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민지훈이 밤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건가?온하랑은 소파에 앉아 눈을 치켜뜨고 민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두 손은 옷자락을 움켜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누나, 정말 저를 믿으셔야 해요...”“서두르지 말고 먼저 앉아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떠올려 보세요.”온하랑이 말했다. 민지훈은 온하랑의 맞은편에 앉아 미간을 찡그리며 필사적으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어요... 모두가 술을 권해서 저도 몇 잔 마셨는데 술이 그렇게 독할 줄 몰랐어요...”“마지막 기억은 어디에서 멈췄어요?”민지훈은 눈을 감고 생각하면 할수록 두통이 더 심해졌다.“기억이 안 나요. 동료가 저한테 술을 권했던 것 같아요...”온하랑이 물었다.“수현 씨가 305호에 있는 건 미리 알고 있었어요?”민지훈은 즉시 고개를 흔들며 황급히 말했다.“몰라요! 누나, 진짜 몰랐어요. 믿어 주세요. 그날 수현 씨가 양아치를 만나 제가 도와주고 수현 씨가 기절하는 바람에 호텔에 데려다준 게 전부예요...”온하랑은 생각에 잠겨 눈을 내리깔았다.그렇다면 이건 너무 우연의 일치인 것 같았다.민지훈은 술에 취해 한층 적게 올라가서 정확히 서수현의 방으로 갔다.“가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봐야겠어요.”온하랑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서수현 씨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겠다고 말했지만, 번복할 것도 대비해야 해요.”“알아요.”민지훈은 두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버려진 강아지처럼 온하랑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누나, 날 떠나지 않을 거죠?”그는 부승민이 바람을 피워 그들의 결혼 생활이 깨진 것을 알고 있었다. 온하랑은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해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몇 초간의 침묵 후 온하랑이 입을 열었다.“지훈 씨, 지금은 장담할 수 없으니 감시카메라를 보고 동료들에게 물어 보고 나서 다시 말해요.”그녀가
온하랑은 멈칫했다.“진짜야?”사실이라면 민지훈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방을 잘못 찾아간 거지?“그래, 못 믿겠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그럼 오빠는 언제 끝나서 돌아갔는데?”“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너무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겼어. 어떻게 돌아왔는지 나도 기억나지 않아.”“알았어. 다음부턴 적당히 마셔. 몸에 좋지도 않은걸.”“방법이 없잖아. 사실 남자들은 밥 먹으며 술을 마시는 게 정상이야. 그러면서 정을 키우는 거지. 괜히 이런 일로 따지지 마.”부현승이 말했다.“그래, 알았어. 지훈 씨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가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왜 따지겠어. 그럼 방해 안 할게. 빠이.”“빠이.”전화를 끊은 후 온하랑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부현승은 민지훈이 많이 마시지 않았다 하고, 하필이면 감시카메라는 고장 났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사실이 어떻든지 온하랑은 아직 민지훈이 필요 했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승민과의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민지훈을 바로 용서하면 안 된다. 무조건 그를 차갑게 대하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었다.게다가 이런 일까지 발생했는데 민지훈이 온하랑을 위해 장국호의 일을 물어 봐 줄 마음이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온하랑과 민지훈이 방에서 나간 후 서수현은 온몸에 힘이 빠져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서글픔에 두 눈을 꾹 감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빚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요란하게 울려댔다. 서수현은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놓인 옷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애써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위압감이 섞여 있었다.“일 처리는 어떻게 됐어요?”서수현
...음식점에 가서 아침밥을 산 온하랑은 민지훈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민지훈은 허겁지겁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그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교차했다.“누나, 드디어 왔네요.”온하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지금 밥 먹으러 식당에 갈 기분이 아닐 것 같아서 아침을 사 왔어요.”그녀는 아침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모니터링실에 다녀왔는데 공교롭게도 어젯밤 본관 감시카메라가 고장 났다네요.”민지훈은 당황해서 해명했다.“누나,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감시카메라를 고장 내겠어요...”“그런 뜻이 아니에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요. 승현 오빠에게 물어봤는데 지훈 씨가 확실히 취했다고 했어요... 됐어요. 우선 밥부터 먹어요. 진정하고 나서 다시 말해요. 저도 신중하게 생각해 볼게요.”뭘 신중하게 생각한단 말이지?분명 그와 계속 만날지 고민한단 말일 것이다.민지훈은 바짝 긴장했다.“누나,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전 정말 헤어지기 싫어요!”그는 자기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다 제 탓이에요.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게 된 거예요! 전 정말 죽어도 싸요...”“이러지 마세요.”온하랑은 그를 제지했다.“헤어진단 말은 안 했어요. 다만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지훈 씨만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요.”“그럼...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요...”민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사흘이요. 사흘 후에 다시 만나서 얘기해요. 그동안은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죠.”민지훈은 입술을 깨물며 마치 길가에 버려진 대형견처럼 귀를 축 늘어뜨렸다.“알았어요... 사흘 후에 누나를 찾으러 갈게요.”“네. 전 일단 방으로 돌아갈게요.”온하랑은 아침밥을 챙겨서 민지훈의 방을 나갔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 후 부승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 짜증이 나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부시아가 그녀를 찾고 있을까 봐 걱정
그 끈이 달린 심플한 천 쪼가리는 텅 빈 베란다에서 유독 눈에 확 띄었다.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오르며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부승민! 너...”“내가 뭐?”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던 부승민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다 알면서 굳이 되물었다. 온하랑은 이를 악물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부시아의 앞에서 다투고 싶지 않았고, 이 일로 부승민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온하랑은 곧바로 베란다로 달려가 비키니를 거두었다.온하랑이 얼른 비키니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데 부승민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는 온하랑의 손에 들린 비키니를 낚아챘다.“뭐 하는 거야?”“내가 뭐 하는 것 같아?”온하랑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비키니를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부승민이 긴 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온하랑은 손이 닿지 않아 화가 나서 옆구리에 손을 짚고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당장 돌려줘!”“이건 내 건데 왜 너한테 줘야 해?”부승민이 당당하게 말했다. 온하랑은 그의 이런 뻔뻔스러운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뭐가 오빠 거야? 그건 내 거야...”“네가 버린 걸 내가 주웠으니 이제 내 거야!”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허 벌린 온하랑은 갑자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하지만...”“하지만 뭐?”부승민이 되물었다.“내 말 틀렸어?”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붉어지고 눈가는 촉촉해졌다. 몹시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마 터뜨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부풀어 오른 복어 같았다.부승민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비키니를 코끝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너무 좋아!”“!!!”온하랑은 온몸에 닭살이 돋아 오르고 두 귀는 빨개지다 못해 피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허파는 분노로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부승민! 너... 너 어쩜 이렇게 유치해?”“그런데.”
부시아는 곧바로 방에서 총총 뛰어나오며 물었다.“삼촌은 안 가요?”“안 가.”“가.”두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울려 퍼졌다. 부시아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한 바퀴 굴리더니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삼촌은 대체 가요, 안 가요?”온하랑은 이를 악물고 마치 네가 가면 내가 안 간다는 기세로 부승민을 째려보았다.“안 가.”부시아는 부승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승민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시아야, 삼촌은 안 갈 테니 숙모랑 재밌게 놀아.”“알았어요.”온하랑은 부시아와 함께 오전 내내 놀았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부시아가 물었다.“숙모, 우리 오후면 돌아갈 건데 나랑 같이 갈래요?”온하랑은 머뭇거렸다. 사실 그녀는 오후에 김시연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이미 민지훈과는 사흘 후에 다시 보기로 약속했으니 굳이 버스를 타고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다만 그녀는 어떤 초딩과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온하랑은 옆에 있는 부승민을 흘겨보았다. 부승민도 깊은 눈동자로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온하랑이 자신을 쳐다보자 시선을 거둔 부승민은 웃으며 말했다.“왜 나를 쳐다봐?”온하랑은 싸늘하게 대꾸했다.“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져 주면 참 좋을 텐데.”부승민은 피식 웃었다.“미안, 이건 들어줄 방법이 없네.”무표정으로 흥, 코웃음을 친 온하랑은 김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시연은 일이 있어 본가에 있어서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온하랑은 허탈하게 이마를 문질렀다. 아마도 이 초딩과 한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시아에게 물었다.“언제 떠나?”“저녁 먹기 전에요.”“그래, 그럼 같이 가자.”부승민은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민지훈과 함께 돌아갈 계획이 없었다. 아마 어젯밤 일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민지훈과 헤어지자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테이블 위에 주제가 바뀌었다. 부시아는 부승민에
부승민의 눈빛에는 장난기와 함께 간교함이 섞여 있었다. 눈을 부릅뜬 온하랑은 그를 무시하고 돌아서서 부시아를 찾으러 갔다....온하랑은 부시아와 함께 또 온천에서 온 오후 몸을 담갔다. 이윽고 그들은 짐을 정리하고 리조트를 떠났다. 가는 길에 왕대운의 창고를 지나며 온하랑은 반사적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민지훈과 왕대운을 만나게 할 계획이었다. 적당한 계기를 빌어 민지훈 앞에서 왕대운을 언급하여 왕대운의 신분과 과거를 밝힐 최적의 장소가 바로 창고였다. 그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대운의 재산 문제도 드러낼 수 있는 완벽한 선택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양아치 몇 명을 찾아 일부러 저번 사고를 일으켰다. 이제 그녀는 장국호가 양강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민지훈을 통해 민성주와 장국호의 관계를 알아내어 작은 단서라도 찾으려고 했지만, 인질이 나서서 범인을 지목하지 않을 가능성은 물론이고 아직 민지훈 쪽에서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설령 결과가 있다고 해도 이미 단서를 지웠을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장국호를 자연스럽게 국내로 유인하여 경찰에 넘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해외에서 누군가를 체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장국호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게 조용히 움직여야만 한다.온하랑은 이마를 문지르다가 무심코 눈을 들어 백미러를 통해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부승민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백미러에서 부승민의 몸으로 향했다.그녀의 각도에서 보니 그의 턱선은 날렵하게 각이 잡혀 있었고, 목뒤의 머리카락은 윤기있고 깨끗했다. 곧게 뻗은 어깨는 슈트를 받쳐주고 커다란 손은 핸들을 잡고 있었다. 구겨진 옷 주름을 따라 튼튼하고 힘 있는 팔뚝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모든 점이 그녀의 취향에 꼭 부합됐다. 과거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부승민을 다시 만난다면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빠?”조용한 차 안에서 온하랑이 돌연 그를 불렀다.
부승민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올라갔다....강성 시내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부승민은 어느 음식점 앞에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었다.“먼저 저녁 먹고 데려다줄게.”온하랑과 부시아는 차에서 내렸다. 세 사람은 함께 음식점 2층에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기 전 온하랑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비상계단을 지나갈 때 온하랑은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자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감독님, 이러지 마세요... 여긴 음식점이잖아요. 밤에 호텔에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이윽고 음란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밤에? 지금 이미 참을 수 없어...”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프로그램은...”“걱정하지 마, 널 꽂아 줄 거야. 빨리 내가 예뻐해 줄게...”“안 돼용...”여자의 앙칼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예계의 은밀한 비리를 직접 마주친 순간이었다. 온하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조용히 계단 앞을 지나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눈을 들어 올리자 비상계단에서 중년 남자가 옷깃을 여미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온하랑이 똑바로 바라보니 방금 전에 여자 연예인이 성 상납을 한 중년 남자는 바로 예전에 온하랑에게 민폐를 끼치던 이상수 감독이었다!다만 온하랑은 이 감독이 이렇게 빨리 끝낼 줄은 몰랐다. 대충 시간을 헤아려보니 5분도 채 안 됐다.온하랑이 비상계단을 통과할 때 한 여자가 안에서 머리를 정리하며 걸어 나왔다. 온하랑을 보자 여자의 발걸음이 휘청거렸다.그녀의 얼굴은 본 온하랑의 눈가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온하랑은 추서윤이 이 지경까지 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부승민의 지원 없이 연예계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어두운 수렁과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애초에 할아버지를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하지만 않았다면 부승민의 태도를 놓고 볼 때 분명 추서윤의 부귀영화를 보장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건 그녀의 자업자득
온하랑이 침묵하자 추서윤은 뿌듯하게 웃었다. 온하랑이 부승민한테 캐물어 부승민이 온하랑의 사진과 신분을 알려준다면 온하랑은 스스로 굴욕감을 찾는 것은 물론 영원히 부승민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추서윤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아직도 모르겠어? 부승민이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네가 그렇게 악착같이 집착해서 나와 승민이 사이를 갈라놓지 않았더라면 어르신이 죽었을까?! 넌 화근덩어리야!”“닥쳐!”온하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시울이 빨개졌다.“내가 네 거짓말에 속을 것 같아? 나와 부승민 사이가 어떻더라도 네가 할아버지를 자극할 이유는 없었어. 네가 한 더러운 짓을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오미연이 했던 말과 똑같은 헛소리에 온하랑은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화근덩어리가 아니다. 그래, 절대 아니다!“안 닥치면 어쩔 건데!”추서윤은 냉소를 흘리며 비아냥거렸다.“화근덩어리, 재앙의 신! 어르신은 바로 너 때문에 죽었어! 넌 누구에게나 몸을 대주는 걸레에 불과해. 계속 부승민을 붙들고 늘어져도 부승민은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추서윤은 흥, 콧방귀를 끼고 자리를 떠났다. 추서윤의 뒷모습을 보며 온하랑은 제자리에서 냉소를 흘렸다....온하랑이 다시 룸으로 들어오니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들이 있었다. 부승민은 젓가락을 거두고 눈을 들었다.“돌아왔어?”“응.”자리에 앉은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았다.“오빠.”“응?”부승민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왜 그래?”“방금 추서윤을 만났는데 이상수 감독과 같이 있더라.”“다 본인이 자초한 일이지 뭐.”“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 오빠가 추서윤을 정신병원에 보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나온 거야?”온하랑은 눈을 치켜올렸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부승민을 응시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날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도 알고 심리 준비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 건 할아버지가 나이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