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배인호는 내 말뜻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아까 여기서 일어난 일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나는 민설아가 빈이를 찾으러 와서 신고까지 한 일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의 안색도 점점 어두워졌다.“아무튼 큰일 해줬으니까 우리 거래는 여기서 끝이에요.”나는 이제 가라고 손짓했다.“돌아가서 민설아 씨한테 잘 설명해 봐요. 오해하게 하지 말고.”“너 전화했을 때 나 회의 중이어서 못 들었어.”배인호는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오히려 내게 설명했다.그가 바쁜 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한번 일하면 내가 거의 죽는다고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나는 진작부터 이런 상태에 적응했지만, 민설아는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이 문제는 민설아 씨한테 설명해요. 민설아 씨도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그런 오해가 생긴 거예요.”나는 좋은 마음에 귀띔했다.“설아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나만 자초지종을 알고 있으면 돼.”배인호의 태도는 너무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이 일을 신경 쓰는 것도 아니면서 왜 나를 찾아왔는지 의문이었다.지현이는 거실에서 내가 분유를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배인호에게 지현이가 여기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아이의 울음소리가 거실에서부터 전해졌다. 나는 이 이유를 핑계로 말했다.“다른 일 없으면 나는 분유 주러 가볼게요. 이만 가봐요.”“응.”배인호가 이렇게 말하더니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거실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지현이는 무슨 원인인지 모르게 토했고 토사물이 코에 들어가 고통스러움에 얼굴이 빨개 있었다.나는 재빨리 지현이를 안아 입과 코에 묻은 오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지현이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고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직 분유를 먹이기 전이라 분유 때문에 사레가 들려서 토한 건 아닐 텐데.’장희선도 소리를 듣고는 달려 나왔다. 그녀는 나보다는 경험이 많은지라 단번에 지현이의 위장에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하고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로아와 승현이는 아직 자고
“네가 높이 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으로 바꿔.”배인호는 인정사정없이 다시 거절했다.노성민은 침묵을 지키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오케이, 알았어.”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불안하던 내 마음도 따라서 놓였다. 배인호가 노성민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지금 바로 옆에 내가 지현이를 안고 앉아있는데 말이다.하지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품속에 안은 아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가는 길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아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정아더러 결정하라고 할까도 생각했다.“도착했어.”집 앞에 도착하자 배인호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네, 오늘 고마웠어요.”나는 지현이를 안고 차에서 내리며 인사했다.배인호는 차창을 통해 품에 안은 지현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는 나를 몹시 긴장하게 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다 해서 이후에도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면서 바로 노성민에게 알려줄 수도 있다.나는 이런 불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배인호의 차도 집 앞을 떠났다.장희선은 아이의 상황을 물었다. 나는 약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알려주고는 로아와 승현이를 보러 갔다. 둘은 얌전하게 잘 놀고 있었다. 웅얼대는 것 외에 작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백지장처럼 단순하고 귀여웠다.이 아이들만 보면 나빴던 기분도 좋아졌다. 아이들만 내 옆에 있으면 모든 것이 희망찼다.——나는 지현이가 우리 집에 있다는 걸 배인호가 알게 되었다고 정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정아가 알게 되면 그쪽에서 하는 일을 영향 줄까 봐 걱정됐다.며칠 속을 졸였는데도 노성민은 집으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자 내 마음도 천천히 놓이기 시작했고 이 일을 까맣게 잊어먹었다.“아가씨, 로아와 승현이 데리고 바람 좀 쐬고 올게요.”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고 장희선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유모차를 끌고 나와 내게 인사했다.“그래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이가 사람들 눈에 띄
“정아가 그러라고 시킨 거죠? 맞죠?”결국 노성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투에는 정아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나는 그저 이 상황이 애처로울 뿐이었다.“노성민 씨, 정아가 뭘 잘못했는데요? 최소연보다 못한 게 뭐죠? 그 정도로 불만을 느낄 만큼 그 여자가 좋은 거예요?”노성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말했을 텐데요. 최소연과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근거 없이 날 의심한 건 당신들이에요. 있지도 않은 일 가지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 데 계속 참고만 있으라고요?”“그럼, 전에 최소연 씨 없을 때는 왜 그렇게 잘 참았어요? 정아가 어떻든 다 받아줬잖아요. 네, 맞아요. 최소연과 실질적인 관계가 생긴 건 아니죠. 근데 최소연이 나타남으로써 정아에 대한 인내심이 대폭 줄어든 건 맞잖아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나는 언성을 높이며 계속 캐물었다. 눈빛은 노성민에 대한 질책과 차가움으로 가득했다.노성민이 이를 악물었다.“이런 소리 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에요. 지현이 내놓지 않으면 신고할 거예요.”또 신고라니, 며칠 전 민설아도 나를 아동 유괴범이라고 신고하겠다 그랬는데 노성민도 신고한다면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짜 경찰에게 유괴범으로 의심받을 것이다.“성민 씨, 진짜 정아와 이혼하고 싶은 거예요?”나는 노성민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이 일에 대한 노성민의 태도는 명확했다.“아니요. 이혼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정아에요. 저는 그냥 정아가 이렇게 근거 없이 억지 부리는 걸 못 참겠다는 거고요.”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걸 봐서는 노성민은 아직 이 결혼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나는 마음속으로 몰래 한시름 놓았다. 만약 노성민이 이런 명확한 문제에서 주저한다면 나는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혼하고 싶지 않다면 일단 최소연 씨부터 해결해요. 지금 이미 홀려 있어요. 알아요?”나는 일부러 천천히 인내심 있게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정아는 너무 성민 씨를 소중히 여기니까 최소연 씨와의 일을 그렇
“나도 인호 씨일 거라 생각했어요. 성민 씨가 톡 까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로 봤을 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에요.”나는 유유히 대답했다.“그냥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에요. 성민 씨 무조건 다시 찾아올 거예요.”이우범이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정아 씨에게 알려주는 게 어때요? 정아 씨가 지현이 엄마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아 씨가 결정해야죠.”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아에게 알려줬다가 겁에 질려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이었다.망설이는데 배인호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 내 마음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전화는 왜 했는지 궁금했다. 노성민이 성공적으로 아이를 뺏어갔는지 물으려고 그러는 건지 싶었다.나는 바로 배인호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문자를 보내왔다. 아니나 다를까 노성민과 관련된 문자였다.「성민이가 찾아갔었어?」나는 문자를 씹었다. 이우범은 내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끼고는 눈치 빠르게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알아챘다.“인호예요?”“네, 성민 씨 물어보려고 그러는 거겠죠.”나는 부정하지 않았다.“왜 안 받아요?”이우범이 또 물었다.“받을 필요 없어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따져도 의미 없어요.”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나와 배인호는 지금 아무 관계도 아니었기에 그에게 왜 그랬는지 따져 물을 입장과 신분이 아니었다.하지만 배인호는 기어코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켜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우범이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이우범이 다짜고짜 차갑게 캐물었다.스피커폰을 켜지 않았기에 나는 이우범이 하는 말만 들렸고 배인호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들리지 않았다.“네가 무슨 말을 해도 지영 씨는 믿지 않을 거야. 끊을게.”이 말과 함께 통화도 끝났다.이우범은 핸드폰을 내게 돌려주면서 말했다.“가끔은 질질 끌 필요
“사람 됨됨이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당신과 성민 씨 관계가 있으니까 성민 씨에게 알려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로 당신 원망할 생각도, 책임지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고요. 이제 알겠어요?”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설명했다.“문부터 열어.”배인호는 이렇게 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대화하는 게 만족스럽지 않은지 문을 두드리며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성민이가 정원 문 부쉈다면서, 거실 문도 망가지고 싶으면 그러든지.”이건 협박이었다.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협박은 안 통해요. 자꾸만 이렇게 찾아오는 거 민설아 씨도 받아들인다면 계속 내키는 대로 해요. 근데 또 빈이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지면 그때 가서 내 탓 하지 마요.배인호가 나를 협박하면 나도 그를 협박하면 된다. 민설아에게는 책임감만 느낄 수 있지만 빈이는 아닐 수도 있었다.내가 민설아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민설아는 무조건 난리를 피우지 않으면 바로 빈이를 데리고 떠날 수도 있다.내 협박이 먹혔는지 배인호도 조용해졌다.2, 3분쯤 지나자 나는 배인호가 간 줄 알고 문을 열어 상황을 확인했다. 그 결과 문을 열자마자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배인호를 발견했다. 누가 돈이라도 뜯어간 것처럼 어두운 표정이었다.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아직도 안 갔어요?”“이제는 설아와 빈이를 가지고 나를 협박하네? 허지영, 간덩이가 부었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야?”배인호가 입을 열더니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이쯤이면 장희선도 지현이 샤워를 거의 끝낼 시간이었다. 나는 아예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는 말했다.“가요. 밖에서 얘기해요. 애들 잘 시간이라 떠들면 안 돼요.”배인호는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장서서 장렬히 희생된 우리 집 대문을 넘어 밖으로 향했다.나는 배인호 뒤를 따라 근처 큰 가로수 아래까지 걸어갔다. 거기에는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평소 사람들이 앉아서 쉬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배인호는 앉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허지영 씨, 말 가려서 해요. 날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예요?”최소연이 화를 내며 반박했다.“난 그저 이미 노 대표님 데리러 왔으니까 온 김에 데려다주려고 한 거예요. 당신들 번거로울까 봐. 이것도 잘못된 거예요?”이런 얄팍한 수를 두고 더 입씨름 하기가 싫어 나는 입을 열었다.“번거롭고 아니고는 내가 결정해요. 앞으로 유부남과 거리 유지 좀 하시죠. 남자가 고프면 혼인 상담소 가세요.”최소연은 몇 초간 침묵했다. 아마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말을 이어갔다.“주소 말해요. 지금 바로 갈 테니까.”나의 재촉하에 최소연은 술집 주소를 하나 말해줬다. 나는 배인호에게 눈짓했다.“당신이 가서 데려다줘요. 나는 집에서 아이 봐야 해요.”“베이비시터 있잖아.”배인호의 말은 나도 같이 가자는 말이었다.“혼자 안 돼요. 책임지고 노성민 데려다줘요. 최소연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요.”나는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지금 내 기분은 정말 너무 엉망이었다. 마치 내가 배신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배인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나와 같이 가. 성민이 취했으니까 이 기회에 확실하게 물어보면 되잖아. 지현이가 여기 있는 거 누가 알려준 건지. 맨정신이면 나와 짰다고 생각할 거잖아.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 하는 말은 사실일 거야.”나는 가끔 배인호가 일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혀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포인트에서 노성민을 찾아 자기 결백을 주장하려 했다. 나도 사실 배인호가 그리 미덥지는 않았다. 만약 혼자 보내면 진짜 노성민을 잘 데려다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소연이 기회를 찾아 따라붙을 수도 있다.정아의 가정을 위해서 나도 신중해야 했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장희선은 이미 지현이 샤워를 마쳤다. 로아와 승현이도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다.“그럼, 애들 자다 깨면 다시 샤워시킬게요.”장희선이 말했다.마침 잘됐다. 로아와 승현이는 잠들면 한두 시간
최소연의 주소를 얻어낸 나와 배인호는 운전하여 그 장소를 향해갔다.이곳은 상업 아파트라 출입이 비교적 쉬웠다. 나는 최소연의 아파트 번호 수를 찾은 뒤 바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설마 집에 없는 건가? 아니면 호텔에라도 갔나? 나는 그들이 옷을 걸치지 않거나 이상한 화면을 보는 순간 그걸 찍어 정아에게 전달해 주기로 했다. 게다가 노성민 쪽이 과실 측으로서, 이혼소송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전에는 노성민이 실질적으로 바람피우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정아더러 그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라고 권유했지만 지금은 달랐다.배인호는 노성민에게 전화를 걸었고, 문에 내 귀를 가져다 대자 역시나 집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안에 있었어!한창 어떻게 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배인호가 나에게 전화를 건네주었다. 전화를 확인해 보니 진경호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고, 그는 여전히 최소연네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나는 얼른 보내온 문자 메시지대로 비밀번호를 눌렀고, 그 문은 곧바로 열렸다.집안에는 거실 하나, 방 하나의 구조로 되어있었고, 때마침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에서는 최소연이 샤워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했다.이때 물소리가 갑자기 멈췄고, 그와 동시에 노성민의 전화벨 소리도 울리기 시작했다.최소연은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뒤 욕실에서 걸어 나왔고, 문 입구 쪽은 쳐다보지 않은 채 바로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의 노성민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깊은 잠에 든 상태였다.그녀는 우리를 등지고 선 채로 노성민의 핸드폰을 한번 보더니 전화를 받는 것이였다.“어머, 미안해요, 정아 씨. 노 대표가 잠에 들었--”최소연이 입을 여는 순간 그 전화는 정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란걸 알게 되었다.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단번에 최소연손의 전화기를 빼앗았고, 그녀는 나와 배인호가 여기에 있는 게 믿
최소연은 내 말에 욹으락 붉으락 하며 눈까지 빨개졌다.하지만 그 모든 건 그녀가 초래한 것이다.“선택해요. 더는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요.”나는 최소연에게 얼른 답하라고 재촉했다.하지만 최소연은 여전히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전 선택 안 해요. 전 잘못한 거도 없거니와, 이따 노 대표가 깨어나면 제 억울함을 풀어줄 거라고요!”노성민이 잠에서 깨고 직면해야 할 건 아마 정아라는 폭풍우일 것이다. 나는 이 증거를 정아에게 보내줄 예정이고, 그때 가서는 노성민이 과연 어떻게 자기 아들을 두둔할 것인지 다시 지켜봐야겠다.나는 더는 길게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요. 하루 생각할 시간 더 줄게요. 내일 저녁 12시 전에도 만약 답이 없으면, 조금 전 이 영상은 아마 각종 사이트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나한테 있어 당신 같은 사람 대응하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요.”“당신 사람 그렇게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최소연은 더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고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나는 그녀와 얘기해봤자 더는 소용없을 거라는 걸 알고, 아예 침대 쪽으로 다가가 노성민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노성민! 정신 차려!”내 싸대기에 노성민의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났고, 그는 겨우 눈을 떴다. 그는 어렴풋이 뜬 눈으로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말을 더듬거렸다.“여보, 나 용서하는 거야? 나 데리러 왔어?”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안으려 하였고,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내가 손을 뻗어 그를 쳐내려고 하던 찰나, 배인호가 이미 먼저 앞으로 다가가 다시 노성민에게 귀싸대기를 날려 그를 바닥에 쓰러트렸다. 노성민은 너무 아픈 나머지 얼른 손을 거두었다.“여보, 왜 때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나 떠나지 마. 아이도 데려가지 말고…”“일어나.”배인호가 노성민의 팔을 잡으며 차갑게 말을 건넸다.노성민은 배인호를 알아보고는 겨우 침대에서 일어서긴 했지만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어 배인호가 그를 부축했다.최소연은 그 자리에 서 있는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