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 전쟁 여제가 나타났다!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문을 바라봤다.붉은색의 옷에 청봉장검을 든 한 여자가 많은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유히 걸어왔다.은빛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경국지색의 외모를 지녔고 그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녀의 모든 움직임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포스가 느껴졌다. 위엄있고 우아한 분위기는 단번에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도도한 눈빛은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싸늘함이 담겨있었다.그녀는 다름 아닌 용국 최강의 여전사 조홍연이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조홍연? 홍연 전쟁의 여제 조홍연이라고?”“세상에나. 저 대단하신 분이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이야. 오늘 정말 눈이 번쩍 뜨이네.”“미모와 풍채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는데 실물로 보니 정말 그렇네요.”“미쳤어. 너무 예쁘잖아. 역시 용국 최강의 여전사다운 아름다움이야.”다가오는 조홍연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그들은 이곳에서 홍연 전쟁의 여제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용국의 정상에 서 있는 거물이자 수백만 명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신이다.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그녀는 모든 여성의 우상이자 자랑이기도 하다.TV에서만 보던 인물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영광이 아니겠는가?지금 이 순간, 감히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그들은 경외심과 초조함이 밀려오는 동시에 너무도 혼란스러웠다.모두가 알다시피 조홍연 같은 거물은 대부분의 시간을 국경에서 보내기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사람들은 조홍연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그녀를 초대할 정도로 명성 높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잘됐다, 잘됐어. 우리 일명이 드디어 살았네.”놀라움을 금치 못한 조군표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흥분했다.“홍연 전쟁 여제를 모
“넌 이제 끝장이야. 홍연 전쟁 여제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목숨이 백 개라도 무조건 죽을 거야.”“도망가려던 찰나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참 안타깝네.”“그래도 홍연 전쟁 여제의 손에 죽게 된 건 영광이 아니겠어요?”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유진우에게 쏠렸다.그중에는 연민과 동정도 있었지만, 더 많은 건 그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다.조홍연은 범표사의 사령관이고, 조일명은 범표사의 고급 장교다.그러니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조일명을 구하려고 이곳에 온 거라며 단정지었다. 비록 유진우도 대단한 건 맞지만 아직은 조홍연과 겸상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이를 설명한 이유 따윈 필요 없었다.왜냐하면 조홍연은 불패의 신화를 써 내려간 전쟁의 여제니까.“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한참 동안 멍해 있던 조유빈은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맞이했다.연경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달려가던 그녀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으니 당황하기 그지없었다.“조 장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하지? 무슨 일 있었어?”조홍연은 무뚝뚝하게 물었다.“연회 초대를 받고 이곳에 나왔는데 뜻밖에도 누군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상황이 복잡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절 협박했습니다... 덕분에 안정을 되찾은 건 맞지만,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결말이 얼마나 끔찍할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응? 누가 널 협박했다고?”조홍연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저 자식입니다.”조유빈은 씩씩거리며 손으로 유진우를 가리켰다.“뭐지?”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조홍연은 흠칫 놀랐고 도도한 눈빛에는 놀라움이 더해졌다.조홍연은 서울에 도착하고 직접 유진우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는데 이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서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던 그때 우연히 유진우를 만났다.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저 자식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절 죽이겠다며 협박했습
댕강!조일명의 머리는 공처럼 떨어지더니 바닥을 두 바퀴나 굴렀다.두 눈은 한껏 튀어나왔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남아있었다.아마도 조홍연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구세주가 한순간에 원수로 변했다.“뭐야?”갑작스러운 상황은 모두를 놀라게 했고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듯 아연실색했다.“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이지?”“범표사의 사령관이라면 당연히 조일명을 대신해서 나서야 하는 거잖아...”“내가 지금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조일명이 죽은 거야?”잇달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죽... 죽었어?”조군해는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죠? 도대체 왜 조일명 씨를 죽이는 거냐고요!”충격을 받은 조윤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아니... 말도 안 돼...”조군표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잘못 본 거라며 현실 부정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예상치 못한 일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 누구도 침착할 수 없었다.조홍연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유진우가 죽음 맞이할 거라고 확신했으나 그 확신과 달리 첫 번째 피해자는 조일명이 되었다.이 모든 과정에 조홍연은 이유도, 핑계도, 심지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칼 하나로 그를 죽이는 건 마치 닭이나 개를 도살하는 것만큼 간단하고 쉬웠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을 각오를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조일명을 죽였다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다.“지금... 무슨 일을 하신 거죠?”옆에 있던 조유빈은 겁을 먹은 채로 몸을 벌벌 떨었다.조일명의 머리가 마침 그의 발 옆으로 굴러떨어졌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그 모습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오싹했다.“쓰레기는 바로바로 처리해야지. 안 그래?”조홍연이 장검을 거두자 새빨간 피가 칼집에 꽂혔다.“쓰레기라뇨?”조유빈은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
“오늘 이곳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철저하게 조사해.”조홍연의 손짓에 범표사는 조씨 가문의 사람들을 일일이 포박했고 그 행동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소란 피운 사람은 유진우랑 강린파 아니었나? 왜 조씨 가문을 잡아가는 거야?”“가해자를 잡아야지, 왜 애꿎은 조씨 가문을...”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억울합니다. 저희는 정말 억울합니다.”잠시 넋을 잃었던 조군해는 처참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저희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조윤지는 겁에 잔뜩 질린 채로 불안에 떨며 물었다.“정말 억울합니다. 잡아서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저희가 아니라 저 자식이라고요!”잔뜩 당황한 조씨 가문은 하소연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고 갑작스럽게 닥친 재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조사해 보면 알겠지? 일단 전부 데려가.”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조홍연은 귀찮아하며 그들을 쫓아냈다.유진우를 건드리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가됐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며 다짐했던 조홍연이다. “억울하다, 억울해!”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조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잡혀갔다.선우 가문과 황보 가문을 비롯해서 연회에 참석한 모든 손님들이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감히 누구도 입을 열어 사정할 수가 없었다.자칫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조씨 가문과 함께 감옥살이하게 될 수도 있으니 강건한 조홍연의 태도 앞에서 그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조씨 가문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이 일과 관련 없는 사람은 전부 나가주세요.”조홍연의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자...”모두 주저하지 않고 와르르 흩어지며 자리를 피했다.신발이 떨어졌음에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했다.“X발, 저 자식은 왜
조유빈은 자신의 인식을 뛰어넘는 이 상황에 전혀 침착하지 못했다.조홍연과 유진우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두 사람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열여덟 살부터 전쟁터에 나간 조홍연은 결단력과 무자비한 살인으로 명성을 떨쳤다.감정 없는 사람처럼 누구를 만나던 큰 기복이 없던 그녀였기에 친구, 부하 직원을 비롯해 심지어 가족마저도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조홍연이 미소를 지을 뿐만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아주 환하게 웃고 있다.평소의 차갑고 도도한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상황인 만큼 조유빈은 그녀가 악령에 씌인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설마 유진우가 마법을 써서 조홍연을 홀렸나?“연경의 일은 이미 다 처리했어요. 희생양 몇 명을 죽였으니, 한동안은 잠잠할 거예요.”조홍연은 솔직하게 말했다.“그럼 됐어.”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밥은 먹었어?”“아니요.”조홍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일단 뭐 좀 먹으러 가자. 먹으면서 얘기하자.”“좋아요!”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유빈은 마음이 착잡했다.그는 종래로 볼 수 없었던 조홍연의 다정함에 충격을 받은듯했다.“공요.”조유빈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홍연의 부장을 붙잡았다.“왜?”공요는 눈살을 찌푸렸다.“저 사람 누군데 저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조유빈은 떠보듯이 물었다.“남 일에 참견하지 말고 앞가림이나 잘해.”공유는 그를 째려보고선 자리를 떴다.“유란?”그는 잔뜩 움츠러든 채로 다른 여부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으나 유란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시크하게 콧방귀를 뀌고는 그냥 가버렸다.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온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X발, 괜히 미움 사는 건 아니겠지?”...그 시각 선우 가문.“뭐라고? 조씨 가문 전체가 잡혀갔다고?”소식을 들은 선우희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
“조군해 쪽은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까 다른 길 알아봐야지.”선우희재는 생각에 잠기더니 신중하게 말했다.“꼭두각시 될만한 사람 몇 명을 더 찾아봐. 누군가는 조군해를 대신해서 일해야지. 명심해, 절대로 신분을 드러내서는 안돼.”“알겠습니다!”부하는 대답하고 곧장 자리를 떴다.“이번에는 실수가 없었으면 좋겠네.”선우희재는 눈을 감으며 혼자 중얼거렸다.직접 나서고 싶었지만, 조선미의 외할아버지 때문에 소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귀찮은 노인네 때문에 일이 복잡해진 건 사실이다....점심 무렵의 로즈 레스토랑.유진우와 조홍연은 창가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오빠를 귀찮게 했던 그 사람들은 제가 확 다 죽여버릴까요?”조홍연은 밥을 먹다가 진지한 말투로 불쑥 말을 꺼냈고 조유빈은 헛웃음이 나왔다.“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며칠 가둬놓고 고생만 시키면 돼.”조일명은 선을 넘었기에 죽는 게 마땅하지만 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 건 아니다.물론 그것보다는 조선미의 감정이 더 큰 이유를 차지했다. 어찌 됐든 그들은 조선미의 친척이니까.만약 다 죽여버리면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지낼까?“알겠어요. 그럼 목숨은 살려줄게요.”조홍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유진우만 좋다면 그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오빠, 며칠 있으면 생일이죠?”조홍연이 갑자기 물었다.“아마 그럴걸?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까먹을뻔했네.”유진우는 생일 따위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다. 밥 먹고 술 마시고, 가끔 케이크를 사 먹는 게 전부였다.“그럼 이번 생일은 어떻게 보낼 계획이에요?”호기심이 가득한 조홍연과 달리 유진우는 대수롭지 않았다.“아마 밥 한 끼에 생일 케이크 사 먹겠지?”“생일을 이렇게 간단하게 보낸다고요? 그건 절대 안 돼요!”조홍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이번 생일은 제가 준비할게요. 오빠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 거니까 기대해도 좋아요.”“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
“칠색 영지요?”그 말을 들은 유진우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목소리마저 높아졌다.“어디서요?”학수고대하던 끝에 마침내 행방을 찾았다.이제 이 영약만 손에 넣는다면 구전수명단을 만들 수 있다.“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남궁 가문에 있어요.”황성태는 재빨리 설명을 이어갔다.“이틀 뒤가 남궁을용 씨의 생신입니다. 누군가 선물로 칠색 영지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사장님의 능력에 달렸어요.”“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중에 두둑하게 보상금을 챙겨드릴게요.”유진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칠색 영지의 행방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그건 사양할게요.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하시죠? 저에게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사장님에게 연락할게요. 그걸로 갚으면 됩니다.”황성태는 웃으며 답했다.“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죠.”유진우의 망설임 없이 제안을 승낙했다.“역시 사장님은 시원시원하시네요. 그럼 행운을 빕니다.”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홍연아, 오빠가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먼저 판용산장으로 돌아가. 나중에 찾으러 갈게.”유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 제가 도와줄까요?”조홍연은 몹시 궁금했다.“괜찮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얼른 들어가. 말 들어야지?”유진우는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로즈 레스토랑에서 나온 그는 값비싼 선물을 준비한 뒤 곧장 남궁 가문으로 향했다.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의 남궁을용은 황보용명에 못지않은 베테랑 장군이었다. 그들은 제자가 만천하에 있는 덕망 높은 거물이자 고위층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다.10년 전부터 서로 교류가 있었던 터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유진우는 후배로서 줄곧 그를 찾아뵙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해왔고 마침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생신 축하를 건네는 동시
“장군님 뵈러 왔어요.”유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보이려고 애쓰네.”뒤에 있던 유연지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혼잣말하며 입을 삐죽거렸다.그녀는 지난번 반창고 사건 이후로 줄곧 유진우가 마음에 걸렸다.그날 총에 맞아 입원한 덕분에 우연히 폐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다행히 일찍 발견해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하여 유진우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할아버지 잠시 외출하셨어요. 금방 돌아오실 거니까 일단 들어가서 차 한잔하면서 얘기 나눌까요? 마침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남궁은설은 다짜고짜 그를 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은설아, 우리 승마 연습하기로 약속했잖아.”유연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띔했다.“아참,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어요.”남궁은설은 유진우를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며 물었다.“오빠, 뒷산 근처에 승마장 있는데 우리 그쪽에서 같이 놀까요? 할어버지 돌아오시면 제가 다시 이쪽으로 모셔다드릴게요. 어때요?”“좋아요.”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던 유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지금 바로 승마장으로 가요.”남궁은설은 빙그레 웃더니 일행을 이끌고 저택의 뒷산으로 향했다.“한솔아, 은설이가 저 남자한테 관심 있는 것 같으니까 긴장해.”유연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충고했다.“쳇. 아무런 힘도 없는 저 자식이 무슨 자격으로 은설이를 만나.”한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은설이가 호감 있다 한들 남궁 가문에서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야.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잖아. 저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밑바닥이야.”“그렇긴 해.”유연지도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우는 복싱과 발차기 실력이 뛰어나고, 의술도 어느 정도 익혔지만 아직은 부족했다.가장 총애받는 손녀인 남궁은설의 미래 남편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첫 번째는 훌륭한 가정형편, 두 번째는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
“맞아, 천우는 정말 훌륭한 아이지.”“흑용군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녔고 내 젊은 시절보다도 강해. 군사적 능력도 아주 뛰어나고.”“장수들이 늘 천우의 공적을 보고하곤 했어. 그 녀석의 성장을 지켜봐 왔고 이런 아들을 둔 게 난 자랑스러워.” 유만수가 흐뭇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쁨이 스며들었다.왕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아들을 이토록 신경 쓰고 있었다니.“의진아, 천우는 뛰어난 아이임이 분명해. 훌륭한 장군이 되어 서경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겠지. 하지만 서경왕은... 아직은 될 수 없어.” 유만수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자 이의진은 당황하며 의아해했다.“시간이 있었다면 천우를 왕으로 키웠겠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어.” 유만수가 고개를 저었다.“어르신...” 이의진이 말을 꺼내다 멈췄다.결과를 짐작했으나 입 밖으로 내기가 두려웠다.“장혁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유만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품이든, 무력이든, 책략이든, 군사적 재능이든, 장혁이가 최적임자야. 나보다도 더 적합하지.”“제가 알기로는 장혁이는 무림 세계를 좋아하고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요...” 이의진이 조심스레 말했다.“그렇지. 하지만 좋아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야. 그게 책임이지.”유만수가 엄숙하게 말했다. “대의를 위해, 서경 백성을 위해, 천하를 위해 그 녀석이 이 짐을 져주리라 믿어.”“어르신께서는 왜 장혁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시나요?”“물론 강요하진 않을 거야. 천우에게도 마찬가지고. 둘 다 내 아들이니 공정하게 경쟁하게 할 테지만 장혁이가 최선의 선택임을 네가 알았으면 해.” 유만수가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알겠어요.” 이의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기 싫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유장혁이 유천우보다 뛰어나고 서경왕에 더 적합했다.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어머니로서 아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그래서 이 왕위는 자신을 위
홍복홍이 대답하고 빠르게 떠났다. 도살자인 그는 서경이 태평해진 뒤로 오랫동안 살육을 하지 않았으나 오늘 안송진의 소행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서게 되었다. 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안씨 가문 전체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창명은 죽음으로 죄를 갚았으니 서민으로 강등하여 매장을 허락하라. 소씨 가문의 죄인들은 법대로 처리하되 무고한 이들은 살려주어라.” 유만수가 다시 명했다.석태혁이 소창명의 시신을 들고 떠나자 곧 대청에는 유만수와 이의진 둘만 남았다.“콜록콜록...”사람들이 떠나자 유만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순간, 그의 온몸이 휘청거렸다.“어르신! 괜찮으세요?”이의진이 놀라 급히 앞으로 나와 그를 부축했다.“괜찮아, 다 고질 병이야.”유만수는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으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피를 토하시다니... 당장 의원을 부를게요!”이의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하지만 떠나려는 그녀를 유만수가 붙잡았다. “놀랄 것 없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알아. 의원을 불러봤자 약이나 더 먹을 뿐, 소용없어.”“어르신...”이의진이 더 말하려 했으나 유만수가 끊었다. “됐다, 걱정 마. 당장 죽진 않을 테니 앉아서 나랑 얘기나 해.”이의진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의진아, 이 세월 너를 고생시켰구나. 연경에서 편히 살 수 있었는데 나를 따라 이 땅에 와서 매일 고생하니, 내가 참 미안해.”유만수가 부드럽게 말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은 세상의 영웅이시니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요.”이의진이 유만수의 손을 잡았다.“영웅은 무슨, 보시다시피 이제 늙은이일 뿐이지.”유만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아무리 변하셔도 제 마음속엔 여전히 비할 데 없는 분이세요!” 이의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유만수를 우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부탁해 혼인을 성사시켰다. 당시 유만수에게는 진소연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
이제 안송진은 이성을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유만수를 도와 서경을 질서정연하게 다스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서경의 오늘날 발전은 자신의 공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그저 직위를 이용해 재미를 좀 봤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권세가 있으면 마음껏 누려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면 관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게다가 천한 백성 몇 명의 목숨이 순무직인 자신과 비교가 되나? 예로부터 권세가들 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나?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고 오히려 유만수가 어리석다고만 생각했다.“안송진,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는가?”유만수가 고개를 저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 자식의 흉행을 눈감아주고 백성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겼으며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자네 행동이 예전의 살인강도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저도 공을 세웠습니다! 서경의 이 번영을 이룩한 것도 저고, 모든 백성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도 접니다. 하찮은 목숨 몇 개쯤 없앤 게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안송진이 분노에 차 외쳤다.“안송진, 자네 공은 인정하네. 하지만 공이 과를 덮지는 못하지. 지네가 세운 공적이 악행을 저지를 구실이 될 순 없고 목숨을 보장받을 방패도 될 수 없어!”유만수가 호통쳤다. “우리가 관직에 있는 건 백성을 위해서지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만약 모든 이가 자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서경은 조만간 멸망할 거야!”“안 대인,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대인께서 법을 크게 어기셨으니 순순히 죄를 인정하세요!”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안송진이 붉은 눈으로 계속 고함쳤다. 죽음 앞에서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인정하지 않아도 소용없어. 이제 증거가 명백하니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없을 거야.”유만수가 말하며 홍복홍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서경의 율법에 따르면 안송진의 죄
소창명과 안송진이 침묵했다. 두 사람은 죄책감에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권력과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있었다. 큰 권력을 쥐고 세상을 좌지우지할 때 그들은 본래의 뜻을 잊고 자신들이 한때 가장 혐오했던 모습으로 타락해버렸다.후회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어떤 일은 한번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니까.“소창명, 안송진, 이런 큰 죄를 지은 자네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유만수가 문득 물었다.“소인은 죄가 깊음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죽음으로 죄를 갚겠습니다. 다만 어르신께서 소씨 가문만은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소창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무고한 이들은 추궁하지 않겠다. 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자는 죽어 마땅해.” 유만수가 등을 돌렸다.“어르신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소창명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엎드려 공손히 세 번 절을 했다. “어르신을 모시게 된 것은 평생의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떳떳하게 살겠습니다!”“어르신께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소인은 이제 속죄하러 가겠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소창명은 친위병의 칼을 빼앗아 자신의 목을 그었다. 순식간에 대청에 피가 튀었고 소창명은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뒤로 쓰러졌다.“소 대인!”소창명이 이렇게 과감할 줄은 몰랐던 안송진은 깜짝 놀랐다. 자결을 말하자마자 실행에 옮기다니,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고 전장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당연히 죽음을 각오할 수 없었다. 소창명처럼 한마디에 자결하는 건 그로서는 정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배짱이 없었으니까.“꽤 체면 있게 갔군.”유만수는 한숨을 쉬며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옛 부하들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 또 한 명이 가니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안송진, 이제 자네 차례야.”유만수의 시선이 온몸을 떨고 있는 안송진에게로 향했다.“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안송진은 겁에 질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참수형에 처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송진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 순간에야 그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보통의 죄라면 기껏해야 연봉을 깎거나 꾸지람을 듣는 정도였을 것이고 조금 더 심해봐야 강등이나 권한 축소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순무직인 그를 어찌 이리 쉽게 처형한단 말인가?“어르신! 어르신, 억울하옵니다!”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안송진은 당황한 나머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비록 제가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까지 바쳐야 할 만큼 큰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흥!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 아닌가?” 유만수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어르신! 소인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안송진이 울상을 지었다.“이 여러 해 동안 자네가 저지른 추잡한 짓들, 설마 잊진 않았겠지?”유만수가 따져 물었다.“소인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송진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좋다! 그럼 알려주지!”유만수는 책상 위에서 편지 뭉치를 집어 들어 다시 안송진의 발치에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밀사들을 통해 수집한 증거야.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자네 가문이 도대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안송진이 편지들을 주워 읽어보더니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는 죄목이 하나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유만수가 이렇게나 많은 증거를 모아놓았던 것이다.이 확실한 증거들을 보며 안송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르신!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소인이 죽어 마땅합니다! 하오나 소인이 수년간 어르신을 충심으로 모셨던 정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안송진은 이제 더 이상의 고집 없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은덕을 베풀어 주소서!”소창명 역시 지지 않고 머
중앙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안송진은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서경왕 유만수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은 매우 불쾌해 보였다. 왕비는 한쪽에 서서 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인도살자 홍복홍은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친위대장 석태혁은 더욱 심각했는데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언제든 검을 뽑을 태세였다.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소창명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는데 큰 재앙이 닥친 듯한 모습이었다.“왕께 인사를 올립니다!”잠시 멈칫한 후, 안송진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보통 때라면 유만수가 일어나라고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안 가주, 내가 왜 한밤중에 자네를 불렀는지 아는가?”유만수는 똑같은 말로 운을 뗐다.“모르옵니다. 어르신께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안송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모른다면 직접 보게!” 유만수는 더 말하지 않고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골라 안송진의 발치에 던졌다.안송진이 자세히 보더니 순간 안색이 변했다.“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안송진은 편지를 들고 바로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마치 큰 억울함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르신, 이 고발장은 절대 위조된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고의로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부디 자세히 살피시옵소서!”이 말을 들은 옆에서 무릎 꿇고 있던 소창명의 눈가가 씰룩거렸다.‘이봐, 그 수법은 내가 이미 써봤는데 전혀 통하지 않아. 차라리 다른 말을 해보지 그래.’“위조라고? 모함이라고?”유만수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자네도 소창명과 마찬가지로 관 뚜껑이 닫혀야 정신을 차리겠군.”“어르신! 제 자식이 비록 쓸모없긴 하지만 절대로 이런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군다나 무슨 영웅회 같은 패거리를 만들 리도 없습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안송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