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올해는 안 갈 건데 서란이라도 데리고 가는 게 어때요?”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쿨하게 서란에게 기회를 양보했다.나는 그녀에게 이런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배인호는 눈썹을 찌푸렸고 그의 눈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그것은 노골적인 불만이 아니라 막연하게 불쾌하지만 절제된 감정이었다.“우리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서란의 일은 내가 처리할게.”솔직히 말해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환청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지 의심했다.왜냐하면 그가 나를 선택했고 서란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닌가? 운명적인 그녀를 이렇게 포기한 걸까?“인호 씨, 농담하지 마요. 그런 의미 없는 약속도 하지 말고요. 아니, 약속도 아니죠?”나는 침착하게 거절했다.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집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배인호가 내 팔을 잡았다.“내가 노력해 볼게.”그는 처음으로 이렇게 애원하는 어조로 내게 말했다.그는 전생에서 나와 이혼하려고 할 때도 이토록 태도를 낮추지 않았었다.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배인호가 정말 나를 사랑한 게 아닐까?서란보다 더 깊은 사랑은 불가능했다. 포기하려면 나를 포기하는 게 맞다. 배인호는 가족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아직 서란을 위해 온 세상과 싸우기에 이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를 이용해 자기 가족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설득력 유일한 이유다.“노력할 필요 없어요, 돌아가요. 오늘 우리 아빠가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이러다 마주치면 당신이 곤란할 거예요.”나는 이성적으로 말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빠는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셔서 나가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설날 식사로 준비하기 바쁘셨기에 배인호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셨다. 아빠는 배인호를 보자 불길한 물건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본 듯 얼굴이 일그러지시더니 진지하게 물으셨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아버님.”배인호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그렇게 부르지 마시게. 못 들
7장의 사진, 사진마다 모두 한 소녀가 있었다.앞에 4장에는 소녀와 배인호가 함께 찍은 것이었다. 벚나무 아래에서, 사찰 앞에서, 흔들다리에서, 관람차에서 두 사람은 커플 옷을 입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뒤에 두 장은 슬픔이 가득 담겨있었다. 울면서 찍은 셀카는 손목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지막 한 장이 제일 두려웠는데 물에 빠진 시신 한 구가 있었다. 온몸이 젖어 있었고 이끼가 붙어 있었다. 피부는 희게 물에 부어있었다.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머니, 이 여자는 누구예요?”“이 여자하고 닮은 사람 너도 본 적 있지?”어머님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서란은 사진에 여자와 똑 닮았다. 어머님은 사진을 넣으시며 한숨을 쉬셨다.“지영아, 이 여자는 민설아라고 해. 인호가 전에 좋아하던 여자애야.”“어머님,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랑 어떤 관계가 있죠?”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전부 알게 되었다. 나는 배인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모르는 비밀도 있었다.거의 졸업이 다가온 시기에 정아와 애들과 함께 나는 인턴을 했었다. 그 기간이 내가 유일하게 배인호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다. 다른 도시에서 매일 문자로 연락하려고 노력했었다.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배인호는 당시에 절대로 바꾸지 않던 프사를 핑크색 복숭아 캐릭터로 바꿨었다.나도 그것을 보고 배인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닌지 엄청나게 걱정했었다. 사실 당시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배인호는 그 사이 민설아를 만났고 처음으로 그에게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준 여자였다.전에 그저 데리고 놀기만 하던 여자들과 다르게 배인호는 진지하게 민설아와 사귀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반대했다.마침 할아버님이 위중해지시면서 배인호가 빨리 결혼하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적당한 인물을 찾던 중 결국 내가 가장 적합한 결혼 상대였다.
내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모두 새해를 축복하는 메시지였다.이우범:「새해 복 많이 받아.」기선우:「누나, 새로운 한 해 더 예뻐지고 더 행복하길 바래요. 모든 고민 다 털어 버립시다!」박정환:「지영아, Happy new year.」이 기사:「사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차 가지고 퇴근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차가 있어서 제때 병원에 모셔갈 수 있었어요.」먼저 이 기사한테 답장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출근 서두를 필요 없어. 나 신정 지나고 출국할 거야. 한 2년쯤 나가 있을 거야. 그때까지 아버지 잘 보살펴 드려. 그리고 와서 우리 아빠 운전기사 해줘도 돼. 급여는 똑같게 줄게.」곧이어 나는 네 명이 있는 채팅방을 클릭했다.정아는 바보처럼 채팅방에서 기프티콘을 보내고 있었고 민정은 불꽃 효과가 있는 이모티콘을, 세희만 총명하게 기프티콘을 수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박 사장님 대박」, 「민정이도 기프티콘 보내봐」를 보내고 있었다.나는 창밖의 불꽃을 영상으로 찍어 채팅방에 보냈다.「친구들, 새로운 한 해 새롭게 시작합시다.」정아, 민정, 세희는 다 서울시에 있었기에 바깥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 불꽃 영상을 찍어 채팅방에 보냈다. 같이 불꽃을 본 셈이었다.내가 이번 설을 집에서 보낸다고 하자 정아가 기뻐하며 문자를 보내왔다.「완전 잘했어. 우리 지영이, 오구오구, 받아!」그러고는 채팅방에 120만 원을 이체했다.나도 별 거리낌 없이 바로 받았다.애들한테 곧 출국할 거라는 얘기도 했다. 애들은 많이 아쉬워했지만, 현재 배인호가 나와 이혼하려 하지 않는 걸 봐서 다들 내 결정에 동의했다. 곧이어 민정과 세희도 비싼 기프티콘을 보내왔다. 나에 대한 응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한참 톡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낸 새해 축복 메시지에 답장했다. 동시에 아버님 어머님께도 새해 문안 문자 한 통씩 올렸다.마음속에 피어올랐던 시부모님에 대한 호감과 친근함은 민설아에 관해 듣게
통화는 끝났지만, 나는 거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나는 몰래 밖으로 나갔고 단지 안에서 정처 없이 돌고 있었다. 단지 안은 설 연휴에 맞춰 새롭게 단장했고 몇몇 아이들은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는 불꽃놀이로 인한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고 설 분위기가 다분했다.어느샌가 단지 대문 앞까지 걸어갔고 갈데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처럼 떠돌아다녔다.순간 나의 시야에 배인호의 차가 들어왔다. 멀지 않은 십자가에 세워져 있었다.‘여기는 왜 온 거지? 나 찾으러 온 건가?’약간 불안해지는 나였다.이내 이 생각은 착각이 되었다. 조수석 문이 내리고 서란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배인호도 운전석에서 내렸고 둘은 길가에 서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다시 차로 돌아갔고 이내 그 차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발견한 순간 배인호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그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고 차를 에둘러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서란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몰라도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설 잘 보내고 있어요?”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응.”배인호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물었다.“설 연휴 지나고 언제 청담동으로 돌아올 거야?”배인호의 등 뒤로 서란이 차창을 내리고 불안한 눈길로 나와 배인호를 보고 있었다.이상했다. 서란은 아직 내가 설 연휴가 끝나고 출국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은 건가?하지만 이내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배인호는 갈팡질팡한 태도인데 나의 출국 소식을 알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서란도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럴 바엔 내가 출국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낫다고 서란은 생각할 것이다. 이미 출국한 마당에 어떻게 더 신경을 쓸까.나는 서란을 힐끔 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상황 봐서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서란이나 잘 챙겨요.”설을 맞이해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온 건가 싶었다.“란이는...”배인호가 무의식중에 서란을 돌아보았다. 서란과 눈이 마주치자, 배인호는 부자연스럽게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그는 집에 가서 설 연휴를 보내라며 하인들을 돌려보냈고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집에 사람도 없는데 남겨서 뭐 해?”배인호가 나를 소파에 내려주고는 몸을 숙였다. 신발을 벗겨 상처를 보려는 듯했다.나는 그가 갑자기 이렇게 잘해주는 게 적응되지 않아 발을 움츠렸다.“구급상자 가져다줘요. 이건 내가 할게요.”나의 말에 배인호가 담담하게 답했다.“네 몸 다 봤고 다 만져봤어. 고작 발목 좀 보는 게 뭐 어때서?”나는 어이가 없어서 몇 초 정도 멍해 있다가 반박했다.“누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그냥 이렇게 잘해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왜 그렇게 생각해?”배인호가 머리를 들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왜긴 왜겠어요?”내가 대답했다.“인호 씨 아까 서란 데려다주고 다시 나 찾으러 온 건데 너무 흘리고 다닌다는 생각 안 해요?”그는 어제까지 세종시에 있다가 빨라도 오늘 아침 서울시에 돌아왔을 것이다. 서울시로 오자마자 서란을 찾아다녔고 흑기사처럼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것이다.돌이켜보면 매년 설이 되면 내가 한참을 잔소리해서야 다시 서울시로 건너왔고 우리 집으로 설 인사를 하러 왔다.그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훤히 보였다.배인호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서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예요? 마땅한 곳 찾아서 숨겨 놓고 집에는 와이프 밖에서는 세컨드를 끼고 지낼 거예요? 아니면 서란이랑 정리하고 더는 연락 안 할 건가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배인호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봤다.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는 아직 어떻게 할지 정리가 안된 상태다. 서란은 그에게 조금 다른 존재이고 나도 그에게 점점 다른 의미로 변해가고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됐어요. 당신이랑 말하다가 화병 도질 거 같아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절뚝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하지만 배인호는 나를 안아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아무
정아를 말릴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실없는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그러다가 정아와 같이 티브이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고 어쩌다 보니 또 서란 얘기가 나왔다. 어제 보낸 금액 이체 캡쳐와 오늘 배인호가 데려다준 일까지 나는 다 털어놓았다.이를 들은 정아가 펄쩍 뛰면서 말했다.“배인호는 지금 양다리 걸치고 싶은 거지? 지영아, 내 말 좀 들어. 자중하지 않는 남자는 버려야 해!”“버리려고 준비하잖아.”내가 과자를 입에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설 연휴 끝나면 진짜 출국하려고?”정아가 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엉엉엉... 나 너 못 보낼 거 같아.”“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틈만 나면 다시 들어와서 너희들이랑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을 가져야지.”나는 정아의 머리를 잡고 매끈매끈한 이마에 뽀뽀를 했다.정아도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내가 보고 싶으면 내가 있는 쪽으로 오면 된다. 그리고 그 기회에 같이 여행도 할 수 있다.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다이닝룸에서 박정환이 우리를 불렀다.“정아야, 지영아. 밥 먹자!”정아가 대답하고는 절뚝거리는 나를 부축해 다이닝룸으로 향했다.박정환의 요리 실력은 아주 훌륭했다. 5종류의 반찬에 찌개까지, 때깔이 죽여줬다. 더 낯 뜨거운 건 죄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라는 거였다.그는 매너 있게 나와 정아에게 백반을 가져다주었고 찌개도 덜어주었다.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꽤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정아가 얍삽하게 나와 박정환을 엮으려고만 하지 않으면 박정환과도 꽤 얘기가 잘 통했다.하지만 정아는 역시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식사할 동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샌가 몰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박정환이 나한테 반찬을 집어주고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이었다.식사가 끝나고 인스타를 열어보지 않았으면 정아가 이런 요망한 짓을 한 줄 몰랐을 것이다.“박정아!!”젖 먹던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왜?”정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와 정아는 병원을 나섰다.“나 집에 좀 데려다줘.”차에 탄 내가 정아에게 말했다.“집? 어느 집?”정아가 의아해서 물었다.“우리 집 안 가고?”저녁에 이우범과도 만나야 하는지라 정아네 집에 계속 있으면 불편했다.“수정 팰리스 그쪽으로 데려다줘. 가는 길 알지?”수정 팰리스는 지금 내가 혼자 쓰는 집이다. 대학 시절 정아랑 애들도 자주 와서 놀다 가곤 했다.박정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고 액셀을 밟아 수정 팰리스로 향했다.수정 팰리스에 도착하고 나는 정아의 부축하에 자리에 앉았다. 정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지영아, 발목 상태가 이런데 진짜 혼자 괜찮겠어? 혼자서 몇 발짝 못 걷잖아...”“괜찮아. 발목이 이러니까 아무 데도 가기 싫어. 그냥 계속 누워만 있고 싶어. 나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 길에서 운전 조심하고.”나는 정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정아가 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정아가 가고 나는 그대로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그러다 어느샌가 잠에 들었고 일어났을 땐 좀 으스스했다.악몽을 꿨다. 꿈에서 민설아의 시체가 내 앞에 놓여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려는데 민설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내 목을 조르려고 손을 뻗었다. 목소리엔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배인호 당신이 뺏어갔어!”꿈에서 깬 뒤에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악몽으로 인한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급하게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돌려 시끌시끌한 드라마를 찾았고 재잘대는 말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하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니 사색은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배인호와 결혼한 그날 그는 나에게 듣기도 거북한 말들을 가득 내뱉었다. 동침하긴 했지만 내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고 새벽 1시가 되자 집을 떠났다.그때는 그저 배인호가 나랑 같이 자는 게 싫어서 나에게 면박을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
배인호가 대답했다.“정아 클럽 갔다길래, 너 그 집에 없을 거 같아서.”정아는 정말 대단했다. 클럽이 두 번째 집이라는 호언장담에 어울리는 행보였다.“네. 알겠어요. 욕실에서 꺼내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도 돼요.”나는 샤워 가운을 한번 고쳐 입으며 말했다.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배인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표정이 ‘날 돌려보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 속옷도 팬티도 안 입은 상태다. 아까 배인호가 내 발목을 확인할 때 내가 단단히 여미지 않았으면 벌써 다 보여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여기 앉아 있는데 옷을 바꿔 입을 수도 없었다.“민설아에 관해서 엄마가 어디까지 말씀해 주셨어?”오히려 배인호가 먼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많지는 않아요. 그냥 그 여자랑 당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당신이 나랑 결혼한 사실에 화가 나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렇게만 말씀해 주셨어요.”내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말투는 덤덤했다.민설아 얘기가 나오자, 배인호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민설아는 그의 금기어였다. 배인호가 이혼을 반대하지만 않았으면 어머님이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게끔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서란은 민설아와 많이 닮았어.”배인호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첫사랑과 닮아서 좋아하게 되었다는 시나리오에 나는 카메오로 나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민설아와 많이 닮지 못한 게 내 죄라면 죄다. 아니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배인호는 나와 사랑에 빠지고도 남았을 것이다.“어떻게 만났어요?”긴 침묵 끝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친구 소개로.”배인호의 대답은 꽤 가벼웠다.“만난 지 얼마 만에 사귀었어요?”내가 또 질문을 던졌다.배인호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민설아 얘기를 먼저 꺼내긴 했지만, 그 내용을 더 깊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아 보였다.나는 그 마음을 읽어냈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저녁에 이우범과 만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