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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화

Author: 빨간 토마토
last update Last Updated: 2025-01-07 15:57:59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우리 딸한테 주려고 곰돌이 인형도 사 왔어. 인형이 얼마나 귀여운데 우리 딸도 분명 좋아할 거야.”

박진성은 임효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 딸 아직 있는 거지?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일 거야. 효정아...”

“그만해!”

임효정이 눈을 감자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박진성의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이야. 우리 딸 이젠 없어. 미안해, 박진성...”

“말도 안 돼...”

박진성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고 온몸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손톱이 살 속을 파고들어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가여운 그의 딸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고통에 몸부림치는 박진성을 보면서 임진규네 가족은 코웃음을 쳤다.

조금의 동정심도 없는 건 물론이고 그저 경멸만이 가득했다.

“대체 왜!”

박진성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내가 그 이유를 알려줄게.”

유미옥은 박진성에게 다가가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지금은 효정이 사업이 가장 잘나갈 때야. 이때 임신하면 사업은 망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그러니 아이는 절대 가져선 안 돼. 너처럼 효정이 사업에 걸림돌이 되게 내버려 둘 순 없어. 효정이 데려가서 수술시킨 사람 바로 나야.”

그녀의 미소는 정말 악마가 따로 없었다.

몇 분 후 박진성은 평정심을 되찾고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 망설임 없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다. 글씨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 추악한 상황을 비웃는 듯했다.

박진성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처럼 바닥에 떨어진 곰돌이 인형을 안아 들었다.

절망에 빠진 듯한 박진성의 모습에 임효정은 마음이 아팠다.

“박진성, 그 대신 너한테 보상해줄게. 이 집 물건들 중에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다 가져가도 돼. 그리고 돈도...”

임효정이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네가 원하는 만큼 적어.”

유미옥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효정아, 무슨 소리야, 그게? 이 집 비싼 물건들 전부 우리가 힘들게 벌어서 산 거라고. 저런 쓸모없는 놈한테 하나도 줄 수 없어. 3년 동안 우리가 공짜로 먹이고 호강하게 했으면 우리도 저놈한테 해줄 만큼 다 해준 거야. 그러니까 돈은 한 푼도 못 줘.”

“엄마, 그런 말씀 마세요. 진성이...”

임효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건이든 돈이든 다 필요 없고 옷장 안에 있는 옷들만 가져갈게.”

박진성은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옷장에는 예쁜 옷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전부 그가 딸을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바느질하면서 손수 만든 옷들이었다.

그는 옷을 다 꺼내 침대 시트에 쌌다. 곰돌이 인형도 함께 싼 다음 등에 멨다.

“그 펜던트는 내 거야. 돌려줘.”

박진성은 임효정이 목에 하고 있던 펜던트를 가리켰다. 임효정은 망설임 없이 펜던트를 빼서 박진성에게 돌려주었다.

펜던트를 받은 박진성은 용성 그룹과의 계약서를 꺼냈다.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라서 선물을 준비했었는데 이젠 아무 의미가 없네.”

박진성은 계약서를 바닥에 던지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엄마, 저놈 꼴 좀 봐요. 집에서 쫓겨난 개 같지 않아요?”

임동우가 대놓고 비웃었다.

“그러게, 정말 그렇네...”

유미옥도 비웃었다.

그런데 그때 문 앞에 다다른 박진성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임씨 가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임효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들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내 가여운 딸의 억울함을 꼭 풀어줄 거예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과 살벌한 기세에 임효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쳇,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우리가 후회한다고? 하하하, 웃겨서, 원. 기뻐해도 모자랄 판인데.”

유미옥이 크게 웃었다. 임동우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우며 말했다.

“용성 그룹 계약서?”

‘용성 그룹?’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임효정과 안영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용성 그룹은 강군시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최근 은해시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총투자금만 20조가 넘었다.

은해시의 모든 기업들이 용성 그룹과 협력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효정이 이혼을 결심한 주요 원인도 용성 그룹에 빌붙고 싶어서였다.

“가짜야.”

재벌 도련님 안영재는 대충 훑어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효정아, 네 남편이란 놈 제법 재주가 좋네. 계약서도 위조하고 말이야.”

임효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박진성이 준비한 선물이라고? 날 기쁘게 해주겠다고 가짜 계약서까지 만들었단 말이야?’

임효정은 박진성에게 이혼을 강요하면서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 보니 그녀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정아, 이혼만 하면 모든 게 다 쉽게 풀릴 거야. 네가 강군회 회원이 되도록 방법 생각해볼게.”

안영재는 금테 안경을 쓰고 부티를 뽐냈다.

‘강군회?’

유미옥 등 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반짝였다.

강군회는 사적인 조직이고 회장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한지아였다.

용성 그룹이 바로 한씨 가문의 것인데 은해시에서 진행하는 20조 프로젝트 역시 한지아가 책임지고 있었다.

강군회 회원 모두 재산이 많거나 신분이 높았다. 이는 신분의 상징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원이 되려면 반드시 싱글 여성이어야 했기에 임효정이 박진성과 이혼하려 했던 것이었다.

“도련님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천해 그룹 도련님이시라 인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효정이 도련님 도움을 받으면 사업이 훨씬 더 잘될 겁니다.”

임진규네 부부는 활짝 웃으면서 아부했다.

“하하, 도련님은 박진성 같은 쓸모없는 놈보다 만 배는 더 나으시죠. 우리 누나가 도련님과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은해시 최고 여자 재벌이 됐을 텐데.”

임동우 역시 비위를 맞추면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안영재는 겸손한 척했지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거실 구석에 걸린 글씨를 보더니 즉시 다가가 감탄했다.

“글씨가 참 멋지네요.”

“무슨 글씨야 저건? 얼른 갖다 버려. 재수 없게 거실에 걸어놓지 말고.”

임동우가 말했다.

“고진감래라고 적혀있어요.”

안영재의 두 눈이 점점 더 빛났다.

‘너무 아름다워.’

그러다가 낙관을 보더니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거 혹시 적진 선생님의 작품이에요?”

“적진 선생이 누군데요?”

임진규가 물었다.

“적진 선생님은 우리 은해시에 은둔하고 계신 서예 대가신데...”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안영재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적진 선생님의 작품은 지금 시가로 한 글자에 2천만 원이에요.”

“뭐라고요?”

유미옥이 화들짝 놀랐고 차를 마시던 임진규 역시 그대로 얼어붙었다.

임효정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재 씨, 지금 농담하는 거죠?”

“농담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은해시 서예 협회 부회장이시고 나도 서예 협회 회원이야. 적진 선생님의 작품은 2천만 원을 줘도 구하기 힘들어. 며칠 전에 성원시에서 온 어떤 재력가가 4억 원을 주고 적진 선생님의 진품을 샀는데 겨우 두 글자였어. 그렇게 따지면 한 글자에 2억 원인 거지.”

안영재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효정 씨네 집에 어떻게 적진 선생님의 진품이 있어?”

한참을 멍하니 있던 임효정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저... 저건 박진성이 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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