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클럽 밖.은도는 고급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유리창으로 번쩍이는 대문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오랜만에 재미있고 잘생긴 남자를 만났는데 명이 이렇게 짧을 줄은 몰랐다.먼저 하희관을 건드리더니 또 이어서 용서후에게도 건방을 떨었다. 골든 클럽에 갇힌 이상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해고 무방했다.은도는 조금 아쉬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유진우의 시신을 거둬주는 것밖에 없었다.‘아쉬워. 참 아쉬워...”“아이고, 은도 씨, 아직 안 갔어요?”그때 유강청과 유성신이 갑자기 마주 향해 다가왔다.“두 사람도 안 갔네요, 뭐.”은도가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말했다.“우리요?”유강청이 웃으며 말했다.“진우 씨가 우리 구세당과 인연이 깊어서 시신이라도 거둬줄까 해서 남았죠.”“흥,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말아요. 당신들이 진우 씨를 골든 클럽으로 불러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우린 그냥 사업 얘기 하려고 부른 거예요. 근데 진우 씨가 저렇게 눈치 없고 주제를 모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자업자득이에요.”유강청은 어깨를 들먹이면서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맞아! 유진우 같은 촌놈은 참 예의도 없어. 어찌나 나대고 잘난 척하는지. 정말 쌤통이야!”유성신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되레 돌을 던졌다.“유성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은도는 유성신을 혐오의 눈빛으로 째려보았다.“내 기억이 맞다면 진우 씨가 구세당을 한두 번 도와준 게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이딴 식으로 보답하는 거야? 배은망덕한 것, 정말 짐승만도 못해!”“너!”유성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유강청의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싸늘하게 말했다.“은도 씨는 뭐 우리랑 다를 줄 알아요? 남쪽 구역에서 당신이 꽃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뻔뻔스럽게 어디서 좋은 사람인 척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제
“세상에나! 정말 기적이 일어난 거야?”은도는 침을 꿀꺽 삼켰고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조금 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들이 한창 넋을 놓고 있던 그때 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유진우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 뒤로 왕현도 걸어 나왔다. 홀가분한 몸으로 나온 유진우와 달리 왕현의 손에 두 사람이 들려있었다.왼쪽에는 손발이 부러져서 처참을 비명을 지르는 하희관이었고 오른쪽에는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어서 누구인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용서후였다.왕현이 두 사람의 옷깃을 잡고 골든 클럽에서 질질 끌고 나왔다. 지나가는 곳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이건 누가 봐도 용서후가 그들을 놓아준 게 아니라 유진우와 왕현이 자기 힘으로 길을 뚫은 것이었다.용서후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전부 용씨 가문의 엘리트 무사들이었고 혼자서 백 명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만한 능력을 지녔다.그런데 몇 분 사이에 모든 엘리트 무사들이 다 널브러졌고 용서후도 잡히고 말했다.‘둘이 저렇게 강했어?’“차에 태워요.”유진우는 용서후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후 왕현에게 두 사람을 차에 태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유진우는 용서후의 랜드로버를 타고 휙 떠나버렸다. 차량 미등이 점점 희미해졌다.꿀꺽...유강청은 침을 삼켰고 등골이 갑자기 오싹했다. 조금 전 나왔기에 망정이지 안에 있었더라면 용서후 꼴이 될 뻔했다.“선배님, 인제 어떡해요? 유진우가... 서후 도련님을 데려갔어요.”유성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큰일 났어! 그 자식이 서후 도련님을 납치해갔어.”잠깐 넋을 놓았던 유강청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얼른, 얼른 차에 타. 지금 당장 용씨 가문에 알려서 서후 도련님을 구해야 해. 안 그러면 너랑 나 다 무사하지 못해.”그러고는 재빨리 자기 차에 올라탔다.“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타!”유성신이 아무 반응이 없자 유강청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거기 서! 누구야?”유진우 몇몇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용씨 저택 대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 두 명이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용수현 가주를 만나러 왔으니까 들어가서 일러.”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가주님이 네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알아? 내일에 먼저 만나겠다고 신청한 다음에 기다려.”왼쪽에 있던 경호원이 냉랭하게 말했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왕현이 바로 알아듣고 차에 있던 용서후를 끌어내 대문 앞에 던져버렸다.“넷째 도련님?”자세히 살피던 두 경호원의 표정이 급변했다.“너희들 누구야? 감히 용씨 가문 사람한테 손을 대? 죽고 싶어?”“얼른 가서 용수현한테 전해. 옛 친구가 왔다고.”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얼른... 얼른 가서 큰아버지께 보고 올려...”용서후는 바닥에 엎드린 채 힘을 쥐어짜면서 겨우 말했다.두 경호원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국 한 경호원이 이 자리를 지켰고 다른 한 경호원이 보고를 올리러 들어갔다.3분 후 완전 무장한 경호원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와 순식간에 유진우 일행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날 보자고 한 사람 누구야?”그때 우람한 체격에 수염이 덥수룩한 한 중년 남자가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왔다.중년 남자는 사각형 얼굴에 짙은 눈썹과 커다란 두 눈을 가지고 있었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그의 뒤로 백발노인 두 명이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뚱뚱했고 한 사람은 삐쩍 말랐다.두 노인은 얼핏 보면 순종적이어서 일반 사람 같아 보였지만 사실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힐끗 쳐다만 봤을 뿐인데도 왕현은 등골이 오싹해져 식은땀이 다 났다.“큰아버지... 큰아버지 살려주세요.”용서후는 마치 구세주라도 본 듯 처참하게 울부짖었다.“뭐야?”용수현의 시선이 가장 먼저 용서후에게 향했다. 머리가 다 헝클어졌고 얼굴이 퉁퉁 부은 데다가 코피까지 흘리고 있어 정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간덩이가 부은 놈이 우리 용씨 가문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용수현은 화가 난 나머지 용서후의 뺨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짝!힘이 어찌나 강한지 용서후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된 거지? 집까지 쳐들어와서 행패 부리는 놈을 처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되레 넷째 도련님의 뺨을 때렸지? 설마 잘못 때렸나?’“큰아버지?”용서후도 멍하긴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누운 채 볼을 움켜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왜... 절 때리세요?”“어리석은 놈. 널 때린 거 맞아!”용수현이 노발대발하면서 그에게 다가가더니 주먹을 날리고 발로 차기까지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맨날 빈둥빈둥 놀면서 사고만 치고 다니고. 너 같은 애가 우리 가문에 있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이야. 오늘 네 아버지를 대신해서 혼 좀 내야겠어.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아이고... 그만... 때리세요. 큰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용서후는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고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넋을 놓고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가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사나워지셨지? 평소 넷째 도련님이 사고 쳐도 기껏해야 한두 마디만 하는 정도인데 오늘은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셨어. 너무한 거 아니야?’“무슨 상황이야, 대체?”금방 도착한 유강청과 유성신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유진우가 살기 위해 사과하러 용씨 저택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용수현이 나온 후 유진우를 탓하기는커녕 되레 조카를 마구 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거물에게 다른 취향이라도 있는 건가?“이상하네. 용씨 가문 사람들 약 잘못 먹었나?”은도는 차를 멀리 세우고 차 안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이 전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가주님, 그래도 가주님의 조카인데 살살하시죠. 죽이진 말고 정신을 잃을 정도면 됩니다.
용씨 저택 접대실.“다들 나가 있어. 내 명령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마.”용수현은 손을 들어 부하와 도우미를 전부 내보냈다.“왕현 씨는 옆 방에 가서 쉬고 있어요. 가주님과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유진우가 눈빛을 보냈다.“알겠습니다.”왕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접대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접대실엔 용수현과 유진우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아이고, 도련님,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사람들이 다 나가자 용수현은 더욱 굽신거렸다.유진우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서경왕부를 대표했다. 나라에서 직급이 높은 그가 서경왕부의 세자와 사적으로 만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비난을 받는 건 물론이고 다른 성가신 일이 따를지도 모른다. 심지어 심할 경우 반역이라는 죄명까지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왜 그러세요? 가주님은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봐요?”유진우는 웃을 듯 말 듯 했다.‘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왜 너 같이 재수 없는 놈을 반가워하겠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용수현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겉으로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 그냥 놀라서 그런 거죠. 높으신 분이 이렇게 친히 와주셔서 얼마나 영관인데요.”“그래요?”유진우는 자기 찻잔에 차를 따른 후 용수현에게도 한잔 따라주었다. 용수현은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받쳐 들었다.“사실은 나중에 찾아올 계획이었는데 용씨 가문이 나랑 인연이 깊은 걸 어쩌겠어요. 그래서 좀 미리 찾아왔어요.”환하게 웃는 유진우와 달리 용수현은 눈을 파르르 떨면서 속으로 용서후를 미친 듯이 욕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척했다.“그럼 어쩐 일로 친히 여기까지 오신 거죠?”“세 가지 일 때문에 왔어요.”유진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면서 말했다.“첫 번째는 연경에 처음 와서 손에 돈이 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가주님한테 도움을 좀 청할까 해서요.”“그거야 문제없죠. 지금 당장 돈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600
“이백 가지까진 필요 없고 두 가지면 돼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필요하다던 두 가지 약재가 뭐예요? 지금 당장 애들 불러서 찾아보라고 할게요.”용수현이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네. 별거는 아니고 빙심연이랑 금수옥입니다.”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풉!그의 말에 차를 마시던 용수현이 차를 뿜으면서 놀란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방금 빙심연이랑 금수옥이라고 하셨어요?”“맞아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용수현 앞에서 이 조건을 얘기한 건 안씨 가문의 일 처리 효율이 늦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사철수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하여 용씨 가문이 도와준다면 훨씬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그 두 약재가 아주 희귀한 최상품 영약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용수현의 목소리마저 다 떨렸다.“영약이긴 한데 용씨 가문이라면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어렵지 않다고? 말은 참 쉽게 하네. 젠장!’용수현은 하마터면 욕설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처음에는 터무니없이 골든 클럽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또 값어치가 어마어마한 데다가 구매하기도 어려운 최상품 영약을 두 가지나 구해달라고 했다. 이건 용씨 가문을 다 거덜 내겠다는 뜻인 건가?“도련님,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최상품 영약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갑자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용수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사람은 힘들겠지만 가주님은 꼭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유진우가 또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건...”용수현은 눈살만 찌푸릴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가주님, 12년 전에 진씨 가문이 몰살당한 사건 들어봤어요?”유진우가 불쑥 한마디 했다. 그 순간 용수현은 속으로는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들어보긴 했는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죠?”“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뭐라고요?”유진우의 말에 용수현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10년 전 자금성의 난은 지금까지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그리고 서경왕비의 죽음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의문으로 남았다. 사실 이 의문은 해결하지 못한 게 아니라 감히 해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었다.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서경왕마저도 결국에는 포기했는데 누가 감히 그 진실을 파헤치겠는가?그때 관공서에서도 진범을 찾아내겠다고 했었지만 결국에는 밝혀내지 못했다.이 점만 봐도 자금성의 난을 일으킨 배후 범인의 권력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왕의 권력보다도 더 막강할지도 모른다.용씨 가문이 집안이 크고 사업도 크게 하지만 지위가 높은 권력자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하여 유진우의 부탁을 들은 순간 용수현은 놀라고 당황한 건 물론이고 겁까지 먹었다.그 속에 숨겨진 게 많아 만약 용씨 가문이 발을 들인다면 언제든지 망할 가능성이 있었다.“가주님, 긴장해 하지 말아요.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유진우는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다시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도... 도련님, 앞서 얘기한 두 조건은 다 괜찮은데 이 일은 저도 정말 어찌할 수가 없어요.”용수현이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금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면 온 세상이 또다시 발칵 뒤집힐 것이다.“가주님,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용씨 가문을 도와준 적이 있을 텐데요?”유진우가 갑자기 물었다.“그건...”용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때 용씨 가문의 실수로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용수현은 결국 서경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서경왕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왕비가 사정하면서 서경왕을 설득한 덕에 용씨 가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이 은혜를 용수현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품고 있었다.“그때 일 아직 잊지 않았군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었다.“우
용씨 가문은 그저 유진우의 계획 중 하나였다. 더 많은 세력이 참여해야만 배후 범인과 맞설 자격이 있었다.그 시각 용씨 저택 대문 밖의 길거리.차 두 대가 앞뒤로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은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뒷좌석에 기대어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진 않았고 미풍에 조금씩 꺼져 들어갔다.유진우가 들어간 지 거의 두 시간이 되지만 아직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아까 용수현의 행동이 예상 밖이긴 해도 사람들 앞이라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용씨 저택에 들어가면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어 조용히 죽이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그 생각에 은도는 저도 모르게 걱정이 밀려왔다. 심지어 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를 이토록 신경 쓰는지조차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단지 유진우의 얼굴이 잘생겨서? 성격이 특이해서?끼익!그때 앞에 서 있던 차가 갑자기 후진하더니 은도의 차 옆에 나란히 섰다. 유리창이 내려가면서 유강청과 유성신의 얼굴이 나타났다.“은도 씨, 아직도 기다려요?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유강청이 웃으며 말했다.“유진우는 겁도 없이 저런 위험한 곳에 들어갔어요. 지금쯤 아마 갈기갈기 찢어져서 시체도 찾기 어려울 걸요?”“흥! 전에도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결과가 어땠어요? 골든 클럽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왔잖아요.”은도는 그들을 비난했다.“골든 클럽과 용씨 저택이 같아요?”유강청이 코웃음을 쳤다.“용씨 저택엔 고수가 수두룩해서 유진우가 들어가면 죽을 길밖에 없어요. 용씨 가문 가주님이 전에는 깍듯하게 대하는 것 같아도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인 거라고요.”“맞아! 유진우가 넷째 도련님을 때렸으니 이젠 죽음뿐이야. 네가 좋아하는 그 기생오라비 아마 평생 못 나올 거야.”유성신이 고소해하며 말했고 은도는 눈살만 찌푸릴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 유강청의 차 앞으로 다가와 유리창을 두드렸다.똑똑!갑작스러운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