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교통사고에 관한 모든 자료 내 메일로 전송해.”“오케이.”1분 뒤, 진환은 알아낸 모든 정보를 상혁에게 전송했다.메일을 클릭한 상혁은 곧바로 모든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상혁 오빠, 이게 뭐예요?”그때, 하연이 언제 깨어났는지 불쑥 끼어들자 상혁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실대로 말했다.“내가 임모연의 집안에 대해 조사했는데 특별한 건 없었어. 5년 전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만 살았다는 것 말고는.”하연은 그 말에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모연이 저를 대했던 태도를 떠올렸다.“설마 그 교통사고가 나랑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상혁은 말없이 핸드폰을 하연에게 건넸고, 정보를 확인한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상혁 오빠, 나 임모연이랑 이번에 처음 봐요. 그 부모는 더더욱 본 적 없고.”이렇게 다시 보니 모연이 왜 저한테 그토록 큰 적의를 품고 있는지 어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분명 피 맺힌 원한을 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상혁이 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마음 편히 가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그래요.”하연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 가운데 분명 아주 깊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상혁은 하연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얼른 화제를 돌렸다.“이제 1시간만 있으면 도착이야.”하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는 하연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온 적 없다.하지만 곧 도착한다는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서준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만났던 게 떠올랐다.그로부터 1시간 뒤, 전용기는 개인 계류장에 도착했다.진작 기다리고 있던 진환은 상혁을 보자마자 잔뜩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상혁을 와락 끌어안았다.“형, 이게 얼마 만이야. 겨우 얼굴 한번 보네...”그에 반해 상혁은 싫다는 표정으로 진환을 피했다.진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상혁에게 몇 번 더 달려들다가 그제야 상혁의 옆
“차는 준비했어?”진환은 얼른 앞으로 다가와 헤실 웃으며 대답했다.“헤헤, 차는 진작 준비했지. 운전기사가 바로 컬럼비아 대학으로 데려다 줄 거야.”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의 의견을 물었다.“바로 갈 거야?”“네.”하연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상혁과 나란히 걸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진환이 얼른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는 내내 재잘재잘 이것저것 안내했다.차 안에서 익숙한 창밖의 풍경을 보다 보니, 하연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이 떠올렸다.그러다 차가 대학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제야 현실로 다시 돌아왔다.눈을 들어 확인한 곳에는 오동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고, 햇빛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장에 세우자 진환이 먼저 정적을 깼다.“형수님, 도착했어요.”상혁과 하연이 곧바로 차에서 내리자 진환은 눈치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방해하지 않으려고 먼저 손을 저었다.“형, 형수 데리고 먼저 볼일 보러 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연의 손을 잡고 캠퍼슨 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익숙한 청록색 돌을 밟자 하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시간 정말 빠르네요, 벌써 졸업한 지 4년이 됐다니...”그중 3년을 하연은 서준을 위해 살며 고통스러운 결혼생활 속에서 견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붙잡고 있었다.“그러게, 시간 참 빠르네.”상혁도 옛 생각에 잠긴 듯 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내 기억 속의 너는 양 갈래 머리를 하고 툭하면 울던 꼬마였는데. 벌써 이렇게 한 회사의 사장이 됐네.”“뭐예요. 내가 언제 툭하면 울었다고.”하연은 얼른 부정했다. 하연의 기억 속에 본인은 항상 말 잘 듣고 귀엽고 사랑스러다.상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더니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너 울보였어.”“내가 언제요? 난 안 그랬어요.”하연은 여전히 부정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호하지만 본인이 울보였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이미
Kelly의 눈에 상혁은 그야말로 외모가 준수하고 말투에 예의가 묻어 있는 데다 교양까지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하연아, 너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결혼 생활 잘하고 있는 모야이네.”“교수님 사실...”“사실 저희가 이번이 학교에 온 건 하연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을 찾기 위해서예요. 학교에 서류가 다 있는 거 맞죠?”상혁은 하연의 말을 자르며 여기로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Kelly는 얼른 대답했다.“모든 학생이 재학시절 디자인했던 작품은 모두 전자파일로 보관해 둬요. 자료 열람실에 가면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안내할게요.”“감사합니다.”상혁이 예의 있게 대답했다.하지만 Kelly는 아쉽다는 듯 하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하연 너는 내 가장 자랑스러운 제자이기도 하고 몇 년 동안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 중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었어. 내가 대학원에 추천서도 써주려 했는데 상혁 군과 결혼하겠다고 그 좋은 기회를 놓쳐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Kelly 낮은 한숨을 쉬며 하연을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알콩달콩 지내는 걸 보니, 한 번뿐인 인생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만 걷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드네.”하연은 그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몇 년 전에 하연도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린 시절의 하연은 안개에 눈이 가려져 정확한 길을 보지 못했다.“여기가 자료 열람실이야.”하연은 시선을 거두고 눈앞에 있는 열람실을 바라봤다.그때 Kelly가 얼른 말을 이었다.“나한테 마침 열쇠가 있으니 열어 줄게.”Kelly는 가방에 있는 열쇠를 꺼내 자료 열람실 문을 열었다.“따라와, 들어가서 확인해 봐.”세 사람은 함께 자료 열람실로 들어갔다. 열람실 내부는 매우 큰 데다 아주 많은 책과 캐비닛이 진열되어 있었다.그때 Kelly가 맨
“이 사진 잘 나왔네.”상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컴퓨터 액정에 뜬 사진을 바라봤다.“이 사진은 입학 첫날 찍은 걸 거예요. 사진 찍는다는 소리에 대충 똥머리 하나 매고 찍은 거예요.”하연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료를 한 페이지씩 넘겨보니 대학생 때의 일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매번 기말시험에 디자인했던 작품들과 성적도 눈앞에 훤했다.하지만 본인의 작품집을 클릭한 순간, 하연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상혁은 하연의 변화를 이내 눈치채고는 화면에 뜬 작품을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하연은 고개를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니에요. 이게 아니에요.”“왜? 뭐가 잘못됐는데?”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상혁 오빠, 이건 내가 디자인한 작품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내 파일에 들어 있지?”마침 그 대화를 들은 Kelly는 다급히 설명했다.“학생 정보에 대한 파일은 사실대로 기록돼 있어서 잘못될 리 없는데? 혹시 잘못 안 거 아니야?”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아니에요, 교수님.”하연은 손을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제가 대학 시절 디자인한 작품에 본명으로 사인한 적 없어요. 모두 영어 이니셜 HY로 했어요. 그런데 이 두 작품을 보면 본명으로 최하연이라고 적혀 있잖아요...”상혁은 얼른 하연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위에는 최하연이라고 본명으로 적혀 있었다.상혁은 얼른 하연과 눈빛을 교환했다. 하연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상혁은 절대 하연이 이런 일에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하지만 왜 하연의 디자인이 아닌 작품이 하연의 이름으로, 그것도 학교 파일에 있는 건지는 의문이었다.하연은 마우스로 뒤 페이지를 계속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제 졸업 작품도 모두 사라졌어요. 이건 제 작품이 아니에요.”하연은 이
다음 순간 컴퓨터 화면에 모연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모연이 갓 입학했을 때 찍은 풋풋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만 보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졌을 뿐.게다가 하연보다 한 학년 선배인 것도 맞았다.“임모연의 말이 사실이었다니.”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때 상혁도 하연의 옆에 바싹 붙어 화면을 빤히 바라봤다. 하연은 손으로 마우스를 쉴 새 없이 클릭하며 맨 마지막 모연의 작품집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작품을 본 순간 하연의 눈에는 놀라움이 드리웠다.“이... 이럴 수가.”작품집에 있는 맨 처음 작품은 바로 하연의 브랜드숍에서 잘 나가는 드레스였다. 물론 상대적으로 덜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 때문에 그 드레스들이 모두 이 기초 상에서 수정하고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마치 이게 바로 원고인 것처럼.“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하연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그러면서 믿기지 않는 듯 다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랬더니 다음 페이지에도 역시 전 페이지와 똑같은 스타일에 상대적으로 좀 더 성숙한 작품이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디자이너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이 원고 네가 그린 거야?”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제 원고는 이렇지 않아요. 이 원고는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그린 원고와 거의 80퍼센트 일치한 작품이 임모연의 자료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하연은 곤란한 상황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그때 마침 밖에서 들어온 Kelly는 어두운 표정의 하연을 보고는 시선을 얼른 컴퓨터 화면으로 돌리더니 물었다.“임모연? 너 임모연을 알아?”하연은 그제야 초점을 찾더니 Kelly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혹시 교수님도 임모연을 아세요?”“응, 알지. 임모연은 너보다 한 학년 위야. 그런데 내가 직접 가르친 학생은 아니야. 임모연을 맡은 교수는 윌리엄이라는 교수님이야. 왜 그래? 무슨
실험실 문 앞에 도착하자 Kelly는 2층 맨 오른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마 저기에 있을 거야. 가자.”하연은 Kelly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2층 실험실 맨 오른쪽 방은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자, Kelly는 얼른 노크했다.“윌리엄 교수님, 안에 계세요?”하지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들리지 않았다.이에 Kelly는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실 복도를 한참 동안 걸어 맨 안쪽에 도착했더니 하연의 눈에 백발이 희끗희끗 나 있는 흰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윌리엄 교수였다.윌리엄이 스포이트에 든 액체를 유리병 안에 떨구자 유리병 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그 모습에 윌리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유리병을 내려놓고 기록 일지에 데이터를 기록했고, 모든 기록을 마친 뒤 고글을 벗고 실험실에서 나왔다.“윌리엄 교수님, 또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어요?”“이번에 또 새로운 데이터를 얻었지 뭔가. 월말에 쓸 새로운 논문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윌리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하연을 보며 물었다.“이분은?”하연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최하연이라고 합니다. 디자인학과를 전공하던 학생이에요.”윌리엄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디자인학과라면 몇 학번이지?”“19학번입니다.”“18학번과 19학번은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애들이었는데. 특히 너보다 한 학년 선배인 Jion이라고 예전에 내 학생이었어. 지금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고...”윌리엄이 먼저 모연에 대해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연은 순간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혹시 Jion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윌리엄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의아한 눈빛으로 하연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연은 불쌍한 애였어. 디자인 재능도 뛰어나고 진취심도 강한 학생이었는데, 하필이면 재학 기간
윌리엄은 제 핸드폰을 꺼내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클라우드에 로그인하더니 신속히 19년도 파일을 클릭했다.“내가 그때 심사위원이라 대회를 모두 영상으로 기록했으니 직접 확인해 봐.”하연은 핸드폰을 건네받아 얼른 수상 영상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본인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연이 제일 높은 시상대 위에 올라 윌리엄 교수가 직접 주는 트로피를 받고 있었다.그 영상을 보니 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너무 어이없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하연은 믿기지 않는 듯 사진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하지만 참가자 명단에서조차 본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하연은 분명 3개 관문을 통화해 6명의 학생과 결승전에 올라 마지막에 우승을 따냈었다.“Kelly 교수님, 이거 진짜 아니에요...”하연은 모든 희망을 Kelly에게 걸면서 Kelly가 자신을 대신해 증명해 주기를 바랐다.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증거 앞에서 Kelly도 그저 입을 오므리고 있다가 끝내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혹시 네가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 너는 다른 해에 주최한 대회에 참석했겠지.”“아니에요. 제가 잘못 기억할 리 없어요.”하연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하연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하연이 첫 번째로 탄 상이기에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잘못 기억할 리 없었다.윌리엄과 Kelly는 동시에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더니 Kelly가 이내 앞으로 나서서 하연의 팔을 잡으며 위로했다.“하연아, 너 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하연은 이 상황을 좀처럼 설명할 수 없어 끝내 침묵을 유지했다.그때 윌리엄이 말을 이었다.“Jion은 내가 만난 학생 중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어. 그 교통사고만 아니었으면 더 완벽했을 수 있는데...”그의 말투에는 온통 안타까움이 들어 있었다.하연은 순간 혼란스러웠다. 이제 버팀목까지 사라져 오히려 본인이 남의 작품을 표절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자
“하하하, 최하연. 정말 주제를 모르는구나?”모연은 그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건너편에서 ‘뚜뚜’하고 들리는 소리에 하연은 핸드폰을 꽉 움켜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잠깐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둘째 오빠, 지금 바빠요?”하경은 본인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농담조로 물었다.“하연아, 네가 웬일로 나한테 다 전화하를 해? 정말 놀랍네.”하연은 그 말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내가 뭐 평소에 전화 안 했나? 그건 그렇고, 오빠...”“말해. 무슨 일인데?”“헤헤. 별일은 아니고. 나 뭐 하나만 도와줘요.”“우선 들어나 보자.”“혹시 컬럼비아 대학 서버에 들어와 학생들 자료 확인해 볼 수 있어요?”하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건너편에서 기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그러다 한참 뒤 놀란 듯한 하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설마 나더러 해킹하라는 건 아니지?”“음... 사실 누가 학교 서버에 들어와서 학생들 자료 수정한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하연은 모연이 자료를 조작했다고 의심하기에 특별히 하경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알아듣기 쉽게 말할게. 사실 학교 서버는 국가 시스템에 속해서 보안관리국에서 책임지고 있어. 일반 해커는 들어갈 수 없어. 들어갔다 해도 아무 흔적도 안 남기고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없어. 아무리 나라도 발각 안 될 거라고 보장 못 해.”하연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오므렸다.‘둘째 오빠도 방법이 없는 건가?’“그런데... 한 사람이라면 가능할 지도.”그때 귓가에 들리는 하경의 말에 하연은 눈을 반짝였다.“그게 누구예요? 얼른 알려줘요.”“그분은 내 우상이야. 해커 X라고 실력이 그야말로 신들렸다고 보면 돼. 그분 상대는 아마 없을걸. 계속 해커 랭킹 1위를 차지하는 분이니까.”하경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창 흥분한 듯 말하던 하경은 한숨을 푹 쉬었다.“이번 생에 그분과 한 번이라도 겨루어 보면 여한이 없을 텐데...”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