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지훈의 품에 안긴 한고운과 한지훈을 번갈아 바라보던 강신이 불만스레 물었다.“이 남자는 또 누구야? 왜? 여자 혼자 애 키우려니 좀 벅찼나 보지? 시커먼 때깔 보니까 대충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누나도 저 애도 이제 우리 집안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당장 꺼져.”악담만 잔뜩 내뱉은 채 돌아서려던 강신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허, 누나 설마 돈 떨어진 거야? 설마 구걸하려고 온 건 아니지? 미안한데... 누나한테 줄 돈은 한 푼도 없어. 몰래라도 누나 돕는 사람 역시 내쫓아버릴 거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거든.”이복동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가시돋친 반응에 강유리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나... 초대장 받아서 온 거야.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온 거라고...”이와 동시에 강우연이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강신에게 건네주었다.하지만 초대장을 홱 빼앗은 강신은 바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됐고! 초대장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는 여기 올 자격없어.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누나 발로 나가. 경비 부르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이걸... 이걸 찢으면 어떡해. 이거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란 말이야...”바닥에 주저앉은 강우연이 다급하게 초대장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한 종이쪼가리일 테지만 강우연에겐 의미가 남달랐다.5년만에 처음 가족 행사에 초대받는 자리, 이제 드디어 그녀를 용서해 주는 건가 싶어서 기뻤고 이 초대장이 강우연에게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의 끈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그 희망이 산산조각 나버리다니...한편, 어두운 표정의 한지훈이 바닥에 엎어진 채 종이 조각을 주워모으는 강우연을 일으켜세웠다.하지만 강우연은 그의 손길을 힘껏 뿌리쳤다.“이거 놔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주신 초대장이란 말이에요...”“나도 알아.”그리고 고개를 돌린 한지훈이 여전히 건방진 표정의 강신을 향해 말했
‘하, 왜 이렇게 착한 거야...’착하다 못해 무르기까지 한 강우연을 힐끗 바라보던 한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국 손에 힘을 풀어주었다.그러자 덜렁거리는 손목을 움켜잡은 강신이 바로 펄쩍 뛰더니 강우연과 한지훈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강우연! 하, 어디서 남자를 만나도 저런 깡패 같은 자식을... 그래. 안 가겠다 이거지? 여기서 딱 기다려.”말을 마친 강신이 부랴부랴 자리를 뜨고 소란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저 남자는 누구야? 세상에... 지금 신이 때린 거 맞지?”“하, 신이가 얼마나 독한 애인데... 유리 쟤는 어쩜 남자를 만나도 저딴 애를 만나니?”“그런데 아까 저 남자... 여자애가 자기 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설마... 저 자식이 바로 5년 전 그...”누군가의 목소리에 하객들의 술렁거림은 더 커져만 갔다.5년 전, 길시아의 집안에서 거금을 들여 소문이 퍼져나가는 걸 막은 뒤로 한지훈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어찌나 울었는지 어느새 눈시울이 빨개진 강우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지훈 씨, 괜찮겠죠? 신이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애라... 아까 사람들 앞에서 그 망신을 당했으니 분명 복수하려고 들 거예요. 우리...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하지만 싱긋 미소를 지은 한지훈은 역시나 똑같은 말로 강우연을 안심시켰다.“괜찮아. 내가 있잖아.”한바탕 소란끝에 세 식구가 드디어 좀 앉아보려던 그때 기세등등한 얼굴의 강신이 중년 남녀와 함께 다시 다가왔다.“엄마, 아빠. 이 자식이야! 이 자식이 내 팔을... 분명 강우연 쟤가 시킨 거라니까? 어떻게 좀 해봐!”강신과 함께 등장한 중년 남자는 근엄한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고 이목구비가 언뜻 강우연과 많이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자는 피부며 몸매며 장성한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데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딱 봐도 부잣집 사모님 같아 보였다.“강우연! 네가 감히 여기가 어
강우연이 이렇게 놀랐으니 강학주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한지훈?강우연에게 못된 짓을 저질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 썩을 자식이 아닌가?“너 미쳤어! 저 범죄자 자식 경찰에 신고는 못할망정 뭐? 남편? 저 자식 때문에 우리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잊은 거야? 너...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니?”서경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표정이 안 좋긴 강학주 역시 마찬가지였다.“강우연,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우리 가족 중에 네 얼굴 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1”말을 마친 강학주가 돌아서려 했지만 부리나케 달려나간 강우연이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아빠, 제발... 제발 내쫓지만 말아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가족들을 잊어본 적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가뜩이나 작은 그녀의 등이 더 불쌍하게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지훈은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학주는 매정하게도 딸의 손을 내쳤다.“가족? 그래. 가족이니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저 자식더러 우리 신이한테 사과하라고 해!”쿠궁!‘사과? 지훈 씨가 잘못한 게 아닌데 사과를 어떻게...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정말 영원히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혼란스러운 마음에 강우연은 말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흥. 지금 남자 때문에 가족을 버리겠다는 거니? 좋아. 오늘부터 집은 물론이고 강운그룹이 운영하는 그 어떤 곳에도 발을 들이지 못할 거다. 앞으로 딸 하나 잃었다 생각하고 살면 그만이야!”말을 마친 강학주가 단호하게 돌아서고 서경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우연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그래. 지금 그 자리가 네게 어울리는 곳이야. 기어오르지 말고 평생 그렇게 살아.”그리고 복수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강신은 심지어 그녀에게 침을 뱉기까지 했다.“퉷, 나 참 더러워서...”“아빠! 안 돼요!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 제발...”엄
하지만 강신은 한지훈의 사과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그냥 말로 미안합니다라면 끝이야? 당장 무릎 꿇어. 그리고 내 팔 이렇게 만들었지? 너도 똑같에 만들어줄게.”이에 고개를 번쩍 든 한지훈의 눈에서 살기가 내뿜겨져 나왔다.“적당히 해...”‘뭐야? 저 눈빛은?’그 눈빛만으로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에 강신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한편, 한 기업의 총수인 강학주는 바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5년 전에 먼 발치에서 봤을 땐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아예 바뀌었잖아?’“신아, 그만! 일단 병원부터 가봐. 그리고 너희도 앉아. 경고하는데 조용히 밥만 먹고 가라. 또 소란을 일으키면 그땐 정말 가만히 안 둘 거니까.”이에 한지훈은 너무 울어 비틀거리는 강우연을 부축해 자리에 착석했다.잠시 후, 생일 파티가 시작되고 너도 나도 강준상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할아버지, 관우 씨가 어렵게 구한 백년근 인삼이에요.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깔끔한 검은색 드레스 차림의 강희연이 정교한 상자에 담긴 인삼을 건넸다.“아이고, 이 귀한 걸. 역시 이 할아비 생각해 주는 건 우리 손녀밖에 없네.”생일을 맞이해 한복까지 곱게 차려입은 강준상이 호탕하게 웃더니 미리 준비한 봉투를 건넸다.“자, 이 할아버지가 주는 용돈이다.”이때 강희연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할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관우라고 합니다.”“어머? 오관우? 오찬그룹 회장 오관우? 어머, 희연이 남자 하나 잘 물었네.”“그러니까. 기업 시가 총액만 아마 500억이 넘지 않아?”“강 대표 사업에 큰 도움이 되겠어.”오관우의 자기소개에 하객들이 술렁대기 시작하고 오관우도, 강희연도 어깨가 으쓱해졌다.‘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다들 나만 바라봐주는 이 느낌...’“아이고, 이 늙은이 생일이 뭐라고 여기까지. 어서 앉게.”강준상 역시 오관우를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하객들의 조롱이 날카롭게 강우연의 귀를 파고들자 땅만 내려다보며 걷던 강우연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시간이 지나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감은 여전했다.‘내가...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5년 동안 가족들 도움 하나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고운이를 키워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났다.그리고 이 모든 건 전부 한지훈 때문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와 한발 멀어졌다.‘무서워... 오늘처럼 중요한 날, 5년 전 그날처럼 또 지훈 씨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될까 봐. 또 다시 부모님에게, 할아버지에게, 다른 가족들, 친척들에게 죄인이 되어버릴까 봐...’오만가지 생각에 강우연의 머릿속에 어지러워질 때쯤, 따뜻하고 큰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차게 식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보니 역시나, 한지훈의 맑지만 단단한 눈이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한지훈이 나지막히 속삭였다.짧은 한 마디였지만 사랑이 뚝뚝 흘러넘치는 두 눈과 손끝에서 전달되는 따뜻한 온기가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모두가 날 버렸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지훈 씨뿐이야. 이제 내 가족은 지훈 씨랑, 고운이라고.’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한지훈을 바라보던 강우연 역시 손을 꼭 잡았다.이때,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파티홀의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강우연? 네가 여길 어떻게... 게다가 저 자식까지. 너, 할아버지 쓰러지시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강우연이 등장하는 순간, 짐짓 마음에 안 드는 척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던 강희연이었다.‘그래... 너라면 무조건 올 줄 알았어.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오늘 제대로 밟아줄게. 다시는 얼굴 들고 살지 못하도록.’‘뭐지? 지훈 씨가 분명 초대장은 언니가 보낸 거라고 했는데.’강우연
“으아악! 너... 지금 날 때린 거야?!”따귀의 충격에 잠깐 멍하니 서 있던 강희연이 바로 길길이 날뛰었다.“네가 뭔데 날 때려! 네가 뭔데!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라고!”놀란 건 강희연뿐만이 아니었다.가족들도 초대받은 하객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강희연은 오늘의 주인공인 강준상 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녀, 그런 그녀의 뺨을 때렸다는 건 강준상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관우 씨, 가만히 있지 말고 좀 와봐! 저 자식이 날 때렸잖아. 내 코... 얼마 전에 바로 한 건데. 어떻게 할 거야!”여자친구의 불호령에 역시 멍하니 앉아있던 오관우가 부리나케 달려와 강희연을 뒤로 숨겼다.“야, 너 뭐야? 미쳤어? 감히 내 여자한테 손을 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내 말 한 마디면 너 당장 죽여버릴 수도 있어. 당장 사과해. 안 그럼 너희 세 식구한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하지만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의 협박 따위가 한지훈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가차없이 킥을 날려 오관우를 털썩 주저앉게 만든 한지훈이 그를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래, 이래야 눈높이가 맞지.”“허!”“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사람들이 술렁대고 강우연 역시 단단히 충격을 받았는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멍하니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린 딸 한고운이 아빠를 향해 외쳤다.“아빠 멋있어!”“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겨우 정신을 차린 강우연이 아이의 입을 막고는 한지훈의 팔을 잡아끌었다.“지훈 씨,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그리곤 부랴부랴 강희연, 오관우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죄, 죄송합니다... 저 사람이 너무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까 제발 용서해 주세요. 치료비든 뭐든 보상해 드릴게요.”“보상? 뭘 어떻게 보상할 건데?”어느새 일어선 오관우가 정장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좀 더 널브러져 있지 그래? 어차피 한 방이면 또 나가떨어
한지훈의 승낙에 사람들의 반응은...“허.”“말도 안 되는 소리!”비웃음뿐이었다.“지금 웬만한 기업들은 다들 그것만 노리고 있는데 자기가 아직도 한정그룹 도련님인 줄 아나봐?”강준상의 태도 역시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았다.“지난 5년 동안 뭘 하면서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영하는 기업은커녕 인맥 하나 없는 네가 무슨 수로? S시의 웬만한 기업들은 전부 금조그룹의 남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을 텐데? 그래, 네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5일 안에 해내. 그럼 우연이뿐만 아니라 너도 내 손주사위로 인정해 줄 테니까.”만약 한지훈이 실패한다면 강우연이라는 오점을 영원히 지울 수 있을 테고 만약 성공하여 금조그룹 프로젝트만 따낸다면 강운그룹의 주가 역시 치솟을 것이다. 이건 강운그룹이 한 단계 더 상승하여 재계 50위권 기업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가슴속에 능구렁이 100마리는 넘게 키우고 있는 강준상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지훈을 사위로 받아들인다면 5년 전 그 치욕을 두 사람이 첫 눈에 서로에게 반했다쯤으로 무마할 수 있을 테니 어느 쪽이나 그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뭐 그래도 지까짓 게 무슨 수로 5일 안에 해내겠어...’하지만 한지훈의 대답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5일이나 필요없습니다. 하루면 충분합니다.”“지금 그 프로젝트를 손에 쥐고 있는 누구인지 알긴 해? 너 같은 건 평생 말도 못 붙일 분이셔!”강희연이 팅팅 부은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할아버지, 지훈 씨 S시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데 무슨 수로...”강우연이 애원을 해봤지만 강준상의 태도는 단호했다.“억지로 강요한 적 없어. 사내라면 자기가 하겠다고 한 일은 무조건 해내야지. 이 험한 세상에서 정말 너희 모녀를 지켜낼 수 있는지 검증하는 테스트 정도라고 생각해라.”강우연의 다급함을 눈치챈 한지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믿어.”“하지만...”“몸 깨나 쓰는 거 보니까 어디 조직
“우연이 대신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선물을 보낸이로 온갖 그룹 회장 이름이 언급되던 그때, 한지훈이 입을 열었다.“네가?”잠깐 흠칫하던 강준상이 바로 호통을 쳤다.“거짓말도 정도껏 쳐야지. 너희 가문이 몰락했다는 건 이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이야. 네가 무슨 수로 이걸 구해?”“하, 프로젝트도 따내겠다 그러더니 이제 저 선물도 자기가 보낸 거라고 그러네? 이건 뭐... 리플리 증후군인가?”“강우연 쟤도 참 불쌍해. 어쩌다 저런 남자랑 얽혀서는...”사람들의 비아냥거림이 비수처럼 강우연의 가슴이 꽂히고 결국 그녀는 다시 한지훈의 손목을 잡았다.“제발... 제발 그만 좀 해요.”한지훈이야말로 제발 자기를 믿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만큼 일단 한 발 물러서기로 한다.한고운을 번쩍 안아든 한지훈이 말했다.“내일 저택으로 계약서가 도착할 겁니다. 약속... 꼭 지키십시오, 회장님.”말을 마친 한지훈은 강우연의 손을 잡고 파티홀을 벗어났다.물론 사람들은 그의 말 따위에 신경도 쓰지 않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보물상자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말이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우연은 결국 또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지훈 씨까지...”“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라니까. 저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든 난 전혀 신경 안 써. 그리고 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런데... 금조그룹 프로젝트라니... 누구한테 이걸 부탁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 걸요...”한지훈의 위로에도 강우연의 얼굴에는 수심으로 가득했다.“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니까. S시 친구들한테 부탁하려고.”“정말... 가능할까요?”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 강우연의 눈동자에 조금의 희망이 스쳤다.“그럼.”하지만 잠시 후, 뭔가 떠올린 듯한 강유리가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설마... 금조그룹... 지훈 씨 때문에 파산한 거예요?”사실 한지훈을 다시 만난 뒤로 강우연은
한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도청전인?”국왕은 지금까지 도청전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하지만 한지훈이 추천한 인물이라면 믿을 만했다.“그럼 짐이 그에게 관직을 하사하여,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겠는가?”국왕이 신중하게 묻자, 한지훈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용국이 위기에 처하면 그가 스스로 나설 것입니다. 그는 무종 사람으로 자유로운 삶에 익숙합니다. 오히려 관직을 주면 그에게 부담이 될 것입니다.”“제가 그를 국왕께 추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공개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오륙으로 떠나기 전까지, 적어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합니다.”국왕은 이 말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한지훈, 그대는 진정 나라의 기둥이로구나!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아내와 자식이 아니라 짐이라니! 짐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겠구나!”위기가 해소되자 국왕의 표정도 한층 부드러워졌고, 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오직 국왕 폐하의 근심을 덜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이제 할 말을 다 했으니, 저는 물러나겠습니다.”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국왕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한지훈, 이번 곤륜에서의 경험이 상당했을 텐데... 지금의 그대는 어느 경지인가?”잠시 침묵이 흘렀다.“천신입니다!”짧고 날카로운 대답이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순식간에 한지훈의 모습이 사라졌다.“천신...?!”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국왕 폐하, 방금 누군가 다녀갔습니까?”진우가 문을 밀고 꼭대기 층 테라스로 들어오며 말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그래, 한지훈이었다!”국왕이 담담히 대답했다.“한지훈이라고 하셨습니까?!”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귀신이나 환영 같은 걸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지훈은 이미…“쓸데없이 놀라
이 시각, 강중에서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도는 것과 달리, 용경은 한층 더 고요했다.용각에서 국왕은 홀로 천자각 꼭대기에서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지금 한지훈이 부재한 상황에서, 용국은 반드시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아야만 했다!그러나 유청은 그 기준에 명백히 미치지 못했다.적어도, 실력이나 경지에 있어서 유청은 열국을 위압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바로 그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내려앉았다!“누구냐!”국왕은 즉시 돌아서며 크게 외쳤고, 동시에 허리에 손을 뻗어 검을 뽑으려 했다.“국왕 폐하, 저입니다.”스윽—!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국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한... 한지훈?!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국왕은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너...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국왕은 말을 하며 몇 걸음이나 물러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세히 보니 과연 한지훈이었다!다만, 지금의 한지훈은 이전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고, 그의 분위기 역시 확연히 변화한 듯했다.예전의 한지훈에게서는 절대적인 위엄이 느껴졌다면, 지금의 한지훈은 더욱 깊고 심오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국왕 폐하,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하산한 뒤에서야 국상을 알았지만, 다행히 운 좋게도 죽지 않았습니다!”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죽지 않았다니?!”국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한지훈! 네 녀석...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 뻔했구나! 네가 정말 죽었다면, 용국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겠느냐!”국왕은 말하며 성큼 다가와 한지훈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세차게 흔들었다.“하지만, 예 씨 부부는 저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두 부부 덕분입니다! 그 부부가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수정층 아래에 누워 있는 것은 바로 저였을 것입니다!”한지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 예 씨 어르신
황약사가 말을 마치자, 옷자락을 휘날리며 앞마당을 나섰다.일반인들은 황약사가 의술이 뛰어나고 그 실력이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고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극히 일부만이, 황약사가 진정한 천왕계 강자이며 무적천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설령 단해룡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황약사의 손에서 쉽게 이득을 보지 못할 터였다.황약사의 예상대로, 한지훈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씨 가문이든 단해룡이든 가슴 한편에 약간의 설렘이 부풀어 올랐다. 한지훈이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장씨 가문의 사람들이 괜히 희생된 것도 아니고, 단해룡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예충기가 살아 있다면 감히 나서지 못했겠지만, 그마저도 곤륜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젠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노 씨 어르신 무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각 문파와 접촉했고, 화산과 항산 역시 이에 호응하며 손을 잡았다. 이제 강우연이 강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그녀를 찾아가 책임을 묻겠다는 움직임이 퍼졌다!겉보기엔 용국이 평온해 보였지만, 물밑에서는 거센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사대 가문 중에서도 특히 동방 가문과 원씨 가문이 한지훈과 가장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이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가주님, 듣기로는 노 씨 어르신과 무맹이 이미 열 개가 넘는 문파를 규합하여 한씨 가문을 찾아가 응징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원상용은 차분한 시선으로 보고한 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원씨 가문의 원한이 그냥 묻힐 수는 없지!”“한지훈, 네가 살아 있을 때 우리 원씨 가문 사람들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다. 이제 네가 죽었으니, 우리가 잔인하다고 탓하지는 말아라!”원상용은 말을 마친 뒤 보고를 한 사람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원상호, 네가 원씨 가문을 대표하여 강중으로 가 강우연에게 책임을 물
이때, 약왕파에서 생방송을 지켜보던 장로들이 하나같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비록 약왕파와 한지훈 사이에는 오래된 원한이 있었으나, 한지훈의 삶은 의롭고 당당하여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하아! 북양왕의 생애가 너무나도 짧았구나. 만약 그에게 10년만 더 주어졌다면, 이처럼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수만 도에 달하는 고온 속에서라면, 누구라도 수증기로 변해 사라졌을 것이야. 하지만 제릉산에 의관총이라도 마련된 것이 그나마 영광이라 해야겠지.”장로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오직 오 장로만은 깊은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생각엔 며칠 안 가서 무종의 사람들이 우리 문파를 찾아올 거요. 우리 약왕파는 이미 한지훈과 엮여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소?”그의 말에 주변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오 장로, 자네가 한지훈에게 당한 게 있다 해도, 그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소!”대장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비록 무종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해도,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했다.한지훈이 막 숨을 거둔 상황에서 즉각 손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문파의 명예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터였다.“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약왕파 전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단해룡이나 원씨 가문, 동방 가문 같은 세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장씨 가문, 천산, 화산, 항산의 인물들이 한지훈을 가만히 두겠습니까?”“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지훈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은 오직 그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예충기까지 함께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예충기 부부마저도 이번 사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그리고, 헬기를 통해 촬영된 그들의 시신 사진도 이미 공개되었습니다!”뭐라고?!앉아 있던 장로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했
두 눈을 뜬 도청 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당초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신계 경지를 돌파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20대의 나이에 천신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내 도청 전인은 천천히 일어나 옆에 놓인 보자기 하나를 들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아래로 걸어갔다. 비록 도청 전인은 아직 천신경로 돌파하지는 못했지만, 그 경지까지 반 보 정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청 전인은 진법에 대한 인식은 깊게 가지고 있었다. 그 또한 체내의 자기장을 동원할 때마다, 발 밑에서는 두 갈래의 회오리바람이 떠오르면서 어느 정도의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곤륜에서는, 한지훈은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왔고, 그의 발은 지면에 닿을 때마다 뇌해의 고온 양향으로 융해된 지면에 층층이 잔잔한 물결을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물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한지훈은 다시금 예충기 부부의 시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절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비통한 마음이었다. 만약 생사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절대 이 두 노인을 자신과 동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지훈은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가슴을 쳐들고 산 아래로 걸어갔다. 한지훈이 자리를 떠난 후, 예충기와 정봉교의 시체 옆에는 기이하게 피어난 금색의 작은 꽃 두 송이가 나타났고 수정과도 같은 지면에는 약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한지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30분도 안 되어 작은 뜰로 다시 돌아왔다. 작은 뜰은 이미 텅 비었고, 신한국과 강만용조차도 종적을 감췄다. 결국 한지훈은 작은 뜰에서 잠시 머물다가 곤륜산 아래로 걸어갔다. 지금 이 순간 용국은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겨있었다. 용국의 백성들은 한지훈의 공적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지훈을 위한 국장이 치러지는 날, 수백만 명의 용국 백성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한지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몇 줄로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한지훈은 급히 일어섰다. 후! 이때, 제단 주위에서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더니 곤륜산 전체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이 한지훈의 감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바로 이 대지의 주재자라도 된 것처럼, 그는 손 하나 발 하나로도 얼마든지 이 대지와 긴밀하게 융합할 수 있었다. 천신! 순간 한지훈의 마음속에서는 이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가 주먹을 쥐자,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이 체내에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마치 이 세상에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 같았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났다. 백룡심을 융합시키고 나니, 또 다른 높은 경지에 다다르게 된 건가? 한지훈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해도, 오로지 육안만으로도 수십 미터 높이의 돌로 쌓은 대전을 관통할 수 있었고 하늘의 노을빛까지 보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천신의 경지에 다다른 징조이다. 게다가 천생서문에 따르면, 일단 천신계로 돌파하기만 하면 하늘에 노을빛이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마침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그 화려한 노을빛이었다. “엄마, 저거 봐, 불광이야!”한편 그 시각, 천부성에 있던 한 소녀가 하늘의 노을빛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린 소녀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많은 사람들은 그 눈부신 빛을 바라보았다. “어머, 진짜 불광이네. 영험한 보살이 나타났나 보구나!”“다들 얼른 무릎 꿇고 절하세요!”대낮에 어떻게 불광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어떤 사람은 단추까지 채운 채 공손하게 무릎 꿇었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이 노을빛은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저 멀리 유럽에서는, 대전에 있는 한 백발의 노인은, 세계 각지에서 전송된 동영상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 비춘 노을빛을 보고는,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용국에 또 천신 강자가 탄생한 거야? 마찬가지로 오르크스산에서는, 백발이
마치 금속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무섭게 들렸다. “칵!”바로 그때,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은제 상자는 떨어지게 됐다. 뒤이어 칠흑같이 어두웠던 제단은 갑자기 대낮처럼 밝게 비쳤다. 한지훈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방금 은제 상자가 놓여있던 곳에서는 눈부신 백광이 나타났다. 한지훈은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주시한다 하더라도 그 백광 뒤에 가려진 사물을 전혀 볼 수는 없었다. “설마 이게 바로 백룡심인 건가?”한지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천생서문에 있는 백룡심에 대한 기록을 다시 회상했다. 백룡심을 융합시키는 건 다른 용심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이유는 백룡심은 사실 생사상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년불멸의 용심은 영원히 살아있기에, 백룡심을 융합하려는 자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생사가 맞아떨어져야 백룡심이 비로소 하나가 된다. 다만 문제는 그 조건이 매우 가혹하다는 것이다. 백광이 제단 전체를 밝게 비추는 가운데, 음양어 문양도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지훈은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쿵쿵쿵!” 심지어 한지훈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땅 위의 제단을 다시 한번 올려다본 한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른바 생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결코 이대로 허무하게 자결한다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땅에 그을린 몇 갈래 금은 모두 음양어로 몰리게 됐는데, 어느새 음양어의 한쪽은 이미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럼 남은 반대쪽은 빨간색으로 물들여야 한다. 그 빨간색은 바로 피였다. 이내 한지훈은 오릉군 가시를 뽑아 들어 직접 자신의 손목을 찔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지훈은 순간 멍해졌다. “땡!” 오릉군을 내려치면서 뜻밖에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이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힘껏 오릉군을 내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목에 는 흰 점 하나만 보였다. 피는커녕 피부에 닿지도 못했다. 한지훈은
그렇게 한지훈은 예충기 부부의 시체를 향해 여러 차례 무릎 꿇고 참배까지 마친 후에야, 계속하여 곤륜허의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뇌해 구역을 지나 5리도 안되어, 한지훈은 갑자기 알 수 없이 넘쳐흐르는 생기를 느꼈다. 이내 주위에 깔려있던 회백색의 모래와 자갈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전방에는 넓은 숲이 나타나더니 자연의 짐승들이 나무 사이를 누비는 걸 보게 됐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공기가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예충기가 말한 바와 같이, 제준의 능묘로 들어설수록 생기가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다. 백룡심을 얻기 위해서는 생사를 건너야 한다더니. 방금 뇌해를 건너면서 한지훈은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겪었기에, 지금 그의 눈앞의 펼쳐진 것은 바로 또 다른 삶이었다. 계속하여 이러한 생사의 왕복이 펼쳐질 예정이다. 동시에 한지훈은 내심 걸어온 길을 되새기며 생기와 사기를 번갈아 생각해 보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지훈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지훈은 생사의 오의를 깨닫지는 못하여 단지 모호한 개념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상한 사실 하나는, 곤륜허에는 낮과 밤의 구분도 없는 것 같았다. 시간으로 계산하게 되면, 지금 시점은 노을이 지는 시점일 텐데 곤륜허는 여전히 대낮과도 같았다. 햇빛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주위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이런 극한의 환경은 곤륜허를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또 몇 시간 계속하여 걸으면서 산등성이를 넘은 한지훈은, 갑자기 비할 데 없이 웅장한 궁전을 마주하게 됐다. 그 궁전은 길이가 수 미터에 달하는 돌로 쌓여 있었다. 비록 세월의 풍파를 거치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대전과 벽에 보이는 금에서 당시 이 궁전이 얼마나 휘황찬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지훈은 곧장 대전으로 걸어갔다.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없는 한기가 한지훈에게로 밀려왔다. 이는 진정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극한의 한기였다. 대
국왕의 발언에, 종묘 장로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젊어 보이지만 그 내면은 매우 단단했다. 이는 이번 기회를 빌어 아주 자연스럽게 4대 가문과 조정에 숨겨진 배후를 함께 물리칠 계획이었다. 재빨리 이 사실을 눈치챈 종묘 대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어귀에 있는 금위군을 향해 말했다. “여봐라, 당장 모두 밀어내!”“네!” 이내 한 무리의 금위군이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 노신들을 밀어내려 하자 국왕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엄연히 다들 우리 용국의 영웅들인데, 어떻게 밀어낼 수가 있겠어?” “네?”그 말에 한 무리의 금위군들은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모두 끌어내! 3일 안에 용경을 떠나지 않는 자들은 가산까진 전부 몰수할 거야!”국왕의 노여움에 금위군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들어 멱살을 잡거나 팔을 잡아당긴 채 20여 명을 모두 용각 밖으로 끌어냈다. 그제야 조정은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신한국은 끌려가는 노신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폐하, 이러면 이젠 4대 가문과 얼굴을 붉히게 될 것입니다!”강만용 역시 근심이 가득했다. “용국이 영원히 4대 가문의 용국은 아니야. 더욱이는 어느 명문 가문의 용국도 아니야. 자고로 용국은 백성들에게 속하고 만민에게 속하는 거야!”“나라를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은 마땅히 봉상을 받아야 하고, 그 유상 역시 마땅히 조상의 영예를 받아야 돼. 이것은 절대 당연한 천리야! 이 천리를 어기려 하는 자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될 거야!”국왕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는, 그동안 4대 가문이 손을 뻗은 범위가 너무나도 넓었고 관리 범위도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왕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닌 용국 전체의 의지를 대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그 시각, 멀리 곤륜허에서는 사람 모양을 한 검은 숯덩이가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족히 10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람 모양의 검은 숯덩이는 겨우 몸을 버티고 땅에서 일어선 뒤 옆에 있는 유리석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