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이우범이 동행하는 것을 동의했다.우지훈이 내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우범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올 것이다.우리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9시였다.우지훈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어두운 분위기가 더 느껴졌다. 특히 두 눈이 독사를 연상시켰다.나는 그가 왜 이런 사람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배씨 집안에서 자라 배인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뒤에서 배인호의 등에 칼을 꽂았다.그 점이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이우범과 배인호가 사이가 틀어진 것은 최소한 여자 때문이었지만 우지훈은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오랜만이에요.”나를 보고 우지훈이 미소를 지었다. 말투가 꼭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와 단지 아는 사이일 뿐 오랜 친구가 아니었다.“네, 오랜만이에요. 만나서 하려는 얘기가 뭐죠?”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니 이미 찻물이 담겨 있었다.우지훈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우리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되잖아요? 아닌가? 나도 다른 사람처럼 지영이라고 불러도 돼요?”우지훈 입에서 친밀한 호칭이 나오자 나는 역겨움을 느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우지훈은 내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이어서 말했다.“지영 씨, 스튜디오에 관한 일 때문에 한번 만나자고 한 거예요. 갑자기 왜 그런 일은 벌인 건지 모르겠네요. 전에 우리 스튜디오 사람이 지영 씨한테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이제 보니 임 매니저는 내가 버린 짓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지훈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네. 스튜디오 본사에 임 매니저와 직원 두 명이 내게 잘못을 저질렀죠. 너무 기분이 나빠서 이렇게 했어요. 별문제 없을 줄 알았거든요.”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말했다.분풀
나는 우지훈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 사건을 내가 그의 앞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그는 꼭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그런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나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일을 중단하라고 했다. 그제야 우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그럼, 이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난 유정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역시나 우지훈의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물었다.“지영 씨가 유정을 고향에 내려보낸 거예요?”“난 몰라요.”나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어요.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난 이미 유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저 지영 씨한테 한 번 더 확인하는 거예요. 모두의 시간은 귀한 거니까요. 허탕 칠 순 없잖아요.”우지훈은 정말 뻔뻔하게 자신의 목적을 얘기했다.그는 유정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비웃었다.“그럼 나한테 물어봐도 소용없겠네요. 나도 몰라요. 만약 유정이 찾으러 갈 거라면 그렇게 해요. 우지훈 씨도 알다시피 유정은 내게 잠깐 이용하던 도구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예전에 그녀가 나를 대한 것처럼 우지훈 씨가 유정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난 신경 쓰지 않아요.”“이런 걸로 날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완전히 잘못된 계획이에요.”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지훈은 바로 더 싸늘해졌다.“내가 유정을 가지고 지영 씨를 협박하는 게 아니라 두 아이를 데리고 협박하는 거라면요? 듣자 하니 이우범하고 함께하게 됐다면서요. 두 사람이 아이까지 두 명 낳았다던데 맞죠?”그 말에 나의 분노는 순간적으로 끓어올랐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애들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우지훈 씨, 너무하네요. 나하고 무슨 원수를 진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장담하는데 만약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 거예요.”나는 자리에
“우지훈 너 죽고 싶어!”원래 배인호는 민설아와 빈이에 의해 멈췄었다. 하지만 우지훈의 말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과 같았다. 배인호의 이마에 핏줄은 터질 것 같았고 눈빛에 살기가 무서웠다.만약 그가 정말로 우지훈을 죽인다고 해도 이제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배인호는 우지훈의 팔을 세게 발로 찼다.우지훈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내면서도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민설아가 다시 한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배인호를 제지했다.“인호 씨, 정신 차려요. 지금 허지영 씨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봐요.”그 말에 배인호 멈칫하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이우범의 품에 안겨 있었다.지금 옷도 반쯤 찢겨있는 상태라 이우범의 품에 숨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다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내 마음속의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때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하지만 그의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과 꽉 움켜쥔 주먹이 천천히 풀리는 것을 지켜보았다.지금은 나와 이우범이 커플이었다.배인호는 나를 위해 나설 자격조차 이우범에게 먼저 양보해야 했다.“하하하...”우지훈이 또 웃었다. 그는 일부러 배인호를 자극했다.“배인호 너도 참 불쌍하네. 허지영은 이우범하고도 자고 나하고도 거의 할 뻔했는데 아쉽네.”이번에는 배인호가 움직이기 전에 이우범이 나를 옆에 있던 여자 직원에게 맡기고 나섰다. 화를 내며 허리를 숙여 우지훈의 옷깃을 잡아 일으키더니 주먹을 날렸다.우지훈은 피를 토하며 이빨 두 개도 함께 뱉어냈다.그가 아무리 체격이 좋다고 해도 배인호와 이우범의 공격을 모두 견뎌 낼 수는 없었다.“너 한마디만 더 해봐. 영원히 입 다물게 해줄 거니까.”이우범은 우지훈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나...”우지훈은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보였지만 한순간에
나는 한시름 놓았다. 로아와 승현이만 떼를 쓰지 않으면 된다. 같이 떼를 쓰면 달래기 힘들었다.한참 대화하다가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우범도 마침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에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맑고 정교한 눈만 보였고 여전히 쌀쌀했다. 어젯밤 우지훈을 대하던 그 험악한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이우범과 배인호는 다 완벽한 겉모습을 가졌다. 있는 집 도련님의 아우라란 타고난 것이다.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는 그 누구도 그들이 화났을 때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요즘 너무 바빠서 몸이 이렇게 약해질 때까지 챙겨주지 못했네.”이우범이 내 침대 옆에 앉더니 자책했다.“이건 우범 씨 책임이 아니에요. 몸이 원래 약해서 그래요. 전에 지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희선 언니와 둘이 보살피느라 좀 피곤했나 봐요. 좀 휴식하면 돼요.”나는 오히려 이우범을 위로해 줘야 했다.“인호 말이 맞아요. 지금 주변 사람들 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면 남자로서 잘 챙겨주고 보호해 줘야 해요. 앞으로 그럴 수 있게 온 힘을 다할게요.”안경 너머로 이우범의 두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매혹적이었다.나는 조금 난처했다. 이우범과 진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이 오해하는 것뿐인데 이런 허황한 명분 때문에 나를 보살펴주겠다고 하니 말이다.아무리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이우범이 더 많이 해줄수록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하지만 나도 이우범 보고 지금 당장 포기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우범 씨, 저기...”나는 잠깐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인호 씨와 자꾸 맞서지 마요. 특히 주먹다짐은 더 안 돼요.”이우범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입가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무조건 상처가 나 있을 것이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질투가 섞인 말투로 물었다.“인호가 먼저 손찌검한 거예요. 지영 씨는 아직도 인호를 더 챙기는 거죠?”배인호를 더 챙기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이
내 말은 민설아의 아픈 점을 찌른 거나 마찬가지였다.사실 연인 사이에 그렇게 오래 헤어졌는데 감정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이까지 없다면 두 사람은 아마 이렇게 빨리 재결합하지 못했을 것이다.다른 걸 떠나서 배인호는 이런 부분에서는 책임감 넘쳤다.“아이는 그냥 하나의 중요한 이유일 뿐이에요. 나와 인호 씨 사이의 감정, 당신은 모를 거라고요.”민설아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지만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지영 씨는 그때 인호 씨와 내가 몇 달밖에 안 만났고 시간도 길지 않은데 감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냐고 생각하겠죠. 근데 감정의 깊이는 시간이 아니라 느낌이에요. 이건 지영 씨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민설아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입가에 번진 웃음은 거의 넘쳐날 지경이었다.배인호를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결국 나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만약 환생하지 않았다면 그냥 전생의 그 결말을 유지했을 것이다.그래서 나도 감정은 시간으로 좌우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내가 잘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민 선생님 본인이 둘 사이가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면 되는 거예요.”내 마음은 지금 고요한 물처럼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나는 민설아가 한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네, 내가 인호 씨는 제일 잘 알죠.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되게 일편단심인 사람이에요.”민설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배인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그리고 인호 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마음이 여린 사람인 걸요. 지영 씨를 놓고 봐도 그때 엄청 미안해했어요.”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민설아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뱉는 단어는 다 아는 단어였지만 조합하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민설아는 어리둥절해하는
민설아가 오늘 온 목적은 나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정교하고 귀여운 작은 선물함을 꺼냈다. 위에는 하늘색 곰과 7살 생일을 축하한다는 영문 그림도 있었다.“다음 주 빈이 7살 생일이에요. 인호 씨와 같이 빈이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주려고 하는데 지영 씨도 와요.”이 말을 하는 민설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7살, 배인호와 결혼하고 5년, 이혼하고 또 2, 3년을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이미 7살이 되었다.“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참석은 됐어요. 선물함은 도로 가져가요.”나는 전혀 흥미가 나지 않았다.“그건 지영 씨가 알아서 하면 돼요.”민설아도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머리를 정리하더니 가기 전에 몇 마디 더했다.“허지영 씨, 이미 당신을 아껴주는 남자가 있으면 다른 남자는 멀리해요. 앞으로 될수록 엮이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정말 고마울 텐데.”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직도 나를 연적으로 생각하고 큰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서란과 민설아가 이 정도로 견제하는지 모르겠다. 배인호와 결혼한 5년간 내가 생과부처럼 지낸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민설아가 가고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았다.지금 창밖은 해가 쨍쨍했다. 점심때라 하루 중 햇빛이 제일 강한 때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창밖의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고는 배달을 불러 굶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 이우범은 점심에 로아와 승현이를 보러 간다고 했으니 내 점심까지 챙길 리가 없다.“형수님!”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얗고 포동포동한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웃으며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이 선생님이 밥 가져다주라고 부탁하셨어요. 우리 병원 관계자 식당에서 사 온 건데 깨끗하고 건강해요. 조금 드셔보세요.”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배인호가 동료에게 부탁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배인호가 아무 표정 없이 꽃다발을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냄새를 킁킁 맡았다.나는 멈칫하다가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렇게 꽃 든 거 본 게 우리 결혼할 때였는데, 그때 표정이 완전히 썩어 있었잖아요.”그날 씁쓸했던 내 기분은 나만 알고 있었다.배인호는 온몸으로 나에 대한 거부감과 역겨움을 티 냈다. 부케를 나에게 건네줄 때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부케가 아니라 칼을 넘기는 것 같았다.그때 다른 사람은 다 나의 결혼을 기뻐했다. 정아와 내 부모님도 내가 짝사랑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소원대로 배인호와 결혼할 수 있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내 마음도 기쁨과 슬픔 사이를 오갔고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꽃을 든 배인호의 몸이 몇 초간 굳는 것 같았다.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는지 모르겠다.“갑자기 왜 이렇게 오래된 일을 꺼내는 거야?”배인호가 물었다.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가끔 기억 속의 화면들이 불쑥 튀어나오는데 나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나는 배인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을 돌렸다.“그 꽃 민설아 씨가 보낸 거예요.”민설아라는 이름을 들은 배인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눈빛에 언짢음이 묻어났다. 그도 당연히 민설아가 나를 찾아오는 걸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이유가 됐든 말이다.배인호는 이내 그 꽃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이 광경에 나도 깜짝 놀랐다.“싫으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지. 왜 여기 놓아두고 그래.”꽃을 던진 배인호는 손을 털며 당연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 꽃을 준 사람이 자기 현 여자 친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했다.그 현 여자 친구는 핍박을 못 이겨 헤어진 첫사랑이기도 했다.나는 쓰레기통에서 삐죽 튀어나온 꽃을 보고는 순간 배인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 민설아가 조금만 늦게 갔으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속상해했을 것이다.“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요? 꽃 버리러 온 거예요?”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를 떠나라고 하기도 그랬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이익이 걸려 있다.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노성민과도 관련되어 있다.“그럼 나는 어떡해요? 우지훈 씨가 퇴원해서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까지 위협하면 어떡하냐고요?”나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문제를 배인호에게 던져줬다.배인호의 대답은 오히려 매우 쉬워 보였다.“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면 되지.”나는 이 말이 너무 우스웠다.“미쳐서 빈이한테 손댈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빈이를 꺼내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배인호의 태도가 변했다. 말투도 날카로워졌다.“그러면 진짜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그럼, 나는요? 나도 애가 있는데!”내가 매섭게 쏘아붙였다.“넌 우범이 있잖아.”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제주를 떠날 생각도, 나를 멀리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내 안전은 이우범이 책임질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지금 내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한 것만은 확실했다.배인호가 민설아와 빈이의 안전을 더 걱정하는 건 당연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배인호 때문에 나도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너무 짜증이 났다.“인호 씨, 당신이랑 있으면 너무 안 좋은 일만 생기는 거 같아요. 제발 좀 나한테서 멀어져요.”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배인호를 내쫓았다.“이제 나가요.”배인호는 가지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낮잠을 잘 생각에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하지만 나는 그림자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배인호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힌 채 몸을 숙이고는 두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있었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눈동자를 쳐다봤다.“인호 씨,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지훈이 혹시 어디 만지지는 않았지?”배인호가 눈을 찡그렸다. 내겐 익숙한 표정이었다.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