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을 것을 좀 사서 병원으로 돌아갔다.엄마는 방금 일어나셨고 집에 돌아가기 전 회복을 위해 며칠 더 입원해야 했기에 요 며칠 어쩔 수 없이 계속 병원에 다녀야 했다.다시는 이우범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는 바로 엄마의 병원을 바꾸기로 했다.“지영아, 아빠는 어디 계시니?”다른 병원으로 옮긴 뒤 엄마는 내게 물었다.“내가 깨어났다는 걸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어?”이 질문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엄마, 아빠가 요즘 좀 바쁘시거든요. 며칠 뒤에 오실 거예요.”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엄마에게 대충 둘러댔다.조만간 아빠 소식을 전해드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막 깨어난 엄마의 몸은 너무 허약했고 또다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나는 그 말을 한 뒤 재빨리 엄마를 위해 이불을 올려 주며 위로했다.“아빠가 이런 모습 보면 많이 속상하실 텐데. 시간이 지나면 엄마는 더 좋아지실 거고 아빠가 일 끝내고 오시면 타이밍이 딱 좋을 거예요.”엄마는 지친 듯 눈을 감으시더니 한숨을 쉬었다.“네 아빠가 지금까지 내 걱정이 많았겠구나. 곧 퇴직인데 왜 아직도 바빠?”“곧 퇴직이니 더 바쁜 것 같아요. 오랜 친구가 산에 놀러 가서 쉬자고 했어요.”아빠가 여행을 가신다는 상상을 하며 나는 엄마에게 둘러댔다.그러자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관광하러 가는 것도 좋지. 평생 고생했으니 이제 편히 쉴 때도 됐어.”우리 모녀는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틀간은 내가 돌아가지 않고 퇴원할 때까지병실에서 엄마와 함께 있기로 했다.이 기간 동안 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아와 애들이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아주머니, 이 자몽 아주 맛있고 달콤해요. 꼭 드셔보세요.”정아는 자몽 껍질을 벗겨 엄마에게 드렸다.엄마 앞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때 매우 조심스러웠고 아빠나 배인호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참 달다. 고마워 정아야.”엄마는 이틀 동안 많이 회복하셨지만 원래 부터 있던 심장 문제 때문에 퇴원 후에
나는 경멸스러워 비웃음을 날렸다.“그럼 꺼져. 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짓 할 필요 없어, 배인호가 결혼하자고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그 전에 배인호 부모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이나 하고.”서란은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나를 도발했는데 자기가 지고 나니 화가 난 듯했다.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줍지 않고 억울함과 분노를 안은 채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갔다.그녀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본 후에도 나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어쩌면 엄마를 일찍 집에 모시고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무사히 안정을 취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병원에 있는 누군가가 엄마 앞에서 몇 마디만 하면 엄마가 모든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이런 생각에 나는 회사에 가지 않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엄마를 퇴원시킨 후 이 기사에게 엄마를 모시러 오라고 했다.나는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지영아, 그 사이 너 혼자 회사를 책임졌니?” 엄마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네, 그렇죠.”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아빠는 뭐하고? 도와주지 않았어?”엄마는 여전히 정확한 사고를 하실 수 있었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어도 쇠퇴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삼촌에게 도움을 청하진 않았어?”나는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이제 엄마가 이런 일로 슬퍼하시는 게 싫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엄마는 자기 핸드폰을 내가 가져다줬으면 했지만, 나는 엄마에게 이제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다고 핑계를 대고 거절한 뒤, 푹 쉬시라고 했다.엄마가 잠드신 후 나도 조금 피곤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 기사는 이미 돌아갔고, 넓은 거실에는 나 혼자였다. 와인 한 병을 가져와 잠을 청하기 위해 한 잔 마시려고 했지만 전화가 울렸다.벨 소리가 너무 커서 조용한 거실에 울렸다. 나는 재빨리 와인잔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어디야?”전화기 저편에서 다정함으로 가득 찬 배인호의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머리까지 뜨거워졌고 몸도 화끈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살짝 떨려왔다.“내가 어떻게 책임져요…”“음, 나랑 있을 때 자꾸 엇나가지만 않으면 돼. 그럴 때마다 난 내가… 강간범 같아.”배인호는 퍽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는 전부 동의하지는 않았다.“몇 번은 그래도 받아주지 않았나요?”배인호에게 잘 보여 도움을 바랄 때는 몇 번 반항도 별로 없이 맞춰주려고 했었다. 전혀 느끼지 못한 건가?배인호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너는 네가 적극적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오늘은 네가 적극적으로 하든지.”“근데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요…”나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알 만큼 아는 여자지만 이런 일에서는 경험이 부족했다.“해보면 알게 되겠지?”배인호는 조금 기대하는 눈치였다.“착하지.”나는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배인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거절할 수가 없어서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배인호의 구겨졌던 미간이 그제야 풀렸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싸더니 손쉽게 나를 그의 다리 위로 안아 올렸다. 나는 머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심호흡 한번 하고는 먼저 키스했다.내가 먼저 적극적인 결과는 배인호의 더욱 저돌적인 갈취였다. 거실 소파가 난장판이 되고 나서야 우리는 안방으로 돌아가 쉬었다.나는 너무 졸렸지만 그래도 졸음을 가까스로 밀어내며 회사 일을 물었다.“미도는 진명수를 배후에 두고 있어. 진명수가 너를 찾은 것도 아마 하미선이 시켜서였을 거야. 너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을걸.”배인호가 눈을 감고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만족을 느낀 듯 나른하게 잠겨있었다.“그럼 협력하는 거 동의해야 할까요?”나는 배인호의 팔을 베고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배인호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응, 해도 괜찮을 것 같아. 협력해야만 그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서 상황을 역전할 수 있어.”망설이던 부분이었지만 배인호가 이렇게 말하니 한
“왜 말이 없어? 마음에 안 들어?”내가 계속 침묵을 지키자, 배인호가 다시 물었다.나는 물에서 꽃잎을 몇 개 건져내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관찰했다. 예쁘긴 했다. 전혀 시든 흔적이 없었고 약간은 벨벳 촉감이었다.“마음에 들어요. 너무 예뻐요.”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한번 보여줘 봐.”배인호는 이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고 영상통화를 다시 걸어왔다.나는 알람을 보며 받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얼떨결에 받기 버튼을 눌렀다.배인호 쪽 배경은 청담동 서재 같았다. 그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점잖은 양아치 느낌이었다. 그는 평소에 안경을 잘 끼지 않았지만, 낄 때마다 나는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뭐야? 반신욕하고 있어?”배인호는 내가 욕실에 있는 걸 발견하고는 물었다.“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당신이 준 장미랑 같이요.”배인호가 약간 멈칫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나는 아예 카메라를 돌려 욕조를 비췄다. 욕조에 가득 담긴 빨간 장미꽃 꽃잎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배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나한테 꽃을 보냈다. 결혼식 부케마저도 배인호 어머니가 골라준 것이었다.“당신이 아무 얘기 안 한 것도 있고 카드에 메모도 해놓지 않아서 누가 보낸 건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반신욕이나 할까 가져온 거예요.”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나 빼고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 있어?”배인호도 약간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보냈다고는 아예 생각도 못 한 거야?”나는 몇 초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솔직히 진짜 생각 못 했어요.”나는 배인호가 액세서리나 가방, 차나 집은 줘도 꽃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배인호의 표정이 굳더니 심호흡했다.“이건 나를 탓하면 안 돼요. 전에 길가에 난 들꽃이라도 좋으니 꽃 좀 선물로 달라고 그렇
유정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그토록 멍청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지영 언니, 그냥 정이한테 사과하고 이 일은 이렇게 넘겨요. 그럼, 앞으로도 친구 할 수 있어요.”서란은 계속 싸움을 말리는 좋은 사람인 척 쇼하며 진지하게 말했다.유정이 그렇게 심한 일을 당했는데 내가 한 짓이 맞는다고 해도 사과만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자기가 당한 일이 아니라고 참 쉽게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하물며 누가 유정을 해쳤는지 서란은 모를 리 없었다.우지훈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전혀 켕기는 게 없어 보였다.이 남자도 진짜 마음이 독했다. 자신의 여자 친구한테 이런 짓까지 한 게 결국은 헤어지기 위해서라니, 모든 잘못을 유정한테 넘긴 것도 더는 매달릴 핑계가 없게 만들려는 것이었다.하지만 사랑에 빠진 유정은 우지훈은 좋은 사람이고 잘못은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서란아, 진심이야?”나는 태연하게 머리와 옷을 정리하고는 담담하게 물었다.“지영 언니, 지금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언니예요.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서란은 내가 무슨 의미로 묻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유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정이는 나와 제일 친한 친구예요. 이렇게 당하는 건 싫다고요.”유정은 서란의 말을 듣고 감동한 표정으로 서란을 한번 쳐다봤다.이때 서란의 눈빛이 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눈이 반짝거렸고 아주 신이 나 보였다.“인호 씨, 여기요!”배인호도 오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아까까지 영상통화를 했는데 말이다.오늘은 밸런타인데이, 서란이 배인호를 불러내는 것도 정상이었다.배인호는 인파를 뚫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시선이 몇 초간 내 몸에 머물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서란은 이런 면에서 매우 민감한 편이었다. 서란은 갑자기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배인호의 팔짱을 끼고는 머리를 배인호의 팔에 살포시 기댔다. 마치 주도권을 과시하는 듯해 보였다.배인호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가 바로 눈치를 보냈다. 그는 눈살을 살짝
이모건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이미 테이블에 쓰러진 세희를 보더니 눈빛이 바로 부드러워졌고 죄책감으로 마음 아파했다.이모건은 “응”하고 대답하더니 바로 세희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불러세웠다.“이모건 씨 잠깐만요. 혹시 이 두 사람 본 적 있어요?”나는 서란과 우지훈을 가리키며 물었다.이모건은 이 두 사람을 힐끔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두 인간쓰레기잖아요.”이모건의 말에 우지훈과 서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정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이모건을 보며 말했다.“무슨 뜻이에요?”우지훈이 유정의 손을 잡더니 다시 옆으로 끌어내려 했다.“둘이 얘기하자.”이모건의 입꼬리에 차가운 웃음이 걸리더니 말했다.“자기 여자 친구에게 약을 탄게 고작 헤어지기 위해서라니, 전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뭐라고요?”유정의 얼굴이 하얘지더니 눈도 휘둥그레졌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이모건이 유정을 힐끔 보더니 더 말하기 귀찮은 듯 세희를 찾으러 갔다.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미 다 해준지라 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표정은 참으로 재밌었다. 특히 서란은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입은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정은 몸에 힘이 빠진 듯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이런 일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배인호가 실눈을 뜨고 우지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소꿉친구이기도 하고 연초에 금방 우지훈을 배 씨 그룹 본사에 들였기 때문이었다.근데 남자가 돼서 이렇게 비겁하기 그지없는 일을 저지르다니, 배인호의 기분도 복잡했다.“라니야, 이 일 너도 알고 있었어?”유정은 서란을 잊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란에게 물었다.“난 몰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서란은 몹시 켕기는 듯한 표정으로 두 걸음 물러서기까지 하면서 배인호 뒤에 숨었다.“정아, 난 진짜 아무것도 몰라.”이젠 유정도 서란을 백 퍼센트 믿지는 못했다. 이모건의 말을 들어보면 두
“인호 씨, 나보다 참을성 더 좋을 텐데?”나는 배인호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고는 적극적으로 그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살살 문질렀다.“인호 씨 말로는 진명수가 의심이 깊다면서요? 당신한테도 경계심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 사람 약점 잡으려면 우리가 끝장까지 봤다고 믿게 해야 해요.”배인호는 손을 돌려 내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은 크면서도 따듯했고 쉽게 내 손을 감쌌다.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입술을 거의 내 얼굴에 대다시피 했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 그래도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보상받아야겠어.”“이것도 보상해야 해요?”많이 놀란 건 사실이었다. 배인호는 요즘 점점 파렴치해졌다.“응, 해야 해.”배인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확하게 내 입술을 찾아 키스를 해왔고 혀끝은 익숙하게 공략해 왔다.요새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는 건 좀 적응이 된 것 같다. 내 몸도 즐거운 일이니, 임신하지 않는 이상 손해 볼 건 없었다.나는 배인호에게 반응을 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나가자, 그가 멈칫하더니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보였고 그 눈빛은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나 빨리 우리 아기 가지고 싶어.”배인호가 부드럽게 키스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까지만 해도 들끓었던 성욕이 이 말로 완전히 사라졌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졌다.더는 아이는 없을 거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배인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부드럽게 키스만 할 뿐이었다. 나는 마음속에 아픔을 숨긴 채 가까스로 키스에 응했다.오늘 밤도 역시 뜨겁게 엉켜서 보낸 밤이었지만 내 기분은 계속 다운되어 있었다.다음 날 아침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기선혜는 이미 아침 준비를 마쳤고 내가 밖에서 들어오자 멈칫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알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아침 드세요.”“그래요. 엄마랑 먼저 먹어요. 저는 옷 좀 갈아입고 내려올게요.”나는 기선혜의 눈을 피해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올라가서 샤워하고 나왔
“진 사장님.”나는 판에 박힌 웃음을 지으며 진명수의 을 잡았다.그는 정계에 몸을 담은 것 외에도 미도 그룹의 최고 관리자였다.진명수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아우라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앉아요. 조금 있다가 친구가 한 명 더 올 거라.”진명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듣는 나는 차가움을 느꼈다.“그러죠.”나는 소파에 앉고는 가방을 옆에 놓았다.진명수는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우 온화한 사람이었다. 전혀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고 나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말은 조곤조곤 천천히 하는 편이었다.나는 이 사람이 아빠를 해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증오가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해소할 곳이 없었다.진명수는 미도 그룹이 우리 회사와 협력하고 싶어 한다고 밝히면서 좋은 점을 하나하나 다 말해주었다. 만약 배인호가 전에 나에게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으면 나는 무조건 혹했을 것이다.둘이 대화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배인호였다.“이 의사, 왔어?”이우범을 본 진명수의 태도가 더 친근해졌다.이우범은 까만 스웨터에 브라운 칼라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시선이 잠깐 내게 머물더니 담담하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허 사장님, 이 의사 아버지와 관계가 괜찮은 편인데 요새 몸이 좀 안 좋아서 이 의사가 단독 회진을 해주고 있어요. 괜찮죠?”진명수의 말이 많아졌다. 얼굴에는 미소도 걸려 있었다.“네, 괜찮습니다.”내가 대답했다.이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진명수 사이에 앉았다.나는 이 늦은 밤에 진명수가 왜 이우범을 레스토랑으로 불러 단독 회진을 보는 건지 이상하게 느껴졌다.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진명수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룸 안에는 나와 이우범만 남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 분 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인호 또 서란이랑 같이 다니던데, 지영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지금은 회사 일만 잘하고 싶어요.”나는 이우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