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어요?”노성민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빈이는 나와 많이 친해졌다. 빈이는 먼저 “아줌마”라고 부르며 인사했다.하지만 빈이는 몰랐다. 나 때문에 민설아의 질책을 받을 거라는 걸 말이다.나는 빈이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엄마랑 아빠는?”“안에 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요.”빈이가 적극적으로 문을 열면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오늘은 빈이의 생일이라 방안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도우미들이 분주하게 돌아쳤고 배인호는 거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배건호는 옆에서 장난감 로봇을 만지작거렸는데 빈이에게 주려는 선물 같았다.나를 발견한 배건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지영이 왔어?”이어 배건호는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유모차에서 로아를 안아 올렸다.“로아 공주도 같이 왔네? 진짜 볼 때마다 예뻐지는 거 같네?”저번에는 꽤 부자연스러웠는데 이번에는 꽤 자연스럽게 안았다. 말투에서 로아에 대한 아낌이 느껴졌다.내가 승현이가 아닌 로아를 데려온 것도 승현이가 점점 배인호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배건호와 김미애가 또 너무 많은 걸 생각하는 게 싫었다.“어머, 지영이 왔구나.”김미애가 이층에서 나타나더니 다급하게 걸어 내려왔다. 안색은 정상이었다.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약간은 부어오른 눈시울이 울었음을 말해주었다.“아주머니.”나는 얌전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민설아는 어디 갔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중요한 날에 민설아가 자리에 없는 게 이상했다.배인호가 내 시선을 발견했지만,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병원에 일이 좀 있어서 갔어. 곧 올 거야.”내가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민설아였다. 김미애의 상황만 아니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왔으니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나는 유모차 아래에 놓인 주머니에서 게임기를 꺼내 빈이에게 건네줬다.“빈아, 생일 축하해.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뜯어봐.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네?”빈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게임을 하는
빈이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분위기가 순간 미묘해졌다.배건호와 김미애는 서로 로아를 안으려고 했다. 마치 로아를 더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도 그저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아서 그런다는 걸 말이다.“빈이야, 무슨 소리야?”민설아가 몸을 반쯤 수그린 채 두 손으로 빈이의 어깨를 잡고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연히 너를 더 좋아하지. 유일한 손주인데 어떻게 다른 애를 더 좋아하겠어. 아저씨, 아주머니, 맞죠?”민설아는 문제를 배건호와 김미애에게 던져줬다.손님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강 건너 불구경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쉽게 티 내지는 못했다.배건호와 김미애는 로아와 빈이를 번갈아 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다른 집 아이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 그랬다. 게다가 다른 집 아이를 더 좋아할 리가 없었다. 좋아한다 해도 그냥 똑같게 좋아할 뿐이다. 빈이가 첫 손주인데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 빈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연히 너를 제일 좋아하지.”김미애는 아쉬운 표정으로 로아를 나에게 돌려줬다. 배건호도 더 안기 민망한 상황이었다.그러더니 김미애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배건호와 빈이를 달래주러 갔다.빈이는 입을 삐쭉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건호와 김미애가 자기를 달래는 걸 지켜봤다. 이 부분에서 그들이 얼마나 빈이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손님 중 그 누구도 배건호와 김미애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인내심 있게 달랠 수 있는 사람은 빈이 밖에 없었다.로아는 까맣고 맑은 눈동자를 뜬 채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직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잡더니 억울한 듯 옹알댔다. 입을 오물거리는 걸 봐서는 배고픈 것 같았다.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은 빈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나는 로아를 옆에 눕혀두고 분유를 타기 시작했다.이때 노성민이 소리도 내지 않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복
어쩐지 배인호 모친 김미애가 로아를 그렇게 좋아하더라니. 아마 진짜 그 아이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 아이는 내 첫 번째 아이이다. 나도 가끔은 로아가 그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외로울까 봐 아들도 하나 더 데려와서 나를 찾아온 게 아닐까?나는 고개를 숙여 품에서 잠자고 있는 로아를 바라보았다.“그러게요. 항상 앞으로 내다봐야죠. 인호 씨도 앞으로 내다봤어요?”나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멈추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배인호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거두고 더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소리로 내 말에 답했다.“응, 앞으로 내다보고 있어.”만약 앞으로 내다본다면 나랑 다시 만날 생각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그의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실이길 바란다.“그래요, 제가 가서 아줌마 설득해 볼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전에 저한테 진짜 잘해주신 거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오전에 햇볕은 점점 강렬해졌고 나는 더 이상 여기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마 로아가 더는 견딜 수 없을 거기에, 나는 로아가 잠이 든 틈을 타 더욱 적절한 곳에 데려가 잠 좀 더 푹 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배인호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나를 향해 말했다.“2층으로 가, 2층 방에서 로아 좀 재워.”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2층 또한 매우 조용하기에 배인호 따라 일단 거실로 돌아갔다. 그 시각, 빈이는 선물을 받고 있었고 일부 현명한 사람들은 아이들끼리는 쉽게 친해지니, 일부러 자기 자녀들까지 데리고 와서 친해지게 했다. 배씨 가문에서 빈이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에 따라, 빈이 하고만 친해지면 일단 배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 환심을 사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배인호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향했고, 일부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많은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아무리 어째도 나는 5년 동안 배인호의 와이프였고, 이 사람들은 배 씨 그룹과 비교적 가까운 협력 파트너이기에 많은 사람은
가장 빈이 옆에 있어야 할 배인호와 민설아가 대체 어딜 간 거지?나는 속으로 다소 의문스러웠지만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노성민이 케이크 한 접시를 나에게 가져다주며 말했다.“좀 먹어요.”“고마워요.”나는 그에게 정중하고 냉정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케이크를 받아 몇 입 먹은 다음 옆으로 치워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보러 위층으로 올라갔다.로아는 평소 1, 2시간은 거뜬히 잤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조금 시끄러웠다. 나는 로아가 이미 깨어났을까 봐 다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로아가 자는 방은 가장 안쪽이었고, 중간에 또 한 방을 지나쳐야 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배인호의 목소리가 그 방에서 아주 차갑게 들려왔다.“너도 불가능할 거란 거 잘 알잖아. 설아야, 난 우리 사이가 그렇게 복잡해지고 싶지 않아.”그 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알고 보니 그 방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그 안에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었다.민설아도 안에 있나?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는 건 좋지 않은 거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이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왜요? 빈 이에게 완전한 가정을 주고 싶지 않은 건가요?”민설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지는 않았고,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금 이미 완전한 가정 아니야? 우리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빈이 아빠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모든 걸 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배인호의 말에서 고민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그 어떠한 여지조차도 없었다.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에 배인호가 나에게 민설아는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정말 민설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줄은 미처 몰랐다.나는 그 잠깐은 민설아를 동정했다. 외부에 보이는 소위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가 돌아온 후 배씨 가문이 가장 먼저 빈이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빈이는 있는 힘껏 나를 밀쳤고, 그때가 때마침 내가 로아를 건네주려 할 타이밍이라서 전혀 무방비 상태여서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다행히 배건호가 빠르게 로아를 받아 안아서 나도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빈아!!”배건호는 빈이를 향해 호통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는 로아를 내게 건네주더니 빈이의 팔을 잡는 것이었다.“얼른 아줌마한테 사과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어떻게 사람을 함부로 밀 수가 있어? 만약 아줌마하고 여동생이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그 모습에 빈이는 깜짝 놀란 듯했고,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민설아를 바라봤다.민설아는 조금 전 빈이가 나를 밀칠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이제야 잽싸게 나에게 걸어오는 것이었다.“빈아, 얼른 허지영 이모한테 사과해.”민설아는 배인호 부친과 같은 편에 섰고 빈이 편을 들지 않았다.그 모습에 빈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치 아주 억울한 듯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았다.나는 원래는 빈이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변한 상태였다. 빈이가 전보다는 나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나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말이다. 뭐가 어찌 됐든 결국엔 그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나한테 진짜로 원한을 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일로 인해 나는 다시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만약 이로 인해 조금 전 로아가 진짜 다치기라도 했다면, 나는 절대로 빈이가 어린아이라고 해서 그대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내가 할아버지 손자인데 왜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 난 싫단 말이야!”빈이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그러고는 배건호의 옷자락을 잡으며 이어서 말했다.“할아버지, 나 싫어진 거 아니죠?”배건호는 비록 아이를 많이 사랑한다 해도 옳고 그름에서는 절대 봐주지 않았고, 훈계할 건 반드시 훈계하곤 했다.“빈아, 할아버지는 당연히 우리 빈이 좋아하지
“빈아.”민설아는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린 듯 빈이를 바라봤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명백히 위협적이었다.나는 이것이 어떤 느낌인지 형용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눈빛을 보일 수 있는지, 그리고 이건 마치 그녀의 아이가 아니라, 말을 듣지 않는 노예인 것만 같았다.그 모습에 빈이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목을 움츠리며 가엾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나는 빈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만약 내가 끝까지 말한다면, 그는 아마 민설아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민설아에게서 꾸중을 들을 것이다.“뭐 할 말 없는데요.”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비록 내가 빈이를 싫어한다고 해도 나는 그가 민설아에게서 벌을 받는 건 원치 않았다.빈이는 마치 민설아가 정성껏 키워낸 꼭두각시처럼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민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나서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또 격노한다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그녀일 것이다.민설아와 빈이의 귀환으로 배 씨네 집안에서는 지금 매우 복잡해졌다. 나는 로아의 유모차를 밀며 바로 가려 했지만, 배인호가 나를 불러세웠다.“일단 말해봐. 민설아가 빈이에게 뭘 시켰다고?”“아빠, 마미가 나한테 뭐 시킨 거 없어요. 그러니 더 이상 오해하지 마요!”빈이는 배인호가 계속 따져 묻자 그의 다리를 잡으며 애원했다.“마미 탓하지 말아요. 네?”빈이는 말하다 결국 울어버렸다. 배인호는 자기 아들이 이러는 게 안타까웠고 표정이 살짝 부드럽게 풀렸다.그가 고민에 빠진 그 순간 나는 이미 로아를 데리고 거기에서 나왔다. 그건 그 집안의 일이라 나는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지영아, 왔어?”집에 도착해보니 엄마가 정원에서 마당 텃밭을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엄마,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빠는요?”“네 아빠는 거기서
나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 침묵으로 상대했다.“지영아, 우범이 진짜 너한테 잘해주잖아. 이런 건 제삼자가 보는 게 가장 정확해. 너 지금 상황, 우범이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면 된 거라고. 알아?”엄마의 말투는 더욱 진지해졌다.“너 혼자서 두 아이 키우는데 앞으로는 어쩔 건데? 나와 네 아빠도 이젠 늙어서 앞으로는 너 못 도와줄 텐데 말이야.”그 말은 마치 아이를 키우는 이혼녀인 나를 이우범이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안 그래도 이우범과 다퉜는데 엄마까지 이런 말을 해서 나는 더욱 화가 났다.“엄마, 저와 이우범 씨는 불가능한 거예요!”나는 홧김에 목소리 톤도 높아졌고, 밖에서 들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너, 너 왜 갑자기 이렇게 언성은 높여! 제대로 말 못 해?”엄마는 바로 나를 제지했다.“지금 우범이가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있는데,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들리면 들리는 거죠, 걱정해야 하는 건데요??”나는 목소리를 낮출 생각 없이 엄마에게 말했다.“저는 일찌감치 그 사람 거절했어요. 그 사람한테 남녀 간의 그런 감정은 하나도 없다고요. 근데 옆에서 자꾸만 우범 씨가 괜찮은 사람이니 나보고 기회 한 번 더 주라고 강요했잖아요. 이렇게 강요하면 뭐 좋은 점이라도 있어요? 그냥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뿐이라고요!”이대로 가다간 이우범이 어떤 일을 해낼지 나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 이우범이 진짜로 이상한 수단을 쓴다면, 난 아마 더 깊은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엄마도 워낙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나의 격분한 태도 때문에 엄마의 얼굴색도 순식간에 변했다.한창 모녀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있을 때쯤, 이우범의 그림자가 욕실 문 앞에 나타났다. 그의 미간은 평온해 보였고, 그 어떠한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욕실에 쭈그리고 앉아 한창 로아를 씻기고 있다가 이우범이 온 걸 본 뒤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이우범은 아마 내 말에 화가 난 듯 보였고 얼굴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분노가 보였다.하지만 나를 향해 화를 내지는 않았고, 단지 주먹을 꽉 쥔 채 인내심 있게 나를 바라보았다.“오늘 인호네로 갔죠?”갑자기 이우범이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네.”나는 부인하지 않았고, 왜 갔는지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만약 이 타이밍에 이우범이 나를 오해라도 하면 더 좋고 말이다. 내가 배인호를 놓지 못했으니, 그더러 마음 접게 하기 딱 좋은 찬스이다.역시나 이우범의 눈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을 베어버릴 수 있는듯한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한번 제대로 폭발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아마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내가 인호보다 못한 게 대체 뭔데요. 걔가 줄 수 있는 거, 나는 더 많이 줄 수 있다고요!”이우범은 다소 격앙된 듯했고, 이미 오랫동안 참아왔다는 거 또한 잘 알고 있다.나는 그의 감정에 기복이 생긴 걸 보고는 오히려 평온해지기 시작했고, 말투도 많이 차분해졌다.“배인호 씨보다 못한 게 아니라 도무지 이우범 씨를 사랑할 수 없다고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강박으로 나날을 보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범 씨도 잘 알잖아요?”전에 도시아와 약혼하라고 강요당할시, 이우범은 아마 도시아에게 관심이 없어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도 그런 기분을 알기에 내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없었고, 눈에는 실망감과 아쉬움이 강렬했다.그 눈빛은 나도 전생에 봤었고, 나에게 서란이 자신을 않는다고 했을 때 그의 눈빛은 지금처럼 이랬다.하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두 번째 서란이 되었고 그가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된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그가 진짜 사랑해서 때문인지 아니면 삐뚤어진 승리욕 때문인지 가늠이 안 갈 지경까지 다다랐다.우리 둘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탓인지 엄마는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엄마는 이우범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