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클럽 밖.은도는 고급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유리창으로 번쩍이는 대문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오랜만에 재미있고 잘생긴 남자를 만났는데 명이 이렇게 짧을 줄은 몰랐다.먼저 하희관을 건드리더니 또 이어서 용서후에게도 건방을 떨었다. 골든 클럽에 갇힌 이상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해고 무방했다.은도는 조금 아쉬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유진우의 시신을 거둬주는 것밖에 없었다.‘아쉬워. 참 아쉬워...”“아이고, 은도 씨, 아직 안 갔어요?”그때 유강청과 유성신이 갑자기 마주 향해 다가왔다.“두 사람도 안 갔네요, 뭐.”은도가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말했다.“우리요?”유강청이 웃으며 말했다.“진우 씨가 우리 구세당과 인연이 깊어서 시신이라도 거둬줄까 해서 남았죠.”“흥,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말아요. 당신들이 진우 씨를 골든 클럽으로 불러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우린 그냥 사업 얘기 하려고 부른 거예요. 근데 진우 씨가 저렇게 눈치 없고 주제를 모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자업자득이에요.”유강청은 어깨를 들먹이면서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맞아! 유진우 같은 촌놈은 참 예의도 없어. 어찌나 나대고 잘난 척하는지. 정말 쌤통이야!”유성신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되레 돌을 던졌다.“유성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은도는 유성신을 혐오의 눈빛으로 째려보았다.“내 기억이 맞다면 진우 씨가 구세당을 한두 번 도와준 게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이딴 식으로 보답하는 거야? 배은망덕한 것, 정말 짐승만도 못해!”“너!”유성신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유강청의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싸늘하게 말했다.“은도 씨는 뭐 우리랑 다를 줄 알아요? 남쪽 구역에서 당신이 꽃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뻔뻔스럽게 어디서 좋은 사람인 척해요?”“그러게 말이에요. 제
“세상에나! 정말 기적이 일어난 거야?”은도는 침을 꿀꺽 삼켰고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조금 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들이 한창 넋을 놓고 있던 그때 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유진우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 뒤로 왕현도 걸어 나왔다. 홀가분한 몸으로 나온 유진우와 달리 왕현의 손에 두 사람이 들려있었다.왼쪽에는 손발이 부러져서 처참을 비명을 지르는 하희관이었고 오른쪽에는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퉁퉁 부어서 누구인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용서후였다.왕현이 두 사람의 옷깃을 잡고 골든 클럽에서 질질 끌고 나왔다. 지나가는 곳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이건 누가 봐도 용서후가 그들을 놓아준 게 아니라 유진우와 왕현이 자기 힘으로 길을 뚫은 것이었다.용서후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전부 용씨 가문의 엘리트 무사들이었고 혼자서 백 명 정도는 거뜬히 해결할만한 능력을 지녔다.그런데 몇 분 사이에 모든 엘리트 무사들이 다 널브러졌고 용서후도 잡히고 말했다.‘둘이 저렇게 강했어?’“차에 태워요.”유진우는 용서후의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후 왕현에게 두 사람을 차에 태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유진우는 용서후의 랜드로버를 타고 휙 떠나버렸다. 차량 미등이 점점 희미해졌다.꿀꺽...유강청은 침을 삼켰고 등골이 갑자기 오싹했다. 조금 전 나왔기에 망정이지 안에 있었더라면 용서후 꼴이 될 뻔했다.“선배님, 인제 어떡해요? 유진우가... 서후 도련님을 데려갔어요.”유성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큰일 났어! 그 자식이 서후 도련님을 납치해갔어.”잠깐 넋을 놓았던 유강청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얼른, 얼른 차에 타. 지금 당장 용씨 가문에 알려서 서후 도련님을 구해야 해. 안 그러면 너랑 나 다 무사하지 못해.”그러고는 재빨리 자기 차에 올라탔다.“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타!”유성신이 아무 반응이 없자 유강청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거기 서! 누구야?”유진우 몇몇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용씨 저택 대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 두 명이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용수현 가주를 만나러 왔으니까 들어가서 일러.”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가주님이 네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알아? 내일에 먼저 만나겠다고 신청한 다음에 기다려.”왼쪽에 있던 경호원이 냉랭하게 말했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왕현이 바로 알아듣고 차에 있던 용서후를 끌어내 대문 앞에 던져버렸다.“넷째 도련님?”자세히 살피던 두 경호원의 표정이 급변했다.“너희들 누구야? 감히 용씨 가문 사람한테 손을 대? 죽고 싶어?”“얼른 가서 용수현한테 전해. 옛 친구가 왔다고.”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얼른... 얼른 가서 큰아버지께 보고 올려...”용서후는 바닥에 엎드린 채 힘을 쥐어짜면서 겨우 말했다.두 경호원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국 한 경호원이 이 자리를 지켰고 다른 한 경호원이 보고를 올리러 들어갔다.3분 후 완전 무장한 경호원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와 순식간에 유진우 일행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날 보자고 한 사람 누구야?”그때 우람한 체격에 수염이 덥수룩한 한 중년 남자가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왔다.중년 남자는 사각형 얼굴에 짙은 눈썹과 커다란 두 눈을 가지고 있었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그의 뒤로 백발노인 두 명이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뚱뚱했고 한 사람은 삐쩍 말랐다.두 노인은 얼핏 보면 순종적이어서 일반 사람 같아 보였지만 사실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힐끗 쳐다만 봤을 뿐인데도 왕현은 등골이 오싹해져 식은땀이 다 났다.“큰아버지... 큰아버지 살려주세요.”용서후는 마치 구세주라도 본 듯 처참하게 울부짖었다.“뭐야?”용수현의 시선이 가장 먼저 용서후에게 향했다. 머리가 다 헝클어졌고 얼굴이 퉁퉁 부은 데다가 코피까지 흘리고 있어 정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대체 어떤 간덩이가 부은 놈이 우리 용씨 가문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용수현은 화가 난 나머지 용서후의 뺨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짝!힘이 어찌나 강한지 용서후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그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된 거지? 집까지 쳐들어와서 행패 부리는 놈을 처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되레 넷째 도련님의 뺨을 때렸지? 설마 잘못 때렸나?’“큰아버지?”용서후도 멍하긴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누운 채 볼을 움켜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왜... 절 때리세요?”“어리석은 놈. 널 때린 거 맞아!”용수현이 노발대발하면서 그에게 다가가더니 주먹을 날리고 발로 차기까지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맨날 빈둥빈둥 놀면서 사고만 치고 다니고. 너 같은 애가 우리 가문에 있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이야. 오늘 네 아버지를 대신해서 혼 좀 내야겠어.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아이고... 그만... 때리세요. 큰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용서후는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고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주변 사람들은 또다시 넋을 놓고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가주님이 왜 갑자기 이렇게 사나워지셨지? 평소 넷째 도련님이 사고 쳐도 기껏해야 한두 마디만 하는 정도인데 오늘은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셨어. 너무한 거 아니야?’“무슨 상황이야, 대체?”금방 도착한 유강청과 유성신은 눈앞의 광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유진우가 살기 위해 사과하러 용씨 저택으로 온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용수현이 나온 후 유진우를 탓하기는커녕 되레 조카를 마구 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거물에게 다른 취향이라도 있는 건가?“이상하네. 용씨 가문 사람들 약 잘못 먹었나?”은도는 차를 멀리 세우고 차 안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이 전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가주님, 그래도 가주님의 조카인데 살살하시죠. 죽이진 말고 정신을 잃을 정도면 됩니다.
용씨 저택 접대실.“다들 나가 있어. 내 명령 없이는 아무도 들이지 마.”용수현은 손을 들어 부하와 도우미를 전부 내보냈다.“왕현 씨는 옆 방에 가서 쉬고 있어요. 가주님과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유진우가 눈빛을 보냈다.“알겠습니다.”왕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접대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접대실엔 용수현과 유진우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아이고, 도련님,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사람들이 다 나가자 용수현은 더욱 굽신거렸다.유진우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서경왕부를 대표했다. 나라에서 직급이 높은 그가 서경왕부의 세자와 사적으로 만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비난을 받는 건 물론이고 다른 성가신 일이 따를지도 모른다. 심지어 심할 경우 반역이라는 죄명까지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왜 그러세요? 가주님은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봐요?”유진우는 웃을 듯 말 듯 했다.‘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왜 너 같이 재수 없는 놈을 반가워하겠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용수현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겉으로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 그냥 놀라서 그런 거죠. 높으신 분이 이렇게 친히 와주셔서 얼마나 영관인데요.”“그래요?”유진우는 자기 찻잔에 차를 따른 후 용수현에게도 한잔 따라주었다. 용수현은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받쳐 들었다.“사실은 나중에 찾아올 계획이었는데 용씨 가문이 나랑 인연이 깊은 걸 어쩌겠어요. 그래서 좀 미리 찾아왔어요.”환하게 웃는 유진우와 달리 용수현은 눈을 파르르 떨면서 속으로 용서후를 미친 듯이 욕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척했다.“그럼 어쩐 일로 친히 여기까지 오신 거죠?”“세 가지 일 때문에 왔어요.”유진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면서 말했다.“첫 번째는 연경에 처음 와서 손에 돈이 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가주님한테 도움을 좀 청할까 해서요.”“그거야 문제없죠. 지금 당장 돈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600
“이백 가지까진 필요 없고 두 가지면 돼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필요하다던 두 가지 약재가 뭐예요? 지금 당장 애들 불러서 찾아보라고 할게요.”용수현이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네. 별거는 아니고 빙심연이랑 금수옥입니다.”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풉!그의 말에 차를 마시던 용수현이 차를 뿜으면서 놀란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방금 빙심연이랑 금수옥이라고 하셨어요?”“맞아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용수현 앞에서 이 조건을 얘기한 건 안씨 가문의 일 처리 효율이 늦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사철수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하여 용씨 가문이 도와준다면 훨씬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그 두 약재가 아주 희귀한 최상품 영약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용수현의 목소리마저 다 떨렸다.“영약이긴 한데 용씨 가문이라면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어렵지 않다고? 말은 참 쉽게 하네. 젠장!’용수현은 하마터면 욕설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처음에는 터무니없이 골든 클럽을 내놓으라고 하더니 또 값어치가 어마어마한 데다가 구매하기도 어려운 최상품 영약을 두 가지나 구해달라고 했다. 이건 용씨 가문을 다 거덜 내겠다는 뜻인 건가?“도련님,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최상품 영약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갑자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요.”용수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사람은 힘들겠지만 가주님은 꼭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유진우가 또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건...”용수현은 눈살만 찌푸릴 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가주님, 12년 전에 진씨 가문이 몰살당한 사건 들어봤어요?”유진우가 불쑥 한마디 했다. 그 순간 용수현은 속으로는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들어보긴 했는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죠?”“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뭐라고요?”유진우의 말에 용수현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10년 전 자금성의 난은 지금까지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그리고 서경왕비의 죽음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의문으로 남았다. 사실 이 의문은 해결하지 못한 게 아니라 감히 해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었다.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서경왕마저도 결국에는 포기했는데 누가 감히 그 진실을 파헤치겠는가?그때 관공서에서도 진범을 찾아내겠다고 했었지만 결국에는 밝혀내지 못했다.이 점만 봐도 자금성의 난을 일으킨 배후 범인의 권력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왕의 권력보다도 더 막강할지도 모른다.용씨 가문이 집안이 크고 사업도 크게 하지만 지위가 높은 권력자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하여 유진우의 부탁을 들은 순간 용수현은 놀라고 당황한 건 물론이고 겁까지 먹었다.그 속에 숨겨진 게 많아 만약 용씨 가문이 발을 들인다면 언제든지 망할 가능성이 있었다.“가주님, 긴장해 하지 말아요. 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유진우는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다시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도... 도련님, 앞서 얘기한 두 조건은 다 괜찮은데 이 일은 저도 정말 어찌할 수가 없어요.”용수현이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금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면 온 세상이 또다시 발칵 뒤집힐 것이다.“가주님,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용씨 가문을 도와준 적이 있을 텐데요?”유진우가 갑자기 물었다.“그건...”용수현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때 용씨 가문의 실수로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용수현은 결국 서경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서경왕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왕비가 사정하면서 서경왕을 설득한 덕에 용씨 가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이 은혜를 용수현은 지금까지도 마음에 품고 있었다.“그때 일 아직 잊지 않았군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었다.“우
용씨 가문은 그저 유진우의 계획 중 하나였다. 더 많은 세력이 참여해야만 배후 범인과 맞설 자격이 있었다.그 시각 용씨 저택 대문 밖의 길거리.차 두 대가 앞뒤로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은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뒷좌석에 기대어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진 않았고 미풍에 조금씩 꺼져 들어갔다.유진우가 들어간 지 거의 두 시간이 되지만 아직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아까 용수현의 행동이 예상 밖이긴 해도 사람들 앞이라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용씨 저택에 들어가면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어 조용히 죽이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그 생각에 은도는 저도 모르게 걱정이 밀려왔다. 심지어 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를 이토록 신경 쓰는지조차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단지 유진우의 얼굴이 잘생겨서? 성격이 특이해서?끼익!그때 앞에 서 있던 차가 갑자기 후진하더니 은도의 차 옆에 나란히 섰다. 유리창이 내려가면서 유강청과 유성신의 얼굴이 나타났다.“은도 씨, 아직도 기다려요?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유강청이 웃으며 말했다.“유진우는 겁도 없이 저런 위험한 곳에 들어갔어요. 지금쯤 아마 갈기갈기 찢어져서 시체도 찾기 어려울 걸요?”“흥! 전에도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결과가 어땠어요? 골든 클럽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왔잖아요.”은도는 그들을 비난했다.“골든 클럽과 용씨 저택이 같아요?”유강청이 코웃음을 쳤다.“용씨 저택엔 고수가 수두룩해서 유진우가 들어가면 죽을 길밖에 없어요. 용씨 가문 가주님이 전에는 깍듯하게 대하는 것 같아도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인 거라고요.”“맞아! 유진우가 넷째 도련님을 때렸으니 이젠 죽음뿐이야. 네가 좋아하는 그 기생오라비 아마 평생 못 나올 거야.”유성신이 고소해하며 말했고 은도는 눈살만 찌푸릴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 유강청의 차 앞으로 다가와 유리창을 두드렸다.똑똑!갑작스러운
점심을 먹고 난 후, 유진우는 갑자기 이청성의 전화를 받았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상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날 장소는 성서의 옛 저택으로 정했다. 성서에 있는 그 오래된 집은 유진우가 이미 구매해 놓은 곳으로 주로 밀사 훈련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전에 소현무에게 피해를 보았던 여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서경의 밀사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의 큰 뜻은 다시는 자신들처럼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뜻에 유진우는 존경을 표했으며 그들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손도운의 훈련을 거친 그 여자들은 이제 입문 단계에 있지만 진짜 임무를 수행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의 연습이 필요했다. 유진우는 그들이 평생 임무를 수행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모든 것이 평화롭다는 의미였다. 밀사들은 잠재적인 위협이 있을 때만 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그들은 거의 죽을 각오로 임무를 수행한다. 30분 후, 유진우는 성서의 오래된 집에 도착해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청성이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이청성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면사포와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매만 봐도 여전히 매우 유혹적이었다. 특히 그녀에게서 풍기는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기운은 마치 타고난 매력처럼 사람들을 쉽게 끌어당기는 느낌을 주었다. “왔어요?” 이청성은 직접 유진우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공주마마,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유진우는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리 이렇게 친해졌는데 공주마마라 부르는 게 좀 어색하지 않나요? 다른 호칭을 쓰는 건 어때요?” 이청성은 미소를 머금은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뭐라 부르면 되나요? 아가씨? 아니면 여사님?” 유진우는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그런 거 말고 그냥 청성 씨라고 불러도 되잖아요. 왜 그렇게 격식을 차려요?” 이청성은
원인은 간단했다. 유진우는 배신자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적인 자들은 마땅히 엄벌에 처해야 했다. 반란을 일으킨 다섯 명을 처형한 후, 그들을 따랐던 고급 장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처분이 내려졌다. 강등될 자는 강등되고 포섭할 자는 포섭하며 감옥에 가야 할 자들은 감옥에 보냈다. 구체적인 처분은 자발적인 배신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유진우는 반란을 수습하는 동시에 홍복홍에게 유만군의 한 부대를 이끌고 보물 지도의 위치를 따라 호룡각의 보물 창고를 찾아가도록 지시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룡각에도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대 마스터인 홍복홍 앞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손쉽게 호룡각의 잔당을 소탕하고 보물 창고에 있던 모든 재물을 회수해 왔다. 사철수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물 창고 안에는 재물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경 왕부에서 동원한 수백 대의 대형 트럭과 수만 명의 인력을 총동원해야만 창고를 완전히 비울 수 있었다. 그 모든 재물의 양과 가치는 어마어마해서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이 보물만으로 서경의 향후 20년 군자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창고 하나만으로 이 정도라면 남은 세 개의 보물 창고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나라를 사고도 남을 부가 될 것이었다. 보물을 가져온 뒤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바로 공로를 논하고 상을 주는 일이었다. 남방의 세 명의 제후인 회음 제후 은성종, 평양 제후 장범규, 선평 제후 주한휘는 모두 큰 공을 세운 자들이었기에 마땅한 보상을 받았다. 그들의 휘하에 있던 장군과 병사들도 저마다 공훈에 따라 상을 받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어느덧 사흘이 지나 있었다. 3일 후, 정오. 유진우가 식사하던 중 홍복홍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세자 전하, 아뢸 일이 있습니다.” 홍복홍은 몸을 숙이며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
“됐어, 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방에 들어가서 쉬어.”유만수는 피곤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유만수가 유진우한테 왕위를 계승해 줄 생각을 했던 건 한편으로는 유진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감 때문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진우는 야망도 없고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그러니 유만수도 싫다는 아들을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얼마 남지 않은 삶이니 이젠 두 아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외에 일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유진우는 뭔가를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우는 아직 왕이 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아니었다.다른 사람들한테는 서경의 왕은 최고의 권세를 대표하고 무궁무진한 부귀영화를 대표하며 세계 정상에 서는 위풍을 대표하겠지만, 유진우한테 서경의 왕은 너무 무거운 자리였다.그 자리는 오르기만 하면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더 이상 자기 자신보다 전체 서경, 더 나아가 천하의 백성을 생각해야 한다.유진우는 자신은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다. 유진우는 이번만큼은 그냥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칠 동안 유진우는 왕부에서 시간을 보냈다.반역을 평정하는 이번 일은 호룡각을 소탕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이 많았다.유만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유진우가 그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했다.먼저 유태범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유진우는 유태범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첫째, 병권을 반납하고 서경에 머물며 매일 개를 산책시키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한가로운 귀족으로서 부귀한 삶을 누린다. 단, 어떤 세력도 있어서는 안 되며 수중의 호위대도 백 명을 넘지 말아야 한다.둘째, 어느 정도의 금전을 가지고 서경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서 발전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왕부는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한 약속이니 제가 지켜야죠.”유진우가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는 보물 황옥주를 가지고 있어 용원의 기를 찾는 데 성공할 확률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야말로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그래. 그럼, 네 말대로 용원의 기는 네가 찾아봐. 그런데 문제는 그걸 찾고 난 다음에는 뭐 할래?”유만수는 되물었다.“그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요.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 안 해봤어요.”유진우는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유만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약속을 지킨 뒤 두말 말고 다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아. 뒷걱정 없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말했잖아요. 저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유천우는 단번에 거절했다.“내 아들인 네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면 누가 이어받아? 설마 정말 천우에게 이 중책을 맡길 생각이야?”유만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천우는 학문도 능하고 무술도 능한데 안 될 건 또 뭐예요?”유진우가 반박하며 물었다.“우수한 건 맞지만 천우는 대장군이 더 어울려. 서경의 왕은 아니야.”유만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서경이 세력이 크긴 하지만 내우외환이 끊지지 않고 있어.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많은 세력이 반드시 들고 일어날 거야. 그때가 되면 천우가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천우한테 왕위를 계승하는 건 그를 해치는 길이야.”“그럼, 저는 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유진우가 물었다.“너는 팔자가 굳세고 대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경에 있는 분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서경의 왕이 된다면 전체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어. 나중에 서경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너는 그만한 중책을 다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야.”유만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듣다 보니까 결국 저는 정세
유태범은 분한 마음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유진우와 유천우가 거절하며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왕은 그 두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걸 유태범도 잘 알고 있었다.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한다면 그의 최후도 채원진과 똑같아질 것이 뻔했다.“그만! 그만! 이 녀석들이! 왕위를 계승하라는데 무슨 처벌을 받듯이 말하고 있어?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야?”두 아들의 태도에 화가 난 유만수는 욕을 퍼부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왕위를 값이 없이 여기며 서로 안 한다고 싸우는 두 아들 때문에 유만수는 너무 창피했다.“저는 정말 생각이 없어요. 천우한테 물려 주세요.”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는 왕위를 감당할 재목이 아니에요. 무조건 형을 시키세요.”유천우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둘 다 입 다물어!”유만수는 탁자를 세게 치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내가 결정해. 너희들이 제멋대로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몸만 괜찮았다면 너희들이 왕위를 이렇게 빨리 넘겨받을 수 있었을 거 같아?”유만수가 화를 내자 유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절대 못 하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었고 유진우는 여전히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유만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자식놈들이 모두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줬네요. 왕위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오늘에는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냅시다.”“자자, 다들 마십시다.”장범규는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는 누가 왕위를 이어받든 상관없었다.결정은 순전히 유만수의 손에 달렸으니, 장범규는 누가 왕이 되었던 유만수의 결정을 따르고 지지할 생각이었다.방금까지 얼어있던 분위기는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다만 아까와 달리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첫 번째 부류는 회음 제후 은성종을 필두로 유진우를
“뭐?”유진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서경의 왕위는 수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이렇게 존귀하고 최고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서로 마다하는 유진우와 유천우 때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예전에는 왕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거늘, 유진우와 유천우는 완전히 반대였다.두 사람은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양보하며 왕위를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유진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유천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모두 입만 벌린 채 얼어있었다.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데 정작 두 형제는 서로 양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형, 애초에 약속했잖아요. 형이 왕이 되고 내가 장군이 돼서 형을 보좌한다고. 왜 말을 바꿔요?”유천우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 구속받는 것도 싫고 부담스러워서 싫어. 그리고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 왕위는 네가 더 합당해.”“합당하기는 개뿔!”유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능력이 어느 정도 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애당초 나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에요. 하지만 형은 다르죠.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수하고 형이야말로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예요.”“천우야, 함부로 너 자신을 낮추지 마. 네가 나보다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야.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유진우가 말했다.“난 몰라요! 아무튼 서경의 왕은 형이 하세요!”유천우는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익지 않은 참외를 억지로 비틀어 따봤자 그 참외는 달지 않아. 나는 큰 포부도 없고 남을 위하는 고상
유태범의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지난날 표기대장군이었던 유태범은 인품 논란은 많았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유태범은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오늘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그러니 유태범처럼 패기 있고 안목이 있는 사람조차 유진우가 왕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했다.조금 전에 그들은 유진우를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로 생각해 유천우를 지지했지만 지금 보니 그건 아니었다.먼저 전쟁의 신 조무진이 힘을 보탰고 이어서 표기대장군 유태범이 지지했으니, 이 두 사람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의 결정을 바꾸기에 충분했다.“셋째야, 왜 장혁을 선택하겠다는 건지 자세히 말해봐.”유만수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장혁을 선택한 이유는 조무진과 비슷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더 중시합니다.”유태범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호룡각을 어떻게 소탕했는지 모두 잘 알 거로 생각합니다. 전부 장혁이 작전을 짜고 계략을 펼쳤기에 교활하기 여지없던 채원진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룡각의 숨겨진 보물까지 전부 찾아냈죠. 이건 그야말로 아주 큰 공이 아닙니까? 종합해 보면 장혁의 용기와 지략은 왕위를 계승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천우는 대장군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유태범의 말이 끝나자, 유만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한휘는 흥분하며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허튼소리! 이번 호룡각을 소탕한 것은 유진우 한 사람만의 공이 아니잖아요. 유천우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유천우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재능과 능력으로 따지면 유천우는 유진우보다 못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젊고 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선평 제후,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서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이고 모든 권한은 저의 형님한테
“괜찮아. 오늘은 가족 연회야.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식구와 마찬가지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걱정 말고 해봐.”유만수가 웃으며 말했다.“위왕 님께서 물어보셨으니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씀 올리겠습니다.”조무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올려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제 의견은 지극히 제 개인 생각일 뿐이니, 혹시 의견이 달라도 저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아주십시오.”“전쟁의 신께서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신은 나라의 기둥과 마찬가지인 사람이니 보는 눈이 분명 다를 거로 생각합니다.”“전쟁의 신께서는 누구를 지지하는 겁니까? 어서 말해보세요.”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용국의 전쟁의 신이자 왕족 조씨 가문의 후계자인 조문진의 영향력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모든 사람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여 있었다.“자, 그럼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조무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말했다.“종합적인 능력과 현명함을 바탕으로 한다면 저는 유진우가 서경의 왕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진우에게는 많은 단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경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서경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토대가 없어 대중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위왕 님께서 저 자리에 오르실 때도 똑같은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많은 세력이 위왕 님께 좋지 않은 눈총을 보냈었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위왕 님은 뛰어난 개인 능력으로 서경의 영토를 넓히며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여 지금의 지위와 영광을 얻었지요. 유진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개인 능력으로 보면 위왕 님보다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서경뿐만 아니라 용국 전체에서도 유진우 같은 사람은 더 없을 겁니다. 저는 유진우에게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그는 반드시 훌륭한 서경 왕이 되어 여러분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께서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까
은성종의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똑똑한 사람이라면 유천우의 지지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유천우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 텐데, 서경의 인재로서 어린 제갈량이라고 불리는 은성종이 왜 반대로 유진우를 지지하는지 모두 의아해했다.“회음 제후,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주한휘가 반박했다.“유진우의 무도 재능은 서경 전체를 놓고 보면 확실히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왕의 자리는 싸움을 잘한다고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천우는 학문과 무예를 골고루 겸비한 데다 지지자까지 많으며 무엇보다 전쟁에서 몇 년 동안 연마하여 모든 면에서 매우 훌륭합니다. 만약 유천우가 왕이 된다면 서경은 분명 더욱 빛날 것입니다!”유천우는 황제의 조카이자 주한휘의 미래 사위이고 양측은 이미 혼약까지 맺은 사이였다.그러니 주한휘는 유천우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자기 딸은 왕비가 되는 것이고 본인도 자연히 신분이 상승할 테니 무조건 유천우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저도 선평 제후의 견해에 동의합니다.”흑용군 주장 한 명이 말했다.“유진우가 우수하다는 건 물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서경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서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천우는 다르지요. 어릴 때부터 서경에서 자랐으니, 인맥도 넓고 군사 내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천우가 왕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맞습니다. 유진우는 10년 동안 서경을 떠나 있었으니 그를 따르지 않을 자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유천우가 왕이 되는 것을 지지합니다.”이때 일부 군사의 고급 장교들이 모두 유천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유진우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서경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그들한테 유진우는 서먹서먹했지만, 유천우는 달랐다.유천우가 예전에는 믿음직하지 못했던 건 맞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였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유천우의 성격상 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