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설아.”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배인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엄숙한 말투로 강렬하게 경고했다.“그만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민설아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금 그녀의 말은 분명히 나를 적대시하는 말이었다. 말 속에 담긴 비웃음과 허세는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그녀가 아무리 아닌 척 연기 하더라도 배인호에게 감정이 있고 소유욕을 느끼는 이상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모두 겪는 슬픔이다. 나도 예전에 다 겪어 봤다.“미안해요. 난 단지 집에 초대하고 싶어서요. 방금 내가 한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영 씨가 몇 년 동안 인호 씨를 위해 헌신해 준 게 너무 감사해요.”민설아는 배인호에게 해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까지 자기가 통제하려 했다.그제야 배인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럴 필요 없어.”“네, 알겠어요.”민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배인호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 로비에 동료들은 때때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힐끗거리곤 했다. 모두 놀라며 민설아를 부러워했다.사람들의 이런 눈빛은 한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민설아는 배인호를 병원 문 앞에 있는 차가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나와 배인호가 또 단둘이 있을까 봐 출근 중인데도 직접 차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아까 냥이를 따라 병실에 온 것도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은연중에 그래도 내가 냥이에게 도움울 주긴 했다.“운전 조심해요.”민설아는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끔 너무 빨리 운전하잖아요. 이젠 그러지 말아요.”“알겠어.”배인호의 평소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떠한 친밀한 느낌도 들리지 않았다.나는 바로 옆에 있던 차에 오른 뒤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를 몰고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용건 있으면 전화로 하세요.”내 태도는 미지근했다. 우지훈을 만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우지훈은 포기하지 않았다.“한 번 만나죠. 친하진 않지만 어쨌든 친구잖아요. 원래는 이틀 뒤에 전 여자 친구 고향에 놀러 갈 예정이었는데 지영 씨 덕분에 여기 남아서 일들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어요.”방금까지 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는데 우지훈이 유정을 찾아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흥분했다.“이미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찾아가서 뭘 하려고요? 우지훈 씨, 유정 씨한테 이미 충분히 잔인한 짓을 저질렀잖아요?”나는 유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예전에 우지훈의 어이없는 행동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뜻밖에 우지훈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웃었다.“그 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난 헤어지고 싶었는데 유정이가 죽어도 헤어질 수 없다고 해서요. 지영 씨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서란이었어요.”이제 배인호와 사이가 틀어졌으니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의 악랄함을 숨기지 않는 것일까?나는 배인호가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위에 한두 명 정말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모두 하나 같이 독한 사람들이었다. 역시 인간은 끼리끼리 노는 것이 맞았다.“그래서 지금 유정 씨를 찾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내가 다시 물었다.마지막에 유정은 나를 도와줬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고향으로 가서 조용히 지내라고 설득했다. 만약 우지훈이 그녀를 찾아가서 괴롭힌다면 뭔가 그녀를 해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우지훈의 말투는 갑자기 악랄해졌다.“유정은 충분히 나쁜 짓을 했어요. 내가 가서 따지지 않으면 어떻게 이 분노를 참을 수 있겠어요?”“우지훈 씨, 지금 유정 씨가 날 도와준 걸 말하고 싶은 건가요?”마음속에 위험한 신호가 울렸다. 심지어 우지훈이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제주도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내가 서란을 폭로했기 때문에 지금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결국 나는 이우범이 동행하는 것을 동의했다.우지훈이 내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아무도 몰랐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우범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올 것이다.우리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9시였다.우지훈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어두운 분위기가 더 느껴졌다. 특히 두 눈이 독사를 연상시켰다.나는 그가 왜 이런 사람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배씨 집안에서 자라 배인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뒤에서 배인호의 등에 칼을 꽂았다.그 점이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이우범과 배인호가 사이가 틀어진 것은 최소한 여자 때문이었지만 우지훈은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오랜만이에요.”나를 보고 우지훈이 미소를 지었다. 말투가 꼭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와 단지 아는 사이일 뿐 오랜 친구가 아니었다.“네, 오랜만이에요. 만나서 하려는 얘기가 뭐죠?”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니 이미 찻물이 담겨 있었다.우지훈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우리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되잖아요? 아닌가? 나도 다른 사람처럼 지영이라고 불러도 돼요?”우지훈 입에서 친밀한 호칭이 나오자 나는 역겨움을 느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우지훈은 내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이어서 말했다.“지영 씨, 스튜디오에 관한 일 때문에 한번 만나자고 한 거예요. 갑자기 왜 그런 일은 벌인 건지 모르겠네요. 전에 우리 스튜디오 사람이 지영 씨한테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이제 보니 임 매니저는 내가 버린 짓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지훈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네. 스튜디오 본사에 임 매니저와 직원 두 명이 내게 잘못을 저질렀죠. 너무 기분이 나빠서 이렇게 했어요. 별문제 없을 줄 알았거든요.”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말했다.분풀
나는 우지훈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 사건을 내가 그의 앞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그는 꼭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그런 불상사는 피하고 싶었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일상에 영향을 주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나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일을 중단하라고 했다. 그제야 우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그럼, 이 일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난 유정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역시나 우지훈의 용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물었다.“지영 씨가 유정을 고향에 내려보낸 거예요?”“난 몰라요.”나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어요.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난 이미 유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저 지영 씨한테 한 번 더 확인하는 거예요. 모두의 시간은 귀한 거니까요. 허탕 칠 순 없잖아요.”우지훈은 정말 뻔뻔하게 자신의 목적을 얘기했다.그는 유정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비웃었다.“그럼 나한테 물어봐도 소용없겠네요. 나도 몰라요. 만약 유정이 찾으러 갈 거라면 그렇게 해요. 우지훈 씨도 알다시피 유정은 내게 잠깐 이용하던 도구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예전에 그녀가 나를 대한 것처럼 우지훈 씨가 유정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난 신경 쓰지 않아요.”“이런 걸로 날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라면 완전히 잘못된 계획이에요.”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지훈은 바로 더 싸늘해졌다.“내가 유정을 가지고 지영 씨를 협박하는 게 아니라 두 아이를 데리고 협박하는 거라면요? 듣자 하니 이우범하고 함께하게 됐다면서요. 두 사람이 아이까지 두 명 낳았다던데 맞죠?”그 말에 나의 분노는 순간적으로 끓어올랐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애들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우지훈 씨, 너무하네요. 나하고 무슨 원수를 진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장담하는데 만약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해줄 거예요.”나는 자리에
“우지훈 너 죽고 싶어!”원래 배인호는 민설아와 빈이에 의해 멈췄었다. 하지만 우지훈의 말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과 같았다. 배인호의 이마에 핏줄은 터질 것 같았고 눈빛에 살기가 무서웠다.만약 그가 정말로 우지훈을 죽인다고 해도 이제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배인호는 우지훈의 팔을 세게 발로 찼다.우지훈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내면서도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민설아가 다시 한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배인호를 제지했다.“인호 씨, 정신 차려요. 지금 허지영 씨를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봐요.”그 말에 배인호 멈칫하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이우범의 품에 안겨 있었다.지금 옷도 반쯤 찢겨있는 상태라 이우범의 품에 숨어 있지 않았다면 정말 다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내 마음속의 두려움도 사라지지 않았기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때 너무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하지만 그의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과 꽉 움켜쥔 주먹이 천천히 풀리는 것을 지켜보았다.지금은 나와 이우범이 커플이었다.배인호는 나를 위해 나설 자격조차 이우범에게 먼저 양보해야 했다.“하하하...”우지훈이 또 웃었다. 그는 일부러 배인호를 자극했다.“배인호 너도 참 불쌍하네. 허지영은 이우범하고도 자고 나하고도 거의 할 뻔했는데 아쉽네.”이번에는 배인호가 움직이기 전에 이우범이 나를 옆에 있던 여자 직원에게 맡기고 나섰다. 화를 내며 허리를 숙여 우지훈의 옷깃을 잡아 일으키더니 주먹을 날렸다.우지훈은 피를 토하며 이빨 두 개도 함께 뱉어냈다.그가 아무리 체격이 좋다고 해도 배인호와 이우범의 공격을 모두 견뎌 낼 수는 없었다.“너 한마디만 더 해봐. 영원히 입 다물게 해줄 거니까.”이우범은 우지훈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나...”우지훈은 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보였지만 한순간에
나는 한시름 놓았다. 로아와 승현이만 떼를 쓰지 않으면 된다. 같이 떼를 쓰면 달래기 힘들었다.한참 대화하다가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우범도 마침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안경에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맑고 정교한 눈만 보였고 여전히 쌀쌀했다. 어젯밤 우지훈을 대하던 그 험악한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이우범과 배인호는 다 완벽한 겉모습을 가졌다. 있는 집 도련님의 아우라란 타고난 것이다.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는 그 누구도 그들이 화났을 때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요즘 너무 바빠서 몸이 이렇게 약해질 때까지 챙겨주지 못했네.”이우범이 내 침대 옆에 앉더니 자책했다.“이건 우범 씨 책임이 아니에요. 몸이 원래 약해서 그래요. 전에 지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희선 언니와 둘이 보살피느라 좀 피곤했나 봐요. 좀 휴식하면 돼요.”나는 오히려 이우범을 위로해 줘야 했다.“인호 말이 맞아요. 지금 주변 사람들 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면 남자로서 잘 챙겨주고 보호해 줘야 해요. 앞으로 그럴 수 있게 온 힘을 다할게요.”안경 너머로 이우범의 두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매혹적이었다.나는 조금 난처했다. 이우범과 진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이 오해하는 것뿐인데 이런 허황한 명분 때문에 나를 보살펴주겠다고 하니 말이다.아무리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이우범이 더 많이 해줄수록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하지만 나도 이우범 보고 지금 당장 포기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우범 씨, 저기...”나는 잠깐 텀을 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인호 씨와 자꾸 맞서지 마요. 특히 주먹다짐은 더 안 돼요.”이우범은 마스크를 끼고 있어 입가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무조건 상처가 나 있을 것이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질투가 섞인 말투로 물었다.“인호가 먼저 손찌검한 거예요. 지영 씨는 아직도 인호를 더 챙기는 거죠?”배인호를 더 챙기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이
내 말은 민설아의 아픈 점을 찌른 거나 마찬가지였다.사실 연인 사이에 그렇게 오래 헤어졌는데 감정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이까지 없다면 두 사람은 아마 이렇게 빨리 재결합하지 못했을 것이다.다른 걸 떠나서 배인호는 이런 부분에서는 책임감 넘쳤다.“아이는 그냥 하나의 중요한 이유일 뿐이에요. 나와 인호 씨 사이의 감정, 당신은 모를 거라고요.”민설아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지만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지영 씨는 그때 인호 씨와 내가 몇 달밖에 안 만났고 시간도 길지 않은데 감정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냐고 생각하겠죠. 근데 감정의 깊이는 시간이 아니라 느낌이에요. 이건 지영 씨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민설아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입가에 번진 웃음은 거의 넘쳐날 지경이었다.배인호를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결국 나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만약 환생하지 않았다면 그냥 전생의 그 결말을 유지했을 것이다.그래서 나도 감정은 시간으로 좌우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내가 잘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민 선생님 본인이 둘 사이가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면 되는 거예요.”내 마음은 지금 고요한 물처럼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나는 민설아가 한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일부러 나를 자극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네, 내가 인호 씨는 제일 잘 알죠.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되게 일편단심인 사람이에요.”민설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배인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털어놓았다.“그리고 인호 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마음이 여린 사람인 걸요. 지영 씨를 놓고 봐도 그때 엄청 미안해했어요.”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민설아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뱉는 단어는 다 아는 단어였지만 조합하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민설아는 어리둥절해하는
민설아가 오늘 온 목적은 나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정교하고 귀여운 작은 선물함을 꺼냈다. 위에는 하늘색 곰과 7살 생일을 축하한다는 영문 그림도 있었다.“다음 주 빈이 7살 생일이에요. 인호 씨와 같이 빈이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주려고 하는데 지영 씨도 와요.”이 말을 하는 민설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7살, 배인호와 결혼하고 5년, 이혼하고 또 2, 3년을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이미 7살이 되었다.“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참석은 됐어요. 선물함은 도로 가져가요.”나는 전혀 흥미가 나지 않았다.“그건 지영 씨가 알아서 하면 돼요.”민설아도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머리를 정리하더니 가기 전에 몇 마디 더했다.“허지영 씨, 이미 당신을 아껴주는 남자가 있으면 다른 남자는 멀리해요. 앞으로 될수록 엮이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정말 고마울 텐데.”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직도 나를 연적으로 생각하고 큰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내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서란과 민설아가 이 정도로 견제하는지 모르겠다. 배인호와 결혼한 5년간 내가 생과부처럼 지낸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민설아가 가고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았다.지금 창밖은 해가 쨍쨍했다. 점심때라 하루 중 햇빛이 제일 강한 때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창밖의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고는 배달을 불러 굶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 이우범은 점심에 로아와 승현이를 보러 간다고 했으니 내 점심까지 챙길 리가 없다.“형수님!”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얗고 포동포동한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가 웃으며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이 선생님이 밥 가져다주라고 부탁하셨어요. 우리 병원 관계자 식당에서 사 온 건데 깨끗하고 건강해요. 조금 드셔보세요.”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배인호가 동료에게 부탁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