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육광태를 알지만 부승민은 몰랐다. 그렇다고 아는 체할 수도 없었다.부승민의 시선을 마주한 그는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 미소를 띤 채 육광태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다.“이게 이들의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육광태는 보지 않고 바로 부승민에게 건네주었다.“네가 골라.”부승민은 자료를 받아들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심히 지켜보았다.룸 안은 매우 조용했다.분위기도 약간 차가웠다.모든 자료를 다 본 그가 이름을 불렀다.“서수현이 누구지?”한 줄로 선 여자 중에서 왼쪽 두 번째 여자가 흠칫하더니 앞으로 나왔다.“안녕하세요, 제가 서수현입니다.”부승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로 정했어. 다른 사람은 다 나가봐.”그들을 데려온 남자가 물었다.“한 명 더 고르지 않으십니까?”남자 두 명이서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논다는 건가?”“됐어.”“알겠습니다.”남자는 더 묻지 않고 나가면서 얘기했다.“수현아, 두 분을 잘 모셔!”다른 여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룸을 걸어 나갔다.이제 룸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서수현은 부승민과 육광태의 시선 속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소매 속의 주먹을 꽉 쥐었다.“앉아.”부승민은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서수현은 부승민을 보면서 옆의 소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 단정한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같았다.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갓 부씨 가문에 왔던 온하랑을 떠올렸다. 그때의 온하랑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안함이 느껴졌다.이게 바로 부승민이 서수현을 고른 원인이었다.“내가 널 왜 부른 건지 알아?”달칵. 부승민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피워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가볍게 던졌다.보통은 성관계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하지만 부승민의 질문은 평범하지 않았다.서수현이 고개를 저었다.“몰라요.”“가서 남자를 유혹해줘.”서수현은 고개를
요즘 날씨가 좋지 않아 도우미의 손자가 감기에 걸려 며칠이나 청가를 맡았다.부승민은 더이상 BX그룹의 대표는 아니지만 다른 사업을 많이 갖고 있었기에 매일 바삐 돌아 채서 부시아랑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부시아는 그래서 당당하게 온하랑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낮에는 온하랑과 밖에서 놀고 저녁에는 온하랑과 같이 잠을 잤다.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목요일에는 김시연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기에 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부시아를 본가로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고등학교 동창 모임은 오성급 호텔에서 진행되었다.그곳에 가기 전, 김시연은 아주 아름다운 메이크업까지 했다.마친 후 거울을 보던 그녀는 소파에 앉은 온하랑을 보고 자기 얼굴을 가리키더니 흥분해서 물었다.“하랑 씨, 봐요. 어때요?”깔끔한 피부 표현에 자연스러운 색조,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썹은 정신을 확 차리게 했다.옅은 컬러렌즈 속 드러난 그녀의 검은 눈동자. 그리고 위로 올라간 아이라인. 갈색의 팔레트까지 더해지니 김시연의 큰 눈은 더욱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딥 레드 립스틱까지 바르니 흰 피부가 더욱 하얘 보였다. 마치 겨울에 피어난 매화처럼 예뻤다.김시연이 이상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그냥 무표정으로 있기만 해도 고급진 여왕 같은 매력이 있었다.“예뻐요.”온하랑이 웃으면서 말했다.“시연 씨가 직접 한 메이크업인데 실수가 있을 리 없죠.”김시연은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 머리를 정돈하면서 말했다.“감히 날 도발하다니. 내가 무조건 그놈을 짓밟아버릴 거예요.”헤어까지 스타일링을 마친 김시연은 옷장에서 가장 비싼 옷을 꺼내 입고 천만 원 대의 가방도 가져왔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시연을 보고 온하랑은 엄지를 치켜세웠다.김시연은 거울을 보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그녀는 온하랑을 거울 앞에 앉혔다.“이젠 하랑 씨 차례에요. 오늘은 기죽으면 안 되는 날이에요.”저녁. 룸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들은 서
김시연은 저녁을 잘 먹으면서 재밌게 대화를 나눴다.그러다가 강혜령이라는 동창이 말했다.“맞다, 시연아. 그거 들었어? 연도진 귀국했다던 거 같은데. 오늘 올 거래.”그 이름을 들은 온하랑은 김시연을 쳐다보았다.연도진. 그게 바로 김시연과 그녀의 라이벌이 같이 짝사랑했던 남자의 이름이다.김시연은 약간 흠칫하더니 얘기했다.“그래? 그럼 오라고 하지.”그녀의 눈은 약간 흐리멍텅했다.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그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명해진다.강혜령이 또 말했다.“오랫동안 못 만났지? 그때 너랑 이슬비가 얼마나 연도진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었냐. 난 너랑 연도진이 사귈 줄 알았어. 그런데 연도진이 해외로 나가니까 이슬비도 나갔더라? 이번은 이슬비가 주최한 동창회라던데 그래서 연도진도 온대.”“그래?”옆의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설마 두 사람 사귀는 건 아니겠지?”강혜령은 김시연을 흘깃 보고 말했다.“글쎄. 두 사람이 해외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으니까. 이슬비도 계속 솔로였고. 딱 봐도 연도진 때문이잖아. 귀국해서 동창회를 연다는 건,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김시연은 몰래 눈을 흘겼다. 허벅지 위에 놓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얘기했다.“그래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마지막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몰라.”김시연은 표정이 굳어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차갑게 웃었다.“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간 것도 이긴 건가?”그 여자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김시연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필 이때 룸의 문이 열렸다.문 앞에는 25세 좌우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키는 180 이상으로 보였다. 그는 목폴라에 정장 바지를 입고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금테 안경까지 더해지니 정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본 후 김시연을 힐긋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 나누고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었다. 모두 다 예뻤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김시연에게 더욱 많이 집중되었다.생얼을 본다면 두 사람 다 비슷했지만 김시연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니 자기 얼굴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그에 맞는 메이크업을 해서 그녀의 분위기를 잘 드러낼 수 있었다.김시연은 눈을 뜨고 이슬비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단톡방에서 그렇게 도발하더니. 내가 오니까 두려운가 봐?”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약간 어색해졌다.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김시연의 성격은 그대로였다.사람들은 다들 연도진과 이슬비가 사귈 거라고 생각했다.1등과 2등이니까.하지만 연도진과 김시연이 사귀다니.1등과 꼴찌의 만남이다.과묵한 사람과 시끄러운 사람의 만남이다.그때 반에는 김시연과 대적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김시연의 별명 중에는 저승사자도 있었다.하지만 연도진 앞에서 저승사자는 그저 귀여운 양이 되었다.이슬비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너 도진이랑 오랫동안 못 만났지? 도진아, 시연이 여기 있어. 아무리 그래도 사귀었던 사이인데 인사라도 할래?”연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김시연은 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기억 속의 마른 몸은 이제 성숙한 남자의 몸이 되었다. 금테 안경은 과묵한 그의 성격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것 같았다.김시연은 연도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안경 너머, 연도진의 눈빛은 많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김시연이 차갑게 얘기했다.“해외에서 안 먹히니까 돌아온 거야?”연도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아직도 널 데려갈 남자는 없는 모양이지?”사람들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이슬비가 갑자기 웃었다.“시연아, 농담도 참. 도진이는 투자 업계의 신이야. 먹히지 않다니. 헤어진지 오래됐는데 설마 아직도 도진이를 미워하는 거야?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마.”온하랑이 말했다.“연도진 씨라고 하셨죠? 장난도 정도껏 하세요. 시연 씨를 짝사랑하는 남자들이 길거리에 넘쳐나요. 데려갈
다른 자리에는 다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일부러 이슬비 옆자리를 비워두었다.연도진은 입술을 약간 씹었다. 금테 안경 아래의 눈에 불쾌감이 언뜻 엿보였지만 이내 이슬비 옆에 앉았다.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이슬비가 연도진에게 말했다.“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어. 싫어하는 거면 다른 거 시켜도 돼.”연도진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의 다른 남자가 장난치듯 물었다.“내가 싫어하는데, 다른 음식 시켜도 돼?”“저리 꺼져.”이슬비가 웃으면서 얘기했다.밥을 먹을 때, 이슬비는 때때로 옆의 연도진에게 말을 걸고 또 시도 때도 없이 김시연에게 시비를 걸었다.김시연은 그런 이슬비를 무시하고 다른 친구들과 얘기를 나눴다.다른 친구들은 김시연을 더욱 좋아했다.솔로인 남자들도 일부러 김시연한테 말을 걸었다.고등학생 시절, 김시연은 성적이 좋지 않아 담임의 골치를 썩였다. 그래서 담임은 그녀를 마지막 줄에 앉혔다.마지막 줄에는 여자가 김시연뿐이었다. 김시연은 외향적인 성격으로 남자들과 털털하게 친구가 되었다.게다가 남자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이슬비는 연도진을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슬비한테 가고 싶지 않았다.오건호는 원래 김시연의 짝궁이었는데 지금 김시연을 엄청 잘 챙겨주고 있었다. 음식을 짚어주거나 음료수도 부어줬고 그녀의 직업과 삶에도 관심을 가졌다.김시연이 장난치면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하는 거야? 나랑 자고 싶어?”오건호가 웃으면서 물었다.“자게 해줄 거야?”연도진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가 젓가락을 꽉 쥐었다. 낮게 내리깐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이슬비가 옆에서 연도진을 두 번이나 불렀지만 연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슬비는 김시연이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다.눈을 데룩 굴린 그녀는 강혜령에게 눈치를 주면서 앞의 술병을 가리켰다.강혜령은 그 뜻을 알아듣고 술을 주어 한 잔을 김시연에게 주면서 말했다.“시연아, 오랜만인데 같이 술이나 하자.”김시연은 술을 받고 같
김시연이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연도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안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 머리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무슨 조폭 마누라마냥 그를 복도에서 가로막았었다.“연도진. 나 너 좋아해. 내 남자 친구 해라. 어때?”지금도 그녀의 성격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는데 호칭은 쓰레기로 변했다.김시연은 민지훈이 일부러 이슬비의 승부욕을 자극해서 동창회를 열게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이슬비가 무조건 도발을 할 것이라 생각했고 김시연이 성격을 참지 못하고 이슬비의 도발에 넘어가서 동창회에 참가할 거란 것도 알았다.올 때 문 앞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엄청난 정신력으로 겨우 평정을 유지했다.김시연은 룸 앞에까지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룸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김시연은 원형 테이블에 사람이 하나도 없고 테이블 근처에도 사람이 안 보이자 이상함을 눈치챘다.종업원이 이미 테이블을 치웠다고?온하랑은?소파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아가씨, 혹시 방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김시연은 말을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언제부터 저렇게 나이 많은 동창이 있었지?담임이 찾아온 건가?이주혁은 몸을 일으켜 중년의 남성에게 사과의 뜻을 담아서 웃으면서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데려다주고 올게요. 시연 씨. 나가요.”중년의 남성은 어느 프로그램의 피디였는데 이주혁은 그 프로그램에 나가고 싶어서 피디를 매니저랑 같이 이번 점심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이었다.누구도 김시연이 갑자기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가까이 다가서자, 이주혁은 김시연 몸에서 풍기는 짙은 술 냄새를 맡아냈다.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니 적잖이 많이 마신 듯했다. 어쩐지 조금 어리벙벙해 보였다.김시연은 고개를 들고 멈칫하더니 눈을 깜박였다.“이주혁 씨? 어떻게 우리 동창회에 있어요?”이주혁은 그녀의 팔을 밖으로 끌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양새를 보면 김시연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김시연은 이주혁의 옷깃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이주혁 씨는 낯선 사람 아니야. 이주혁 씨는 내 친구야!”이주혁은 연도진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뜨면서 되물었다.“들으셨어요?”연도진도 이주혁을 보면서 말했다.“취했잖아요. 룸도 못 알아보는데 친구도 못 알아볼 수 있죠!”오고 가는 눈빛에서 불꽃이 튕기는 것만 같았다.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룸 안에는 아직 손님이 있어서 이주혁은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난처했다. 그는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김시연에게 물었다.“누구랑 같이 왔어요.”“하랑이요. 온하랑 어디 갔어요? 왜 저 안 기다렸대요?”김시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이주혁은 그 말을 듣고 바로 물었다.“온하랑이 어느 룸에 있는데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눈앞의 남자가 취한 김시연을 데리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연도진은 그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0307.”이주혁은 고개를 돌려 몸 뒤의 김시연을 쳐다봤다.“온하랑 찾으러 같이 갈까요?”“좋아요!”김시연은 병아리처럼 대답했다.“가죠.”김시연은 이주혁의 팔뚝을 잡고 얌전하게 그를 따랐다.그녀는 둘 사이에서 이주혁을 더 믿는 게 보였다.연도진은 한 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안경 너머의 눈빝은 더없이 깊었다. 연도진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걸었다.룸은 딱 두 개 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연주혁이 바로 문을 열고 옆으로 섰다. 그러고는 이주혁을 흘겼다.이주혁은 들어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온하랑을 찾았다.온하랑도 그와 김시연을 발견하고 바로 일어났다.“이주혁?”“하랑 씨!”김시연은 그녀를 보고 헤헤 웃으면서 안겼다.온하랑은 중심을 잡고 김시연의 허리를 안았다.“어떻게 여기 있어?”이주혁은 연주혁에 대한 적의를 거둬들이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여기서 밥 먹고 있는데 방을 잘못 찾아왔더라고.”“고마워.”온하랑은 김시연
주위에서 몰래 속닥거리던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 시선을 보내왔다.주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온하랑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주혁은 저희 친구예요.”친구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면서 온하랑에게 말했다.“그럼, 하랑 씨, 시연아. 이주혁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저도 갖고 싶어요. 부탁할게요...”“나도, 나도. 시연아, 고마워. 고마워요 하랑 씨.”“나도 갖고 싶어. 시연아...”온하랑이 채 말하기도 전에 김시연이 가슴을 치면서 승낙했다.“그래! 문제없어!”“너무 좋다, 시연아!”“고마워, 시연아!”“시연아, 너 이주혁이랑 엄청 사이좋지? 무려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잖아.”온하랑은 눈빛이 어두워졌다.많은 친구가 김시연을 둘러싸고 말했다.이슬비는 이 모습을 보자 눈에 질투가 어려서 주먹을 움켜쥐었다.왜?왜 사람들은 그녀보다 김시연을 더 좋아해 주지? 친구들도 그렇고, 온하랑도 그렇고?내가 김시연한테 꿀리는 게 뭔데?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시연아. 다른 아는 연예인 있어?”김시연은 트림을 하고는 말했다.“있지. 무슨...”그녀는 손가락을 접으면서 연예인들의 이름을 대려는 순간이었다.온하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시연 씨, 배불리 먹었어요?”“배불러요.”김시연은 바로 화제가 바뀌었다.“술은? 술은 어딨어? 난 술 마실래!”“안 돼요. 더 마시면 안 돼요. 돌아갈 때가 됐어요.”“싫어요. 난 더 마실래요!”김시연은 미간을 누르면서 손을 뻗어 온하랑의 팔을 붙잡았는데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안 돼요.”온하랑은 일어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집에 가야 해요.”“아유. 하랑 씨. 시연이가 가기 싫어하는데 그냥 조금 더 앉아 있다 가세요.”옆에 있던 친구가 권했다.김시연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보면서 애 같은 표정으로 입을 뚱하게 내밀었다.“안 갈 거예요. 마실 거라고요!”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숙여 작게 귓속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이슬비랑 연도진이 당신 술주정 부리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