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의 사진, 사진마다 모두 한 소녀가 있었다.앞에 4장에는 소녀와 배인호가 함께 찍은 것이었다. 벚나무 아래에서, 사찰 앞에서, 흔들다리에서, 관람차에서 두 사람은 커플 옷을 입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뒤에 두 장은 슬픔이 가득 담겨있었다. 울면서 찍은 셀카는 손목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지막 한 장이 제일 두려웠는데 물에 빠진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온몸이 젖어 있었고 이끼가 붙어 있었다. 피부는 희게 물에 부어있었다.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이 여자는 누구예요?”“이 여자하고 닮은 사람 너도 본 적 있지?”어머님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서란은 사진에 여자와 똑 닮았다. 어머님은 사진을 넣으시며 한숨을 쉬셨다.“지영아, 이 여자는 민설아라고 해. 인호가 전에 좋아하던 여자애야.”“어머님,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랑 어떤 관계가 있죠?”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전부 알게 되었다. 나는 배인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모르는 비밀도 있었다.거의 졸업이 다가온 시기에 정아와 애들과 함께 나는 인턴을 했었다. 그 기간이 내가 유일하게 배인호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다. 다른 도시에서 매일 문자로 연락하려고 노력했었다.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배인호는 당시에 절대로 바꾸지 않던 프사를 핑크색 복숭아 캐릭터로 바꿨었다.나도 그것을 보고 배인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닌지 엄청나게 걱정했었다. 사실 당시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배인호는 그 사이 민설아를 만났고 처음으로 그에게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 여자였다.전에 그저 데리고 놀기만 하던 여자들과 다르게 배인호는 진지하게 민설아와 사귀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반대했다.마침 할아버님이 위중해지시면서 배인호가 빨리 결혼하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적당한 인물을 찾던 중 결국 내가 가장 적합한 결혼 상대였다.
내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모두 새해를 축복하는 메시지였다.이우범:「새해 복 많이 받아.」기선우:「누나, 새로운 한 해 더 예뻐지고 더 행복하길 바래요. 모든 고민 다 털어 버립시다!」박정환:「지영아, Happy new year.」이 기사:「사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차 가지고 퇴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차가 있어서 제때 병원에 모셔갈 수 있었어요.」먼저 이 기사한테 답장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출근 서두를 필요 없어. 나 신정 지나고 출국할 거야. 한 2년쯤 나가 있을 거야. 그때까지 아버지 잘 보살펴 드려. 그리고 와서 우리 아빠 운전기사 해줘도 돼. 급여는 똑같게 줄게.」곧이어 나는 네 명이 있는 채팅방을 클릭했다.정아는 바보처럼 채팅방에서 기프티콘을 보내고 있었고 민정은 불꽃 효과가 있는 이모티콘을, 세희만 총명하게 기프티콘을 수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박 사장님 대박」, 「민정이도 기프티콘 보내봐」를 보내고 있었다.나는 창밖의 불꽃을 영상으로 찍어 채팅방에 보냈다.「친구들, 새로운 한 해 새롭게 시작합시다.」정아, 민정, 세희는 다 서울시에 있었기에 바깥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불꽃 영상을 찍어 채팅방에 보냈다. 같이 불꽃을 본 셈이었다.내가 이번 설을 집에서 보낸다고 하자 정아가 기뻐하며 문자를 보내왔다.「완전 잘했어. 우리 지영이, 오구오구, 받아!」그러고는 채팅방에 120만 원을 이체했다.나도 별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았다.애들한테 곧 출국할 거라는 얘기도 했다. 애들은 많이 아쉬워했지만, 현재 배인호가 나와 이혼하려 하지 않는 걸 봐서 다들 내 결정에 동의했다. 곧이어 민정과 세희도 비싼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나에 대한 응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한참 톡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낸 새해 축복 메시지에 답장했다. 동시에 아버님 어머님께도 새해 문안 문자 한 통씩 올렸다.마음속에 피어올랐던 시부모님에 대한 호감과 친근함은 민설아에 관해 듣게
통화는 끝났지만, 나는 거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나는 몰래 밖으로 나갔고 단지 안에서 정처 없이 돌고 있었다. 단지 안은 설 연휴에 맞춰 새롭게 단장했고 몇몇 아이들은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는 불꽃놀이로 인한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고 설 분위기가 다분했다.어느샌가 단지 대문 앞까지 걸어갔고 갈데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처럼 떠돌아다녔다.순간 나의 시야에 배인호의 차가 들어왔다. 멀지 않은 십자가에 세워져 있었다.‘여기는 왜 온 거지? 나 찾으러 온 건가?’약간 불안해지는 나였다.이내 이 생각은 착각이 되었다. 조수석 문이 내리고 서란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배인호도 운전석에서 내렸고 둘은 길가에 서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다시 차로 돌아갔고 이내 그 차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발견한 순간 배인호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고 차를 에둘러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서란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몰라도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설 잘 보내고 있어요?”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응.”배인호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물었다.“설 연휴 지나고 언제 청담동으로 돌아올 거야?”배인호의 등 뒤로 서란이 차창을 내리고 불안한 눈길로 나와 배인호를 보고 있었다.이상했다. 서란은 아직 내가 설 연휴가 끝나고 출국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은 건가?하지만 이내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배인호는 갈팡질팡한 태도인데 나의 출국 소식을 알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서란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럴 바엔 내가 출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낫다고 서란은 생각할 것이다. 이미 출국한 마당에 어떻게 더 신경을 쓸까.나는 서란을 힐끔 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상황 봐서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서란이나 잘 챙겨요.”설을 맞이해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온 건가 싶었다.“란이는...”배인호가 무의식중에 서란을 돌아보았다. 서란과 눈이 마주치자, 배인호는 부자연스럽게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그는 집에 가서 설 연휴를 보내라며 하인들을 돌려보냈고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집에 사람도 없는데 남겨서 뭐 해?”배인호가 나를 소파에 내려주고는 몸을 숙였다. 신발을 벗겨 상처를 보려는 듯했다.나는 그가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는 게 적응되지 않아 발을 움츠렸다.“구급상자 가져다줘요. 이건 내가 할게요.”나의 말에 배인호가 담담하게 답했다.“네 몸 다 봤고 다 만져봤어. 고작 발목 좀 보는 게 뭐 어때서?”나는 어이가 없어서 몇 초 정도 멍해 있다가 반박했다.“누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냥 이렇게 잘해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왜 그렇게 생각해?”배인호가 머리를 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왜긴 왜겠어요?”내가 대답했다.“인호 씨 아까 서란 데려다주고 다시 나 찾으러 온 건데 너무 흘리고 다닌다는 생각 안 해요?”그는 어제까지 세종시에 있다가 빨라도 오늘 아침 서울시에 돌아왔을 것이다. 서울시로 오자마자 서란을 찾아다녔고 흑기사처럼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것이다.돌이켜보면 매년 설이 되면 내가 한참을 잔소리해서야 다시 서울시로 건너왔고 우리 집으로 설 인사를 하러 왔다.그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훤히 보였다.배인호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서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예요? 마땅한 곳 찾아서 숨겨 놓고 집에는 와이프 밖에서는 세컨드를 끼고 지낼 거예요? 아니면 서란이랑 정리하고 더는 연락 안 할 건가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배인호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아직 어떻게 할지 정리가 안된 상태다. 서란은 그에게 조금 다른 존재이고 나도 그에게 점점 다른 의미로 변해가고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됐어요. 당신이랑 말하다가 화병 도질 거 같아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절뚝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하지만 배인호는 나를 안아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아무
정아를 말릴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실없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그러다가 정아와 같이 티브이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고 어쩌다 보니 또 서란 얘기가 나왔다. 어제 보낸 금액 이체 캡쳐와 오늘 배인호가 데려다준 일까지 나는 다 털어놓았다.이를 들은 정아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배인호는 지금 양다리 걸치고 싶은 거지? 지영아, 내 말 좀 들어. 자중하지 않는 남자는 버려야 해!”“버리려고 준비하잖아.”내가 과자를 입에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설 연휴 끝나면 진짜 출국하려고?”정아가 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엉엉엉... 나 너 못 보낼 거 같아.”“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틈만 나면 다시 들어와서 너희들이랑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을 가져야지.”나는 정아의 머리를 잡고 매끈매끈한 이마에 뽀뽀를 했다.정아도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으면 내가 있는 쪽으로 오면 된다. 그리고 그 기회에 같이 여행도 할 수 있다.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다이닝룸에서 박정환이 우리를 불렀다.“정아야, 지영아. 밥 먹자!”정아가 대답하고는 절뚝거리는 나를 부축해 다이닝룸으로 향했다.박정환의 요리 실력은 아주 훌륭했다. 5종류의 반찬에 찌개까지, 때깔이 죽여줬다. 더 낯 뜨거운 건 죄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라는 거였다.그는 매너 있게 나와 정아에게 백반을 가져다주었고 찌개도 덜어주었다.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꽤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정아가 얍삽하게 나와 박정환을 엮으려고만 하지 않으면 박정환과도 꽤 얘기가 잘 통했다.하지만 정아는 역시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식사할 동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샌가 몰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박정환이 나한테 반찬을 집어주고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이었다.식사가 끝나고 인스타를 열어보지 않았으면 정아가 이런 요망한 짓을 한 줄 몰랐을 것이다.“박정아!!”젖 먹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왜?”정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와 정아는 병원을 나섰다.“나 집에 좀 데려다줘.”차에 탄 내가 정아에게 말했다.“집? 어느 집?”정아가 의아해서 물었다.“우리 집 안 가고?”저녁에 이우범과도 만나야 하는지라 정아네 집에 계속 있으면 불편했다.“수정 팰리스 그쪽으로 데려다줘. 가는 길 알지?”수정 팰리스는 지금 내가 혼자 쓰는 집이다. 대학 시절 정아랑 애들도 자주 와서 놀다 가곤 했다.박정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고 액셀을 밟아 수정 팰리스로 향했다.수정 팰리스에 도착하고 나는 정아의 부축하에 자리에 앉았다. 정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영아, 발목 상태가 이런데 진짜 혼자 괜찮겠어? 혼자서 몇 발짝 못 걷잖아...”“괜찮아. 발목이 이러니까 아무 데도 가기 싫어. 그냥 계속 누워만 있고 싶어. 나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길에서 운전 조심하고.”나는 정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정아가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정아가 가고 나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그러다 어느샌가 잠에 들었고 일어났을 땐 좀 으스스했다.악몽을 꿨다. 꿈에서 민설아의 시체가 내 앞에 놓여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민설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내 목을 조르려고 손을 뻗었다. 목소리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배인호 당신이 뺏어갔어!”꿈에서 깬 뒤에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악몽으로 인한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급하게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돌려 시끌시끌한 드라마를 찾았고 재잘대는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하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니 사색은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배인호와 결혼한 그날 그는 나에게 듣기도 거북한 말들을 가득 내뱉었다. 동침하긴 했지만 내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고 새벽 1시가 되자 집을 떠났다.그때는 그저 배인호가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어서 나에게 면박을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
배인호가 대답했다.“정아 클럽 갔다길래, 너 그 집에 없을 거 같아서.”정아는 정말 대단했다. 클럽이 두 번째 집이라는 호언장담에 어울리는 행보였다.“네. 알겠어요. 욕실에서 꺼내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도 돼요.”나는 샤워 가운을 한번 고쳐 입으며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배인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이 ‘날 돌려보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속옷도 팬티도 안 입은 상태다. 아까 배인호가 내 발목을 확인할 때 내가 단단히 여미지 않았으면 벌써 다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여기 앉아 있는데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없었다.“민설아에 관해서 엄마가 어디까지 말씀해 주셨어?”오히려 배인호가 먼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많지는 않아요. 그냥 그 여자랑 당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당신이 나랑 결혼한 사실에 화가 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렇게만 말씀해 주셨어요.”내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말투는 덤덤했다.민설아 얘기가 나오자, 배인호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민설아는 그의 금기어였다. 배인호가 이혼을 반대하지만 않았으면 어머님이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게끔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서란은 민설아와 많이 닮았어.”배인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첫사랑과 닮아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시나리오에 나는 카메오로 나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민설아와 많이 닮지 못한 게 내 죄라면 죄다. 아니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인호는 나와 사랑에 빠지고도 남았을 것이다.“어떻게 만났어요?”긴 침묵 끝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친구 소개로.”배인호의 대답은 꽤 가벼웠다.“만난 지 얼마 만에 사귀었어요?”내가 또 질문을 던졌다.배인호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민설아 얘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그 내용을 더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아 보였다.나는 그 마음을 읽어냈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녁에 이우범과 만나기로
이우범은 진짜 불쌍한 사람이다.전생에 배인호와의 서란 쟁탈전에서 실패했다고만 알고 있었지 그전에 이미 그 패배의 씨앗을 심어뒀을 줄은 몰랐다.원인은 당연히 민설아였다.민설아도 의대생이었고 이우범과는 친구 사이였다. 시작은 민설아가 이우범을 쫓아다녔지만 이우범은 그때 연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한 파티에서 민설아는 배인호를 알게 되었고 이우범을 자극하고 싶어서인지 배인호와 썸을 타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국 배인호와 사랑에 빠져 사귀게 된 것이었다.“우범 씨, 왜 그렇게 운이 없어요?”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그런가요?”이우범이 물었다.“없는 거죠!”나는 내 생각을 서슴없이 말했다.“우범 씨를 좋아하던 사람이 결국 인호 씨로 갈아타고 우범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또 인호 씨와 사귀는데 당연히 운이 없는 거죠!”말하고 나니 말이 빗나간 걸 느꼈다. 결국 서란도 배인호와 사귀게 될 거라는 걸 그에게 대놓고 말하다니,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다행히 이우범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랑싸움에서 항상 배인호가 한발 앞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사실 그때 우범 씨도 민설아 조금은 좋아했던 거죠? 마음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고 인호 씨한테 양보한 건가?”나는 논리적으로 분석했다.“네, 그렇다고 봐야죠.”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훗날 서란을 두고 둘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경쟁한 거구나.’마음속으로 드는 생각이었다.이 일의 자초지종이 머릿속에 정리가 되자 마음속에 남아있던 집념도 사라졌다. 며칠 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편히 출국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알겠어요.”나는 소고기 한 점을 샤부샤부에 던져 넣으며 가볍게 웃었다.전생에 이우범은 나에게 민설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민설아는 마음속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번 생은 왜 말해주는지 모르지만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