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은설이 자신을 비웃었다.“친구로 생각했다고요? 그런데 왜 사촌 오빠를 해치고 날 납치한 건데요?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요!”“그건...”유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람을 때린 걸 방금 두 번이나 설명했지만 남궁은설은 믿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는 유진우를 이미 죄인이라고 단정 지었을지도 모른다.지금 유진우가 뭐라 설명하고 결백을 주장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의심의 씨앗을 품기 시작하면 믿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니까. 이 점은 예전부터 진작 깨달았었다.“왜 아무 말이 없어요? 이젠 더는 발뺌해봤자 아무 소용 없을 것 같아요? 우리 아빠 말씀이 옳았네요. 예전에 나한테 보였던 호의 전부 가짜라는 거.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잘해준 거 맞네요. 난 진우 오빠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다른 사람과 달리 욕심도 없고 허영심도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제 보니까 내가 정말 사람 잘못 봤네요, 그것도 아주 많이. 진우 오빠도 나한테 일부러 접근했던 그런 사람들이랑 다를 바 없어요. 위장에 능하고 남을 잘 속이잖아요. 그동안 날 속여서 재미있었어요? 진실도 모르고 하마터면 가족들이랑 등을 돌릴 뻔하니까 재밌었냐고요! 정말 실망이에요!”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포효하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남궁은설의 두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진심으로 대하면 상대의 진심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돌아온 건 기만이었다. 남궁은설은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남궁은설의 말에 유진우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이미 선택했다는 걸 알아버렸다.가족들과 친구들 앞에서 남궁은설은 결국 가족을 택했다. 크게 비난할 것도 없기에 딱히 화도 나지 않았다.“은설 씨,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유진우는 설명도 하지 않았고 결백도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눈빛이 점점 서늘해졌다.“사실 은설 씨 말이 맞아요. 난 욕심도 많고 허영심도 많은 평범한 남자예요. 하지만 은설 씨를 속인 적은 단
“도련님, 일어나세요, 도련님!”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남궁은설의 생각을 깨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상을 입은 남궁진혁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진혁 오빠!”화들짝 놀란 남궁은설이 재빨리 달려가 남궁진혁의 상태를 살폈다. 유진우의 주먹 한 방에 남궁진혁의 복부가 다 비틀어졌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 숨이 겨우 붙어있는 상태였다.“유진우 이 빌어먹을 놈이 진혁 도련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고약한 것!”유연지가 이를 꽉 깨물었다.“그 자식이 바로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한솔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실력으로 싸워 이기지는 못해도 허세 정도는 부릴 수 있었다.“얼른 병원으로 데려가요!”상황이 심상치 않자 남궁은설이 사람을 불러 남궁진혁을 차에 태운 후 곧장 동강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진들이 분주히 오가며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서야 남궁진혁은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유진우가 그나마 힘을 덜 가해서 이 정도지, 조금만 더 세게 쳤더라면 진작 황천길로 갔을 것이다.그 시각 특수 병실 안.남궁진혁은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로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남궁보성 일행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수심에 찬 얼굴이었다.며칠 사이 남궁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남궁유나가 말에 걷어차였고 그다음은 남궁보성이 내상을 입어 입원했었으며 이젠 남궁진혁이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여러 일들이 전부 유진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진혁이는? 진혁이 어떻게 됐어?”그때 남궁무원이 병실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종일 바삐 돌아치다가 겨우 쉬나 싶었는데 침대에 눕기도 전에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형, 걱정하지 마. 진혁이 위험한 고비는 넘겼대.”남궁보성이 위로를 건넸다.“누구야? 대체 누가 내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남궁무원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 그는 현재 남궁 가문의 가주이자 서울에서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그
남궁무원이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이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실력 괜찮은 고수 몇 명 불러서 유진우 그놈 해결해버려!”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큰 힘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알았어.”남궁보성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아무튼 남궁무원이 내린 명령이기에 나중에 진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남궁을용은 그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이튿날 오전.남궁 가문 장군 저택 문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고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오늘은 남궁을용의 생일날이다. 거물은 물론이고 직위가 높고 명성과 위세가 대단한 사람들도 전부 참석했다.남궁을용은 이미 은퇴했지만 예전에 지위도 높았고 권력도 어마어마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곳곳에 수두룩했다. 강남 전체에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늘 겸손했던 남궁을용은 쓸데없는 낭비를 가장 싫어했다. 하여 이번 생일에도 친인척과 친구만 불렀다. 물론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꽤 있었다.그 시각 장군 저택 대문 앞, 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장 어르신이 내렸는데 손에 선물도 들고 있었다.“보스, 어젯밤에 남궁진혁을 죽어라 팼는데 오늘 이렇게 생신 축하하러 오면 저 집안에서 안면을 바꿀 텐데요?”장 어르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장군 저택은 경계가 삼엄했고 한 번 들어가면 나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장군님은 현명하신 분이에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남궁진혁을 때리긴 했지만 남궁을용의 생일을 축하하는 건 또 별개였다.“그럼 다행이고요.”장 어르신이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남궁을용이 사리에 밝으면 다행이겠지만 혹시라도 손자를 감싸면서 억지를 부릴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화를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들어갑시다.”유진우는 두말없이 초대장을 건네고 장 어르신과 함께 장군 저택 안으로 들
“난 장군님 생신 축하해드리러 왔어. 괜한 소란 피우고 싶지 않으니까 저리 비켜.”그들이 건방을 떨고 협박해도 유진우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축하? 흥, 그럴 자격이나 있어?”유연지가 대놓고 비웃었다.“네까짓 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장군님 생신을 축하해드려? 은설이가 아니었더라면 여기 대문에 발이라도 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꿈 깨!”유연지는 유진우가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남궁은설이 어제 말해놓은 덕분이라도 생각했다.“그러게 말이야.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봐.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지위도 높고 명성이 있는 분들이야. 보험이나 파는 주제에 감히 우리랑 어울리려고?”한솔이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진우가 싸움을 좀 한다고 해도 그저 망나니일 뿐 큰 파도를 일으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남궁은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유진우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어젯밤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금이 갔다.침대에 누워있는 남궁진혁만 생각하면 유진우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다.“충고하는데 사람 너무 업신여기지 마.”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난 초대장 받고 여길 왔어. 신분이 뭐든, 자격이 있든 없든 너희들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초대장? 허허... 훔친 건지 빼앗은 건지 누가 알아? 너 같은 루저가 무슨 일을 못 하겠어?”유연지가 경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유진우, 그렇게 돋보이고 싶어? 네 신분이 어떤지 여기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넌 장군님께 빌붙을 자격도 없다고.”한솔이 한껏 위세를 부렸다.“두 사람 정말 시끄럽네.”유진우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내가 너희들이랑 친해? 내가 뭘 하든 너희들이 뭔데 나서? 한 번만 더 헛소리 지껄였다간 내 주먹맛 보여주는 수가 있어.”그러면서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전에는 남궁은설의 체면을 봐서 두 사람을 무시했었는데 사이가 틀어진 지금은 체면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무... 무엄하다!”유진우가 버럭 화를 내자 유연지는 저도 모
남궁은설은 유진우가 이토록 막무가내이고 쩍하면 주먹을 쓰는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에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 믿었었는데 지금 보니 사람을 잘못 봐도 너무나 잘못 봤다. 악인을 여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니...그 순간 남궁은설은 유진우가 더욱 미웠고 원망스러웠다.“은설 씨, 장난친 거니까 너무 긴장해 하지 말아요. 저 사람들이 먼저 날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난 절대 어쩌지 않아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흥! 방금 그게 어딜 봐서 장난이야? 은설이가 막지 않았더라면 진작 손을 썼겠지.”유연지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유진우, 싸움 좀 한다고 함부로 해도 되는 줄 알아? 여긴 장군 저택이야. 소란 피워도 되는 곳이 아니라고!”한솔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누군가 날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어쩌지 않아. 하지만 건드리면 절대 가만 안 둬. 충고니까 명심해.”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은설아, 저 자식 완전히 미쳤어. 그냥 내쫓아버리는 건 어때? 안 그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유연지가 또다시 부추기기 시작했다.“맞아!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고 했어. 오늘은 장군님 생신이라 귀한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저놈이 소란이라도 피우면 남궁 가문의 체면이 뭐가 돼?”한솔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은설아, 저 자식을 내쫓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선택이야.”나머지 몇몇도 남궁은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유진우 씨, 여기 당신 반기는 사람 없으니까 나가 주세요.”남궁은설은 이를 꽉 깨물고 결국 내쫓았다.친구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유진우가 여기서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생일 연회를 망쳐버리게 된다.“날 내쫓겠다는 건가요?”유진우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은설 씨, 저 사람들도 손님이고 나도 손님이에요. 고작 몇 마디 말 듣고 날 내쫓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그는 줄곧 남궁은설을 여동생이라 생각했기에 오해를 받아도 그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져서 친구로 남
“믿지 마, 은설아.”상황이 다르게 돌아가려 하자 유연지가 다시 나서서 이간질했다.“널 구했다는 둥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둥 다 거짓말이야. 유진우는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가지고 너한테 접근했어. 다 네 호감을 얻으려고 일부러 꾸민 계획이라고. 지금까지 한 행동들 전부 가짜야. 그러니까 절대 믿지 마!”“맞아. 저 자식은 다른 속내가 있어. 좋은 놈이 아니라고. 항상 경계해야 해!”한솔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그들의 말에 남궁은설은 조금 전까지 생겨났던 미안함이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다.‘그래, 날 도와준 건 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은혜도 아니지. 어젯밤에 진짜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나 혼자 속고 있었을 거야. 유진우는 날 속였으니까 미안해할 필요도, 고마워할 필요도, 마음 약해질 필요도 없어.’그 생각에 남궁은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다시 유진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신 진우 씨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나가세요!”“당신...”장 어르신이 화내려 하자 유진우가 말렸다. 유진우의 두 눈에 실망과 차가움이 짙어졌다.“은설 씨 지금 날 엄청 미워하는 것 같네요. 그렇다면 더는 알짱거리지 않고 이만 가볼게요.”그러고는 바로 돌아서서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남궁은설이 내쫓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은데 뻔뻔스럽게 버티고 있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남궁을용의 생일은 마음만 전해주면 되었다.“흥, 진작 꺼졌어야지. 재수 없어!”유연지가 싫은 티를 팍팍 냈다.“지금 당장 가주님께 알려서 유진우가 나가면 잡아들이라고 해.”한솔은 바로 옆에 있는 부하에게 분부했다. 파티를 망쳐서는 안 되지만 유진우를 가만히 두겠다는 뜻도 아니었다. 남궁 가문의 도련님을 때렸으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지.“장군님 오셨습니다.”유진우가 연회장을 나가던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백발이 성성하고 체격이 우람한 남궁을용이 한 무리 사람들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그가
“인마, 죽으려고 찾아왔어?”남궁보성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매섭게 째려보았다.“재밌네... 아주 재밌어.”사람들 속에 있던 서문천명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젯밤 일 때문에 밤새워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유진우가 직접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겁도 없는 녀석이었다.“하하... 저 자식 인제 죽었어. 장군님께 걸렸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못 도망칠 거야.”한솔이 흉악스럽게 웃었다.“쌤통이야, 아주! 진작 꺼졌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쓸데없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더니 꼴좋다. 저게 바로 죽음을 자초한다는 거지.”유연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고소해했다. 그들은 남궁을용이 손자가 얻어맞은 사실을 알게 되어 공개적으로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다.“장군님, 마음은 전했으니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유진우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인사했다.“거기 서!”그 모습에 한솔이 갑자기 튀어나와 앞을 막으면서 호통쳤다.“인마, 장군 저택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그런 곳인 줄 알아?”그러면서 남궁을용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자신을 어필할 기회를 절대 놓쳐선 안 되었다. 만약 장군에게 잘 보인다면 앞으로 출세할지도 모르니까. 유진우도 제압하고 장군에게도 잘 보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그 생각에 한솔은 자신의 영리함과 관찰력에 스스로 감탄했다.‘난 정말 대단해.’“뭐야?”갑자기 튀어나온 한솔을 보고 남궁을용은 멈칫했다.‘이 자식은 또 어디서 튀어나왔어? 뭐 하자는 거야?’“아까는 날 내쫓더니 또 가지 말라고? 대체 무슨 뜻이야?”유진우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흥, 시끄러워!”한솔이 무섭게 몰아붙였다.“장군님의 눈앞에서 알짱거린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기분을 더럽혀놓고 그냥 가려고? 꿈 깨!”“맞아. 네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장군 저택에 들어왔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어. 다행히 장군님께서 예리한 안목으로 너의 정체를 알아봤지. 오늘 넌 어디도 도망 못 가.”유연지가 또박또박 말했다.유진
“네?”갑작스러운 따귀에 한솔과 유연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움켜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소란 피운 건 유진우인데 우릴 왜 때려?’그 시각 남궁 가문 사람들과 하객들도 전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줄곧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장군이 많은 사람 앞에서 게다가 생일날에 누군가를 때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장... 장군님,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저 자식은 죄인이에요. 다른 나쁜 짓 못 하게 잡아들여야 한다고요.”한솔이 설명하려 했다.“네, 장군님. 저 자식이 어젯밤에 진혁 도련님도 다치게 했다고요. 극악무도한 놈을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유연지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그녀는 남궁을용이 앞뒤 진실을 몰라서 제지한 줄 알았다.“닥쳐!”남궁을용이 눈을 부릅뜨자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유진우 씨는 내 손녀 목숨을 구한 남궁 가문의 은인이야. 그리고 내 귀한 손님이고. 한 번만 더 헛소리 지껄였다간 싹 다 내쫓는 수가 있어!”그의 말에 한솔과 유연지는 순간 얼어붙어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장군 저택에서 쫓겨나면 그들이 봉변당하는 건 물론이고 그들 가족도 전부 영향받게 된다. 심지어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남궁을용에게 밉보이면서까지 그들과 왕래하려는 가문은 없을 테니까.“할아버지...”보다 못한 남궁은설이 일어서서 뭐라 하려는데 남궁무원이 가로챘다.“아버지, 오늘 생신이신데 화내시면 어떡해요. 일단 화부터 푸세요.”남궁은설을 막은 건 지금 이 순간 사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궁을용이 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이유가 뭐든 남궁 가문은 반드시 따라야 했고 절대 어겨서는 안 되었다. 특히 많은 하객 앞에서 남궁을용의 권위를 절대 도발해서는 안 되었다.“흥!”남궁을용은 두 사람을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유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진우 씨, 자리로 가자. 오늘 누가 또 불만 있나 지켜보겠어.”그러고는 유진우의 손을 잡고 귀빈석으로 걸어갔다. 귀빈석은 남궁 가문의 핵심 인물이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