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뭔가 고민하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다가 상혁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을 추측했다.“상혁 오빠, 일주일로 시간 연장한 목적이 따로 있죠?”상혁은 하늘이 무너져도 무섭지 않다는 기세로 팔짱을 끼더니 꿀 떨어지는 말투로 대답했다.“역시 너한테는 뭘 숨기지 못하겠다니까.”하연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상혁과 눈빛을 교환하며 싱긋 웃었고, 옆에 있는 예나만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둥절해했다.“최하연, 지금 둘이 나 따돌리는 거야?”“걱정하지 마. 이 세상에 일을 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없어.”“그래서?”“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거야. 임모연이 표절이라고 제보한 디자인은 모두 내가 대학생 때 그린 작품들이라 원고는 아마 학교에 남아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야.”증거를 찾을 충분한 시간.예나는 그제야 두 사람의 목적을 알아차렸다.“그래서, 학교에 다녀오려고?”“응. 가볼 때도 됐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상혁 오빠...”하연이 이제 막 말하려 할 때, 상혁은 하연의 뜻을 읽은 듯 대답했다.“나도 같이 갈게.”하연은 순간 가슴이 따뜻해졌다.“그래요.”그날 오후, 하연은 DS 그룹의 모든 일을 뒤로 미룬 채 상혁과 함께 G국으로 떠났다.전용기에 앉은 하연은 피곤했는지 의자에 기대 휴식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옆에 있던 상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하연이 잠자는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온 세상 조용해진 것 같아 상혁은 조심스레 담요를 하연에게 덮어주었다.그때, 테이블 위에 놓았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위성을 통해 신호가 전해지기에 비행 중이라도 전화는 받을 수 있다.상혁은 얼른 일어나 반대편으로 가더니 핸드폰 액정을 터치했다.그 순간 액정에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 상혁을 향해 인사했다.“형, 흑흑흑. 한 번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소진환이 주절주절 쉴 새 없이 말하자 상혁은 곧바로 끊어버렸다.“본론이나 말해.
“그날 교통사고에 관한 모든 자료 내 메일로 전송해.”“오케이.”1분 뒤, 진환은 알아낸 모든 정보를 상혁에게 전송했다.메일을 클릭한 상혁은 곧바로 모든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상혁 오빠, 이게 뭐예요?”그때, 하연이 언제 깨어났는지 불쑥 끼어들자 상혁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실대로 말했다.“내가 임모연의 집안에 대해 조사했는데 특별한 건 없었어. 5년 전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만 살았다는 것 말고는.”하연은 그 말에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모연이 저를 대했던 태도를 떠올렸다.“설마 그 교통사고가 나랑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상혁은 말없이 핸드폰을 하연에게 건넸고, 정보를 확인한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상혁 오빠, 나 임모연이랑 이번에 처음 봐요. 그 부모는 더더욱 본 적 없고.”이렇게 다시 보니 모연이 왜 저한테 그토록 큰 적의를 품고 있는지 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분명 피 맺힌 원한을 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상혁이 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마음 편히 가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그래요.”하연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 가운데 분명 아주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상혁은 하연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이제 1시간만 있으면 도착이야.”하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는 하연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온 적 없다.하지만 곧 도착한다는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서준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만났던 게 떠올랐다.그로부터 1시간 뒤, 전용기는 개인 계류장에 도착했다.진작 기다리고 있던 진환은 상혁을 보자마자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상혁을 와락 끌어안았다.“형, 이게 얼마 만이야. 겨우 얼굴 한번 보네...”그에 반해 상혁은 싫다는 표정으로 진환을 피했다.진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상혁에게 몇 번 더 달려들다가 그제야 상혁의 옆
“차는 준비했어?”진환은 얼른 앞으로 다가와 헤실 웃으며 대답했다.“헤헤, 차는 진작 준비했지. 운전기사가 바로 컬럼비아 대학으로 데려다 줄 거야.”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의 의견을 물었다.“바로 갈 거야?”“네.”하연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상혁과 나란히 걸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진환이 얼른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는 내내 재잘재잘 이것저것 안내했다.차 안에서 익숙한 창밖의 풍경을 보다 보니, 하연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이 떠올렸다.그러다 차가 대학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제야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눈을 들어 확인한 곳에는 오동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고, 햇빛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장에 세우자 진환이 먼저 정적을 깼다.“형수님, 도착했어요.”상혁과 하연이 곧바로 차에서 내리자 진환은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방해하지 않으려고 먼저 손을 저었다.“형, 형수 데리고 먼저 볼일 보러 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연의 손을 잡고 캠퍼슨 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익숙한 청록색 돌을 밟자 하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시간 정말 빠르네요, 벌써 졸업한 지 4년이 됐다니...”그중 3년을 하연은 서준을 위해 살며 고통스러운 결혼생활 속에서 견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붙잡고 있었다.“그러게, 시간 참 빠르네.”상혁도 옛 생각에 잠긴 듯 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내 기억 속의 너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툭하면 울던 꼬마였는데. 벌써 이렇게 한 회사의 사장이 됐네.”“뭐예요. 내가 언제 툭하면 울었다고.”하연은 얼른 부정했다. 하연의 기억 속에 본인은 항상 말 잘 듣고 귀엽고 사랑스러다.상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더니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너 울보였어.”“내가 언제요? 난 안 그랬어요.”하연은 여전히 부정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호하지만 본인이 울보였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이미
Kelly의 눈에 상혁은 그야말로 외모가 준수하고 말투에 예의가 묻어 있는 데다 교양까지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하연아, 너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결혼 생활 잘하고 있는 모야이네.”“교수님 사실...”“사실 저희가 이번이 학교에 온 건 하연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을 찾기 위해서예요. 학교에 서류가 다 있는 거 맞죠?”상혁은 하연의 말을 자르며 여기로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Kelly는 얼른 대답했다.“모든 학생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은 모두 전자파일로 보관해 둬요. 자료 열람실에 가면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안내할게요.”“감사합니다.”상혁이 예의 있게 대답했다.하지만 Kelly는 아쉽다는 듯 하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하연 너는 내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이기도 하고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 중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었어. 내가 대학원에 추천서도 써주려 했는데 상혁 군과 결혼하겠다고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Kelly 낮은 한숨을 쉬며 하연을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알콩달콩 지내는 걸 보니, 한 번뿐인 인생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만 걷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드네.”하연은 그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몇 년 전에 하연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린 시절의 하연은 안개에 눈이 가려져 정확한 길을 보지 못했다.“여기가 자료 열람실이야.”하연은 시선을 거두고 눈앞에 있는 열람실을 바라봤다.그때 Kelly가 얼른 말을 이었다.“나한테 마침 열쇠가 있으니 열어 줄게.”Kelly는 가방에 있는 열쇠를 꺼내 자료 열람실 문을 열었다.“따라와, 들어가서 확인해 봐.”세 사람은 함께 자료 열람실로 들어갔다. 열람실 내부는 매우 큰 데다 아주 많은 책과 캐비닛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때 Kelly가 맨
“이 사진 잘 나왔네.”상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컴퓨터 액정에 뜬 사진을 바라봤다.“이 사진은 입학 첫날 찍은 걸 거예요. 사진 찍는다는 소리에 대충 똥머리 하나 매고 찍은 거예요.”하연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니 대학생 때의 일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매번 기말시험에 디자인했던 작품들과 성적도 눈앞에 훤했다.하지만 본인의 작품집을 클릭한 순간, 하연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상혁은 하연의 변화를 이내 눈치채고는 화면에 뜬 작품을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하연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니에요. 이게 아니에요.”“왜? 뭐가 잘못됐는데?”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상혁 오빠, 이건 내가 디자인한 작품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내 파일에 들어 있지?”마침 그 대화를 들은 Kelly는 다급히 설명했다.“학생 정보에 대한 파일은 사실대로 기록돼 있어서 잘못될 리 없는데? 혹시 잘못 안 거 아니야?”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아니에요, 교수님.”하연은 손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제가 대학 시절 디자인한 작품에 본명으로 사인한 적 없어요. 모두 영어 이니셜 HY로 했어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을 보면 본명으로 최하연이라고 적혀 있잖아요...”상혁은 얼른 하연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에는 최하연이라고 본명으로 적혀 있었다.상혁은 얼른 하연과 눈빛을 교환했다. 하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상혁은 절대 하연이 이런 일에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하지만 왜 하연의 디자인이 아닌 작품이 하연의 이름으로, 그것도 학교 파일에 있는 건지는 의문이었다.하연은 마우스로 뒤 페이지를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제 졸업 작품도 모두 사라졌어요. 이건 제 작품이 아니에요.”하연은 이
다음 순간 컴퓨터 화면에 모연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연이 갓 입학했을 때 찍은 풋풋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졌을 뿐.게다가 하연보다 한 학년 선배인 것도 맞았다.“임모연의 말이 사실이었다니.”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때 상혁도 하연의 옆에 바싹 붙어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하연은 손으로 마우스를 쉴 새 없이 클릭하며 맨 마지막 모연의 작품집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놀라움이 드리웠다.“이... 이럴 수가.”작품집에 있는 맨 처음 작품은 바로 하연의 브랜드숍에서 잘 나가는 드레스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덜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그 드레스들이 모두 이 기초 상에서 수정하고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마치 이게 바로 원고인 것처럼.“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하연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그러면서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다음 페이지에도 역시 전 페이지와 똑같은 스타일에 상대적으로 좀 더 성숙한 작품이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디자이너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이 원고 네가 그린 거야?”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제 원고는 이렇지 않아요. 이 원고는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그린 원고와 거의 80퍼센트 일치한 작품이 임모연의 자료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하연은 곤란한 상황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때 마침 밖에서 들어온 Kelly는 어두운 표정의 하연을 보고는 시선을 얼른 컴퓨터 화면으로 돌리더니 물었다.“임모연? 너 임모연을 알아?”하연은 그제야 초점을 찾더니 Kelly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혹시 교수님도 임모연을 아세요?”“응, 알지. 임모연은 너보다 한 학년 위야. 그런데 내가 직접 가르친 학생은 아니야. 임모연을 맡은 교수는 윌리엄이라는 교수님이야. 왜 그래? 무슨
실험실 문 앞에 도착하자 Kelly는 2층 맨 오른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마 저기에 있을 거야. 가자.”하연은 Kelly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2층 실험실 맨 오른쪽 방은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자, Kelly는 얼른 노크했다.“윌리엄 교수님, 안에 계세요?”하지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이에 Kelly는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복도를 한참 동안 걸어 맨 안쪽에 도착했더니 하연의 눈에 백발이 희끗희끗 나 있는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 교수였다.윌리엄이 스포이트에 든 액체를 유리병 안에 떨구자 유리병 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그 모습에 윌리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유리병을 내려놓고 기록 일지에 데이터를 기록했고, 모든 기록을 마친 뒤 고글을 벗고 실험실에서 나왔다.“윌리엄 교수님,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이번에 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지 뭔가. 월말에 쓸 새로운 논문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윌리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하연을 보며 물었다.“이분은?”하연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최하연이라고 합니다. 디자인학과를 전공하던 학생이에요.”윌리엄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학과라면 몇 학번이지?”“19학번입니다.”“18학번과 19학번은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애들이었는데. 특히 너보다 한 학년 선배인 Jion이라고 예전에 내 학생이었어.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고...”윌리엄이 먼저 모연에 대해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연은 순간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혹시 Jion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윌리엄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의아한 눈빛으로 하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연은 불쌍한 애였어. 디자인 재능도 뛰어나고 진취심도 강한 학생이었는데, 하필이면 재학 기간
윌리엄은 제 핸드폰을 꺼내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클라우드에 로그인하더니 신속히 19년도 파일을 클릭했다.“내가 그때 심사위원이라 대회를 모두 영상으로 기록했으니 직접 확인해 봐.”하연은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수상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본인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연이 제일 높은 시상대 위에 올라 윌리엄 교수가 직접 주는 트로피를 받고 있었다.그 영상을 보니 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너무 어이없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하연은 믿기지 않는 듯 사진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참가자 명단에서조차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연은 분명 3개 관문을 통화해 6명의 학생과 결승전에 올라 마지막에 우승을 따냈었다.“Kelly 교수님, 이거 진짜 아니에요...”하연은 모든 희망을 Kelly에게 걸면서 Kelly가 자신을 대신해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증거 앞에서 Kelly도 그저 입을 오므리고 있다가 끝내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혹시 네가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 너는 다른 해에 주최한 대회에 참석했겠지.”“아니에요. 제가 잘못 기억할 리 없어요.”하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하연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하연이 첫 번째로 탄 상이기에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잘못 기억할 리 없었다.윌리엄과 Kelly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더니 Kelly가 이내 앞으로 나서서 하연의 팔을 잡으며 위로했다.“하연아, 너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하연은 이 상황을 좀처럼 설명할 수 없어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그때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Jion은 내가 만난 학생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어. 그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더 완벽했을 수 있는데...”그의 말투에는 온통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이제 버팀목까지 사라져 오히려 본인이 남의 작품을 표절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