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문이 막혔다.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를 떠나라고 하기도 그랬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이익이 걸려 있다.게다가 이 프로젝트는 노성민과도 관련되어 있다.“그럼 나는 어떡해요? 우지훈 씨가 퇴원해서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까지 위협하면 어떡하냐고요?”나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문제를 배인호에게 던져줬다.배인호의 대답은 오히려 매우 쉬워 보였다.“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면 되지.”나는 이 말이 너무 우스웠다.“미쳐서 빈이한테 손댈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빈이를 꺼내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배인호의 태도가 변했다. 말투도 날카로워졌다.“그러면 진짜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그럼, 나는요? 나도 애가 있는데!”내가 매섭게 쏘아붙였다.“넌 우범이 있잖아.”이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제주를 떠날 생각도, 나를 멀리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내 안전은 이우범이 책임질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지금 내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한 것만은 확실했다.배인호가 민설아와 빈이의 안전을 더 걱정하는 건 당연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배인호 때문에 나도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니 너무 짜증이 났다.“인호 씨, 당신이랑 있으면 너무 안 좋은 일만 생기는 거 같아요. 제발 좀 나한테서 멀어져요.”나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배인호를 내쫓았다.“이제 나가요.”배인호는 가지 않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낮잠을 잘 생각에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하지만 나는 그림자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눈을 떠보니 배인호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힌 채 몸을 숙이고는 두 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있었다.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코앞까지 다가온 눈동자를 쳐다봤다.“인호 씨,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지훈이 혹시 어디 만지지는 않았지?”배인호가 눈을 찡그렸다. 내겐 익숙한 표정이었다. 위험
“미안해요, 나는...”이우범은 멘붕한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앉아서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내가 바로 그 손을 쳐냈다.전에 나와 이우범 다 누군가 약을 타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스킨십을 한 것 외에 우리 사이는 늘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무슨 원인인지 모르게 이우범이 이런 행동을 보이면 배인호가 그러는 것보다 더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 내 마음속으로 이우범은 배인호보다 인성이 더 좋다고 여겼기에 이런 부분은 더 젠틀할 거로 생각한 것 같았다.배인호는 이미 짐승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터치하지 마요. 지금 당장 퇴원 수속 해줘요. 여기 있기 싫어요. 돌아갈래요.”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짜증스럽게 이우범에게 명령했다.“퇴원은 내일 해요. 오늘은 안돼.”이우범은 내 요구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내가 병원에서 며칠 더 몸조리하면서 영양제도 맞길 바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필요 없었다. 나는 지금 마음의 타격이 건강 문제보다 더 심각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고 싶어요.”내가 거절했다.하지만 이우범은 오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막무가내로 말했다.“꿈 깨요. 내일 오후가 되기 전까지 여기서 잘 쉬어요. 간호사한테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할 거니까.”“미쳤어요?”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이우범인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난 그냥 지영 씨 몸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전에 이미 잘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했고요. 말 좀 들어요.”이우범은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듣는 나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이우범은 이미 몸을 돌려 나갔다.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평소처럼 침착해 보이진 않았다.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그도 지금 나보다 만만치 않게 짜증이 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참아야 했다. 만약 둘이 더 입씨름하다간 점점 더 크게 싸울 것이다.나를 피하는 거라도 좋았다. 마침 나도
빈이는 나와 민설아의 관계가 좋지 않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을 믿지 않아야 맞았다.근데 왠지 모르게 그는 멍한 표정이었다.“진짜예요? 마미가 미안하다고 했어요?”나는 멈칫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확신에 차서 머리를 끄덕였다.“그래. 너희 엄마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 너한테 직접 말하긴 힘들어하더라고. 알잖아. 너희 엄마랑 나 사이 별로 안 좋은 거. 그래서 내 앞에서는 숨기는 거 없이 바로 알려주더라고. 그러니까 아줌마한테 숨길 필요 없어.”빈이는 뭔가 사랑이 부족한 아이 같았다.그럴 리가, 사랑이 부족해도 아빠인 배인호의 사랑이 부족해야 맞았다. 민설아가 지금까지 혼자 업어 키웠는데 못 해줬을 리가 없다.빈이는 민설아가 미안하다고 했다는 말에 게임도 제쳐두고 기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더 있어요? 마미가 뭐라고 안 해요?”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민설아가 빈이에게 할 법한 말을 지어냈다. 당연히 전부 다 좋은 말이었다. 민설아가 뒤에서 아들에게 별로 잘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빈이는 민설아와 배인호의 아이였다. 지금 배씨 집안으로 돌아갔으니 배씨 집안의 유일한 작은 도련님이 되었다. 배씨 집안 미래 후계자이자 민설아가 배씨 집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티켓인데 왜 이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엄마가 너한테 혼자 아빠 쫓아가라고 했을 때 무서웠어?”그럴싸한 타이밍에 나는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왔다.빈이도 경계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머리를 끄덕였다.“무서웠어요.”내가 또 질문을 던졌다.“너희 엄마는 빈이가 노성민 아저씨에게 문자 보냈다고 하던데, 엄마 원망하지 않아? 아빠가 알게 되면 널 굉장히 싫어할 텐데?”나는 차근차근 대답을 유도했다.빈이는 민설아가 자기를 싫어하는 걸 무서워할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배인호가 자기를 미워할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마미 원망하지 않아요. 대디가 빈이를 그렇게 좋아하
감정은 이 세상에서 제일 컨트롤하기 힘들다. 말하지 않아도 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이런 느낌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이우범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하지만 나도 그 힘든 과정을 다 견뎌왔고 지금 이런 감정 소모를 완전히 이겨낸 것 같다.한참 뒤 나는 이우범의 눈시울이 붉어진 게 보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억울해 보였고 이해를 받지 못했다는 처절함도 느껴졌다. 눈물로 적셔진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나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이우범은 처음인 것 같았다.“우범 씨, 괜...찮은 거죠?”나는 얼른 티슈를 한 장 빼서 이우범의 눈가를 닦아주려 했지만 그가 나를 피했다.“괜찮아요. 계속 그런 마음인 것도 알고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도 포기하기 싫었어요. 지영 씨 빼고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됐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도시아가 되는 거겠죠.”이우범의 말은 앞부분은 괜찮았지만 뒷부분은 소름이 끼쳤다.나를 보는 이우범의 눈빛은 이미 안정을 되찾았고 차갑기까지 했다.나는 이우범이 나를 협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아는 이미 죽었다. 직접 선택한 건 맞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우범에게 정말 진심으로 푹 빠져 있었다.이우범은 종래로 도시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불안하지 않았던 걸까?그렇다면 이우범은 정말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다.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기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굴 것이다.“무슨 뜻이에요? 우범 씨, 너무 극단적으로 나오지 마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나도 흥분하기 시작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고 있었잖아요. 내가 했던 일들도 거의 알고 있고, 아니에요?”이우범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떤 일은 내가 직접 경쟁하지 않는 이상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그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왔어요?”노성민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빈이는 나와 많이 친해졌다. 빈이는 먼저 “아줌마”라고 부르며 인사했다.하지만 빈이는 몰랐다. 나 때문에 민설아의 질책을 받을 거라는 걸 말이다.나는 빈이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엄마랑 아빠는?”“안에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요.”빈이가 적극적으로 문을 열면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오늘은 빈이의 생일이라 방안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도우미들이 분주하게 돌아쳤고 배인호는 거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배건호는 옆에서 장난감 로봇을 만지작거렸는데 빈이에게 주려는 선물 같았다.나를 발견한 배건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지영이 왔어?”이어 배건호는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유모차에서 로아를 안아 올렸다.“로아 공주도 같이 왔네? 진짜 볼 때마다 예뻐지는 거 같네?”저번에는 꽤 부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에는 꽤 자연스럽게 안았다. 말투에서 로아에 대한 아낌이 느껴졌다.내가 승현이가 아닌 로아를 데려온 것도 승현이가 점점 배인호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배건호와 김미애가 또 너무 많은 걸 생각하는 게 싫었다.“어머, 지영이 왔구나.”김미애가 이층에서 나타나더니 다급하게 걸어 내려왔다. 안색은 정상이었다.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약간은 부어오른 눈시울이 울었음을 말해주었다.“아주머니.”나는 얌전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민설아는 어디 갔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민설아가 자리에 없는 게 이상했다.배인호가 내 시선을 발견했지만,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병원에 일이 좀 있어서 갔어. 곧 올 거야.”내가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민설아였다. 김미애의 상황만 아니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왔으니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나는 유모차 아래에 놓인 주머니에서 게임기를 꺼내 빈이에게 건네줬다.“빈아, 생일 축하해.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뜯어봐.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네?”빈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게임을 하는
빈이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분위기가 순간 미묘해졌다.배건호와 김미애는 서로 로아를 안으려고 했다. 마치 로아를 더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도 그저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아서 그런다는 걸 말이다.“빈이야, 무슨 소리야?”민설아가 몸을 반쯤 수그린 채 두 손으로 빈이의 어깨를 잡고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연히 너를 더 좋아하지. 유일한 손주인데 어떻게 다른 애를 더 좋아하겠어. 아저씨, 아주머니, 맞죠?”민설아는 문제를 배건호와 김미애에게 던져줬다.손님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강 건너 불구경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쉽게 티 내지는 못했다.배건호와 김미애는 로아와 빈이를 번갈아 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다른 집 아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 그랬다. 게다가 다른 집 아이를 더 좋아할 리가 없었다. 좋아한다 해도 그냥 똑같게 좋아할 뿐이다. 빈이가 첫 손주인데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빈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연히 너를 제일 좋아하지.”김미애는 아쉬운 표정으로 로아를 나에게 돌려줬다. 배건호도 더 안기 민망한 상황이었다.그러더니 김미애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배건호와 빈이를 달래주러 갔다.빈이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건호와 김미애가 자기를 달래는 걸 지켜봤다. 이 부분에서 그들이 얼마나 빈이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손님 중 그 누구도 배건호와 김미애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인내심 있게 달랠 수 있는 사람은 빈이 밖에 없었다.로아는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뜬 채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직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잡더니 억울한 듯 옹알댔다. 입을 오물거리는 걸 봐서는 배고픈 것 같았다.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은 빈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나는 로아를 옆에 눕혀두고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이때 노성민이 소리도 내지 않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복
어쩐지 배인호 모친 김미애가 로아를 그렇게 좋아하더라니. 아마 진짜 그 아이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 아이는 내 첫 번째 아이이다. 나도 가끔은 로아가 그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외로울까 봐 아들도 하나 더 데려와서 나를 찾아온 게 아닐까?나는 고개를 숙여 품에서 잠자고 있는 로아를 바라보았다.“그러게요. 항상 앞으로 내다봐야죠. 인호 씨도 앞으로 내다봤어요?”나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멈추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배인호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거두고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소리로 내 말에 답했다.“응, 앞으로 내다보고 있어.”만약 앞으로 내다본다면 나랑 다시 만날 생각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그의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이길 바란다.“그래요, 제가 가서 아줌마 설득해 볼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저한테 진짜 잘해주신 거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오전에 햇볕은 점점 강렬해졌고 나는 더 이상 여기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마 로아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거기에, 나는 로아가 잠이 든 틈을 타 더욱 적절한 곳에 데려가 잠 좀 더 푹 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배인호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말했다.“2층으로 가, 2층 방에서 로아 좀 재워.”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2층 또한 매우 조용하기에 배인호 따라 일단 거실로 돌아갔다. 그 시각, 빈이는 선물을 받고 있었고 일부 현명한 사람들은 아이들끼리는 쉽게 친해지니, 일부러 자기 자녀들까지 데리고 와서 친해지게 했다. 배씨 가문에서 빈이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에 따라, 빈이 하고만 친해지면 일단 배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 환심을 사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향했고, 일부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많은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아무리 어째도 나는 5년 동안 배인호의 와이프였고, 이 사람들은 배 씨 그룹과 비교적 가까운 협력 파트너이기에 많은 사람은
가장 빈이 옆에 있어야 할 배인호와 민설아가 대체 어딜 간 거지?나는 속으로 다소 의문스러웠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노성민이 케이크 한 접시를 나에게 가져다주며 말했다.“좀 먹어요.”“고마워요.”나는 그에게 정중하고 냉정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케이크를 받아 몇 입 먹은 다음 옆으로 치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보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로아는 평소 1, 2시간은 거뜬히 잤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조금 시끄러웠다. 나는 로아가 이미 깨어났을까 봐 다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로아가 자는 방은 가장 안쪽이었고, 중간에 또 한 방을 지나쳐야 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배인호의 목소리가 그 방에서 아주 차갑게 들려왔다.“너도 불가능할 거란 거 잘 알잖아. 설아야, 난 우리 사이가 그렇게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그 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보니 그 방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그 안에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었다.민설아도 안에 있나?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좋지 않은 거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이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왜요? 빈 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주고 싶지 않은 건가요?”민설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지는 않았고,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금 이미 완전한 가정 아니야? 우리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빈이 아빠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모든 걸 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배인호의 말에서 고민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 어떠한 여지조차도 없었다.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에 배인호가 나에게 민설아는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정말 민설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나는 그 잠깐은 민설아를 동정했다. 외부에 보이는 소위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가 돌아온 후 배씨 가문이 가장 먼저 빈이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