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는 좀 달갑지 않은듯했다.“엄마, 그 사람 이혼도 했는데 내가 좋아하지도 못해?”“진짜 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알아? 그 사람이 외부에 이혼했다고 발표한 적 있어? 본인이 직접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해!”“흥, 언젠간 꼭 공개하게 될 거야.”한참 후, 그 두 모녀의 발걸음 소리는 사라졌고, 나는 칸막이 화장실에서 나왔다.그 루루라는 여자는 유 삼촌의 딸 유이루였다.식사 시간 전, 나는 유 삼촌이 소개해 줘서 그녀를 한번 본 적 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꾸만 배인호를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태도도 괜찮았고,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띠며 말했다.나는 손을 씻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하객들은 속속히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유 삼촌한테 인사하고 가려 했는데,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었다.“지영 언니!”이때 갑자기 유이루가 등장했다. 그녀는 25, 26살쯤의 나이로, 옷은 성숙하고 화려한 스타일로 입었지만, 자세히 보면 어린 게 티가 났다.“이루야.”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엇, 배인호 대표님은요? 왜 언니랑 같이 안 있어요?”유이루는 선물상자를 나에게 건네줬고, 들기에는 다소 무거웠다.그녀가 말했다.“이건 답례품이에요 언니.”“고마워.”나는 선물상자를 받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했다.“그나저나 인호 씨가 어디 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 네가 한번 찾아봐. 그리고 유 삼촌한테 나 대신 고맙다고 꼭 전해주고. 나 일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네, 그래요.”유이루는 고개를 끄떡였다.나는 선물상자를 들고 그랜드 호텔을 나와 차를 잡으려 했다.이때 서울 번호판인 까만색 벤틀리 아르나지가 내 앞에 멈춰 섰다.창문이 반쯤 열리더니, 배인호가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데려다줄게.”“그래요.”나는 얼른 답했고, 바로 조수석에 탔다.논리적으로는 배인호와 거리를 두는 게 맞지만, 내가 임신한 아이가 이 사람 아이이고, 앞으
“네, 동의하지 않았어요.”나는 나 자신은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민예솔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남은 기간도 별로 대화가 없었다. 업무적인 대화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거의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다행히 그녀는 공과 사는 분명했고, 업무적으로는 아주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계약도 성공적으로 체결된 후, 우리는 싱가포르로 돌아갔다.허성재는 나와 민예솔을 칭찬하며 아주 기뻐했다. 그 뒤로도 민예솔과 계속하여 동료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그러나 뚜렷한 충돌이 있기 전까지 나는 주동적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지영씨, 마케팅팀에 이 문서 좀 전달해 줘요. 요즘 회사에서 온라인 마케팅 준비하고 있거든요. 출장 가서 체결한 채널도 이거랑 관련된 거니까 마케팅팀과 콘택트 좀 해줘요. 국내랑 해외 모두 동시에 진행되어야 해요.”허성재는 나에게 문서를 건네줬다.나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문서를 전달하러 마케팅 부서에 갔다.마케팅 부서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정교한 메이크업을 한 예쁜 어린 여자 몇 명을 보았다. 마케팅팀 동료에게 물어보니, 이 여자애들은 마케팅 부서에서 모집한 온라인 비제이라고 하였다.회사는 주로 색조 화장품 생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자체 브랜드뿐만 아니라 자체 판매 채널도 있다. 싱가포르에 이미 거의 100개의 전문 매장이 있고, 허성재는 온라인에서도 잘 발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이 또한 지사의 주요 목표이기도 하다.나는 서류를 마케팅팀 매니저에게 건네주고 떠나려던 찰나 뜻밖에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서란은 샤넬풍 트위드 재킷을 입었고, 기존에 까맣던 긴 생머리는 큰 물결펌을 해 여성스러움을 더했다. 얼굴에 메이크업은 다른 여자애들보다 훨씬 옅었지만 그래도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수려해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그녀도 날 보고 놀란 듯했다.“지영 언니.”서란은 다가오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여기서 뭐 해?”나는 이 정도면 진짜 나를 뒷조사라도 하느라 접근하는
나는 정아의 이런 작전에 매우 난감했다. 박정환은 내가 누구랑 어떤 내용으로 문자 하고 있는지 아는 듯했고, 내 마음을 이해해 주면서 말했다.“지영아, 너무 난감해할 필요 없어. 나 여기 친구들 많아, 아니면 호텔에 묵어도 되고. 정아 말 듣지 마.”박정환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오히려 더욱더 어찌할 줄 몰랐다.“아니야 오빠, 며칠뿐인데 뭐! 우리 집에 방도 2개라서 괜찮아요.”나는 쿨하게 답했다.“그럼… 신세 좀 질게. 아마 3일 이내에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박정환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고작 3일뿐인데 뭐, 정아의 오빠면 내 오빠이기도 하지.이튿날 아침 일어나보니, 주방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주방에 가보니 박정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일어났어? 얼른 아침 먹고 출근해.”박정환은 나를 보더니 앞치마를 벗었고, 계란국수 두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 위에는 표고버섯과 고기 부스러기가 토핑되어 있었다. 나는 평소 출근하는 길에 아침을 사서 먹곤 했는데, 오늘은 박정환이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 덕분에 집에서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감사합니다!”나는 젓가락으로 빠르게 국수 한 그릇을 다 먹어버렸다.아침을 먹고 난 뒤, 나는 빠르게 회사로 향했다.오늘도 또 서란이를 문 앞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전동 스쿠터에서 내렸고,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그녀를 지나갔다.점심 휴식 시간이 다 되어 우리 부서 문 앞에 갑자기 서란이 나타났고 몇몇 남자 동료들은 그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지영 언니!”서란은 밝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손에는 예쁜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나와 민예솔의 자리는 가까이 붙어 있었으며, 그녀는 소리를 듣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설아?”서란은 민예솔이 누군지 몰랐고, 오직 나를 향해 걸어왔다.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뭔 일이야?”“언니, 인호 씨한테서 요즘 언니 위장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든
나는 배인호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애인이나 신경 써요. 이렇게 날 따라오면 서란이 울 수도 있어요."배인호는 서란의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돌아가지는 않았다.이를 본 박정환은 나를 뒤로 끌어당기며 차갑게 경고했다. “배인호 씨 분명히 하세요. 당신과 지영 씨는 이혼했고 당신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 당신이 지영 씨에게 질문할 자격이 있습니까? 지영 씨가 누구와 함께 있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내가 상관하겠다는데 당신이 나한테 뭘 어쩔 건데?" 배인호의 말에는 이미 도발적인 기미가 담겨 있었다.설날에 두 사람이 다투는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상처를 입은 건 나였다. 다시는 그런 억울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인호 씨, 정환 오빠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더 이상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끝내요.”나는 말을 마치고 박정환을 끌어당겼다. 박정환의 차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의 차에서 점심을 먹은 후 나는 만족스럽게 배를 문질렀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박정환에게 감사했고 그는 적어도 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처인 나로서는 정말 당황스러웠다.“하하, 괜찮아서 다행이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데.”박정환은 다 먹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 다정하게 말했다.“일하러 가기 전에 잠시 차에서 쉬어.”조수석을 최대한 눕혀놓고 알람 시계를 맞춘 뒤 누워서 쉬었다.“저도 차에서 쉬고 싶네요.”“그래. 좀 쉬어.”박정환이 대답했다.임신한 덕분에 잠이 너무 빨리 왔다. 앞으로 잘 먹고 잘 자는 튼튼한 아들을 낳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30 분 후 알람 시계가 울려 멍하니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보니 박정환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나는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고 내려 문을 닫았다.빨간색 BMW가 옆을 지나쳤다. 나는 서란이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배인호가 저 여자를 매우
배인호와 내가 대치 상태에 빠졌을 때 계단 위에 한사람이 나타났는데 박정환이었다. 박정환은 나와 배인호를 보고 재빨리 달려와 배인호의 얼굴을 때렸다.“개자식!” 박정환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바닥에 널브러진 과일들과 헝클어진 내 머리를 보면 누구라도 불미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배인호는 뜻밖에 반격하지 않았고 땅에 쓰러진 후 피가 나는 입술 끝을 만졌다가 다시 일어났다.그는 심지어 박정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 대신 때린 거로 생각하고 난 반격하지 않을 거야.”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예전에 네가 나한테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깊어져 간다는 말 이제 조금 알 것 같아.”배인호의 짧은 머리도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한쪽 눈을 덮고 있어 어떤 감정인지 보이지 않았다.“당신 무슨 개소리야?”박정환도 화를 내며 욕했다.“그런 헛소리 같은 말은 아껴뒀다가 어린 애인한테나 해, 알겠어? 남자로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배인호는 박정환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넌 왜 여기에 있어?”“너 이 사람 집에서 사는 거야?”배인호는 조금 더 위험한 눈빛으로 다시 나를 가리켰다. 박정환이 말했다.“그래, 왜? 네가...”나는 박정환이 나를 대신해 배인호를 기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남자이니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모를까?하지만 나는 박정환을 말렸다.“며칠간 머물 예정이에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요. 국내 회사도 바빠서 시간도 없을 텐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그러고는 박정환을 데리고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가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지영아, 저 사람을 놓지 못한 거야?”박정환은 약간 실망한 눈으로 자리에 앉았다.“이건 놓고 안 놓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과 나는 이미 이혼했어요. 이런 갈등이 다시 일어날 필요도 없고요. 그 사람이건 오빠건 다치면 다 내 책임이에요.” 나는 아픈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배인호가 점점 더 화를 내면 상황은
허생재와 얘기를 나누고 나는 민예솔이 진행하던 업무 일부를 맡기로 했다. 사실 많지도 않았고 나도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다만 임신했으니 너무 힘들면 안 될 것 같아 전부 맡지는 않았다.업무가 많아지고 나도 바빠졌다. 눈 깜빡할 사이에 2일이 지나갔다. 박정환은 나에게 지낼 곳을 구했다고 말했다.“너만 괜찮으면 내가 집세 내고 계속 여기 있을게. 너 임신 했는데 혼자 괜찮겠어? 보살펴 줄 사람도 없고.”떠나기 전에 박정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걱정하지 마요. 나 괜찮아요. 그리고 구한 집이 여기 근처 아니에요? 무슨 일 있으면 나도 뻔뻔하게 오빠한테 연락할게요.”나는 마음속으로 감동했다. 동시에 박정환이 나를 단념하기를 바랐다. 나는 이미 임신까지 했고 그도 아빠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박정환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는 나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간단하게 챙긴 짐을 가지고 떠났다.한 명이라도 더 살던 집이 활기찼다고 해야 하나, 박정환이 떠난 후 갑자기 텅 빈 방을 혼자 마주하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박정환에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임신한 후 호르몬 변화로 인해 쉽게 감정적으로 변했다, 행복이나 슬픔이 전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마음을 정리한 후,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부터 출근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며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다행스럽게도 배인호는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그가 한국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서란과 함께 있는지는 모르겠다.주말이 다가오자, 프로모션 부서에서는 여러 가지 종목이 나열된 설문조사지를 보내왔고 프로모션부서 각자 가장 참여하고 싶은 종목에 이름을 적어야 했다.결국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주말에 워크숍을 떠나는 것이었다. 회사의 단합대회 같은 느낌이었다. 내 생각엔 아마도 우리 부서 부장님이 민예솔도 참여하도록 초대할 것 같았다. 그녀는 프로모션부서의 첫 팀원 중 한 명이고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민예솔의 뒤로 서란이 따라왔다.“지영 언니.”
“사람 이용하기만 하고 지워버리는 건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요?”이우범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듣기에 그가 정말 나를 매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그래요. 나 양심 없어요.”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심리적 균형을 찾기 위해 기선우를 이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더 이상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죄를 지었으니 먼저 차단한 거예요. 그래도 아직 양심이 남아 있나 봐요.”“그러네요, 아직 양심은 남아 있네요.”이우범은 나의 말을 듣고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그럼, 기선우가 나를 다시 만나러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기선우가 나의 소식을 듣기 위해 병원까지 가서 이우범을 찾은 것일까? 나는 기선우가 그렇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마음속 죄책감이 두 배로 커졌다.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그냥 배인호와 이혼하고 해외로 일하러 갔다고 전해 주세요. 2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요. 앞으로 기선우가 직장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면 당신을 찾으라고 하세요!”이우범은 깜짝 놀랐고 몇 초 후에 다시 물었다.“직장에 관련된 도움을 받는데 왜 나를 찾아와요? 의대생이에요?”“아니요, 하지만 우범 씨도 기선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아요? 이 박사님, 의사로서 친절한 마음을 좀 가져 보세요.”나의 가스라이팅 같은 말에 그는 침묵했다. 그는 의사로서 자기가 다른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나는 재빨리 덧붙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동생 한 명만 나 대신 챙겨준다고 생각해요. 우범 씨가 도와주면 그 신세 나도 잊지 않을게요.”나도 빈말로 허세를 부리진 않을 것이다.“어떻게 갚을 건데요?”이우범이 마침내 다시 말했다.“서란을 내가 대신 꼬셔 줄까요?”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하고 그것도 부적절하다고 느껴졌다.“에이 그것도 안 되
세희와 민정이도 참지 못했다.세희:「지영아 너 정말 이혼 잘한 거야. 배인호 정말 너무하다. 네가 민설아의 존재를 알고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너한테 복수하겠다는 거야?」민정:「맞아, 너무 감정적이잖아. 너도 피해자야!」정아:「그리고 민예솔도 미친 거 아니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내가 거기 있었으면 그 여자 머리채를 잡았을 거야!」나는 분노에 찬 문자들을 보며 마음이 더 불편했다. 애초에 배인호는 내게 민설아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그저 할아버님의 제안을 거절하라고만 했었다.할아버님의 병세가 악화하며 더는 미룰 수가 없었고, 나도 거절하지 않았기에 이 결혼이 결국 성사된 것이다.단톡방에서 정아와 애들이 열띠게 내 편을 들어 주고 있었다. 배인호에게 가서 따지겠다는 것을 내가 겨우 말렸다. 따지면 따질수록 계속 얽히게 되고 차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았다.내가 지금 제일 걱정하는 문제는 도대체 배인호가 싱가포르에서 얼마 동안 있냐는 것이다.나는 그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배도 점점 불러올 것이고 쉽게 들킬 것 같았다.“퇴근하고 만나서 얘기 좀 해요.”다음날 출근했을 때 나는 민예솔의 문자를 받았다.“시간 없어요.”나는 답장을 했다.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퇴근 시간에 민예솔이 회사 문 앞에서 나의 차를 막을 줄은 몰랐다.나는 차를 세우고 내릴 수밖에 없었다.“나도 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그쪽이 더는 서란을 괴롭히지 않았으면 해요. 평소에 자주 부딪히지도 않는데 그렇게 미워할 필요 없잖아요.”민예솔은 정의로운 척 얘기했다.“그쪽은 무슨 신분으로 서란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나는 담담하게 물었다.“내 친동생처럼 생각해요. 그거면 충분하죠.”민예솔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너무 웃겼다.“그쪽 동생하고 닮았다는 이유로 배인호가 마음속으로 제일 사랑하는 게 그쪽 동생 같아요? 그래서 동생을 대신해서 서란이 배인호의 옆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