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우 씨요.”“유진우? 들어도 못 봤어. 여기서 거치적거리지 말고 당장 꺼져!”경호원이 날카롭게 호통쳤다.황보 가문에 매일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은 늘 있는 일상이었다.“하지만 진우 씨가 이걸 꼭 황보걸 도련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황백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말귀 못 알아들어? 꺼지라고.”경호원이 짜증 섞인 말투로 쏘아붙였다.“먼저 가서 도련님께 보고하는 건 어떨까요?”황백은 겁먹은 듯 한껏 움츠러들었다.“네가 뭔데 보고하라 말아야? 당장 꺼져. 안 그러면 가만 안 둬!”경호원이 싸늘하게 말했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그때 우람한 체격의 한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도 노기등등하던 경호원은 그를 보자마자 바로 웃으며 깍듯하게 말했다.“황보곰 도련님, 별일 아닙니다. 웬 거지가 대문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황보걸 도련님께 선물을 드리겠다고 해서요. 지금 당장 쫓아내겠습니다.”“잠깐!”황보곰의 시선이 황백에게 머물렀다.“황보걸을 알아?”“모릅니다.”황백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유진우 씨가 황보걸 도련님께 약주를 전해드리라 해서요. 제발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유진우?”황보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유진우의 사람이었구나.”“진우 씨를 아시나 봐요? 정말 다행이에요.”황백은 구세주를 만난 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다행이긴 하지.”황보곰이 차갑게 웃었다.“이 약주를 황보걸한테 줘야 한다고?”“네, 맞습니다.”황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술 안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황보곰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독이요?”황백은 화들짝 놀라다가 이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술은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약주인데 독이라니요.”“독이 없으면 어디 한번 마셔봐 봐.”황보곰이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이건 황보걸 도련님의 술입니다. 저같이 비천한 신분인 사람은 마실 자격도 없어요
해 질 무렵 유진우가 양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황백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평소였다면 이 시간쯤 황백은 이미 밥상을 차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밖에 있다고 해도 전화해서 물어볼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밥도 하지 않았고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한창 의문에 잠겨있던 그때 휴대 전화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황은아가 걸어온 전화였다.“아저씨, 큰일 났어요! 아빠한테 사고가 생겼어요!”그녀의 말투가 조급하게 들렸다.“사고? 무슨 일인데?”유진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방금 병원에서 전화 왔는데 아빠가 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중상을 입었대요.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대요!”황은아가 말했다.“아저씨처럼 자상한 분이 어떻게 맞을수 있어?”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백은 행동거지가 늘 조심스러웠고 누굴 만나든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와 원한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구체적인 상황이 어떤지는 저도 잘 몰라요. 저 지금 차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어느 병원이야?”“남주 병원요.”“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유진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외출했다. 그렇게 20분도 채 안 되어 병원에 도착했다.그 시각 병실 안.황백은 이목구비를 제외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겨우 숨이 붙어있었다. 황은아는 어쩔 줄 모른 나머지 발만 동동 굴렀다.17살짜리 고등학생이 언제 이런 일을 겪어봤겠는가? 유일한 가족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맞았으니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은아야, 아저씨 어떠셔?”그때 유진우가 미친 듯이 병실 안으로 달려왔다.“아저씨, 드디어 왔네요.”황은아는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다급하게 말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골절상이 많고 내장도 파열됐대요. 게다가 피부에 상처도 가득한 걸 봐서 아무래도 고문을 당하신 것 같대요.”“고문?”유진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혹시 예전에 누굴 건드린 적이 있었어?”“아니요
유진우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그러니까 황보 가문 사람이란 말이죠?”좋은 마음으로 황백에게 황보용명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주를 가져다주라고 했는데 황보 가문에서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레 사람을 이 지경으로 때렸다.무슨 이유에서든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아저씨, 죄송해요. 이게 다 제 탓이에요.”유진우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술을 가져다주라고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모진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아닙니다. 이건 진우 씨 탓이 아니에요. 다 제가 운이 나빠서 그런 거예요.”황백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아저씨, 제가 꼭 복수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저씨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든, 꼭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유진우는 굳게 맹세했다.“진우 씨, 황보 가문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만한 그런 가문이 아니에요.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아요.”황백이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혼자 맞으면 됐지, 이 일로 유진우에게 피해를 준다면 목숨으로도 속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병원에서 마음 편히 치료만 받으시면 돼요.”유진우는 상처 치료제 한 알을 꺼내 황백에게 조심스럽게 먹이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아저씨, 어디 가요?”황은아는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아저씨를 이렇게 만든 놈들한테 복수하러 간다.”유진우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아저씨 잘 보살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전화하고.”그러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30분 후, 황보 저택 대문 앞.눈앞의 높고 커다란 대문을 본 유진우의 낯빛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거기 서! 너 누구야?”경호원이 그를 보자마자 소리 높이 외쳤다.“오늘 너희들이 여기서 계속 대문을 지켰어?”유진우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런데?”경호원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기고만장했다. 유진우의 행색을 보더니 귀한 재벌은 아닌 것 같아 함부로 대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
“뭐야?”주먹 한 방에 죽은 동료를 본 나머지 경호원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진우가 이토록 잔인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황보 가문의 사람을 죽였다는 건 황보 가문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은 게 분명했다.“무엄하다!”“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감히 황보 가문 사람을 죽여?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놀라움도 잠시 경호원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유진우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너희들도 황백 아저씨를 때렸어?”“뭐?”순간 움찔한 경호원들은 마치 맹수의 먹잇감이 된 순한 양처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이곳은 황보 저택이고 상대는 고작 한 명인데 뭐가 두려울 게 있겠는가?“인마!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 안 그러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아!”왼쪽에 서 있던 경호원이 두 발짝 앞으로 나서서 흉악하게 말했다.“퍽!”유진우가 발로 그를 걷어차자 경호원은 벽에 부딪혀 피를 흘리면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너 이 새X...”오른쪽에 서 있던 경호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달려들자 유진우는 이번에도 가차 없이 킥을 날렸다. 그 경호원은 휙 날아가 벽에 꽂혀버렸다.눈 깜짝할 사이에 경호원 네 명 중 한 명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경고하는데... 함부로 움직이지 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마지막 경호원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너에게 기회를 줄게. 가서 황보곰 불러와.”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알았어. 여기서 딱 기다려.”경호원은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황급히 안으로 달려갔다.잠시 후, 백여 명의 사람들이 저택 내부에서 살기등등한 기세로 우르르 몰려나왔다.“어떤 미친놈이 감히 황보 저택에서 행패를 부려?”황보곰이 활개를 저으며 맨 앞에서 걸어왔고 그의 뒤로
양측의 거리가 수십 미터쯤 되었을 때 유진우는 두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힘껏 뛰어올랐다.“쿵!”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고 유진우는 마치 폭탄처럼 인파 속으로 날아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바닥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그 와중에 진기까지 더해진 바람에 엘리트 경호원들은 유진우에게 손끝 하나 대기도 전에 뿔뿔이 날아가고 말았다.경상을 입은 자는 손발이 부러진 정도였고 심하게 다친 자는 즉사하고 말았다. 유진우의 상대가 될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그 순간 유진우는 마치 순진한 양 떼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마구 공격을 퍼부었고 아무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단 몇 분 사이에 백여 명의 엘리트 경호원들이 절반이나 쓰러졌다.“젠장! 저 자식 꽤 실력 있네?”미쳐 날뛰는 유진우를 보며 황보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황보 가문의 엘리트 경호원들은 일일이 엄선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런데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순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도련님, 제가 본 게 맞다면 저 자식 아무래도 본투비 레벨 고수인 것 같습니다.”검은 옷의 경호 팀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본투비 레벨 고수? 너도 본투비 레벨 고수잖아. 이길 자신 있어?”황보곰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황보 가문의 경호 팀장이 되려면 적어도 선천무사여야 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제가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경호 팀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좋아! 이따가 죽이진 말고 쥐어패기만 해. 내가 천천히 놀아줄 생각이거든.”황보곰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경호 팀장도 따라 웃었다.두 사람이 얘기하던 사이 전세는 점점 가라앉았고 백여 명의 경호원들 전부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다칠 사람은 다치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귀청을 때리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짝짝짝...”경호 팀장은 손뼉을 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네놈이 실력이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아쉽게도 넌 오늘
주변을 둘러보던 유진우는 자신이 완전히 포위됐다는 걸 알아챘다. 시커먼 옷을 입은 그들 모두 황보 가문의 엘리트 경호원들이었다.인파 속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는데 황보걸과 황보추가 놀란 얼굴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진우 씨?”현장에 도착하여 둘러보던 황보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 저택에 와서 행패를 부린다는 소리에 어떤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나대나 생각했었는데 유진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놈이었어?”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황보추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아주 단단히 부었구나. 감히 내 아들을 다치게 해? 당장 풀어주지 못해?”“풀어줘!”“당장 풀어주라고!”황보 가문의 엘리트들이 기고만장하기 시작했고 저마다 살기를 내뿜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지원병이 도착하자 조금 전까지 당황하던 황보곰은 이내 허리를 곳곳이 펴고 시건방을 떨었다.“아까 엄청 나대더니 왜 갑자기 찍소리도 못해? 고작 이 정도에 놀란 거야? 솔직하게 얘기할게. 지금 네 앞에 나타난 이 사람들은 황보 가문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네가 실력이 좀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래서 뭐? 우리 황보 가문에는 고수가 줄지어 있고 강자도 수없이 배출했어. 널 죽이는 건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죽이기보다 더 쉬워. 지금 너한테 기회를 줄게.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을 깨끗하게 핥는다면 목숨은 살려줄게.”황보곰은 일부러 자기 신발에 피 묻은 가래를 퉤 하고 뱉었다.“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하하... 날 건드릴 수 있겠어?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주변에 전부 다 내 사람들이야. 함부로 움직였다간 뼈도 못 추릴 줄 알아!”황보곰은 상대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날카롭게 웃었다.“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구나. 그래도 괜찮아. 인과응보가 뭔지 제대로 보여줄게.”유진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보곰의 무릎을 걷어찼다. 뚜두둑 소리와 함께 황보곰의 무릎이 반대 방향으로 90도 꺾이고 말았다. 뼈가 살가죽을 뚫고 나
하지만 은침을 찌른 후로 황보곰이 느끼는 고통은 순식간에 배가 되었고 비명도 더 처참해졌다.“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우린 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하는 건데?”한바탕 포효한 후 황보추는 되레 침착해졌다. 하지만 눈빛에 담긴 살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아무런 원한도 없다고요? 당신 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알아요?”유진우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내 아들이 무슨 짓을 했든, 그게 네가 여기서 횡포를 부려도 되는 이유가 안 돼.”황보추가 무섭게 쏘아붙였다.“역시 당신들은 다 똑같아요. 막무가내인 사람들한테는 매가 답이라니까.”유진우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3일 줄게요. 3일 내로 당신 아들더러 피해자한테 가서 사과하라고 해요. 안 그러면 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겁니다!”“이 자식아,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황보 가문이 무슨 공공화장실인 줄 알아?”황보추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내가 남겠다고 하면 당신들은 날 내쫓지 못할 것이고 내가 가겠다고 하면 절대 잡지도 못해요.”유진우는 황보곰을 발로 걷어차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저 자식을 죽여버려!”황보추는 시뻘게진 두 눈으로 포효했다.“죽여!”황보 가문의 엘리트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만약 황보곰이 그의 손에 잡혀있지 않았더라면 진작 공격했을 것이다. 이젠 인질도 없겠다, 드디어 마음껏 공격할 수 있었다.감히 황보 가문에서 행패를 부린 자는 살아서 대문을 나간 사람이 없다. 설령 예수라고 해도 불가능했다.10분 후...“쿵!”마지막 경호 팀장이 바닥에 쓰러진 순간 황보추 등 일행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먼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유진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마치 괴물을 보는 듯했고 저마다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황보 가문에서 이삼백 명이 넘는 경호원을 내보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10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전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내공무사든 본투비 레벨 고수든
“쿵! 쿵! 쿵!”황보 저택 회의실.웅장하고 힘찬 종소리와 함께 황보 가문을 이끄는 중요 인물들이 현장에 도착했다.황보 가문에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경고 종이 울릴 때면 가문에 엄청난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기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반드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회의실에 도착해야 했다.“셋째야,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너더러 경고 종을 치라고 했어?”황보춘이 심복을 몇 명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의 핵심 인물들이 꽤 많이 모여있었다.그들 모두 종소리를 듣고 달려오긴 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황보 저택이 산까지 포함할 정도로 엄청나게 커서 뒷산 쪽에 사는 사람들은 아예 대문 앞에서 결투가 벌어진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큰형님, 아까 어떤 놈이 우리 황보 저택에서 사람을 마구 죽였어요. 이런 상황에 종을 치지 않는다면 황보 가문의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질 판이에요.”황보추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뭐야? 어떤 간덩이가 부은 놈이 우리 황보 가문에서 행패를 부려?”황보춘은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유진우 그 자식입니다.”황보추가 이를 악물었다.“아주 겁을 상실한 놈이더라고요. 실력이 좀 있다고 우리 가문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어요. 이삼백 명에 달하는 엘리트 고수를 전부 쓰러뜨린 것도 모자라 제 아들의 사지까지 다 분질러버렸어요.”“유진우? 그 사람이 왜?”황보춘은 살짝 의아해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셋째야, 정말 유진우 맞아? 잘못 본 거 아니고?”“잘못 보다니요? 그 자식이 잿더미가 됐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예요!”황보추는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무슨 일이든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래?”황보춘이 캐물었다.“이유가 뭐든 유진우가 사람을 해칠 이유가 못 돼요.”황보추가 성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형님, 제 아들 좀 보세요. 유진우에게 얻어맞아서 무슨 꼴이 됐는지.”그가 손을 흔들자 누군가 황보곰을 들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