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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 다시 깨어나다
용주, 다시 깨어나다
Author: 빨간 토마토

0001 화

Author: 빨간 토마토
last update Last Updated: 2025-01-07 15:57:59
“처음이니까 살살해줘...”

밑에 있는 여자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귀여운 곰돌이 인형을 들고 있던 박진성은 석 달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로 그날 밤 아내 임효정이 그의 딸을 가졌다.

박진성은 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꾸만 실없이 웃었다. 마치 예전에 자신이 뭘 했던 사람인지조차 깡그리 잊은 듯이 말이다.

과거 그는 무도계의 정점에 선 용주였다. 마지막 결전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처참하게 죽었고 그 역시 중상을 입어 모든 수련을 잃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박진성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용인을 봉인한 다음 은해시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지금의 아내 임효정을 만났고 이젠 딸까지 얻게 되었다.

박진성은 곰돌이 인형을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장인, 장모와 처남 모두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박진성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의 물밑 지원 덕분에 아내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이젠 수백억 자산가가 되었다.

오늘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다. 박진성은 아내를 위해 용성 그룹과의 협력 계약까지 선물로 준비했는데 왜 다들 표정이 어두운 걸까?

“가서 밥할게.”

박진성은 괜한 불똥이 튈까 봐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박진성, 이리 와봐. 할 말이 있어.”

장인 임진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예전엔 참 궁상맞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금붙이를 휘감고 부잣집 회장님처럼 폼을 잡고 있었다.

“장인어른, 무슨 일인데요?”

박진성이 급히 다가갔다.

“이것 좀 봐봐.”

임진규는 박진성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박진성이 고개를 숙여 보니 검고 큼지막하게 이혼 합의서라고 적혀있었다.

“장인어른, 이게 무슨 뜻이죠?”

박진성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임진규는 담배를 한 모금 빨며 말했다.

“네가 본 그대로야. 이젠 효정이도 신분이 달라졌어. 수백억 자산가가 됐고 우리 임씨 가문도 은해시에서 알아주는 재벌이 됐지. 근데 넌... 글씨 하나 잘 쓰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게 없잖아. 이 결혼을 유지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그리고 효정이가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꾸 뭐라 수군거려.”

박진성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억울한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 집안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결국 돌아온 건 이혼 합의서라니... 효정이가 가진 것과 임씨 가문이 가진 모든 게 다 내가 준 건데.’

박진성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건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효정이의 뜻입니까?”

“누구 뜻인지는 알 필요 없어.”

임진규는 담뱃재를 털며 위압적인 눈빛으로 박진성을 노려봤다.

“넌 그냥 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만 하면 돼. 눈치껏 행동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3년이나 같이 산 인연도 있으니 좋게 좋게 끝내자.”

“만약 두 분의 뜻이라면 사인하지 않겠습니다.”

박진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랑 효정이의 행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을 권리는 없어.’

탁.

그때 잿빛이 된 얼굴로 옆에 앉아 있던 장모 유미옥이 참다못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녀는 박진성을 노려보며 매섭게 소리쳤다.

“박진성, 네가 그동안 우리 식구들 수발든 걸 생각해서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뻔뻔한 놈이었어?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면 그 이유를 알려줄게.”

유미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진성에게 손가락질하며 쏘아붙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너 효정이 사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금 효정이가 만나고 다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재계 거물, 돈이 넘쳐나는 회장님, 못해도 대기업 부장급 정도는 된단 말이야. 무능한 넌 그냥 사람들이 혐오하는 벌레 같은 존재야. 우리 임씨 가문은 이미 재벌이 됐고 여기엔 네가 발붙일 곳이 없어. 그러니까 당장 짐 싸서 나가.”

한숨을 깊게 내쉬는 박진성의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때 처남 임동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진성, 3년 동안 누나한테 빌붙어 살았잖아. 누나가 키우는 개나 다름없는 주제에 진짜 사위라도 된 줄 알았어? 당장 사인하고 나가. 안 그러면 가만 안 둬.”

“한 번 더 묻겠습니다. 효정이 뜻인가요?”

박진성이 되물었다.

“빌어먹을 놈!”

유미옥은 흥분한 나머지 박진성을 힘껏 밀쳤다.

“너 바보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엄마, 비켜 봐요. 내가 처리할게요. 오늘 사인 안 하면 다리를 확 부러뜨릴 겁니다.”

임동우는 옆에 있던 야구방망이를 들고 박진성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무거운 합금 방망이를 높이 들고 박진성의 머리를 내리치려던 그때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임효정이 걸어 나왔다. 섹시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 거기에 피부까지 하얘서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옆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잘생긴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천해 그룹 아들 안영재였는데 임효정과 매우 친밀하게 행동하며 안방에서 함께 나왔다.

박진성은 몸을 파르르 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효정을 바라보았다.

임효정의 흔들리는 눈빛에 죄책감이 담겨있는 걸 본 순간 박진성은 모든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효... 효정아, 이게 정말이야?”

임효정은 얼굴이 창백해진 박진성을 보면서 마음이 아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박진성, 우리 이혼하자.”

“아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했던 말씀도 다 네 마음속의 말이야? 지금 내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임효정은 씁쓸하게 웃는 박진성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 난 이젠 다른 세계의 사람이야.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

박진성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아팠다.

이 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구석에 있던 곰돌이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혼할 수는 있어. 하지만 딸이 태어나면 그때 사인할 거야.”

이건 박진성이 참을 수 있는 마지막 한계였다.

그런데 임효정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치 냉혹한 사형집행인처럼 박진성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우리 딸... 이젠 없어.”

“뭐라고?”

박진성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마의 핏줄이 순식간에 튀어나왔고 숨이 턱 막혔다.

“나... 아이를 지웠어.”

임효정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쾅.

박진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곰돌이 인형이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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