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없이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그건 나도 궁금해. 하지만 꼬리가 길면 언젠간 밟히게 돼 있어.”그 시각, B시.모연은 해변가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심지어 와인이 절반쯤 담긴 잔을 즐거운 듯 흔들어댔다.“한 대표님, 왜 그렇게 정색하고 그래요? 앉아서 같이 술이나 마셔요.”서준은 눈앞의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모연은 분명 아주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임모연 씨, 얼마면 돼요?”서준의 온기 없는 싸늘한 말투에 모연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눈썹을 치켜떴다.“참 시원시원하네요. 하지만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그런 제의를 하는 거죠? 최하연과 씨와는 이미 이혼한 거로 아는데.”서준은 모연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도 그저 모연더러 하연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라는 요구를 하러 왔을 뿐이다.“그건 나와 최하연의 일이니 임모연 씨는 상관하지 마세요.”서준은 말하면서 백지 수표 한 장을 꺼내 모연 앞에 내놓았다.“원하는 액수 적어요.”모연은 싱긋 웃을 뿐 수표를 받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들어 서준과 시선을 교환했다.“한 대표님은 본인 여자한테 다 이렇게 관대하신가요? 그게 아무리 전처라고 한들, 이 정도 돈은 기꺼이 쓰나 보죠? 가져가세요, 저 임모연은 돈에 관심 없으니까.”“하, 돈이 싫다면 왜 최하연한테 2천억을 달라고 했죠? 돈이 싫은 게 아니라 내 돈이 싫은 모양이네...”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 앞에 다가갔다. 그 순간 강한 카리스마가 모연의 얼굴을 덮쳐왔다.‘역시 한서준이라 이건가?’‘몇 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달려들지.’“한 대표님 돈은 너무 시시하잖아요? 다른 거래하는 게 어때요?”서준은 말없이 건네던 수표를 움켜쥐었다가 도로 거두어들이더니 또박또박 물었다.“무슨 거래요?”모연은 앞으로 바싹 다가가 서준과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돈거래는 안 되지만
서준은 본인이 뭐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살짝 젓더니 이내 대답했다.“임모연 씨의 목적이 뭐든, 뭘 하고 싶든, 절대 최하연은 다치게 하지 마요.”모연은 그 말에 깔깔 웃어댔다. 뼈를 뚫고 전해지는 듯 섬뜩한 웃음소리는 사람을 소름 돋게 했다.“한서준, 이미 늦었어. 뭐,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이윽고 모연은 서준을 빤히 바라보더니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한 대표님이 나와 결혼한다면 최하연에게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절대 봐주지 않을 거예요.”서준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네 주제에 감히?”늘 담담하던 서준의 눈동자에는 순간 매섭고도 악랄한 빛이 스쳐 지났다. 이윽고 서준이 손을 휘휘 젓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은 동후가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모연에게 건넸다.“임모연 시, 그래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것 같네요. 그렇게 자신만만하니, 내 손에 뭘 들고 있는지 모르나 보죠?”모연은 서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동후 손에 있는 자료를 확 낚아챘다. 이윽고 그 안에 든 내용을 본 순간 안색이 크게 변했다.이 순간 모연은 정말 당황했다.“이건 어떻게 손에 넣었지?”서준은 모연과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증거들은 최하연이 누명을 썼다는 걸 충분히 증명할 수 있고, 당신이 그동안 디자인 업계에서 쌓은 명예도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어. 내가 임모연 씨라면 아무 소란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을 텐데. 안 그러면 이 증거들 바로 언론사에 뿌릴 거니까...”서준의 협박에 모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하지만 모연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심지어 서준의 말을 무시한 채 제 귀밑머리를 뒤로 넘기며 덤덤하게 말했다.“한 대표님, 따로 할 얘기가 있는데...”서준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할 얘기가 있으면 경찰한테나 하시죠.”모연은 고개를 살짝
“대표님, 대체 왜 그러세요? 최하연 씨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왜 그냥 이렇게 떠나는 건데요?”동후의 질문이 연속적으로 쏟아졌지만, 서준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님, 왜 그러세요?”“돌아가자.”서준이 끝까지 입을 다물자 동후도 입을 오므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올 때만 해도 분명 하연의 누명을 벗겨주겠다며 자신만만해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그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니 동후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방금 임모연이 대표님한테 뭐라고 했지?’동후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준이 갑자기 물었다.“최하연 돌아왔어?”동후는 다급히 대답했다.“아니요, 아직 G국에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그 대답에 한참 동안 고민한 서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전용기 준비해, G국으로 갈 테니까.”이토록 갑작스러운 결정에 동후는 의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분부에 따랐다.“네, 대표님.”...이틀 동안 하연과 상혁은 더 이상 아무 진전이 없었다.그도 그럴 게, 상대가 마치 뭔가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깊이 숨어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으니까.그 때문에 하연은 저와 상혁이 상대의 손에 완전히 놀아나는 건 아닌지, 귀국하지 않은 걸 들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그때, 진환은 새로운 정보를 알아 왔는지 흥분에 겨워 말했다.“형, 나 임모연이 성형 수술한 병원 찾았어.”그 한마디에 하연이 눈은 반짝 빛났다.“어딘데요?”진환은 어렵게 찾아낸 진료기록을 상혁과 하연에게 건넸다.“임모연 진짜 너무 교활하던데. 수술할 때 사용한 이름이 임모연이 아니라 전에 아무것도 못 찾은 거였어. 조사한 데 따르면 수술을 총 20여 차례나 받았는데 그중 4차례는 피부 이식 수술과 성형 수술이었어.”“음.”상혁은 가볍게 대답하고 진료 기록을 하연에게 건넸다.“네가 봐, 무슨 수상한 점 있어?”하연은 진료 기록을 한참 동안 펼쳐보다가 성명란에 적힌 Anna라는 영어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임모연의 영어 이름
상혁은 진환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대답했다.“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화상 자국은 흔적도 없이 말끔히 없어질 수 없을 거야...”이건 하연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때 하연이 눈을 내리깔더니 진료 기록을 가리켰다.“여기, 문제 있어요.”“뭐가요?”진환이 의아한 듯 묻자 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혈액형이 달라요. 아까 학교에서 임모연 자료를 볼 때 신체검사 보고서도 본 적 있는데, 그 위에 적힌 혈액형은 분명 B형인데, 여기는 O형이에요.”진환은 그런 디테일까지 확인하지 못했다.“혹시 병원에서 실수한 거 아닐까요?”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이런 우연이 있을 리 없어요.”이 순간 하연의 의심은 한 층 더 깊어졌다.“상혁 오빠, 저는 아직도 의심스러워요. 지금 우리를 적대시하는 게 진짜 임모연인지.”디자인 스타일만으로도 충분히 문제 있다는 게 확인되는데, 이제 혈액형까지 다르다는 건 분명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설명한다.‘그럼 진짜 임모연은 어디 갔지? 가짜 임모연은 또 누구고?’“5년 전의 임모연한테 친한 친구거나 친척이 있는지 조사해 보면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하연은 왠지 5년 전의 교통사고를 기점으로 진짜와 가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현재, 누군가 그 진실을 알아내는 걸 방해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모연과 한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목적이 대체 뭐지?’그때 상혁이 하연의 의견에 동의했다.“진환, 네가 가서 조사해 봐.”“알았어. 바로 조사할게.”진환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떠나갔다.진환이 가자 하연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너무 많은 사실이 마치 촘촘하게 짠 그물망처럼 한데 얽혀 있어 하연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걸 본 상혁이 하연의 앞에 다가갔다.“하연아, 뭐 좀 먹어.”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저 입맛 없어요.”하지만 상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내가 있잖아.”하연은
하연은 거절하고 싶었으나 서준의 말투가 너무 유혹적이었다.심지어 서준이 뭘 알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하지만 하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상혁을 보며 한참 생각하더니 끝내 대답했다.“위치 보내줄게.”“응.”전화를 끊은 하연은 바로 설명하려 했지만 상혁은 이미 하연의 속내를 읽은 듯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하연은 상혁의 말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로부터 약 1시간 뒤, 서준이 도착했다.하연을 본 순간, 서준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스쳐 지났다. 그때 서준의 위에 있던 동후가 먼저 인사했다.“최하연 씨.”“동후 씨, 오랜만이네요.”예전과 똑같은 하연의 말투에 동후는 살짝 놀랐다. 전에는 분명 저와 회사 동료였던 사람이 이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되었는데, 하연이 동후를 보는 눈빛은 여전했다.그걸 느낀 동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한 대표님, 앉으시죠.”예의를 차린 하연의 말투에서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자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하연은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 대표님이 먼 길 오신 게 회포나 나누려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요...”서준은 입꼬리를 바르르 떨며 한참 머뭇거리다가 끝내 물었다.“임모연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아냈어?”하연은 표정을 숨긴 채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최하연, 더 이상 조사하지 마. 응?”서준이 이런 말투로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치 이걸 들어주면 뭐든 약속해 줄 것처럼, 고상하고 오만하던 태도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이에 하연은 살짝 놀랐다.“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기나 해?”“이번 일 네가 억울한 건 알아. 네가 남의 작품 표절할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계속 조사해 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그만해. 내가 방법을 대서 네 결백 증명해 줄게.”하연은 너무 터무니없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눈 밑까지 그 미소가 전달되지는 않아
서준은 분명히 느꼈다. 본인이 이 말을 한 뒤 공기가 삽시간에 변했다는 것을...하연도 한참 동안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 안 나.”“기억 안 나는 거야? 하기 싫은 거야?”서준의 눈에는 실망이 드리웠다.하연은 입꼬리를 움직이더니 눈을 들어 서준을 바라봤다.“그럼 하나만 솔직히 말해 봐. 임모연과 무슨 사이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믿어줄래?”서준의 입가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천하의 한서준이 언제 이렇게 비굴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최하연, 네가 계속 조사하겠다고 고집부리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난 그저 네가 다칠까 봐 귀띔해 주는 것뿐이야.”“한서준, 이런 말 하는 거 너무 웃기지 않아? 나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이게 정말 날 위하는 거라고 생각해?”“아니야.”서준은 하연의 말을 잘랐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사실 저도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최하연, 내 말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돼?”서준의 말투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하연이 말하려는 순간, 뒤에 있던 상혁이 입을 열었다.“하연아.”말이 끝나기 바쁘게 상혁은 성큼성큼 걸어와 하연의 곁에 섰고, 그 뒤를 따라오던 진환도 옆에 선 채 입꼬리를 올리며 먼저 인사했다.“HT 그룹 한서준 대표님 아닙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서준은 진환을 흘깃거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진환은 하연과 서준 사이의 일을 진작 알고 있었기에 서준한테 호감이 없었다.하지만 서준의 능력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얼마나 대단한 거물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한 대표님,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더니, 맞는 말이네요. 하지만 우리 형수님과는 무슨 예기 중이었어요?”‘형수님’이라는 호칭에 서준의 눈빛은 순간 어두워졌다.서준은 상혁과 하연을 바라보더니 물었다.“최하연, 두 사람 만나?”하연이 뭐라고 설
말을 마친 상혁은 서준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하연과 함게 떠나버렸다. 순간 커다란 홀에 서준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서준은 마치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배처럼 떴다 잠기기를 반복하며 끝내 방향을 찾지 못했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동후가 서준의 옆으로 다가왔다.“대표님, 괜찮으세요?”서준은 그제야 눈에 초점을 찾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구 실장, 내가 예전에 대체 어떤 사람이었지?”“혹시 최하연 씨를 생각하시는 겁니까?”동후는 서준의 비서로 몇 년 동안 있으며 하연과 서준이 지난 3년간 어떻게 지냈는지도 옆에서 지켜봤다.물론 처음에 동후도 하연의 정체를 몰랐지만 일상생활에서 서준이 하연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아쉽게도 정작 서준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지만...“대표님, 대표님은 최하연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아직도 본인이 왜 하연 씨를 다르게 대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네요.”동후의 말에 서준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그때 옆에 있던 동후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당사자보다 제삼자가 더 잘 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한편, 상혁과 함께 떠난 하연은 차에 오르자마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진환 씨, 혹시 뭘 알아냈어요?”진환은 발언권을 상혁에게 넘겼다.“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형한테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자료는 이미 형한테 보냈어요.”“상혁 오빠, 대체 무슨 일인데요?”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봤다.그러자 상혁이 천천히 설명했다.“내가 진환한테 부탁해서 임모연의 친척과 친구에 대해 조사하라고 했거든. 그러다가 중요한 사람을 찾았어.”“누군데요?”상혁은 자료 뭉치를 하연에게 건넸다.“임모연한테 배예린이라는 절친이 있더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친자매나 다름없는.”자료를 펼치자 젊은 여자의 사진이 하연의 눈에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한 건, 5년 전 그 교통사고가 있은 뒤 두 사람의 연이 끊어졌다는 거야. 게다가 중요한 건 배예린이 지금은 싱글맘인데 컬럼비아 대학 교문 앞
하연은 고개를 들어 예린 앞으로 다가갔다.“저기 혹시 배예린 씨 맞나요?”예린은 그 말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하연을 경계하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옆에 있는 상혁도 살펴보더니 물었다.“혹시 저 알아요?”“배예린 씨, 저희는 그저 임모연 씨한테서 배예린 씨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오늘 길 가다가 우연히 들른 겁니다.”모연의 이름을 들은 순간 예린은 흠칫 놀라더니 어색한 기색이 얼굴을 언뜻 지나갔다. 그러다 한참 뒤 확신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임모연 씨이요? 혹시 모연을 알아요?”“네.”하연이 대답하자 예린은 오히려 웃으며 언짢은 듯 말했다.“지금 장난해요? 제가 모연과 어릴 때부터 친했는데 두 분 같은 지인이 있다는 건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말해요. 대체 누구죠? 진재준 그 인간이 보냈어요? 말해두는데, 아들은 내가 낳은 거지 그 인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내 아들 빼앗아 갈 생각이면 꿈 깨라 그래요. 감히 모연의 친구인 척 이런 수준 낮은 거짓말을 하다니... 당장 나가요!”말을 마친 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빗자루를 들고 두 사람을 내쫓으려 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하연은 얼른 설명했다.“배예린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진재준이라는 사람 몰라요.”하지만 예린은 전혀 믿지 않았다.“나 속이려 들지 마요! 돌아가서 진재준한테 말해요. 아이를 빼앗고 싶다면 법적 절차대로 소송 해라고. 그러면 내가 끝까지 싸워 주겠다고.”하연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그때 상혁이 나서서 하연의 앞에 막아서더니 예린이 휘두르는 빗자루를 손으로 잡았다.“배예린 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정말 오해하셨어요. 우리가 찾아온 건 임모연 씨 때문입니다. 진재준 씨와 양육권 문제로 다투는 것 같은데, 그건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요.”그 말에 예린은 얼른 하던 동작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 듯 상혁을 바라봤다.“정말... 저를 도와줄 수 있나요?”“제가 양육권 소송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