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와 민정이의 2일 여행은 일시적으로 연장됐다.나는 매일 출근하는 것 외에도, 어떻게 하면 정아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민정이와 식단을 연구했다.정아네 집도 자연스레 발칵 뒤집혔고,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는 전화가 잇달아 걸려 왔다. 그러나 노성민 쪽에서 답변을 받기 전까지, 정아는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나도 일단은 정아를 위해 입을 다물었고, 정아의 친오빠 박정환이 물어봐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나 갑자기 하이난 치킨 라이스가 너무 먹고 싶어.”정아는 갑자기 배를 만지며 말했다.주방에서 오리찜을 하고 있던 민정이가 나오며 물었다.“오리는 어때?”“오리보다는 하이난 치킨 라이스가 먹고 싶다.”정아는 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소파에 누워 꿈쩍하지 않았다.요즘 정아의 입덧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지라 그 입맛도 아주 까다로워졌다.가끔은 아예 음식에 입도 못 대다가, 또 가끔은 걸신들린 것처럼 많이 먹어 재꼈다.나는 차 키를 들며 말했다.“기다려, 내가 가서 사 올게.”“역시, 우리 지영이가 최고야!”정아의 눈은 삽시간에 반짝였다.밖에는 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 갔던 곳이 가장 정통 식당이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그 식당을 향해 갔다. 저녁 시간이라 식당에는 사람이 많이 붐볐다. 나는 하이난 치킨 라이스와 다른 요리도 주문 후 포장해달라 하고 문 근처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배인호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까지도 나는 머리를 숙인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그는 화이트에 그레이 색상의 정장에, 안에는 블랙 스웨터를 입었다. 수작업으로 만든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았고, 완벽한 핏과 뛰어난 비율로 신사적이고 고상한 느낌을 줬다. 게다가 짧은 까만 머리와 일부 머리카락은 눈 사이에 늘어져 있었고,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와 얼굴형까지 합쳐져 더할 나위 없이 멋있었다.그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식당 안의 몇몇
정아는 포장 2인분을 들고 베란다로 가서 욕설을 퍼부으려던 찰나, 갑자기 하늘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나와 민정이도 뒤쫓아가 머리를 들어 보니, 밤하늘에는 수많은 드론이 있었고, 매 드론에는 새빨간 장미가 걸려있었다. 그 위에는 불빛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하트모양으로 진열돼 있었다. 인근 건물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내밀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나는 3층에 살고 있었고, 베란다 아래로 내려가면 동네 정원을 볼 수 있다. 나는 정아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저거 노성민 아냐?”정아는 고개를 쭉 뻗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역시나 노성민이 정장을 차려입고, 큰 꽃다발을 들고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박정아, 나랑 결혼해 줘!”노성민은 거짓 없이 정아를 바라보며, 바닥에 무릎을 꿇어 보였다.멀지 않은 곳에 배인호, 이우범, 박준의 그림자가 파란 나무 그늘에 희미하게 가려져 있었다.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한 명이 프러포즈한다고 다들 달려왔네.정아는 요 며칠간 혹시라도 노성민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할까 봐 마음 졸이며 기다렸었다.예상외로 노성민이 남자답게 프러포즈하러 비행기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정아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이며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고, 나와 민정이도 얼른 뒤따라 내려갔다.“박정아, 급하게 프러포즈하러 와서 미안하다. 나 이곳은 잘 몰라서 거창한 프러포즈는 해줄 수 없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프러포즈만 받아준다면 한국 돌아가서 꼭 근사한 결혼식으로 보답해 줄게!”노성민은 무릎을 꿇고, 진지하고 솔직담백하게 말했다.나는 정아가 노성민을 곤란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웃어 보이며 반지를 빼앗아 스스로 손에 끼는 것이었다. “이거 몇 캐럿이야?”그녀는 손가락의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물었다.“9캐럿, 우리 둘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며 산 거야!”노성민은 바보처럼 웃으며 말했다.“그래, 너희 집에서는 뭐래?”정아가 이어서 물었다.노성민은 자신 있게 답했다.“걱정하지 마, 우리 엄마,
배인호가 나간 후 이우범과 다른 사람들은 나를 한 번씩 힐끗 쳐다봤다.만약 조금 전 전화 온 상대가 서란이라면, 잠시 후 이 전처와 현처가 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는 광경일 것이다.정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됐어, 나 안 먹어!!”“왜 그래, 난 괜찮아.”나는 정아의 불안정한 정서가 태아의 발달에 영향을 끼칠까 봐 두려웠다.노성민은 얼른 정아의 배를 어루만졌다.“아기야 겁내지 마, 너희 엄마는 너한테 화난 게 아니란다!”정아는 손바닥으로 노성민의 이마를 냅다 때리며 말했다.“너와 배인호가 친구란 것만 생각하면, 너랑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싹 사라져!”노성민은 억울하단 듯이 이마를 감싸며 아무 말도 못 했다.“정아야, 너 지금 임신 상태라 너무 화내고 그러지 마.”나는 정아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줬다.분위기가 무거워진 상태에서 룸 문이 열렸다. 배인호는 한 남자와 웃으며 들어왔고, 둘 사이는 꽤 친해 보였다.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우지훈?”이우범이 그 남자를 알아보고는 반가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우범아, 오랜만이다!”우지훈의 나이는 배인호와 비슷해 보였고, 외모나 스타일은 점잖은 편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우범과 인사를 나눴다.인사를 나누면서 배인호와 우지훈은 다시 착석했다.나는 배인호가 서란이를 데리러 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남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우지훈은 바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아 그를 자꾸 힐끔거렸다. 그러다 어렴풋이 어디선가 본 것 같았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전에 배인호의 앨범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배인호의 앨범에는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그의 중요한 추억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은 그와 이우범, 그리고 나이가 비슷한 남자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그것은 고등학교 졸업 때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고, 사진에 있는 한 소년의 얼굴은 지금 눈앞의 우지훈과 아주
나는 얼른 화장실 문을 열었고, 정아는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배탈 났어?”“응, 저녁에 너무 많이 먹었나 봐.”나는 잠옷을 여미며 말했다.“얼른 화장실 써, 난 들어가 자야겠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나는 방으로 돌아가 잠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나는 불을 끄지 않은 채, 눈은 창문 유리를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다.이젠 어떡하지?만약 임신한 사실을 배인호한테 알려주면 우리 둘 사이는 더욱더 얽힐 것이며, 특히 그의 부모님은 손주를 일찍 보고 싶어 했기에 분명히 날 찾아올 것이다.그렇다고 배인호한테 안 알려주면 애는 어떻게 해야지? 나 혼자서 낳고 홀로 키워야 할지 아니면 병원에 가서…나는 모성애가 이렇게 빨리 생길 수 있다는 걸 인제야 깨달았고,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엄마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병원에 가서 아기를 지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여러 가지 헛된 생각 속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나는 다음 날 출근 때문에 정아와 민정이를 배웅할 수 없었고, 그들을 깨우지도 않았다.회사에 출근 후 나는 민정이의 메시지를 받았다.「지영아, 우리 지금 떠나. 정아 결혼식 날짜 잡히면 꼭 와서 참석해!」나는 바로 답장했다.「당연하지, 조심히 가.」정아와 민정이가 떠난다고 하니 나는 왠지 슬펐다. 비록 큰아버지네 가족과 같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기쁘진 않았고, 심지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나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 아예 화장실에 달려갔다.화장실에서 한창 울고 있을 찰나, 배인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받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계속 전화를 걸었고, 5번째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나는 울지 않은 척 전화를 받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나 한국에 돌아가.”배인호가 입을 열었다.“네.”나는 운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짧게 답했다.“잘 있어.”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간결하게 인사 한마디 건넸다.나는 잽싸게 전화를 끊고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배인호는 나
위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토하고 있을 때, 한 손이 갑자기 내 등에 떨어지더니, 내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나는 괴로움을 참으며 고개를 돌려 봤더니, 배인호는 진지한 얼굴로 약간의 걱정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병원에 데려다줄게.”“괜찮아요, 위병이 있어서 이제 위장약 사 먹으면 돼요.”나는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병원에 가면 내가 임신한 사실을 들킬 뿐만 아니라, 배인호가 알면 더 큰 일이다.내가 싱가포르에 있을 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더니 현재 임신한 지 거의 2달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다만 내가 여러 약을 먹었기 때문에, 현재 태아가 영향을 받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나는 아이를 지울 자신이 없어 계속 미뤄왔었다.“위병이 있으면 더욱 병원에 가서 전면적인 검사를 받고, 약물과 배합해서 치료해야지.”배인호는 내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며 내 팔을 잡았다.“병원에 이미 가서 검사받았으니까, 다시 갈 필요 없어요!”나는 그의 손을 떼며 지친 듯이 답했다.“이 방에 쉬고 싶어서 들어온 거니까 저 좀 잘게요.”여기는 레스트룸인 듯했으며, 크지 않은 침대 소파가 놓여있었다. 나는 거기로 걸어가서 누웠고, 눈꺼풀도 따라서 감기며 눈 뜨기도 귀찮았다.임신 때문인지 너무 졸렸고, 배인호가 옆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 쓸 힘이 없어 금방 깊은 잠에 빠졌다.얼마나 잤는진 모르겠지만 깨어나 보니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방안에는 어슴푸레한 불이 켜져 있었다.“일어났어?”배인호는 예상외로 아직 가지 않았고, 의자에 앉아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몇 시예요? 결혼식 이미 끝났죠?”나는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고 나니 아차 싶었다. 다들 날 찾았을 텐데?배인호는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저녁 9시 반.”나는 일어나 앉았고, 조금은 멍했다. 내가 오후부터 저녁까지 잤다고?!배인호는 이어서 말했다.“박정아와 몇몇이 널 찾아왔어. 그래서 내가 이따가 너 데려다준다고 하고, 너 친구들 먼저
길거리 음식을 한참을 먹고 난 후에야 마침내 배가 불렀다. “안 바쁘면 나 호텔까지 데려다줘요.”나는 배가 부르고 나니 차를 잡으러 가기 귀찮았다.배인호도 때마침 아직 가지 않았으니, 나는 뻔뻔하게 그에게 말했다.배인호는 말없이 차 쪽을 향해 걸어갔고, 나도 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 엄마 최근에 너한테 연락한 적 있어?”차로 가는 도중, 배인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우리 이젠 이혼도 했으니 다시 연락해 오진 않을 것 같은데요.”나는 창밖의 풍경에 몰두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했다.하지만 나는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노려봤다.“혹시 나한테 보내준 이혼 증명서 가짜는 아니죠?!”그는 원래부터 이혼하려 하지 않았고, 거기에 부모님의 반대까지 더해져 이런 수단으로 내 입과 가족의 입을 막았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배인호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비웃었다.“내가 안 놓아줄까 봐 그렇게나 걱정돼?”“내가 다음 남편 찾는 걸 지체시키잖아요!”나는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는 대로 답했다.차는 급정거하여 길가에 멈췄고, 내 몸은 관성 때문에 심하게 흔들렸다.배인호는 욱하는 성질이 올라온 듯 무섭게 나한테 명령했다. “내려, 너 혼자서 가!”때마침 호텔과 거리가 멀지 않았고, 나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주저 없이 차에서 내렸다. 임신 기간이라 운동도 조금씩 해야 하는데, 배인호 고-맙네!호텔에 도착 후 나는 샤워를 하면서 한가지 결심을 내렸다. 애를 낳고 나 혼자서 키우기로 말이다.배인호 같은 성격의 아버지라면 분명히 내 아이한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나는 내 첫 번째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부성애가 부족하긴 하지만 아이한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고, 빠르게 옅은 화장 후 옷을 갈아입고 Linda와 같이 부산으로 향했다. 그녀가 운전하고, 나는 그 옆 조수석에 앉았다.운전으로 부산까지 가려면 8시
Linda는 나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니에요. 그냥 인연이란 게 있는 것 같아서요. 예전에 나도 그와 아는 사이였지만 친하진 않았어요.”나는 더는 깊게 묻지 않고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게요. 세상은 크다면 크고 좁다면 좁은 것 같아요. 인연만 닿으면 언젠간 꼭 만나게 되니까요.”Linda는 말없이 앉아있더니, 몸을 일으키며 샤워하러 들어갔다.나는 침대에 누워 전화로 이우범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허성재한테 연락했고 오늘 논의했던 문제들을 그한테 전달했다. 한참을 이야기 후, 뒤에는 대략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내가 거의 잠이 들려 할 때쯤 Linda도 샤워를 마치고 나왔고, 소리 없이 내 옆 침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이튿날 아침, 나는 배고픔과 함께 깨어났다.호텔에는 조식 서비스도 있었고, 나는 빠르게 일어나 2층 식당에 조식 먹으러 갔다.거기에는 예상외로 이우범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약간의 흰 수염을 가진 5, 60세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고, 아마 병원의 교수님인 듯했다.이우범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그 시선은 쭉 나를 따라왔다.내 테이블 위에는 계란 네 개와 우유 한 잔, 사오마이, 그리고 샌드위치 두 개와 차시우바오 하나, 마지막으로 죽까지 놓여있었다.그는 역시나 깜짝 놀란 듯했고, 교수님과 한마디 하고는 내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이렇게나 많이 먹어요?”이우범은 내 테이블 위의 조식들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다 맛보고 싶어서요.”나는 계란을 까며 말했다. 이젠 임신 2달째가 되어가니, 배고픔의 정도는 마치 2달은 굶은 사람처럼 배가 고팠다.이우범은 계란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주었고, 곧 내 죽에 계란 두 개가 들어가 있었다.나는 계란과 죽을 먹으며, 가끔 사오마이도 한입씩 먹으면서도 속으로는 맵고 짠 음식이 당겼다. 하여 점심에는 어떤 걸 먹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었다.“그때 봤
젊은 여자는 좀 달갑지 않은듯했다.“엄마, 그 사람 이혼도 했는데 내가 좋아하지도 못해?”“진짜 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알아? 그 사람이 외부에 이혼했다고 발표한 적 있어? 본인이 직접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해!”“흥, 언젠간 꼭 공개하게 될 거야.”한참 후, 그 두 모녀의 발걸음 소리는 사라졌고, 나는 칸막이 화장실에서 나왔다.그 루루라는 여자는 유 삼촌의 딸 유이루였다.식사 시간 전, 나는 유 삼촌이 소개해 줘서 그녀를 한번 본 적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꾸만 배인호를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태도도 괜찮았고,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띠며 말했다.나는 손을 씻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하객들은 속속히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유 삼촌한테 인사하고 가려 했는데,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었다.“지영 언니!”이때 갑자기 유이루가 등장했다. 그녀는 25, 26살쯤의 나이로, 옷은 성숙하고 화려한 스타일로 입었지만, 자세히 보면 어린 게 티가 났다.“이루야.”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엇, 배인호 대표님은요? 왜 언니랑 같이 안 있어요?”유이루는 선물상자를 나에게 건네줬고, 들기에는 다소 무거웠다.그녀가 말했다.“이건 답례품이에요 언니.”“고마워.”나는 선물상자를 받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했다.“그나저나 인호 씨가 어디 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 네가 한번 찾아봐. 그리고 유 삼촌한테 나 대신 고맙다고 꼭 전해주고. 나 일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네, 그래요.”유이루는 고개를 끄떡였다.나는 선물상자를 들고 그랜드 호텔을 나와 차를 잡으려 했다.이때 서울 번호판인 까만색 벤틀리 아르나지가 내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반쯤 열리더니, 배인호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데려다줄게.”“그래요.”나는 얼른 답했고, 바로 조수석에 탔다.논리적으로는 배인호와 거리를 두는 게 맞지만, 내가 임신한 아이가 이 사람 아이이고, 앞으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