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으로 찻잔을 꽉 쥐고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분위기는 점점 굳어가듯 조용해졌고, 공기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왜 그래요? 이미 마음속으로 추측하고 있었잖아요.”이우범이 침묵을 깨뜨렸다.“인호가 진명수와 손을 잡고 아빠를 상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나는 마침내 믿고 싶지 않은 추측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날 속일 필요 없어요. 내가 우범 씨를 믿을 것 같아요?”“그럼 잘 생각해 봐요. 인호는 왜 서란과 여전히 연락하고 있고 왜 진명수와도 함께 있었는지?”이우범은 약간 공격적으로 나에게 물었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왜 약속에 나왔어요? 그냥 인호를 믿으면 될 텐데요.”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 나한테 이런 도발은 필요 없어요.”“나는 도발하려는 게 아니에요. 항상 인호에게 속지 말라고 차근차근 명확하게 알려주는 거예요.”이우범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이우범 씨 말대로 배인호와 진명수가 우리 아빠를 처리하기 위해 함께 공모했다면, 증거는 있어요? 그가 왜 그랬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나는 조금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이제 여기까지 왔으니,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이우범은 내 감정을 읽고 있었고, 잠시 침묵한 뒤 내 질문에 대답했다.“지영 씨도 말했잖아요. 내가 서란과 손잡았다고. 그래서 지금은 실제로 서란란과 어느 정도 접촉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서란에 대해 많이 알게 됐고요.”“지영 씨 말대로 인호가 왜 그랬을까요? 이건 아주 간단한 질문 아닌가요?”이우범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인호는 지영 씨를 자기 옆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지금 그 소원대로 됐잖아요?”내 마음의 마지노선 무너졌고, 비록 이우범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내가 추측한 것과 정확히 같았다.심지어 이전에 나는 배인호가 아버지를 상대로 한 샤인 그
다음 장면에서는 배인호 어머니가 화를 내시며 서란을 꾸짖고 서란은 계속 울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결국 배인호 어머니는 더 이상 서란이 우는 것을 참지 못하시고 손을 들었고, 이번에는 배인호가 서란 대신 맞았다. 그의 얼굴에 있는 뺨 자국은 그의 어머니에게 맞은 것이었다.영상을 보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적어도 배인호 어머니는 나를 대신해 서란의 뺨을 두 번이나 때려주셨다. 시간차 복수라고 할 수 있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나는 기선혜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부드럽게 감사 인사를 했다.“지영 씨, 서란과 배 대표님은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기선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담하게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나는 레드 와인 한 병을 가져와 두 잔을 따르고, 한 잔을 기선혜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배인호와 서란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전혀 그렇게 표현할 수 없다.하지만 나는 기선혜에게 최근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기선우가 과거의 일은 대부분 기선혜에게 말했을 것이다.기선혜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내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서란은 팔자가 정말 좋네요. 배 대표님은 예전에 실제로 서란을 좋아했고 하미선도 서란을 수양딸로 인정했으니 말이에요. 하늘은 정말 불공평하네요.”그녀는 서란을 질투한 것이 아니라 남동생의 비극적인 최후를 생각한 것 같았다.어찌 되었든 기선우는 서란과 사랑에 빠졌고 처음에는 그들의 시작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제 기선우는 비극적으로 죽었고 그 뒤로 서란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그런데 선혜 언니.”나는 갑자기 기억났다.“전에 언니가 말했었죠? 예전에 선우와 서란이 만나는 것을 반대했다고. 왜 반대했어요? 말해 줄 수 있어요?”기선혜는 멍하니 잔에 담긴 와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한숨을 쉬었다.“지영 씨, 과거의 서란은 모두가 본
"하미선은 분명 의심스러워할 거야. 그러니 네가 연극에 협조해 주길 바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네 아버지의 문제와 기선우의 문제도 함께 해결될 거야.”배인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냥 말해요.”그날 밤 나는 배인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소식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자기에 대한 나의 의심을 조금씩 풀어주었다.마지막으로 그는 내가 그를 파트너로 대하더라도 매번 자기를 의심하지 말라고 말했다.어쩌면 배인호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매우 낮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에 나는 그를 더욱 의심하게 됐다.다음날 깨어났을 때 나는 배인호와 치열한 갈등을 빚었다.배인호는 재떨이를 땅에 내리친 다음 나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아직도 나를 못 믿겠으면 당장 꺼져. 지금 바로 이 집에서 사라지라고.”그의 눈은 미련 하나 없이 차가웠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고,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았다. 그가 말을 꺼냈으니 나는 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고 옷 몇 벌을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때 기선혜는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배인호의 부모님은 아래층에 계셨다.창백한 얼굴로 내려오는 나를 보고 몇몇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특히 배인호 어머니는 곧바로 다가와서 나를 잡으셨다.“지영아 무슨 일이야? 방금 위층에서 왜 그렇게 시끄러웠어?”“아주머니, 저 여기서 나가려고요. 인호 씨가 저한테 나가라고 했어요.”나는 붉어진 눈으로 배인호 어머니에게 말했다."그때 다시 돌아오라는 말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우리 사이에 풀리지 않은 갈등이 너무 많아요. 죄송합니다. 저 먼저 가 볼게요.”배인호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당겼다.“잠깐만, 무슨 일이야? 인호는 어디 있어? 이 새끼는 어디 있는 거니?”나는 위층을 바라보았고 배인호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간소한 짐을 챙겨 서둘러 밖
나는 먹을 것을 좀 사서 병원으로 돌아갔다.엄마는 방금 일어나셨고 집에 돌아가기 전 회복을 위해 며칠 더 입원해야 했기에 요 며칠 어쩔 수 없이 계속 병원에 다녀야 했다.다시는 이우범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는 바로 엄마의 병원을 바꾸기로 했다.“지영아, 아빠는 어디 계시니?”다른 병원으로 옮긴 뒤 엄마는 내게 물었다.“내가 깨어났다는 걸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어?”이 질문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엄마, 아빠가 요즘 좀 바쁘시거든요. 며칠 뒤에 오실 거예요.”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엄마에게 대충 둘러댔다.조만간 아빠 소식을 전해드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막 깨어난 엄마의 몸은 너무 허약했고 또다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나는 그 말을 한 뒤 재빨리 엄마를 위해 이불을 올려 주며 위로했다.“아빠가 이런 모습 보면 많이 속상하실 텐데.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더 좋아지실 거고 아빠가 일 끝내고 오시면 타이밍이 딱 좋을 거예요.”엄마는 지친 듯 눈을 감으시더니 한숨을 쉬었다.“네 아빠가 지금까지 내 걱정이 많았겠구나. 곧 퇴직인데 왜 아직도 바빠?”“곧 퇴직이니 더 바쁜 것 같아요. 오랜 친구가 산에 놀러 가서 쉬자고 했어요.”아빠가 여행을 가신다는 상상을 하며 나는 엄마에게 둘러댔다.그러자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관광하러 가는 것도 좋지. 평생 고생했으니 이제 편히 쉴 때도 됐어.”우리 모녀는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틀간은 내가 돌아가지 않고 퇴원할 때까지병실에서 엄마와 함께 있기로 했다.이 기간 동안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아와 애들이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아주머니, 이 자몽 아주 맛있고 달콤해요. 꼭 드셔보세요.”정아는 자몽 껍질을 벗겨 엄마에게 드렸다.엄마 앞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때 매우 조심스러웠고 아빠나 배인호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참 달다. 고마워 정아야.”엄마는 이틀 동안 많이 회복하셨지만 원래 부터 있던 심장 문제 때문에 퇴원 후에
나는 경멸스러워 비웃음을 날렸다.“그럼 꺼져. 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짓 할 필요 없어, 배인호가 결혼하자고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그 전에 배인호 부모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이나 하고.”서란은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나를 도발했는데 자기가 지고 나니 화가 난 듯했다.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줍지 않고 억울함과 분노를 안은 채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갔다.그녀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어쩌면 엄마를 일찍 집에 모시고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무사히 안정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병원에 있는 누군가가 엄마 앞에서 몇 마디만 하면 엄마가 모든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이런 생각에 나는 회사에 가지 않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엄마를 퇴원시킨 후 이 기사에게 엄마를 모시러 오라고 했다.나는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지영아, 그 사이 너 혼자 회사를 책임졌니?”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네, 그렇죠.”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아빠는 뭐하고? 도와주지 않았어?”엄마는 여전히 정확한 사고를 하실 수 있었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어도 쇠퇴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삼촌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어?”나는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이제 엄마가 이런 일로 슬퍼하시는 게 싫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는 자기 핸드폰을 내가 가져다줬으면 했지만, 나는 엄마에게 이제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다고 핑계를 대고 거절한 뒤, 푹 쉬시라고 했다.엄마가 잠드신 후 나도 조금 피곤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 기사는 이미 돌아갔고, 넓은 거실에는 나 혼자였다. 와인 한 병을 가져와 잠을 청하기 위해 한 잔 마시려고 했지만 전화가 울렸다.벨 소리가 너무 커서 조용한 거실에 울렸다. 나는 재빨리 와인잔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전화기 저편에서 다정함으로 가득 찬 배인호의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머리까지 뜨거워졌고 몸도 화끈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살짝 떨려왔다.“내가 어떻게 책임져요…”“음, 나랑 있을 때 자꾸 엇나가지만 않으면 돼. 그럴 때마다 난 내가… 강간범 같아.”배인호는 퍽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다.“몇 번은 그래도 받아주지 않았나요?”배인호에게 잘 보여 도움을 바랄 때는 몇 번 반항도 별로 없이 맞춰주려고 했었다. 전혀 느끼지 못한 건가?배인호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너는 네가 적극적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오늘은 네가 적극적으로 하든지.”“근데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요…”나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알 만큼 아는 여자지만 이런 일에서는 경험이 부족했다.“해보면 알게 되겠지?”배인호는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착하지.”나는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배인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거절할 수가 없어서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배인호의 구겨졌던 미간이 그제야 풀렸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싸더니 손쉽게 나를 그의 다리 위로 안아 올렸다. 나는 머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심호흡 한번 하고는 먼저 키스했다.내가 먼저 적극적인 결과는 배인호의 더욱 저돌적인 갈취였다. 거실 소파가 난장판이 되고 나서야 우리는 안방으로 돌아가 쉬었다.나는 너무 졸렸지만 그래도 졸음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회사 일을 물었다.“미도는 진명수를 배후에 두고 있어. 진명수가 너를 찾은 것도 아마 하미선이 시켜서였을 거야. 너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을걸.”배인호가 눈을 감고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만족을 느낀 듯 나른하게 잠겨있었다.“그럼 협력하는 거 동의해야 할까요?”나는 배인호의 팔을 베고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배인호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응, 해도 괜찮을 것 같아. 협력해야만 그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서 상황을 역전할 수 있어.”망설이던 부분이었지만 배인호가 이렇게 말하니 한
“왜 말이 없어? 마음에 안 들어?”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배인호가 다시 물었다.나는 물에서 꽃잎을 몇 개 건져내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관찰했다. 예쁘긴 했다. 전혀 시든 흔적이 없었고 약간은 벨벳 촉감이었다.“마음에 들어요. 너무 예뻐요.”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한번 보여줘 봐.”배인호는 이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고 영상통화를 다시 걸어왔다.나는 알람을 보며 받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얼떨결에 받기 버튼을 눌렀다.배인호 쪽 배경은 청담동 서재 같았다. 그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점잖은 양아치 느낌이었다. 그는 평소에 안경을 잘 끼지 않았지만, 낄 때마다 나는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뭐야? 반신욕하고 있어?”배인호는 내가 욕실에 있는 걸 발견하고는 물었다.“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당신이 준 장미랑 같이요.”배인호가 약간 멈칫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나는 아예 카메라를 돌려 욕조를 비췄다. 욕조에 가득 담긴 빨간 장미꽃 꽃잎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배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나한테 꽃을 보냈다. 결혼식 부케마저도 배인호 어머니가 골라준 것이었다.“당신이 아무 얘기 안 한 것도 있고 카드에 메모도 해놓지 않아서 누가 보낸 건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반신욕이나 할까 가져온 거예요.”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나 빼고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 있어?”배인호도 약간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보냈다고는 아예 생각도 못 한 거야?”나는 몇 초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솔직히 진짜 생각 못 했어요.”나는 배인호가 액세서리나 가방, 차나 집은 줘도 꽃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배인호의 표정이 굳더니 심호흡했다.“이건 나를 탓하면 안 돼요. 전에 길가에 난 들꽃이라도 좋으니 꽃 좀 선물로 달라고 그렇
유정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그토록 멍청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지영 언니, 그냥 정이한테 사과하고 이 일은 이렇게 넘겨요. 그럼, 앞으로도 친구 할 수 있어요.”서란은 계속 싸움을 말리는 좋은 사람인 척 쇼하며 진지하게 말했다.유정이 그렇게 심한 일을 당했는데 내가 한 짓이 맞는다고 해도 사과만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자기가 당한 일이 아니라고 참 쉽게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물며 누가 유정을 해쳤는지 서란은 모를 리 없었다.우지훈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전혀 켕기는 게 없어 보였다.이 남자도 진짜 마음이 독했다. 자신의 여자 친구한테 이런 짓까지 한 게 결국은 헤어지기 위해서라니, 모든 잘못을 유정한테 넘긴 것도 더는 매달릴 핑계가 없게 만들려는 것이었다.하지만 사랑에 빠진 유정은 우지훈은 좋은 사람이고 잘못은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서란아, 진심이야?”나는 태연하게 머리와 옷을 정리하고는 담담하게 물었다.“지영 언니, 지금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언니예요.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서란은 내가 무슨 의미로 묻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유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정이는 나와 제일 친한 친구예요. 이렇게 당하는 건 싫다고요.”유정은 서란의 말을 듣고 감동한 표정으로 서란을 한번 쳐다봤다.이때 서란의 눈빛이 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눈이 반짝거렸고 아주 신이 나 보였다.“인호 씨, 여기요!”배인호도 오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아까까지 영상통화를 했는데 말이다.오늘은 밸런타인데이, 서란이 배인호를 불러내는 것도 정상이었다.배인호는 인파를 뚫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시선이 몇 초간 내 몸에 머물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서란은 이런 면에서 매우 민감한 편이었다. 서란은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배인호의 팔짱을 끼고는 머리를 배인호의 팔에 살포시 기댔다. 마치 주도권을 과시하는 듯해 보였다.배인호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가 바로 눈치를 보냈다. 그는 눈살을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