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와 정아는 병원을 나섰다.“나 집에 좀 데려다줘.”차에 탄 내가 정아에게 말했다.“집? 어느 집?”정아가 의아해서 물었다.“우리 집 안 가고?”저녁에 이우범과도 만나야 하는지라 정아네 집에 계속 있으면 불편했다.“수정 팰리스 그쪽으로 데려다줘. 가는 길 알지?”수정 팰리스는 지금 내가 혼자 쓰는 집이다. 대학 시절 정아랑 애들도 자주 와서 놀다 가곤 했다.박정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고 액셀을 밟아 수정 팰리스로 향했다.수정 팰리스에 도착하고 나는 정아의 부축하에 자리에 앉았다. 정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영아, 발목 상태가 이런데 진짜 혼자 괜찮겠어? 혼자서 몇 발짝 못 걷잖아...”“괜찮아. 발목이 이러니까 아무 데도 가기 싫어. 그냥 계속 누워만 있고 싶어. 나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길에서 운전 조심하고.”나는 정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정아가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정아가 가고 나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그러다 어느샌가 잠에 들었고 일어났을 땐 좀 으스스했다.악몽을 꿨다. 꿈에서 민설아의 시체가 내 앞에 놓여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민설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내 목을 조르려고 손을 뻗었다. 목소리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배인호 당신이 뺏어갔어!”꿈에서 깬 뒤에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악몽으로 인한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급하게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돌려 시끌시끌한 드라마를 찾았고 재잘대는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하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니 사색은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배인호와 결혼한 그날 그는 나에게 듣기도 거북한 말들을 가득 내뱉었다. 동침하긴 했지만 내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고 새벽 1시가 되자 집을 떠났다.그때는 그저 배인호가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어서 나에게 면박을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
배인호가 대답했다.“정아 클럽 갔다길래, 너 그 집에 없을 거 같아서.”정아는 정말 대단했다. 클럽이 두 번째 집이라는 호언장담에 어울리는 행보였다.“네. 알겠어요. 욕실에서 꺼내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도 돼요.”나는 샤워 가운을 한번 고쳐 입으며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배인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이 ‘날 돌려보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속옷도 팬티도 안 입은 상태다. 아까 배인호가 내 발목을 확인할 때 내가 단단히 여미지 않았으면 벌써 다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여기 앉아 있는데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없었다.“민설아에 관해서 엄마가 어디까지 말씀해 주셨어?”오히려 배인호가 먼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많지는 않아요. 그냥 그 여자랑 당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당신이 나랑 결혼한 사실에 화가 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렇게만 말씀해 주셨어요.”내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말투는 덤덤했다.민설아 얘기가 나오자, 배인호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민설아는 그의 금기어였다. 배인호가 이혼을 반대하지만 않았으면 어머님이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게끔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서란은 민설아와 많이 닮았어.”배인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첫사랑과 닮아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시나리오에 나는 카메오로 나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민설아와 많이 닮지 못한 게 내 죄라면 죄다. 아니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인호는 나와 사랑에 빠지고도 남았을 것이다.“어떻게 만났어요?”긴 침묵 끝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친구 소개로.”배인호의 대답은 꽤 가벼웠다.“만난 지 얼마 만에 사귀었어요?”내가 또 질문을 던졌다.배인호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민설아 얘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그 내용을 더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아 보였다.나는 그 마음을 읽어냈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녁에 이우범과 만나기로
이우범은 진짜 불쌍한 사람이다.전생에 배인호와의 서란 쟁탈전에서 실패했다고만 알고 있었지 그전에 이미 그 패배의 씨앗을 심어뒀을 줄은 몰랐다.원인은 당연히 민설아였다.민설아도 의대생이었고 이우범과는 친구 사이였다. 시작은 민설아가 이우범을 쫓아다녔지만 이우범은 그때 연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한 파티에서 민설아는 배인호를 알게 되었고 이우범을 자극하고 싶어서인지 배인호와 썸을 타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국 배인호와 사랑에 빠져 사귀게 된 것이었다.“우범 씨, 왜 그렇게 운이 없어요?”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그런가요?”이우범이 물었다.“없는 거죠!”나는 내 생각을 서슴없이 말했다.“우범 씨를 좋아하던 사람이 결국 인호 씨로 갈아타고 우범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또 인호 씨와 사귀는데 당연히 운이 없는 거죠!”말하고 나니 말이 빗나간 걸 느꼈다. 결국 서란도 배인호와 사귀게 될 거라는 걸 그에게 대놓고 말하다니,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다행히 이우범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랑싸움에서 항상 배인호가 한발 앞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사실 그때 우범 씨도 민설아 조금은 좋아했던 거죠? 마음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고 인호 씨한테 양보한 건가?”나는 논리적으로 분석했다.“네, 그렇다고 봐야죠.”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훗날 서란을 두고 둘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경쟁한 거구나.’마음속으로 드는 생각이었다.이 일의 자초지종이 머릿속에 정리가 되자 마음속에 남아있던 집념도 사라졌다. 며칠 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 편히 출국할 수 있을 것 같았다.“알겠어요.”나는 소고기 한 점을 샤부샤부에 던져 넣으며 가볍게 웃었다.전생에 이우범은 나에게 민설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민설아는 마음속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번 생은 왜 말해주는지 모르지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 바로 이튿날이라면 배인호가 내가 사는 아파트로 찾아온 날이다. 그날 전화를 받고 나간 게 이 소식을 들어서였나? 서란이 차 사고가 난 거면 확실히 급한 일은 맞았다. 그날 그렇게 급하게 나가고 며칠 동안 안 보인 이유가 여기 있었다.‘그럼, 이우범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근데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지?’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이우범을 너무도 당연하게 나의 정보통으로 생각한 것이다.나는 생각을 마치고 답장했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네.」정아가 ‘참 잘했어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내일 아침 회사로 출근 도장을 찍고 본격적으로 일에 들어가야 하니 더 이상 이런 일에 시간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황에서 나는 잠에 들었다. 알람 소리가 울려서야 나는 비몽사몽 잠에서 깼다.첫 출근인데 지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씻으러 갔다. 그러고는 허성재의 차를 타고 같이 회사로 향했다.내가 배정받은 부서는 프로모션 부서였다. 허성재의 말로는 자회사기도 하고 아직 스타트단계라 프로모션부서가 굉장히 중요한 부서라고 했다. 루트 확장과 프로모션 등의 업무를 책임지는 부서라 나의 성장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나는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직장 신입으로서 제일 중요한 건 착실하게 배우는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열심히 배우겠노라고 다짐했다.3일 뒤, 허성재가 회사 근처에 내가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이삿짐센터를 찾고 이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드디어 네가 적응할 수 있게 준비를 끝냈네. 아저씨가 하루에도 8통씩 전화해서 너 잘 보살피고 있는지 물어보셔, 무서워 죽는 줄.”“아이고, 우리 오빠 고생했네. 월급 타면 밥 살게.”내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그때 형수님이랑 별님이도 같이 데려와요. 한 명도 빠짐없이.”별님이
“나 전화 들어온다. 좋은 소식 들었으니까 오늘 저녁 잘 보내. 나 전화 받으러 간다.”정아가 속사포로 내뱉고는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사실 별로 좋아할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배인호가 지금 마음이 바뀌어 서란을 매정하게 버렸다거나 이우범이 서란을 성공적으로 뺏었거나 하면 진짜 기뻐서 웃을 수도 있다.심심해서 전화기를 좀 만지다가 잠에 들려 하는데 순간 울리는 벨 소리에 놀라 심장이 멎을 뻔했다.확인해 보니 배인호였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여보세요?”전화를 받았지만 목소리에 졸림과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왔다.“갑자기 왜 출국한 거야?”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배인호가 물었다.‘정아는 도대체 누구한테 흘렸길래 벌써 배인호 귀에 들어간 거지?’나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했다.“출국하고 싶으면 하는 거죠. 무슨 문제 있어요?”“나한테 얘기라도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직 우리 이혼 전이야!”배인호는 목소리는 거의 분노의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이혼 서류에 사인 안 해주니까 출국한 거예요. 전화해서 이런 얘기할 거면 서란이나 잘 보살펴 줘요. 손에 장애가 남았다니 잘 위로해줘야 하겠네요.”내 말투가 묘하게 사람의 속을 긁고 있었다.배인호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이혼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 이혼 서류 다시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내. 사인해 줄게.”그의 목소리는 이미 평정을 되찾았다.“진짜예요?”나는 멍해서 되물었다.“그래.”배인호가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전에도 이혼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이렇게 오래 끌었는데 이번에도 나를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뭐 시도는 언제든지 해볼 수 있으니까 괜찮다.이튿날 출근 전 나는 예전에 저장해 두었던 이혼 서류 포맷을 프린트해서 사인하고는 제일 빠른 우편으로 한국에 보냈다.그 뒤로 나는 조급하게 이혼 서류를 보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배인호는 다시 나를 찾지는 않았고 나도 서약서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배인호도 같이 온 거 같아.”내가 한마디 보충했다.정아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욕을 퍼부었다.“당연하지. 아니면 하필 그런 날에 왜 차로 뛰어들었겠어? 배인호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겠지. 지금 네가 배인호랑 이혼하니까 국내에 있으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봐 외국으로 유학 온 거지. 스펙도 쌓을 겸 구설수도 피할 겸.”“배인호가 같이 오다니, 참 그쪽도 찐사랑이다.”민정이 감탄을 내뱉었다.매일 회사 일이 바빠서 자리를 비울 수 없던 사람이 직접 서란과 같이 외국 유학 다 오고, 진짜 돈도 대줘 사랑도 내줘 모든 걸 서란에게 다 쏟아붓고 있었다.정아가 ‘퉤’ 하고 가짜 침을 뱉으며 말했다.“젠장, 서란은 골라도 하필이면 싱가포르야. 사람 보내서 너 뒷조사라도 한 거 아니야? 너 싱가포르에 온 거 알고 와서 엿 먹이려고?”진짜 그런지는 모르지만, 서란의 능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싱가포르가 크지는 않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까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할 만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배인호가 내 위치를 알아냈다면 한번 믿어보긴 하겠지만 이혼한 마당에 나를 조사할 이유가 없었다.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정아를 타일렀다.“화내지 마. 맛있는 거 먹어야지.”정아는 입으로는 대답했지만 별로 먹지 않았고 계속 전화를 붙들고 톡을 냅다 해댔다. 그러다 한참 후 씩씩거리며 말했다.“배인호가 서란한테 싱가포르로 유학 가라고 건의한 거 맞대!”“엥?”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정아의 말을 들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왜?”“그건 나야 모르지!”정아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었다.“서란은 맨 처음에 프랑스로 가고 싶어 했는데 배인호가 이쪽으로 가라고 해서 이쪽으로 온 거래. 배인호 일부러 너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배인호의 성격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방법으로 나를 역겹게 굴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서란은 그가 제일 사랑하는 사
정아와 민정이의 2일 여행은 일시적으로 연장됐다.나는 매일 출근하는 것 외에도, 어떻게 하면 정아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민정이와 식단을 연구했다.정아네 집도 자연스레 발칵 뒤집혔고,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는 전화가 잇달아 걸려 왔다. 그러나 노성민 쪽에서 답변을 받기 전까지, 정아는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나도 일단은 정아를 위해 입을 다물었고, 정아의 친오빠 박정환이 물어봐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나 갑자기 하이난 치킨 라이스가 너무 먹고 싶어.”정아는 갑자기 배를 만지며 말했다.주방에서 오리찜을 하고 있던 민정이가 나오며 물었다.“오리는 어때?”“오리보다는 하이난 치킨 라이스가 먹고 싶다.”정아는 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소파에 누워 꿈쩍하지 않았다.요즘 정아의 입덧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지라 그 입맛도 아주 까다로워졌다.가끔은 아예 음식에 입도 못 대다가, 또 가끔은 걸신들린 것처럼 많이 먹어 재꼈다.나는 차 키를 들며 말했다.“기다려, 내가 가서 사 올게.”“역시, 우리 지영이가 최고야!”정아의 눈은 삽시간에 반짝였다.밖에는 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 갔던 곳이 가장 정통 식당이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그 식당을 향해 갔다. 저녁 시간이라 식당에는 사람이 많이 붐볐다. 나는 하이난 치킨 라이스와 다른 요리도 주문 후 포장해달라 하고 문 근처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배인호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까지도 나는 머리를 숙인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그는 화이트에 그레이 색상의 정장에, 안에는 블랙 스웨터를 입었다. 수작업으로 만든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았고, 완벽한 핏과 뛰어난 비율로 신사적이고 고상한 느낌을 줬다. 게다가 짧은 까만 머리와 일부 머리카락은 눈 사이에 늘어져 있었고,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와 얼굴형까지 합쳐져 더할 나위 없이 멋있었다.그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식당 안의 몇몇
정아는 포장 2인분을 들고 베란다로 가서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갑자기 하늘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나와 민정이도 뒤쫓아가 머리를 들어 보니, 밤하늘에는 수많은 드론이 있었고, 매 드론에는 새빨간 장미가 걸려있었다. 그 위에는 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하트모양으로 진열돼 있었다.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내밀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나는 3층에 살고 있었고, 베란다 아래로 내려가면 동네 정원을 볼 수 있다. 나는 정아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저거 노성민 아냐?”정아는 고개를 쭉 뻗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역시나 노성민이 정장을 차려입고, 큰 꽃다발을 들고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박정아, 나랑 결혼해 줘!”노성민은 거짓 없이 정아를 바라보며, 바닥에 무릎을 꿇어 보였다.멀지 않은 곳에 배인호, 이우범, 박준의 그림자가 파란 나무 그늘에 희미하게 가려져 있었다.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한 명이 프러포즈한다고 다들 달려왔네.정아는 요 며칠간 혹시라도 노성민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할까 봐 마음 졸이며 기다렸었다.예상외로 노성민이 남자답게 프러포즈하러 비행기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정아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이며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고, 나와 민정이도 얼른 뒤따라 내려갔다.“박정아, 급하게 프러포즈하러 와서 미안하다. 나 이곳은 잘 몰라서 거창한 프러포즈는 해줄 수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프러포즈만 받아준다면 한국 돌아가서 꼭 근사한 결혼식으로 보답해 줄게!”노성민은 무릎을 꿇고, 진지하고 솔직담백하게 말했다.나는 정아가 노성민을 곤란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웃어 보이며 반지를 빼앗아 스스로 손에 끼는 것이었다. “이거 몇 캐럿이야?”그녀는 손가락의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물었다.“9캐럿, 우리 둘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며 산 거야!”노성민은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그래, 너희 집에서는 뭐래?”정아가 이어서 물었다.노성민은 자신 있게 답했다.“걱정하지 마, 우리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