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이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도 새해 복 많이 받든지.”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어디 가?”부승민이 뒤따라 오며 온하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그냥 산책 좀 하는 거야.”온하랑이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방금 형수님이랑 얘기하고 있던데. 뭔 얘기하고 있었어?”부승민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온하랑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부승민을 흘겨보며 말했다.“넌 모르겠어? 아주버님 오늘따라 형님한테 말도 잘 안 걸고, 평소랑 다른 게 뻔한데.”“난 몰랐지. 너만 보느라.”온하랑이 눈을 부릅뜨고 부승민을 째려보았다.“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게.”“그래?”부승민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으쓱 치켜들었다.온하랑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물었다.“아무래도 아주버님한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은데. 넌 뭐 아는 거 있어?”“몰라.”부승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무슨 오해가 생긴 건 아닐까?”부승민은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먼저 좋다고 쫓아다닌 쪽은 부민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같이 자라온 사람으로서 부승민이 아는 부민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부민재는 소청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 결혼 생활을 해오며 부부 사이도 아주 화목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귀여운 아이까지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바람이 난다고?온하랑이 비웃었다.“형님이 아주버님한테서 나는 여자 향수 냄새를 맡으셨대. 여자 머리카락도 같이 발견했고. 게다가 몸에서 여자 손톱에 긁힌 자국까지 있는데 그 여자랑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잡아떼셨다더라.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구냐고 형님이 물어보니까 막상 대답은 안 하고. 왜? 이래도 형님이 지금 오해 하는 것 같아?”온하랑의 대답에 부승민이 입을 다물었다.온하랑이 우습다는 듯 부승민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역시 두 사람 형제 맞네. 이렇게나 서로한테
온하랑은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부승민은 뒤따라 가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자신이 절대 밤을 새우지 못 할 것을 직감했다. 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 위해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잠옷을 입고 화장실을 나선 온하랑이 침대 위에 누웠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 밖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부시아가 돌아온 줄로만 알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방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부시아가 아니라 부승민이었다.온하랑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부승민은 열린 문틈을 통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왜 들어온 거야?”온하랑이 뒤늦게 부승민이 들어오려는 것을 눈치채고 발걸음을 옮겨 두 팔을 뻗은 채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부승민은 평온한 표정으로 온하랑의 질문에 대답했다.“자려고.”온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내 방에서 자겠다고? 지금 장난해?”“여긴 우리 방이야.”부승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온하랑의 표정이 부승민의 말에 멍해졌다.둘이 이혼을 하기 전, 이 방은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던 장소이긴 했다.“우리 이미 이혼했어. 잘 거면 다른 방 가서 자.”“없던데.”“뭐가 없다는 거야?”“둘째 삼촌이랑 둘째 숙모가 한 방, 부현승이 한 방, 고모가 한 방, 큰 형이 한 방, 형수님이랑 윤민이 한 방. 이렇게 해서 손님방은 이미 다 찼어. 남은 방 두 개는 이불도 없고 청소도 안 했던데.”도우미 아주머니가 부민재와 소청하의 각방 생활을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온하랑이 부승민의 답변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큰 형님이든 셋째 형님이든 아무나 찾아서 같이 자든지 해. 나 찾아와서 이러지 말고.”“갔었어. 부현승은 여자친구랑 밤 새 통화한다 그러고, 큰 형은 지금 다른 사람이랑 영상통화나 하고 있고. 소리 들어보니까 여자랑 통화 중인 것 같던데…”부승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부승민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부민재는 정말로
“음?”목울대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짧고 간결하면서도 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묵직하고 매력적인 몸짓이 귓가를 스치더니 가까이에서 온하랑의 고막을 두드렸다. 한 줄기의 전류가 몸 안을 뚫고 흐르듯 뼈 사이 사이가 짜릿짜릿했다.창밖에서 터지는 폭죽의 불꽃이 어두운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몸을 뒤척인 온하랑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승민의 섹시한 목울대와 각이 선명한 턱선이었다.그대로 멈칫한 온하랑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왜 내 이불 속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부승민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실눈을 뜬 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랬어?”온하랑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그럼 아니야? 눈 크게 뜨고 한 번 봐…”온하랑은 하던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만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손에 쥔 이불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이 이불… 아무래도… 부승민 것 같은데…온하랑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이불을 발견했다.그 순간,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온하랑의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부승민은 침대에 누운 채 웃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웃음기는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뭘 봐?”“… 아무것도 아니야…”온하랑은 조용히 몸을 돌려 침대를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부승민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온하랑은 생각할 수록 민망하고 수치스러워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손을 뻗어 부승민을 한 번 내리치더니 말했다.“웃지 마!”온하랑은 표정을 굳힌 채 잔뜩 화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부승민의 귀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웃고 싶은 걸 어떡해.”부승민은 온하랑의 말에 더 크게 웃어 보였다. 일부러 정갈하고 새하얀 이빨까지 내보이며 해맑게 웃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의 웃음에 잠깐
부승민은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큰 보폭으로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방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부시아가 울면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눈망울이 눈물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삼촌 으아아앙…”부승민은 부시아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부선월이 한 손님방 입구에 가만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부승민의 냉랭한 눈빛과 부선월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 부시아를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와 물었다.“시아야, 왜 그래?”부시아가 이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부승민의 마음이 아파왔다.온하랑은 진작에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빠른 걸음으로 부시아에게 다가갔다.“시아야, 왜 울어? 숙모한테 얘기해줄래?”“으아앙…”부시아의 두 눈은 하도 울어 벌겋게 부어있었다. 아직 울음기가 남아있는 아이는 계속해서 훌쩍이며 온하랑을 향해 팔을 뻗었다.자신에게 의지하는 아이의 표정을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온하랑이 부시아를 끌어안고 침대맡에 걸터앉았다.부시아는 온하랑의 품속에 고개를 파묻고 조심스레 그녀의 잠옷 옷자락을 꼭 쥔 채 훌쩍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부시아가 이렇게 우는 것에 분명 부선월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굳이 아이에게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아직도 훌쩍대며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부시아의 등을 살살 토닥일 뿐이었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부시아가 점점 울음을 멈추고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부승민에게 따뜻한 수건 한 장을 갖고 전해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부승민에게서 건네받은 수건으로 부시아의 얼굴을 살살 닦아주며 말했다.“시아야, 불꽃놀이 보러 가지 않을래?”부시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우리 같이 자자. 어때? 시아는 삼촌이랑 숙모 사이에서 자는 거야.”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시아는 자리에 누운 후에도 여전히 온하랑의
온하랑이 가볍게 “응.”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보아하니 부승민은 이미 부시아를 곁에 두기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온하랑은 눈을 내리깔아 부시아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손에 한 움큼의 신사임당을 쥐고 소파에 앉아 열심히 돈을 세고 있었다.“삼촌은 얼마 줬어?”아이는 돈을 세며 대답했다.“200만 원 될걸요? 아직 다 못 세어봤어요.”“그럼 우리 시아한테 천만 원 있는 거야? 부자네!”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다시 돈을 세는 데 집중했다.온하랑은 부시아가 돈을 안 센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아침 먹어야 하니까 돈 봉투는 일단 내려놓을까?”“싫어요.”부시아는 보물이라도 숨기듯 돈 봉투를 옷 주머니에 하나씩 쑤셔 넣었다.그 순간,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온하랑은 위층에서 내려오던 부선월과 눈이 마주쳤다.온하랑은 옅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고모님.”부선월은 온하랑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코웃음을 치며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왔다.고개를 들어 부선월의 얼굴을 확인한 부시아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물 들었다.“할머니.”부시아는 부선월을 부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호주머니에 숨겨뒀던 돈 봉투들을 꺼냈다.“시아야, 할머니한테 와.”부선월은 부시아의 맞은 편에 있는 소파 위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부시아가 고개를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부선월은 품에서 돈 봉투를 꺼내더니 부시아에게 흔들어 보였다.“할머니가 세뱃돈 줄게.”부시아는 그제야 천천히 부선월에게 다가가 나어린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고맙습니다. 세배 올릴게요. 할머니, 새로운 한 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착하지.”부선월은 부시아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시아야, 할머니가 사과하마. 어젯밤에는 할머니가 너무 흥분해서 시아를 다치게 했어. 한 번만 할미 용서해주지 않으련?”부시아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대답했다.“할머니, 시아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상가 안에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다.온하랑은 옷을 들고 탈의실에서 나오며 매장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포장 해주세요. 그리고 방금 제가 입어봤던 그 두 개도요.”“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매장 직원은 기쁜 표정으로 옷을 받아들고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온하랑은 매장 직원을 뒤따라가며 무의식적으로 입구에서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부현승도 온하랑을 발견하고 같이 온 일행과 함께 온하랑에게 다가갔다.온하랑도 함께 그쪽으로 걸어가며 웃는 얼굴로 외쳤다.“오빠, 진짜 신기하다.”“우연치고는 진짜 신기하긴 하네. 혼자 왔어?”부현승이 고개를 숙이며 온하랑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부승민이 함께 있을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다.“응.”온하랑은 부현승의 곁에 있는 젊은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젊은 여자 역시 동시에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오빠, 소개 안 해줘?”부현승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소개할게. 여기는 내 여자친구 서혜민이야. 혜민아, 여긴 내 여동생, 온하랑.”“안녕하세요, 하랑 씨.”서혜민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온하랑은 서혜민을 바라보며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혜민 씨,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서혜민은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꼭 잡고 말했다.“저희 온천 리조트에서 만난 적 있잖아요. 거기 식당에서 저희 사촌 언니가 하랑 씨한테 인사할 때 제가 옆에 있었거든요.”온하랑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서수현 씨가 사촌 언니셨군요. 수현 씨 잘 지내죠?”어찌 됐든 다 부승민이 온하랑 때문에 저지른 짓이 있던 터라 온하랑의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서혜민이 가방끈을 꽉 쥐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부현승을 바라보고는 말했다.“사촌 언니요? 잘 지내죠. 큰아버지께서 신장 이식을 받을 수 있게 됐대요. 설날 지나면 곧바로 수술 들어갈 거라 요즘 기분 엄청 좋아 보여요.”“아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손가락은 옷소매를 꽉 쥔 채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이 층에는 온하랑과 김시연의 집 하나밖에 없었다. 집 밖으로는 바로 엘리베이터가 있고 엘리베이터 옆으로 소방 대피 통로가 있는 구조였다.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저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의 잔잔한 소음만이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하지만 온하랑은 소방 대피 통로 문 뒤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 종이를 두고 간 사람이 그 뒤에 숨어 온하랑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지도 몰랐다.온하랑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몸을 돌려 문을 굳게 잠갔다.그녀는 문에 등을 지고 기댄 채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려버렸다.몇 분 정도가 지나자 겨우 안정을 되찾은 온하랑은 그 종잇장의 사진을 찍어 관리 사무실 카카오톡으로 보내 CCTV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전에 살해 협박을 한 번 받았을 때 온하랑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이번 일을 조사하는 데에도 큰 두려움을 갖지는 않았다.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된 판에 온하랑도 그저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온하랑은 휴대전화를 들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통하자마자 온하랑이 바로 입을 열었다.“승민아, 나한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시아 데리고 돌아갈래? 요 며칠 동안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자신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든 별로 상관없었지만 부시아까지 끌어들여 큰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수화기 너머의 부승민이 말했다.“나 이미 너희 집 앞인데.”“먼저 돌아갈래?”“허.”“…”2분 정도가 지나자 문밖에서 또 한 번의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이번에는 인터폰으로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부승민과 부시아인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안심하고 문을 열어주었다.부시아는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바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고양이에게 장난을 치며 웃
만약 단순한 장난이었다면 가장 좋은 결과일 것이다.만약 그게 아니라면…“응, 알겠어.”“맞다, 서우현 의뢰인은 찾아봤어?”“찾았어.”“누구야?”“… 온하랑.”육광태가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부승민이 순간적으로 흠칫하더니 옆에 있던 현관문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확실해?”“확실하고 말고를 넘어서 확신이야. 서우현한테 의뢰를 맡기기 전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난 적도 있더라. 아마 의뢰하려고 만났겠지.”부승민이 침묵을 지켰다.온하랑이 사립탐정에게 그 시절 납치사건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니, 대체 왜일까?육광태가 웃으며 말했다.“에이, 제수씨가 아직 너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래서 알아보고 있는 거 아니야? 한번 계속 알아보라고 해. 어차피 지금 추서윤이랑 완전히 헤어진 거 아니야? 그럼 굳이 숨겨줄 필요도 없잖아.”지금 인터넷에는 그 납치사건에 대한 정보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선 부승민의 공로가 컸다.그러니 온하랑이 사립탐정을 찾아 의뢰를 맡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부승민이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나와 추서윤 사이가 지금 어떻든, 추서윤이 그 납치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만약 이 일에 네티즌들에 의해 까발려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은 물론 추서윤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더 많은 시궁창 속 쥐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연예인 피해자에 대한 비판과 조롱, 비하를 일삼을 게 뻔했다.그때 그 일은 추서윤의 남자 친구로서 부승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부승민은 그날 납치사건에 관련된 모든 뉴스를 지워달라는 추서윤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한 번 약속을 한 이상 그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부승민 역시 이 일로 추서윤을 협박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지금 추서윤의 처지도 자업자득인 격이었으니 부승민은 지금의 추서윤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육광태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그건 그래.”통화를 마치고 부승민은 다시 온하랑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