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이제 하연 차례였다.“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잠겨 있다고요?”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그리고 신분증은...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어떻게 내
한서준의 약혼자?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마워요.”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이고, 최 비서가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최 비서님, 오셨네요.”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전 정말 괜찮아요.”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할게요.”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그 순간 하연은 직감
대표실은 살얼음장과 같았다.늘 한서준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최하연이 강압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의 말에 서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정말이야, 서준 씨?”혜경이 다가온 순간, 서준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정말이겠어?”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 말대로 HT그룹에 일 잘 하는 사람은 차고 넘쳤어. 저런 일개 비서의 신분증은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아.”“퇴사하기 전에 인수인계는 똑바로 해야지. 입사할 때 지급한 유니폼을 입고 인수인계도 없이 떠나는 건 HT그룹 규칙에 어긋나니까.”그제야 하연은 자신의 신분증을 이용해 HT그룹으로 불러들인 서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이곳에 남거나 아무것도 없이 떠나거나.서준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그녀를 항복하도록 하려고 했으며 하연이 항복할 것이라 확신했다.그 순간, 하연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모조리 짓밟혔다.“아, 그런 거야? 그런 거면 최 비서가 잘못했네.”“순간 최 비서랑 서준 씨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잖아.”혜경이 서준의 품을 더 파고드는 것을 본 하연은 미친듯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검은색 유니폼 자켓을 벗고 셔츠를 하나씩 풀었다.“벗을게요.”간결하고 확실한 네 글자.‘서준 씨 말이 맞아.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야지.’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표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이미 고개를 숙인 서준의 욕정으로 얼룩진 서늘한 눈빛이 얼어붙었다.그는 최근 하연이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이 느낌은 그녀가 자신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서준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었다.아니면 3년이라는 결혼 생활동안 그녀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까?대표실의 소문이 빠르게 퍼지자 많은 직원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아무도 항상 온화하고 친절했던 하연에게 그런 거친 면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셔츠를 벗은 하연
“서준 씨?”민혜경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 채 그저 최하연이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서준 씨, 얼른 주고 보내! 오늘 우리 부모님이 내가 당신 데리고 오는 줄 알고 기다리고 있어,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 우리 부모님이 서준 씨 보고 싶대.”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한서준은 정신을 차렸다.한씨 가문은 민씨 가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어 그는 민씨 저택에 방문했어야 했다.하지만 이 말에도 하연의 얼굴은 서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서준은 답답하고 복잡했다.“저기 있어.”하연은 그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그곳엔 신분증이 정수기 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채 마치 그녀처럼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네.”하연은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고 신분증을 주워들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서 대표실을 떠났다.그 뒤에는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그저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가십거리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더군다나 회사에선 하연이 서준을 꼬셔서 그에게 쫓겨났다는 소문도 돌았다.그녀는 법적으로 서준의 부인이었지만, 내연녀로 치부됐다.하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최 비서님, 밖에 비 와요. 추우시면 제 겉옷 드릴게요.”우산을 가져다준 사람은 다름아닌 구동후였다.‘매정한 HT그룹에도 따뜻한 사람이 있긴 하구나.’겉옷을 벗으려는 동후를 본 하연은 그를 말리며 씁쓸함을 목에 삼켰다.“아니에요, 고마워요 구 실장님. 이제 만날 일도 없겠네요.”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본 동후는 입을 움직였지만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연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이럴 때는 폭풍우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유일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못된 장난을 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우리 졸업 날짜가... 며칠이더라?”그 말에 상혁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얼굴에 잠시 분노가 스쳐 갔다. 하연은 그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가 잦아들었다.“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하연은 그제야 상혁을 달래듯 메모장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밝게 비추는 듯했다.“내가 한명준의 선물을 받을 뻔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우리 넷째 오빠가 있잖아요. 오빠가 내가 고생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연은 이미 이득을 본 주제에 오히려 얄밉게 굴며, 일부러 두 사람이 감정이 깊어지던 때 사용했던 애틋한 호칭으로 상혁을 불렀다.상혁의 몸도 순간에 마치 굳혔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준 땅이 절대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조사 결과, 그 땅은 이 도시에서 악명 높은 깡패, 별명 ‘까마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연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땅이 그렇게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을 줄은 몰랐다.정태훈이 말했다. “그 사람, 까마귀는 굉장히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땅이 값어치 있다는 걸 알고 계속 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상혁이 준 주소는 ‘까마귀’의 애인의 집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도록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마치 사창가 같은 장소였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고,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정민 언니 만나러 왔어요.” 길가에 서 있던 여자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민 언니?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저는 정민 언니의 친척입니다. 좋은 거래를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
상혁은 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사실 꽤 좋은 거래였어. 아쉽네.” 이 순간, 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의 태도로 하연의 말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서 있었다. 하연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상혁의 눈에 잠깐 비쳤는지, 결국 그는 약간의 연민을 보였다. “부남준을 만났어?” 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네 몸에서 부남준이가 좋아하는 남자 향수가 나네. 오늘 부남준이 정다영 씨와의 만남은 순조로웠나?”하연은 상혁이 모든 걸 이미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당신이 주선한 거였어요?” 상혁이 모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다영 씨는 재능 있는 남자를 좋아해. 이 사회에서 부남준은 정다영 씨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하연은 드디어 기억났다.“정다영의 아버지가 지금도 DL그룹의 이사였고, 정다영과 부남준의 결혼은 부남준에게 득이 될 뿐이야.” “왜 굳이 스스로 적을 만들어요?”상혁은 하연의 다리를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직 발목이 완전히 낫지 않은 듯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어.”하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생각에는 정다영이 부남준과 결혼하면 두 집안이 단단히 결속되고, 상혁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결국 가족의 지지가 없이는 부남준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혁은 하연을 지나쳐 서류를 들고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었어. 이제 돌아가.” 그는 밤새도록 잠을 잤고, 이미 시간이 늦었지만 하연은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주저앉아 무언가를 깊이 생각했다. 상혁이 이미 계획을 세운 것 같다면, 하연도 자신이 정다영을 굳이 경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조승원이 계약을 취소했고, 지금 하연에게 남은 시간에 새로운 땅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손이현은 하연이가 굴복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상혁이 바로 하연을 밀어냈다. “몸이 더럽고, 냄새도 안 좋으니, 나가라.” 상혁이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전에 당신도 나를 이렇게 많이 챙겨줬잖아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상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술주정뱅이.” 상혁은 그녀의 밝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원신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부에 있는 원신민을 불렀다. 하연이 다시 상혁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원 비서는 이미 갔어요. 여기엔 나만 있어요.” 상혁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하연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원신민은 말했다. [대표님, 오늘 검토하셔야 할 서류는 모두 최 사장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선 충분히 쉬세요. 정규인 문제는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상혁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씻기 시작했다. “정규인은 떠났나요?” [새로운 사업을 받았고, 이익을 얻었으니 당연히 떠났습니다. 오후 비행기로 떠났습니다.]“고경수의 딸이 임신한 거 아니었나요?”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정규인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쓸 용기가 없었습니다.] “확실한가요?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죠?” [정규인의 아이입니다. 검사 결과는 최 사장님이 드린 서류에 있습니다.]상혁은 씻고 나와 머리가 한결 맑아졌다. 문을 열었을 때, 하연은 발코니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는 서류에서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승원아, 도대체 왜 갑자기 우리와 계약 해지하려고 한 거야?” 하연은 정태훈에게서 연락받았다. 승원이 일방적으로 DS그룹과의 계약을 취소했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연은 마치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승원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약 취소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나도 분명히 말했잖아. 이건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이고,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알아, 하지만 존이가 예전에 내 목숨을
하연이는 멀리서 송혜선이 정다영을 칭찬하는 소하연 은은하게 들렸다. 그 내용은 대부분 과찬이었다. “졸업 후에 이곳에 남을 계획인가요, 아니면...” “우리 정씨 가문은 외동딸이니까, 당연히 곁에 두겠죠.” 하미주는 단호했다. 다영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망설였다. 그녀는 외부 세상을 보고 싶으며 큰 야망을 키웠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단순히 집에서 기다리며 맞선을 보거나 결혼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거 좋네요. 다영 씨, 남준은 계속 여기에 익숙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남준에게 연락하면 돼요.” “그렇게 하면 민폐겠죠.” 하미주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송혜선은 다영이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무슨 걱정이세요, 아이들끼리는 공통된 언어가 있는 법이잖아요. 우리 남준은 기꺼이 도와줄 텐데, 다영이는 어때요?” 다영은 조금 전 남자에게서 느꼈던 은은한 향기를 떠올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준 오빠가 귀찮아하지 않는다면, 저도 기꺼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송혜선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보시죠’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미주는 딸이 의외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놀란 듯했다. 그녀는 딸이 반항심 강한 줄 알았지만, 남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화분 뒤쪽에서 하연의 핸드폰이 ‘딩’소리를 내며 울렸다. 하연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남준 오빠.”남준은 그 소리에 흠칫하며 당황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 남준 오빠는 여기서 마음껏 즐겨요.” 하연은 착하게 미소 지으며 가방을 들어 올리고는 가볍게 돌아섰다. 남준이가 따라올지 신경 쓰지 않은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연 이미 다영의 연락처를 손에 넣었고, 또 다른 소식도 받았다. 즉, 오늘 상혁이 바로 옆 식당에서 접대 중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과음한 그는 방에 묵고 있었고,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모든 정보를 준 사람은 바
“우리 남준이는 타고난 재능이 좋지 않으니,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해요.” 송혜선의 말에 하미주는 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우리 집안이 혜선 사모님의 사정을 잘 몰라서 소홀히 했던 점이 있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준은 다영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다영은 계속 남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제가 밥을 살게요.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그제야 남준은 그녀를 한 번 보고, 비서에게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다영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제가 남준 씨의 개인 번호를 받고 싶어요.” 남준은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는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습관이 없어요.” “제가 저장할게요.” 다영은 긴장했지만, 동시에 솔직하고 대담했다. 남준은 벽에 기대며 숫자를 읊어주었다. “다영 씨,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남준은 다영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같이 안 가요?” “회사에 일이 있어서 급히 돌아가야 해요.” 그제야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탄 다영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남준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봤는데, 갑자기 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남준 씨의 그 작품은 정말 멋졌어요. 웅장하면서도 제가 그림 안에 서글픔과 고독이 느껴지더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남준은 잠시 멈칫하며 그녀를 다시 보았다. 그의 감정은 가려졌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다영 씨께서 제 작품을 감상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다른 작품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다영의 눈빛에는 이미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제 번호를 이미 받지 않았나요?” 다영은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하연은 이 호텔의 VIP 회원이었기 때문에, 호텔 지배인이 직접 안내했다. “정다영
“설령 제가 왕씨 가문을 하연 씨에게 준다고 해도, 하연 씨는 받지 않을 거잖아요.”이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남산 땅은요? 당신이 왜 제가 그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죠?”짧은 침묵이 흘렀다.하연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자신이 겨우 얻어낸 또 다른 부지를 이현이 몇 마디로 취소시켜 버렸다.“앞으로 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하연은 차갑게 말하며 다시 돌아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우리 회사와 계약 해지를 한 계약서라도 썼나?”승원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계약서도 없으니, 우리 계약은 그대로 진행할 거야. 내가 보증금도 곧바로 입금할게. 승원아, 협력은 우리 둘이 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끼어들 자격은 없어. 잘 기억해.”하연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고, 그 분노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녀는 가방을 들고 단호히 자리를 떠났다.승원은 멍한 표정으로 한쪽에 앉아 있는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진심이야? 정말로 하연을 여자 친구로 만들려고?” 오랜 침묵 끝에 이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응.” 승원은 놀란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너 정말 하연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해? 최씨 가문이 그렇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하연의 전 남친은 세계 50대 기업의...” “부상혁 말이지, 알아.” 이현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까 먹다 남긴 음식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마치 굳은 결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 “난 그저 과거의 후회를 만회하고 싶을 뿐이야. 지금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아.” ...‘미녀4총사’의 톡방이 톡을 끊임없이 계속 문자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남산 땅을 가져왔다는 건 정말 큰 공을 들였다는 의미야. 하연아, 지금 그저 앉아서 득을 보면 되는 건데, 왜 안 받아?]여은이는 전형적인 사업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