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부선월은 쿵쿵, 걸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부선월의 뒷모습이 계단에서 사라지자, 김정숙은 온하랑을 위로했다.“하랑아, 고모의 헛소리를 듣지 마.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야. 조금만 맘에 안 들면 소란 피우는 건 몇 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으니, 원...”“괜찮아요, 할머니. 저도 알고 있어요.”온하랑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부선월의 아무런 타격도 없는 욕설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일 년에 몇 번 밖에 만나지도 않으니 말이다.“그럼 저 이제 숙모랑 같이 못 놀아요?”부시아는 작은 팔로 부승민의 목을 끌어안은 채 빨개진 커다란 눈망울로 아쉬움을 가득 담고서 온하랑을 바라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아니지.”부승민이 얼른 대답했다.“네가 숙모랑 놀고 싶으면 숙모랑 놀면 돼. 누구도 널 제지할 수 없어.”“그랬다가 할머니가 또 화를 내면 어떡해요?”“할머니는 잠깐 화나셨을 뿐이야. 게다가 삼촌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네...”부승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부시아는 그에게 매우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얼굴까지 닮아서 정말 친아버지와 딸 같았다.김정숙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부선월의 태도를 떠올리더니 표정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머릿속에는 믿을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설마 시아가 정말 부승민의 친딸인 걸까?부선월은 오랫동안 혼자 살았는데 왜 갑자기 아이를 입양할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우연이라고 하기에 이 아이는 부승민을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게다가 부시아는 아주 건강한데 부모가 왜 버렸을까?이렇게 건강한 아이가 어떻게 독신인 부선월한테 입양할 차례가 주어질 수 있을까?그러나 김정숙은 부승민이 절대 밖에서 아무 여자나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부승민이 아이의 아버지라면 아이의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아마도 허무맹랑한 생각이겠지?김정숙은 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다.점심때 다들 그
그러기에 경찰이 민성주를 조사해 내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 관계는 너무 복잡했다. 민성주는 유괴당한 적이 있는데 워낙 오래된 사건이라 민지훈조차 알지 못했다.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고 온하랑은 천천히 저으며 어떻게 민지훈에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온하랑은 이미 민지훈에게서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하나는 장국호의 위치였고, 나머지 하나는 장국호와 민성주의 관계였다. 더 많은 것을 캐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더 물으면 민성주가 의심할 것이다.나머지는 경찰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제 민지훈은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였다. 아무 말도 없는 온하랑 때문에 민지훈은 불안감에 긴장해서 물었다.“누나, 생각해 봤어요? 나랑 헤어질 거예요?”온하랑은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서수현 사건을 빌미로 민지훈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 같았다.그렇게 하면 그녀가 일부러 민지훈에게 다가간 사실도 숨길 수 있고, 그에게서 순조롭게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행위는 너무 정 없고 이기적이라서 마음에 걸렸다.민지훈에게 미안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래 끄는 것보다 마음이 아파도 차라리 확실하게 일찍 끝내는 게 나았다.민지훈은 조마조마해하며 온하랑을 살폈고 그녀가 여전히 침묵하자 마음속으로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기대감이 남아 있었다. 온하랑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한 사람이 다가와 테이블 옆에 섰다. 고개를 들자 부승민의 엄숙한 두 눈빛과 마주쳤다.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온하랑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안에는 셔츠와 정장을 입고 반듯하게 묶은 넥타이 위에는 정교한 핀이 꽂혀 있었다. 밖에는 심플한 검은색 코트를 입었는데 덕분에 길쭉한 몸매가 더욱 돋보였고 온몸에서 윗사람의 기세를 내뿜었다.온하랑은 깜짝 놀라 맞은편에 앉은 민지훈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부승민에게 말했다.“여기는 왜 왔
“그게 오빠랑 무슨 상관인데?”온하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승민은 민지훈과 헤어지라고 그녀를 압박하고 있다. 그들이 진짜 헤어지게 되면 부승민이 그녀를 어떻게 괴롭힐지 벌써 걱정이 앞섰다. 부승민은 한참 온하랑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실소를 터뜨렸다.“민지훈이 그렇게 좋아? 그놈이 바람피우는 건 받아주면서 나는 싫어? 그놈이 너에게 주는 거 나도 줄 수 있어. 걔가 못 주는 것도 난 다 줄 수 있다고!”하지만 사실은 그가 말한 것과 반대였다. 온하랑은 민지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이성적으로 연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또한 온하랑이 부승민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 쉽게 상처받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온하랑이 입을 열었다.“정신적으로 바람피운 것도 바람이야. 잊지 마. 며칠 전에 네 입으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추서윤이라고 인정했잖아.”부승민은 슬픈 눈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랑아,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너도 알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라는 거...”“난 모르겠는데.”온하랑이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뜻은 내가 내로남불이라는 거잖아? 좋아. 지훈이랑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게. 하지만 오빠랑도 똑같아. 어때? 이럼 공평하지?”온하랑의 냉랭한 말에 부승민의 가슴은 날카로운 한기가 흘러들었고, 그는 손으로 미간을 누르며 지친 듯 고개를 숙였다.“정말 그렇게 생각해?”“그래.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부승민은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눈빛을 번뜩이며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그건 불가능해! 이번 생에, 나에게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부승민, 너...”부승민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온하랑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밖으로 나갔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온하랑이 몸부림칠수록 부승민은 손가락을 점점 더 조였다. 커피숍 앞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는 조수석 문을
“지금 당장 전화해서 헤어지겠다고 해.”부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온하랑을 보면서 말했다. 온하랑은 몇 초간의 침묵 후 망설이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민지훈과의 연애에서 잘못한 건 그녀였다. 원래는 민지훈과 직접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하고 싶었다. 정중히 말해야만 민지훈에게도 조금의 위안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전화로 헤어지자고 하는 건, 그것도 부승민 앞에서 말하는 건 온하랑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온하랑이 아무 말도 안 하자 부승민은 그녀를 흘끗 보고는 압박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왜, 싫어? 싫으면 내가 할게.”부승민은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민지훈에게 전화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민지훈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그 모습을 본 온하랑은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고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부승민, 선 넘지 마!”머리를 들어 올린 부승민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썹은 잔뜩 올라간 채 눈빛은 더없이 단호해 보였다.“내가 선 넘었다고? 난 늘 이랬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온하랑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자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두 사람은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전쟁을 치른 적군 같았다. 결국 몇 초 뒤 온하랑이 이 대치에서 물러났다. 눈을 내리깔고 등을 좌석에 기대며 휴대폰을 꺼내 민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스피커 눌러.”부승민이 지시했다.“쓸데없는 참견은.”온하랑은 눈을 흘기며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통하자 건너편에서 민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차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민지훈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말투는 지금 상황을 떠보는 듯한 기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온하랑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훈 씨.”건너편에 있는 민지훈은 온하랑의 감정 변화를 느낀 듯 갑자기 당황해하며 말했다.“누나, 지... 지금 저랑 헤어지려고 그래요?”“... 미안해요, 지훈 씨. 우리
“난 이미 오빠가 말한 대로 했으니까 오빠도 약속 꼭 지켜. 내 의견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부승민은 앞만 보면서 운전에 집중했다.의견을 존중해 달라고? 그게 무슨 의견인지 봐야지.두 사람은 본가에 도착했다.부민재네 가족과 둘째 삼촌네 가족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평소 하던 대로 오늘 밤은 모든 가족이 모여서 식사할 것이다.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가족 모임은 평소보다 한 사람이 줄었다는 것이다.이 점을 생각하니 온하랑은 문득 슬퍼졌다.거실에서 할머니 옆에 소청하와 둘째 숙모가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민재는 다른 쪽 소파에 앉아 옆에 있는 부현승과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그리고 부시아와 부윤민은 주방에 있는 식탁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다.그들과 인사를 나눈 온하랑은 소청하 옆에 다가가 앉았다.“형님, 안녕하세요.”소청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소 부자연스러운 그 미소는 억지로 짜낸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눈가가 거무스름한 게 몹시 피곤해 보였다.온하랑은 소청하가 걱정되어 물었다.“형님, 어디 편찮으세요?”부민재가 듣고 고개를 돌려 소청하를 힐끔 쳐다봤다. 놀란 소청하는 온하랑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아니. 괜찮아요.”소청하는 온하랑 뒤에서 따라오는 부승민을 보더니 온하랑에게 몸을 붙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도련님이랑 화해했어요?”“아니요.”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흘끗 봤다.그는 부현승 옆에 다가가 앉았다. 부민재는 분명 부승민과 친형제이지만 지금 보니 부현승과 더 닮아 있었다. 오히려 부승민은 그 누구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할머니와 둘째 숙모도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숙모가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벌써 스물일곱인데 여자 친구도 없다니.”부현승은 소파에 기대어 어색하게 웃으며 목을 주물럭거렸다. 온천에서 긁힌 상처가 아직 남아있었다. 부현승이 말했다.“엄마,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 곧 여자 친구가 생
온하랑은 그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그렇게 부시아와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저녁 준비할 시간이 되자 내려가서 일손을 거들었다.둘째 숙모와 소청하는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부승민과 부현승, 부민재도 안에서 새우를 손질하고 갈비를 잘랐다.거실에는 할머니와 두 아이만 남았다.온하랑은 소청하를 쳐다보고는 다시 닭 다리를 재우고 있는 부민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한마디도 교류가 없는 것을 보니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소청하는 아예 부민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부민재는 소청하를 힐끔 보다가도 곧바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탁에 음식을 가득 차려놓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가족들은 하나둘씩 원형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다. 자리에 앉을 때 소청하는 일부러 온하랑 옆자리를 짚으며 말했다.“여기에 어린이 의자 두 개 추가하고 윤민이랑 시아 앉혀요.”온하랑은 그녀가 부민재와 같이 앉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란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부선월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부시아는 이미 온하랑 옆에 앉아서 부윤민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부선월의 표정은 몹시 언짢아 보였는데 할머니 옆자리에 앉으며 부시아에게 말했다.“시아야, 할머니 옆으로 와!”부시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할머니, 저는 숙모 옆에 앉고 싶어요.”온하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청하가 먼저 말했다.“고모님, 시아 여기 앉아서 윤민이랑 같이 놀게 해요.”소청하는 아이를 핑계로 옆자리에 앉았으니 이때 당연히 온하랑 대신 나서서 말해야 했다.부선월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할머니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명절인데 적당히 해.”그러자 부선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할 때 부민재는 소청하에게 음식을 집어주었지만 소청하는 못 본 척하며 그에게 음식을 집어주지 않았다.식사가 끝난 후 부씨 가문 사람들은 거실에서 윷놀이도 하고 체스도 두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불만이 자리 잡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부민재와 함께 지내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이혼을 하면 부씨 가문 핏줄인 부윤민은 이 집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소청하는 자신의 아이와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저도 제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그녀는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저번 달에 부민재랑 통화 중이던 여자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런데도 저한테 따로 무슨 일인지 얘기 해주지도 않고 계속 피하기만 하더라고요… 전엔 단 한 번도 저 몰래 여자랑 통화한 적 없었거든요. 여자 비서든, 여사친이든 제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요… 그때도 별로 신경은 안 썼는데 그 후로 어느 날 갑자기 부민재 몸에서 여자 향수 냄새가 나는 거 있죠? 그리고 머리카락, 손, 목덜미 쪽 손자국까지… 딱 봐도 여자 손톱자국이었어요.”“제가 부민재한테 따졌을 때는,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거든요… 하… 근데 그 여자가 누구냐고 직접 물었을 땐 또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보죠?”딱 들어도 지금 소청하는 부민재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마음속에 진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이런 상황에 온하랑이 소청하 대신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었다.온하랑이 부씨 가문으로 들어왔던 그때도 소청하와 부민재는 이미 연애 중이었다. 온하랑이 대학교 신입생이 되던 그해에 둘은 성대 하고도 낭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온하랑은 두 사람의 연애부터 결혼까지 모든 것을 다 지켜보았다.결혼 후, 소청하는 임신에 성공했지만 아이를 한 번 잃은 경험이 있다.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정성스레 공을 들여 비로소 부윤민을 얻은 것이다.온하랑은 한 때 소청하가 너무 부러웠다. 소청하와 부민재의 금실 좋은 부부 사이가 부러웠고 화목하고 아름다운 그 가족이 부러웠다.하지만 지금, 화목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 가정에 금이 갔다.부승민, 부민재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온하랑은
온하랑은 이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너도 새해 복 많이 받든지.”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어디 가?”부승민이 뒤따라 오며 온하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그냥 산책 좀 하는 거야.”온하랑이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방금 형수님이랑 얘기하고 있던데. 뭔 얘기하고 있었어?”부승민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온하랑이 눈썹을 찌푸리더니 부승민을 흘겨보며 말했다.“넌 모르겠어? 아주버님 오늘따라 형님한테 말도 잘 안 걸고, 평소랑 다른 게 뻔한데.”“난 몰랐지. 너만 보느라.”온하랑이 눈을 부릅뜨고 부승민을 째려보았다.“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게.”“그래?”부승민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으쓱 치켜들었다.온하랑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물었다.“아무래도 아주버님한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같은데. 넌 뭐 아는 거 있어?”“몰라.”부승민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무슨 오해가 생긴 건 아닐까?”부승민은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먼저 좋다고 쫓아다닌 쪽은 부민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같이 자라온 사람으로서 부승민이 아는 부민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부민재는 소청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오랜 시간 결혼 생활을 해오며 부부 사이도 아주 화목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귀여운 아이까지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바람이 난다고?온하랑이 비웃었다.“형님이 아주버님한테서 나는 여자 향수 냄새를 맡으셨대. 여자 머리카락도 같이 발견했고. 게다가 몸에서 여자 손톱에 긁힌 자국까지 있는데 그 여자랑은 아무 사이 아니라고 잡아떼셨다더라. 그래서 그 여자가 누구냐고 형님이 물어보니까 막상 대답은 안 하고. 왜? 이래도 형님이 지금 오해 하는 것 같아?”온하랑의 대답에 부승민이 입을 다물었다.온하랑이 우습다는 듯 부승민을 바라보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역시 두 사람 형제 맞네. 이렇게나 서로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