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민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순간 내 시선은 무심코 배인호와 다시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에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가득 찼다.“왜 이혼하고 싶지 않은데?”정아가 되묻기도 전에 배인호가 오히려 노성민에게 물었다. 그 말투는 나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내가 잘못했으니까요. 내가 남녀 사이의 선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최소연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도움이 내 와이프가 나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었어. 이건 정아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야.”모든 일은 시작이 어렵지, 첫마디를 내뱉은 뒤 노성민은 이미 준비라도 한 듯이 그 뒤에는 술술 말을 내뱉었다.그는 용기를 내 정아를 바라보았다.“여보, 나랑 이혼 안 하면 안 돼? 나에게 기회 한 번만 더 줘. 절대 똑같은 반복하지 않을 거야.”정아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가 있었지만, 마음이 움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녀는 노성민을 잠깐 바라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노성민, 네가 나 알고 난 뒤로부터, 넌 내 성격에 대해 알았을 거야. 난 내 의견 굽히지 않아.”그 짧은 몇 마디에 노성민의 얼굴은 굳어졌다. 평소에는 철없는 귀공자가 지금은 길가에 내다 버려진 강아지같이 풀이 죽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정아가 이토록 마음을 굳게 먹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노성민이 어떻게 그녀에게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정아야, 너…”나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참았다. 왜냐하면 정아의 선택을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기로 했으니 말이다.“계속 말해.”배인호는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듯했다. 노성민은 그 몇 마디를 한 뒤 정아에게 거절당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호 형, 내가 뭘 더 말해?”노성민의 목소리는 낮고 퇴폐했다.“할 말 있으면 지금 다 말해. 지금 안 하고 이혼한 뒤에 말하려고 그러는 거야? 어떤 말은 정해진 시간 내에 말해야 그 효과도 더 발
정아는 눈물을 닦아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맞아, 나도 여왕벌이긴 했지. 지금은 왜 이렇게 약해 진 건지 모르겠어. 사랑이 인간을 죽도록 괴롭히긴 하나 봐.”나는 정아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나도 사랑 때문에 10년이라는 청춘을 소모했었다.“다 지난 일이지. 지영아, 너 먼저 집에 가. 애들이 기다리겠다. 난 혼자서 좀 걸으려고.”지금 정아의 기분은 많이 다운돼 보였다. 내가 함께 있어 주고 싶었지만 가끔 기분이 심하게 나쁠 때는 혼자서 조용히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도움이 된다.나는 할 말이 더 있긴 했지만 정아가 유모차를 밀며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햇빛 사이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빛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가 비쳐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팠다.배인호와 노성민은 얘기를 나누느라 아직 나오지 않았다.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휙 지나가는 작은 그림자가 왠지 빈이 같았다.확실하지 않아 차에 타서 10초 정도 기다려보니 역시나 빈이가 튀어나왔다. 빈이는 자기의 손목시계를 보며 수상쩍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빈이의 주위에 민설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혹시 배인호가 데려온 것일까? 하지만 배인호가 빈이를 혼자밖에 놔둘 가능성은 없었다.가끔 나는 빈이가 조금 싫었다. 너무 장난꾸러기이기도 했지만 민설아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아 막무가내일 때가 많았다. 그것들이 나는 조금 불편했지만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배인호에게 빈이를 데려가라고 연락하려는데 빈이가 갑자기 횡단보도로 달려갔다. 신호등도 보지 않고 다급해 보였다. 한 빨간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빈이는 차에 치일 뻔했다.빈이도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더니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누구 집 애야? 죽으려고 환장했어?”빨간 차량의 주인은 큰 목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 중에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나는 전화를 할 새도 없이 재빨리 달려갔다. 사람들 사이를 뚫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빈
만약 배인호의 지력에 문제가 없다면 나의 어이없는 눈빛의 뜻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나를 왜 쳐다보고 있는 거지? 우리는 부부가 아니고 셋이 한 가족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거절하면 될 것을.’결국 빈이가 입을 열었다. 빈이는 매우 기분 나빠하며 판매원에게 말했다.“아줌마, 왜 아무 말이나 막 해요? 이 아줌마는 우리 마미 아니에요. 근데 이 사람은 우리 아빠예요.”빈이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입술을 삐쭉이며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판매원은 놀라더니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론이 좋지 않은 듯 갑자기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다른 판매원과 눈빛을 교환했다.“그러시군요. 저희가 잘못 봤습니다.”판매원은 화보집을 가지고선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배인호는 빈이의 손을 잡고 멀지 않은 곳에서 따라왔다. 내가 두 판매원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의 귓속말이 들려왔다.“저런 여자는 정말...”“그러게, 남자가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는데 저 여자는 부끄럽지도 않나?”“저 남자 멋있고 돈도 많아 보이니까 들이대는 거겠지.”서로 얘기를 나누더니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내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녀는 당황하며 서둘러 나에게서 멀어졌다.그런데 나는 이미 들었다. 이런 모욕적인 얘기를 어떻게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있을까?“거기 서!”나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 정확히 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췄지만 나를 돌아보더니 곧바로 앞으로 걸어가며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의 스튜디오가 있었다.두 사람이 곧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 나는 재빨리 문 앞으로 다가가 그녀들의 앞을 막아섰다.배인호는 상황을 보더니 빈이를 데리고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두 사람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요.”나는 배인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강렬한 눈빛으로 두 판매원
“아빠, 마미가 알면 화낼 거예요.”차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배인호에게 말하는 빈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빈이는 꽤 진지하게 배인호에게 말하고 있었다.“마미가 질투할 거예요. 아빠 어떻게 다른 여자를 도와줄 수 있어요?”어린아이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너 아직 아빠한테 어떻게 혼자 뛰쳐나왔는지 안 알려줬어. 할머니 할아버지가 널 찾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배인호의 반문에 빈이는 입을 다물었다.빈이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 먼저 갈게요.”나는 배인호에게 말한 뒤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보는 눈이 없는 두 판매원 때문에 화가 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배인호와 빈이의 대화는 사실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와 먼저 승현이와 로아 부터 챙겼다. 그다음에 스튜디오에 관한 정보들을 검색했다.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스튜디오는 비열한 수단으로 고객들을 유인했다. 전에도 제주도의 매체에서 한번 터트렸지만 어떠한 논란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묻힌 것 같았다.그렇다면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나는 계속 스튜디오 배후에 있는 사장의 정보를 수집했다. 낱낱이 파헤친 덕분에 익숙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우지훈이었다.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한동안 이 이름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나는 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란이 감옥에 간 이후로 유정은 내가 준 돈으로 고향에 내려갔다. 하여 우지훈이 어디에 있는 것까지 나는 신경 쓰지 못했다.설마 아직도 배씨 그룹에 있는 것일까? 전에 배인호에게 말해준 적은 있었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을까?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직감했다. 원래 스튜디오의 최대 주주는 우지훈이 아니었다. 그는 반년 전에 양도받았다.한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지훈이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배인호에게 다른 마음이
냥이가 왜 이렇게 초췌해졌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런 환자를 한 명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들에게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냥이는 무거운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슬퍼하진 않았다. 아마도 이미 여러 차례 이런 위험한 상황을 겪은 상태라 무감각해진 것 같았다.나는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묵묵히 옆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이때 병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배인호였다.그가 왜 여기 있는 걸까?냥이는 배인호를 보더니 피곤한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배인호와의 재회 때문인지 아니면 배인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인지는 모르겠다.“인호 씨, 정말 왔네요.”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보자 눈에 띄게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아버지는 좀 어때?”배인호는 아무 감정도 없이 병상에 누워 있는 진덕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보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아요.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면 아마...”냥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나 혼자 아빠를 간병하고 있어요. 아빠의 좋은 부인은 코빼기도 얼굴을 비추지 않네요.”인간의 마음은 얄팍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도 그 사람에게서 진심 어린 보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진덕호는 냥이에게 잘해주었다. 최소한 아버지로서 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딸에게 남겨줄 것은 아까워하지 않고 모두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냥이가 지금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진덕호는 배인호에게 몇 마디 말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으니 눈빛으로 나약하게나마 인사를 건넸다.냥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와 진덕호의 앞에서 다시 한번 배인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배인호 씨, 절 좀 도와줄 수 없어요? 민 선생님께 아빠를 한 번 봐달라고 얘기해 주세요. 한의학 의술에 능하다면서요. 어쩌면 한의학으로 치료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배인호는 미간을 찌푸
배인호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몇 초 동안 바라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먼저 물어봐.”나는 이우범과 민설아에 대해 묻고 싶었다.전부터 두 사람에게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 늘 의심해 왔지만 증거가 없었다. 나는 바보처럼 그들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민설아가 처음에 이우범을 좋아했다는 거 인호 씨도 알고 있죠?”이게 나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첫 질문이었을 뿐인데도 배인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 당신 배인호와 이우범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결국 자기 친구를 좋아했던 여자와 사귄 것인데 조금 부적절해 보였다. 게다가 민설아가 이우범의 마음을 얻지 못해 일부러 배인호를 만나 이우범을 자극하기 위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배인호가 애초에 이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민설아와 사귄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응.”배인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대답을 거부하진 않았다.“계속 물어봐.”“두 사람 아이는 어땠는데요?”나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그때? 아니면 지금?”“지금이요.”나의 대답에 배인호의 눈빛이 뜻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허벅지의 탁탁 털며 일어났다.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나를 내려다보았다.“뭘 의심하는 건데? 이우범과 민설아가 어떤 사이라도 될까 봐 의심하는 거야?”당연히 아니다. 만약 이우범이 나를 포기한다면 나는 오히려 후련했다. 지금 상황은 그가 나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민설아의 사이가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두 사람이 단둘이 만나는 장면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뒤에서 늘 서로 연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배인호는 이미 내가 두 사람을 부적절한 사이로 의심하고 있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싸늘해졌다.“이제 보니 이우범이 정말 좋아졌나 봐. 신경 쓰기 시작하면 질투도 하잖아.”“?”나는 의문이 들었다.“하긴 두 사람 사이에 두 아이도 있는데 어떻게 아무 감정도 없을 수
“민설아.”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배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엄숙한 말투로 강렬하게 경고했다.“그만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민설아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금 그녀의 말은 분명히 나를 적대시하는 말이었다. 말 속에 담긴 비웃음과 허세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그녀가 아무리 아닌 척 연기 하더라도 배인호에게 감정이 있고 소유욕을 느끼는 이상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모두 겪는 슬픔이다. 나도 예전에 다 겪어 봤다.“미안해요. 난 단지 집에 초대하고 싶어서요. 방금 내가 한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영 씨가 몇 년 동안 인호 씨를 위해 헌신해 준 게 너무 감사해요.”민설아는 배인호에게 해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까지 자기가 통제하려 했다.그제야 배인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럴 필요 없어.”“네, 알겠어요.”민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배인호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 로비에 동료들은 때때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힐끗거리곤 했다. 모두 놀라며 민설아를 부러워했다.사람들의 이런 눈빛은 한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민설아는 배인호를 병원 문 앞에 있는 차가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나와 배인호가 또 단둘이 있을까 봐 출근 중인데도 직접 차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아까 냥이를 따라 병실에 온 것도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은연중에 그래도 내가 냥이에게 도움울 주긴 했다.“운전 조심해요.”민설아는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끔 너무 빨리 운전하잖아요. 이젠 그러지 말아요.”“알겠어.”배인호의 평소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떠한 친밀한 느낌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바로 옆에 있던 차에 오른 뒤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를 몰고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용건 있으면 전화로 하세요.”내 태도는 미지근했다. 우지훈을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우지훈은 포기하지 않았다.“한 번 만나죠. 친하진 않지만 어쨌든 친구잖아요. 원래는 이틀 뒤에 전 여자 친구 고향에 놀러 갈 예정이었는데 지영 씨 덕분에 여기 남아서 일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어요.”방금까지 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는데 우지훈이 유정을 찾아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흥분했다.“이미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찾아가서 뭘 하려고요? 우지훈 씨, 유정 씨한테 이미 충분히 잔인한 짓을 저질렀잖아요?”나는 유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예전에 우지훈의 어이없는 행동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뜻밖에 우지훈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웃었다.“그 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난 헤어지고 싶었는데 유정이가 죽어도 헤어질 수 없다고 해서요. 지영 씨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란이었어요.”이제 배인호와 사이가 틀어졌으니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의 악랄함을 숨기지 않는 것일까?나는 배인호가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위에 한두 명 정말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모두 하나 같이 독한 사람들이었다. 역시 인간은 끼리끼리 노는 것이 맞았다.“그래서 지금 유정 씨를 찾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내가 다시 물었다.마지막에 유정은 나를 도와줬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고향으로 가서 조용히 지내라고 설득했다. 만약 우지훈이 그녀를 찾아가서 괴롭힌다면 뭔가 그녀를 해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우지훈의 말투는 갑자기 악랄해졌다.“유정은 충분히 나쁜 짓을 했어요. 내가 가서 따지지 않으면 어떻게 이 분노를 참을 수 있겠어요?”“우지훈 씨, 지금 유정 씨가 날 도와준 걸 말하고 싶은 건가요?”마음속에 위험한 신호가 울렸다. 심지어 우지훈이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제주도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내가 서란을 폭로했기 때문에 지금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