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내 마음속으로 이우범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이 캡처를 보자 배인호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졌다. 어젯밤 배인호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하마터면 내가 오해했다고 착각할뻔했다.“알겠어요.”사진을 보고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불안함을 참아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우범의 표정은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허지영 씨, 난 당신이 청담동에 돌아가는 것을 정말로 바라지 않았어요. 배인호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머릿속은 방금 본 대화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우범의 말을 듣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배인호와의 거래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나 이미 배인호와 재혼하기로 했어요.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있어요.”연기를 하려면 완벽하게 해야 했다. 나와 배인호가 곧 재혼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아야 배인호가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이우범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떨렸다. 찻잔의 손잡이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고 찻잔은 테이블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나는 깜짝 놀랐다.“왜요?”배인호는 엉망이 된 테이블은 신경도 쓰지 않고 흥분했다.“계속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는데, 인호가 지영 씨를 그렇게 대했는데 왜 또 기회를 주려는 거예요? 난... 그저 기다려 달라고만 했는데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이우범 씨, 내가 우범 씨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걸 알아줘요.”나는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이미 약혼 하기로 한 거 아니에요? 잘 됐어요.”“지영 씨도 알잖아요.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이우범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나는 이우범이 수년 전의 배인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아무리 마음이 원하지 않아도 집안의 압력에 의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하지만 이우범이 도시아와 약혼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 그는 미래가 없을 것이다. 배인호는 미친놈이었고 절대로 나와 이우범
온몸이 얼어붙었고 눈을 뜨자마자 목을 잡은 손이 천천히 조여오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쉬기 힘들었다.배인호의 표정은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 같았고 싸늘했고 눈빛은 칼날보다 더 날카로웠다.“정아는 어디 있고 왜 인호 씨가 있어요?”나는 배인호의 손을 밀고 겨우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에게 네가 어떻게 남자를 꼬시는지 보여주고 싶은 거야?”배인호는 손가락의 힘을 풀며 이를 악물고 내게 물었다.배인호가 감히 나를 찾아와서 물어?나는 속에서 분노가 터져 나와 결국 폭발했다.“이거 놔. 나쁜 새끼야. 당신이 뭔데 상관이야?”“지금 내게 내 사람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나와 재혼하겠다는 네 진심은 어디 있는데?”배인호는 소유욕이 가득 찬 눈빛을 하고는 나를 놓아주었다.나는 웃겨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앉아 테이블 위의 술잔을 들고 고개를 젖히며 삼켰다.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바라보았다.“나한테 정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날 사랑해요? 나와 함께 있을 때 민설아를 떠올린 적 없어요?”“아,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당신들 아이도.”나는 또 술 한 잔을 따르며 무표정하게 한마디 덧붙였다.그 순간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고 코트를 가져와 입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배인호는 아마 내가 그 일에 대해 모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큰 반응을 보였다.우리는 두 조각상처럼 앉아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배인호가 입을 열었다.“누가 말했어?”“누가 말했는지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어차피 사실인데. 민설아가 자살했을 때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아쉽게 됐네요.”나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더 이상 몸 따윈 생각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마셨다.계속 술을 마시려고 하는데 배인호가 내 손에서 술잔을 뺏어가 바로 쓰레기통에 던졌다.“그만해.”“그만하긴 뭘 그만 해요?”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배인호를 바라보았다.“배인호, 당신은 죽어서 지옥에 갈 거야. 하하하...”배인호 이마의 푸
나는 하루 종일 아래층으로 내려가지 않고 침실에서 업무를 보았다.저녁이 되어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켜 바람을 좀 쐬러 나갔다가 뒤를 돌아보니 배인호의 차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린 사람은 배인호의 임 비서였다.임 비서는 빠르게 대문을 들어 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 앞에 가서 살폈다. 그는 이미 2층까지 올라와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바로 침착하게 내게 고개를 숙였다.나는 그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고 계단에서 고개를 들어 임 비서가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배인호의 서재는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고 나도 몇 번 들어가 보지 못했다. 매번 배인호가 안에 있을 때만 들어가 볼 수 있었다.서재의 문은 도어락이 설치되어 있었고 안면인식이나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세 번 시도해서 실패하면 자동으로 신고가 접수되었다.임 비서는 빠르게 서재에서 나왔고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신속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임 비서가 떠나고 나는 귀신에 홀린 듯 3층 서재 문 앞으로 갔다.만약 배인호가 정말 나를 도와 아빠와 기선우의 일을 알아봤다면 이미 단서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여기 서재에 두지 않았을까?“삐...”도오락에서 경보음이 울렸다.“안면인식에 실패하셨습니다. 다시 시도 하세요.”나는 깜짝 놀라 다시 안면 인식을 피하고자 바로 자리를 피했다.침실로 돌아온 뒤에도 나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고 도둑질하다 들킨 것 같았다. 서재의 각종 자료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었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하지만 마음이 불안해질수록 더 미친 듯이 충동적인 생각이 들었다. 서재로 가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고 싶었고 만약 손에 넣으면 바로 청담동을 떠날 것이다.오늘 밤에도 배인호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정아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지영아, 너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네가 배인호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줬어?”나는 조금 화를 내며 말했다
서란의 반한 듯한 눈빛에 거짓이 없었다.솔직히 말하면 나도 배인호가 생긴 건 흠 잡을 데 없다고 생각한다.배인호가 나타나자 다가가 말을 거는 사람이 많았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유명인들이었지만 상위 클래스도 등급은 나뉜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가져온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정상회의 개막을 알리는 연설은 내가 맡았다. 주요하게는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었다. 진작부터 준비를 해두었고 연설문도 여러 번 수정했다.회사를 관리한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겁나진 않았다. 오히려 도전하고 싶었고 정상회의에서 나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협력 파트너도 따라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배인호는 나와 좀 떨어진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나도 마음 놓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가끔 나에게 머무른다는 걸 나 자신도 느꼈다.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와 배인호를 번갈아 보며 입이 근질근질해 보였다.이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배인호가 보낸 메시지였다.「어제 회사에서 야근하고 회사에서 잤어. 그래서 집에 안 들어간 거야.」나는 눈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앉은 배인호를 쳐다봤다. 그는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오만함이 느껴졌고 누가 봐도 태생이 리더 같았다.나는 답장하지 않았고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은 척했다.일 분이나 지났을까, 배인호의 눈빛이 다시 느껴졌다. 약간 언짢은 듯한 눈빛이었다.서란도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내 핸드폰을 보다가 머리를 돌려 배인호를 봤다.나는 배인호의 시선을 피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기선우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어. 4,000만 원 주면 증거 넘겨주지.”이상한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나는 깜짝 놀라 바로 되물었다.“너 지금 어디야?”“어딘지는 묻지 마. 옆에 사람 많지? 너무 시끄럽네? 다음에 전화하지.”상대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일 분,
배인호의 말은 거의 상황의 마침표를 찍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이미 되돌릴 여지가 없었다.행사에 참여한 사람은 서울시에서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인데 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했으니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하미선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에 귀티 나고 우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언제 철들래”하는 표정으로 서란을 쳐다보고 있었다.사회자가 작은 목소리로 서란에게 말했다.“서란 씨, 그럼,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네...”서란이 머리를 숙이고는 연설문을 테이블 위에 버린 채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왔다.나는 그 연설문을 한번 보더니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구겨서 던져버렸다. 서란이 아까 멈춘 부분에서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서란의 행동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긴장이 풀리니 사유도 원활해졌고 말하는 말투도 유쾌하면서 힘이 있었다.내 연설은 약 10분간 지속되었고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가 끊이질 않았다.나는 내가 오늘 꽤 선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서란은 처지가 딱했다. 서란은 자리로 돌아가서부터 정상회의가 끝날 때까지 거의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앞에 놓인 테이블만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허 사장님, 잠깐만요.”행사장의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때 하미선이 나를 불러세웠다. 하미선은 서란을 내 앞으로 데려오더니 말했다.“오늘 일은 라니가 잘못했네요. 그렇게 연설문을 가져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나를 보는 서란의 눈빛에서 나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차갑게 웃고는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자리를 떠났다.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신비한 전화번호를 조사하라고 시켰다. 누가 나한테 전화를 한 건지 알면 경찰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상대가 그 번호로 다시 전화하면 모를까 그다음은 그저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청담동으로 돌아온 나는 갑자기 배인호가 던진 그 반지가 떠올랐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누군가 주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혼자 정원으로
내가 강아지를 너무 챙기자, 배인호의 말에서 질투가 새어 나왔다.“너는 나보다 강아지를 더 좋아하는 거 같다?”“강아지는 인류의 좋은 친구라고 했어요.”나는 머리도 들지 않고 강아지에게 물었다.“맞지? 호니야?”티베탄 마스티프가 내 품에서 호응이라도 하듯 짖어댔다. 마치 새로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말이다.배인호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티베탄 마스티프는 그를 보면 목을 움츠리며 무서워했다. 역시 이런 저승사자 같은 사람은 작고 귀여운 동물들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사장님, 아가씨, 저녁 식사 준비됐습니다.”“호니야, 밥 먹자.”나는 호니를 데리고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원래는 데리고 간단하게 먹으려 했는데 그래도 사람이랑은 다른지라 우유를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호니를 옆 의자에 놓아두었다. 그 자리는 배인호가 평소에 앉던 자리였다.자신의 자리를 뺏긴 걸 발견한 배인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호니는 그를 향해 착해 보이게 두 번 짖었지만, 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끼고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나는 밥을 먹으면서 반려견에 대한 지식을 검색했다. 아이를 낳을 가망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강아지가 생기자 이렇게 작고 귀여운 생명을 자식처럼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자료를 검색하는데 배인호는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우지훈이 걸어온 전화 같았다.두 사람의 대화를 대충 들어보니 우지훈이 배 씨 그룹에 낮지 않은 직급으로 입사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나는 정아와 토론했던 그 음모론이 떠올라 우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지훈을 조금 의심하고 있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래, 그럼, 새해 지나고 내년에 절차 밟아.”배인호는 우지훈과 토론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대뜸 나에게 물었다.“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우지훈이 당신 회사로 출근하기로 했어요?”나는 머리를 숙이고 밥을 먹으며
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자신이 약간은 변태 같아 보였다.이때 배인호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어제 핸드폰을 화장대에 그대로 던져놓았기에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힐끔 보니 트러블메이커라고 적혀 있었다.냥이가 걸어온 전화니 나는 더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못 들은 척했다.냥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문자를 보내왔다.「왜 전화 안 받아요? 돼지처럼 늦잠 자는 건가?」알림창에 알림만 떴을 뿐인데 나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나는 조금 켕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예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려고 했다.냥이가 문자를 한 통 더 보내왔다.「어제는 고마웠어요. 아니면 아빠가 나 죽게 욕했을 텐데. 요즘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이것저것 단속하려고 하네요.」어젯밤 배인호가 잠깐 나갔다 온 게 냥이때문이었다. 평소에 냥이를 귀찮아하는 것 같아도 행동은 성실했다. 진짜로 냥이를 무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나는 핸드폰을 화장대에 엎어놓은 채 더 이상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내가 집을 나설 때까지 배인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도 그를 부르진 않았다. 이 기사님을 불러 민정이네로 태워다 달라고 했다.내가 도착했을 땐 정아와 애들은 이미 와 있었다. 노성민과 박준도 보였다.나를 보자 노성민이 목을 움츠리고 얌전하게 세희 뒤에 숨어 있었다. 며칠 전 배인호한테 일러바친 것도 아직 따지지 않았다.“지영아, 왔어? 와서 디저트 좀 먹어.”민정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장유성도 박준, 이모건과 대화하다가 나를 보더니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아와 민정, 세희와 같이 앉아 수다를 떨었다.나는 내가 청담동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셋 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정아가 물었다.“진짜 배인호랑 다시 시작해 보려고?”“서로 필요한 것만 갖는 거지.”나는 디저트를 한 조각 들어 베어 물고는 태연하
기선혜는 금방 기차역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기선우의 하나밖에 없는 누나였다. 집에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이 계시는데 이번에 같이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민정이네 집에서 역까지 반 시간 넘게 걸렸다. 기선혜를 본 나는 멈칫했다. 기선우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지만, 거기에 여자의 부드러운 여성미가 더해졌다.기선혜는 기선우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나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녀는 슬픔에 잠겨 있었고 눈시울이 부어 있었다. 아마도 오는 내내 운 것 같았다.“선혜 언니, 허지영이라고 합니다. 선우랑은 친구예요.”나는 이 기사님더러 기선혜 손에 들린 몇 안 되는 짐을 들어주라고 하고는 자기소개를 했다.“지영 씨,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는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번거롭겠지만 잘 부탁해요.”기선혜가 슬픈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네, 선우한테 누나면 저한테도 언니예요.”내 기분도 슬프기 그지없었다. 죄책감까지 들었다. 나는 간접적으로 기선우를 해친 거나 다름없었다.기선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 선우한테 이런 친구가 있었다니, 이것도 선우 복이라면 복이죠.”나는 들을수록 마음이 아파졌고 죄책감도 점점 더 거세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갑시다. 먼저 제 쪽으로 가요. 먼저 제 쪽에서 지내다가 선우 보러 가요.”기선혜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고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그래요.”이 기사님은 나와 기선혜를 청담동으로 데려다줬다. 원래는 기선혜를 내가 살던 아파트로 데려다주려 했지만 나한테 물어볼 것도 있어 보였고 말할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서 아예 청담동으로 데려왔다.하지만 오늘 배인호도 집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내가 기선혜를 데리고 들어오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야?”“선우 누나예요. 여기서 며칠 지낼 거예요.”나는 슬리퍼를 꺼내 기선혜에게 건네주었다. 기선혜는 난감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미안한 듯한 기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