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시무시한 행렬에 기겁한 사람들이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룸에 도착한 한지훈이 황망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황대식을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표준우에게 연락해. 날 잡아들였으니 직접 와보라고.""예예예!"눈치 빠른 황대식이 표준우에게 전화를 걸어 들뜬 목소리를 꾸며냈다."도련님, 말씀하신 그놈 잘 데려다 놨습니다. 저희가 할까요, 아니면 직접 손보시겠습니까."그 시각, 표준우는 클럽에 제 술친구들을 잔뜩 불러 파티를 열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늘씬한 미녀 두 명이 안겨 있었다."빠르네? 알았어. 지금 당장 가지. 도망 못 가게 잘 지켜야 해."잔뜩 흥분한 표준우가 제 친구들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으하하, 한지훈 그 버러지 새끼가 황대식에게 잡혔대. 당장 가서 손봐줘야겠어. 너희들 딱 기다려, 곧 그 새끼가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걸 영상에 담아올 테니까."클럽을 나선 표준우가 잔뜩 신이 난 채로 포르쉐를 몰고 쏜살같이 제이드 바로 향했다.3층에 도착한 표준우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수고 많았어, 황대식. 그 자식은 어디 있어? 오늘 이몸이 직접 그 자식을 병신으로 만들어 주겠어. 내게 맞서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우쳐 줘야지."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늘한 목소리가 룸 안에 울려 퍼졌다."표준우, 또 보는군."표준우가 흠칫했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도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빌어먹을 한지훈이었다."뭐야, 한지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야? 네놈이 왜 거기 앉아 있어. 당장 내 앞에 무릎 꿇어!"상황 파악이 덜 된 표준우가 버럭 화를 냈다.고개를 틀어 옆을 보니 황대식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룸 안에는 또한 일여덟 명의 건달들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살기가 가득했다.표준우가 바로 황대식에게 따졌다."황대식, 대체 어떻게 된 거야?"사실 그는 조금 전부터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발뺌할 생각부터 하다니.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한지훈이 황대식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소매를 걷어 올린 황대식이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건달들이 표준우를 둘러싸기 시작했다."너... 너희들 뭐 하는 거야. 헉, 그만해, 내 몸에 손대기만 해봐. 난 표씨 가문 도련님이란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아시면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악! 아파! 얼굴은 건드리지 말라고..."처음엔 나름 기고만장하게 협박하던 표준우는 결국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빌기 시작했다.십 분 정도가 지나자 돼지 머리처럼 퉁퉁 부어오른 표준우가 바닥에 엎드려 헐떡댔다. 얼굴은 피범벅이었으며 내뱉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다."한... 한지훈...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표준우 앞으로 걸어간 한지훈이 몸을 숙여 처참한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표준우에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표준우, 내 아내 강우연에게 추근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음은 없어."말을 마친 한지훈이 룸을 벗어났다.만약 황대식이 똑똑한 놈이라면 나머지 일은 그가 알아서 해결할 터였다.한지훈이 떠난 뒤 황대식은 표준우도 바에서 쫓아냈다. 바닥에 널브러진 표준우에게 황대식이 날카롭게 말했다."어이구, 도련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늘 일은 제 뜻이 아니란 것만 알아주십시오. 혹시 복수를 하려거든 한 선생에게나 하시구요. 그런데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 킥킥."말을 마친 황대식은 표준우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다시 술집으로 들어갔다.차가운 도로에 드러누운 표준우를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어머, 표씨 가문에 그 도련님 아니야? 왜 꼴이 저 모양이래?""세상에, 어느 높으신 분 눈 밖에 났길래... 끔찍하군.""한때 그렇게 잘난척하던 사람도 더 강한 사람 앞에선 별수 없네. 이래서 사람은 시건방지면 안 된다니까. 그러다 큰코다칠라."사람들의 조롱을 무기력하게 듣고 있던 표준우는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핏발선 두 눈을 형형하게 부릅뜬 표준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정말이지? 나 대신 복수해 줘야 해? 꼭 그 자식이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줘. 아니라면 나도 콱 죽어버릴 거야."표준우는 더욱 불을 지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도혜영이 기겁하며 제 남편을 재촉했다."여보, 얼른 해결하지 않고 뭐해. 당신 아들이 죽는 꼴을 지켜볼 거야?"표중혁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두르지 마. 내일 내가 직접 강씨 가문으로 찾아가지."다음날.열몇 대의 검은색 벤츠를 거느린 표중혁이 제 마이바흐에 올라타며 바로 강운그룹으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강운그룹 사람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에 떨며 회의실에서 소란스레 말다툼을 벌였다."이거 큰일 났습니다. 표씨 가문의 기세가 말이 아니라고요. 어르신, 우린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이게 다 빌어먹을 한지훈 그놈 때문입니다. 표준우 도련님을 때리라고 사람을 사주했다잖아요.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요.""한지훈은 아직이랍니까?"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내며 씨근거렸다.상석에 앉은 강준상도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아침부터 표중혁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어제저녁에 벌어진 일을 전하며 강씨 가문에서 순순히 범인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다른 가문과 기업을 선동하여 강운그룹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그리하여 조급해 난 강준상이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그만들 하세요. 긴장할 거 없습니다. 사실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한지훈이 친 사고이니 표씨 가문에서 찾아오거든 그놈을 넘기면 되는 일이에요. 기껏해야 병원비나 좀 보태주고요."강문복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그제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마침 회사에 도착한 한지훈과 강우연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긴장과 분노가 가득했다.사람들은 적의를 감추지도 않은 채 강우연과 한지훈을 노려보고 있었다."할아버지, 사람들을 급하게 소집하셨다고 들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강우연은 아직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강준상이 차갑게
한지훈은 당황했다. 강우연이 이렇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그러나 눈물범벅이 된 강우연을 바라보며 한지훈도 차마 뭐라고 입을 열 수 없었다.정말 자신이 잘못한 걸까?눈물을 훔쳐낸 강우연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몸을 돌린 그녀가 강준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할아버지, 지훈 씨가 잘못한 건 맞지만... 저 때문에 그런 거예요. 벌을 주시려거든 제가 대신 받을게요."그 말을 들은 한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은 여전히 강우연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라면 이렇게 감쌀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지훈은 이 와중에도 어쩐지 행복해졌다.강준상이 차가운 얼굴로 강우연에게 호통쳤다."네게 벌을 내리라고?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내가 널 여태 내버려 뒀겠느냐? 표씨 가문에서 요구하는 건 저놈이라고. 이번 일은 저놈이 벌인 일이니 수습도 저놈이 해야 할 것이다."다른 사람들도 함께 그들을 비난했다. 그중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마음껏 욕설을 퍼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희연이었다. "강우연, 네가 다시 돌아온 뒤로 귀찮은 일들이 끊이질 않아. 너뿐만 아니라 네 뒤에 있는 그 쓰레기도 마찬가지고. 저 인간은 어쩜 사고를 치지 않는 날이 없어. 내가 너였다면, 우리 가문과 회사를 생각해서라도 당장 짐 싸 들고 나갔어. 아직도 뻔뻔하게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너도 참 대단하다."설해연도 맞장구를 쳤다."희연이 말이 맞아. 이 불행을 몰고 다니는 것아. 길씨 가문의 일도 채 해결 못한 마당에 표씨 가문까지 합세하게 생겼어. 대체 이를 어쩌면 좋아? 어떻게 책임질 건데!"설해연이 강준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아버님, 우연이의 직위를 해제시키는 건 어떨까요?"그 말을 들은 강준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했다.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서경희와 강신이 강문복네 식구들과 말싸움을 벌였다.서경희는 이 와중에도 한지훈에게 욕설을 퍼붓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제가 무릎 꿇는다면 이분이 감당 못 할 텐데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한지훈은 그야말로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허, 드디어 한지훈이 미쳤나 봐요. 아직도 그렇게 기고만장하나? 대체 우리 가문에 얼마나 피해를 주려고 이래?""멍청한 것들은 답도 없다니까. 감히 표 가주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그러게. 얼마나 멍청했으면 스스로 무덤을 파겠어."강씨 가문 사람들이 한지훈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강준상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한지훈을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가 얼른 표중혁에게 사과했다."가주님, 이것 참 면목 없습니다. 우리 집안에 겨우 다시 돌아온 자라... 버릇이..."강준상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한지훈은 막무가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표중혁의 비서와 부하들도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들도 저마다 한지훈을 지적했다."뭐? 우리 회장님이 감당할 수 없다고? 어이가 없어서 원. 당장 무릎 꿇지 못해!"눈썹을 치켜올린 한지훈이 서늘한 눈빛으로 비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이름."표중혁을 뒤에 업은 비서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그가 양복 옷깃을 정리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표 회장님 비서 엄승원이다. 왜, 이젠 나한테까지 손대려고? 당신 주제를 알아야지, 한지훈 씨."한지훈이 피식거렸다."사냥개 주제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군. 왜 자꾸 짖어.""뭐... 뭐라고?"엄승원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자신은 표중혁의 비서였으니 지위가 높은 게 당연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예의를 차리며 입에 발린 말을 해대기 바빴다. 한데 별것도 아닌 자식이 감히 저를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모욕적일 순 없었다."회장님, 저놈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 할 듯싶습니다."엄승원이 표중혁의 귓가에 속삭였다.표중혁이 드디어 딱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한지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한지훈이라고 했나. 담대함은 인정해 주지. 하지
한지훈을 태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그러나 병원 문 앞에 도착한 표중혁은 어쩐지 석연찮은 분위기를 느꼈다.병원 앞에 군용 차량 두 대가 떡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입구에는 중무장한 군인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그들은 병원을 드나드는 모든 차량을 조사하고 있었다.심지어 모든 거리에도 중무장한 군인들이 엄숙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린 표중혁이 당황해서 제 비서에게 물었다."엄 비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군인들이 여기에 있어? 높으신 분이라도 행차하셨나?"조수석에 앉은 엄승원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뒷좌석에 앉아 팔짱을 낀 한지훈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불렀거든."그 말을 들은 차 안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표중혁과 엄승원이 한지훈을 힐끗 쳐다보았다.곧이어 엄승원이 한껏 조롱했다."재미없는 농담 좀 그만하시지. 저 많은 군인을 전부 당신이 불러 모았다고? 누가 들으면 당신이 아주 높으신 분인 줄 알겠어. 허언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표중혁도 허허 웃었다."그런다고 우리가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래, 정 그러면 두고 보지. 누가 나서서 네놈 편을 들어줄지."차가 멈춰서자 표중혁이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지훈도 태연하게 그를 따라나섰다.중무장한 군인들이 장관의 통솔을 받으며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상황 파악이 아직 덜 된 표중혁은 그저 관례에 따른 검사 절차인 줄 알았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들 녀석을 보러 왔습니다. 이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요."지켜보던 엄승원도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그렇습니다, 장관님. 이분은 표중혁 회장님이십니다. 오군 주군 본부 분들이시지요? 우리 회장님께서는 한민학 군단장님과도 친분이 있으십니다. 그러니 이쯤 하시고 보내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장관은 두 사람을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옆으로 밀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한지훈이 한민학 군단장의 친구라니. 표중혁은 말문이 턱 막혀왔다. 경악과 의심이 서린 눈빛으로 한지훈을 쳐다보던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정말... 자네가 한민학 군단장님과 아는 사이라고?"한지훈은 그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표 가주, 나더러 당신 아들에게 무릎 꿇고 빌라며? 올라가지."표중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한민학 군단장의 친구를 감히 무릎 꿇릴만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민학과 오군 주군 본부와 맞서겠다는 결심이 아니고서야...몸을 벌벌 떨던 표중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냉큼 무릎을 꿇었다. 그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한 선생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한민학 군단장님의 친우분이시니 당연히 우리 가문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으셔야지요. 제 아들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사과하시겠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사과는 저희가 드려야지요."회장님까지 무릎을 꿇은 마당에 엄승원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그도 털썩 무릎을 꿇으며 벌벌 떨었다.강운그룹에서 한지훈에게 한껏 건방지게 굴었던 과거의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싶어졌다.가장 바라지 않는 일들은 언제나 거짓말처럼 이뤄진다고 했던가.한지훈이 거의 엎드리다시피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엄승원에게 말을 걸었다."엄 비서. 왜 무릎을 꿇고 있지."겁을 잔뜩 집어먹은 엄승원이 바닥에 퍽퍽 머리를 박았다."한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선생님을 업신여기다니, 제가 미쳤었나 봅니다. 제 안목이 이렇게나 형편없습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이번에는 자기 뺨을 내려쳤다. 소리가 어찌나 살벌한지 병원 문 앞에 서 있던 구경꾼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연신 뺨을 후려친 엄승원이 싹싹 빌었다.한지훈이 짧게 코웃음 쳤다.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다시
도혜영의 말을 듣고 한지훈은 잠시 반응을 못했다. 오히려 표중혁이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엄승원이 서둘러 표중혁을 부축했다.도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왜 그래?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 몸이 불편해?”표중혁은 급한 마음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서둘러 말했다."여보, 한 선생님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이분이 누구……."“누구긴 누구야!?”도혜영은 표중혁이 자신의 아들을 때리도록 부추긴 범인을 선생으로 부르면서 그렇게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자, 화가 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표중혁, 너 머리를 대문짝에 박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 선생은 개뿔, 저 사람은 우리 아들을 때리도록 다른 사람을 사주한 범인이야! 너 뭐 하는 거야? 데리고 와서 사과하라는 거지, 모셔오라고 한 게 아니라고! "도혜영은 표중혁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남편이 너무 한심했다. 왜 이렇게 전전긍긍하면서 걱정이 많은 건지.아예 도혜영이 돌아서서 어두운 얼굴로 한지훈을 쳐다보며 말했다."감히 사람을 시켜 내 아들을 때려, 내가 너 오늘 꼭 혼내야겠어!"말을 마친 도혜영은 다짜고짜 한지훈의 뺨을 내리쳤다그러나 이 행동에 표중혁이 놀라서 이마에 식은땀을 가득 흘렸다. 그는 급히 도혜영을 잡아당긴 후 뺨을 ‘짝’ 소리가 나게 도혜영의 뺨을 쳤다!뺨을 때리는 큰 소리가 병원 입구 전체에 울려 퍼졌다!도혜영은 그 자리에서 화끈거리는 뺨을 움켜쥐고 경악한 얼굴로 표중혁의 격동되고 상기된 안색을 보더니, 바로 히스테리 하게 울부짖으며 물었다."표중혁! 너 미쳤어?! 왜 날 때려?! "표중혁은 열받아 죽을 것 같이 호통쳤다.“도혜영! 미친 건 너야! 한 선생님이 누군지 알아? 저분은 한민학 군단장님 친구야, 이 근무 소대는 모두 한 선생님이 불러온 거야! 감히 한 선생님에게 손찌검을 해? 너 미친 거 아니야! 우리 표씨 가문이 오군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거야! "표중혁은 단번에 뱉어내고 그제야 마음속의 긴장이
한지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도청전인?”국왕은 지금까지 도청전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하지만 한지훈이 추천한 인물이라면 믿을 만했다.“그럼 짐이 그에게 관직을 하사하여,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겠는가?”국왕이 신중하게 묻자, 한지훈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용국이 위기에 처하면 그가 스스로 나설 것입니다. 그는 무종 사람으로 자유로운 삶에 익숙합니다. 오히려 관직을 주면 그에게 부담이 될 것입니다.”“제가 그를 국왕께 추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공개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오륙으로 떠나기 전까지, 적어도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합니다.”국왕은 이 말을 듣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한지훈, 그대는 진정 나라의 기둥이로구나!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아내와 자식이 아니라 짐이라니! 짐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겠구나!”위기가 해소되자 국왕의 표정도 한층 부드러워졌고, 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오직 국왕 폐하의 근심을 덜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이제 할 말을 다 했으니, 저는 물러나겠습니다.”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국왕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물었다.“한지훈, 이번 곤륜에서의 경험이 상당했을 텐데... 지금의 그대는 어느 경지인가?”잠시 침묵이 흘렀다.“천신입니다!”짧고 날카로운 대답이 밤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졌고, 순식간에 한지훈의 모습이 사라졌다.“천신...?!”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은 한동안 진정되지 않았다.“국왕 폐하, 방금 누군가 다녀갔습니까?”진우가 문을 밀고 꼭대기 층 테라스로 들어오며 말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그래, 한지훈이었다!”국왕이 담담히 대답했다.“한지훈이라고 하셨습니까?!”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귀신이나 환영 같은 걸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지훈은 이미…“쓸데없이 놀라
이 시각, 강중에서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도는 것과 달리, 용경은 한층 더 고요했다.용각에서 국왕은 홀로 천자각 꼭대기에서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지금 한지훈이 부재한 상황에서, 용국은 반드시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아야만 했다!그러나 유청은 그 기준에 명백히 미치지 못했다.적어도, 실력이나 경지에 있어서 유청은 열국을 위압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바로 그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불쑥 내려앉았다!“누구냐!”국왕은 즉시 돌아서며 크게 외쳤고, 동시에 허리에 손을 뻗어 검을 뽑으려 했다.“국왕 폐하, 저입니다.”스윽—!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국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한... 한지훈?!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국왕은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너...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국왕은 말을 하며 몇 걸음이나 물러섰고, 정신을 가다듬어 자세히 보니 과연 한지훈이었다!다만, 지금의 한지훈은 이전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고, 그의 분위기 역시 확연히 변화한 듯했다.예전의 한지훈에게서는 절대적인 위엄이 느껴졌다면, 지금의 한지훈은 더욱 깊고 심오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국왕 폐하,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하산한 뒤에서야 국상을 알았지만, 다행히 운 좋게도 죽지 않았습니다!”한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죽지 않았다니?!”국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한지훈! 네 녀석...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 뻔했구나! 네가 정말 죽었다면, 용국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겠느냐!”국왕은 말하며 성큼 다가와 한지훈의 옷깃을 움켜쥐고는 세차게 흔들었다.“하지만, 예 씨 부부는 저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두 부부 덕분입니다! 그 부부가 목숨을 걸고 저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수정층 아래에 누워 있는 것은 바로 저였을 것입니다!”한지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 예 씨 어르신
황약사가 말을 마치자, 옷자락을 휘날리며 앞마당을 나섰다.일반인들은 황약사가 의술이 뛰어나고 그 실력이 아무도 따라올 수 없다고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극히 일부만이, 황약사가 진정한 천왕계 강자이며 무적천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설령 단해룡이 직접 나선다고 해도, 황약사의 손에서 쉽게 이득을 보지 못할 터였다.황약사의 예상대로, 한지훈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씨 가문이든 단해룡이든 가슴 한편에 약간의 설렘이 부풀어 올랐다. 한지훈이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장씨 가문의 사람들이 괜히 희생된 것도 아니고, 단해룡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것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예충기가 살아 있다면 감히 나서지 못했겠지만, 그마저도 곤륜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젠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노 씨 어르신 무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각 문파와 접촉했고, 화산과 항산 역시 이에 호응하며 손을 잡았다. 이제 강우연이 강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바로 그녀를 찾아가 책임을 묻겠다는 움직임이 퍼졌다!겉보기엔 용국이 평온해 보였지만, 물밑에서는 거센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사대 가문 중에서도 특히 동방 가문과 원씨 가문이 한지훈과 가장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이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가주님, 듣기로는 노 씨 어르신과 무맹이 이미 열 개가 넘는 문파를 규합하여 한씨 가문을 찾아가 응징할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원상용은 차분한 시선으로 보고한 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원씨 가문의 원한이 그냥 묻힐 수는 없지!”“한지훈, 네가 살아 있을 때 우리 원씨 가문 사람들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다. 이제 네가 죽었으니, 우리가 잔인하다고 탓하지는 말아라!”원상용은 말을 마친 뒤 보고를 한 사람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원상호, 네가 원씨 가문을 대표하여 강중으로 가 강우연에게 책임을 물
이때, 약왕파에서 생방송을 지켜보던 장로들이 하나같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비록 약왕파와 한지훈 사이에는 오래된 원한이 있었으나, 한지훈의 삶은 의롭고 당당하여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하아! 북양왕의 생애가 너무나도 짧았구나. 만약 그에게 10년만 더 주어졌다면, 이처럼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수만 도에 달하는 고온 속에서라면, 누구라도 수증기로 변해 사라졌을 것이야. 하지만 제릉산에 의관총이라도 마련된 것이 그나마 영광이라 해야겠지.”장로들은 저마다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오직 오 장로만은 깊은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내 생각엔 며칠 안 가서 무종의 사람들이 우리 문파를 찾아올 거요. 우리 약왕파는 이미 한지훈과 엮여 있었으니, 지금이라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소?”그의 말에 주변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오 장로, 자네가 한지훈에게 당한 게 있다 해도, 그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소!”대장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비록 무종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해도,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했다.한지훈이 막 숨을 거둔 상황에서 즉각 손절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문파의 명예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터였다.“제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약왕파 전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단해룡이나 원씨 가문, 동방 가문 같은 세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장씨 가문, 천산, 화산, 항산의 인물들이 한지훈을 가만히 두겠습니까?”“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한지훈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은 오직 그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예충기까지 함께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예충기 부부마저도 이번 사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그리고, 헬기를 통해 촬영된 그들의 시신 사진도 이미 공개되었습니다!”뭐라고?!앉아 있던 장로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했
두 눈을 뜬 도청 전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당초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신계 경지를 돌파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20대의 나이에 천신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이내 도청 전인은 천천히 일어나 옆에 놓인 보자기 하나를 들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아래로 걸어갔다. 비록 도청 전인은 아직 천신경로 돌파하지는 못했지만, 그 경지까지 반 보 정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도청 전인은 진법에 대한 인식은 깊게 가지고 있었다. 그 또한 체내의 자기장을 동원할 때마다, 발 밑에서는 두 갈래의 회오리바람이 떠오르면서 어느 정도의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곤륜에서는, 한지훈은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왔고, 그의 발은 지면에 닿을 때마다 뇌해의 고온 양향으로 융해된 지면에 층층이 잔잔한 물결을 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물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한지훈은 다시금 예충기 부부의 시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절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비통한 마음이었다. 만약 생사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절대 이 두 노인을 자신과 동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한지훈은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가슴을 쳐들고 산 아래로 걸어갔다. 한지훈이 자리를 떠난 후, 예충기와 정봉교의 시체 옆에는 기이하게 피어난 금색의 작은 꽃 두 송이가 나타났고 수정과도 같은 지면에는 약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한지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30분도 안 되어 작은 뜰로 다시 돌아왔다. 작은 뜰은 이미 텅 비었고, 신한국과 강만용조차도 종적을 감췄다. 결국 한지훈은 작은 뜰에서 잠시 머물다가 곤륜산 아래로 걸어갔다. 지금 이 순간 용국은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겨있었다. 용국의 백성들은 한지훈의 공적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지훈을 위한 국장이 치러지는 날, 수백만 명의 용국 백성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한지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몇 줄로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한지훈은 급히 일어섰다. 후! 이때, 제단 주위에서는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더니 곤륜산 전체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이 한지훈의 감지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바로 이 대지의 주재자라도 된 것처럼, 그는 손 하나 발 하나로도 얼마든지 이 대지와 긴밀하게 융합할 수 있었다. 천신! 순간 한지훈의 마음속에서는 이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가 주먹을 쥐자,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이 체내에서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마치 이 세상에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 같았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났다. 백룡심을 융합시키고 나니, 또 다른 높은 경지에 다다르게 된 건가? 한지훈은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해도, 오로지 육안만으로도 수십 미터 높이의 돌로 쌓은 대전을 관통할 수 있었고 하늘의 노을빛까지 보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천신의 경지에 다다른 징조이다. 게다가 천생서문에 따르면, 일단 천신계로 돌파하기만 하면 하늘에 노을빛이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마침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그 화려한 노을빛이었다. “엄마, 저거 봐, 불광이야!”한편 그 시각, 천부성에 있던 한 소녀가 하늘의 노을빛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린 소녀의 손가락 방향을 따라 많은 사람들은 그 눈부신 빛을 바라보았다. “어머, 진짜 불광이네. 영험한 보살이 나타났나 보구나!”“다들 얼른 무릎 꿇고 절하세요!”대낮에 어떻게 불광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어떤 사람은 단추까지 채운 채 공손하게 무릎 꿇었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이 노을빛은 수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저 멀리 유럽에서는, 대전에 있는 한 백발의 노인은, 세계 각지에서 전송된 동영상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그는 하늘에 비춘 노을빛을 보고는,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용국에 또 천신 강자가 탄생한 거야? 마찬가지로 오르크스산에서는, 백발이
마치 금속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무섭게 들렸다. “칵!”바로 그때,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은제 상자는 떨어지게 됐다. 뒤이어 칠흑같이 어두웠던 제단은 갑자기 대낮처럼 밝게 비쳤다. 한지훈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방금 은제 상자가 놓여있던 곳에서는 눈부신 백광이 나타났다. 한지훈은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주시한다 하더라도 그 백광 뒤에 가려진 사물을 전혀 볼 수는 없었다. “설마 이게 바로 백룡심인 건가?”한지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천생서문에 있는 백룡심에 대한 기록을 다시 회상했다. 백룡심을 융합시키는 건 다른 용심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이유는 백룡심은 사실 생사상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년불멸의 용심은 영원히 살아있기에, 백룡심을 융합하려는 자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생사가 맞아떨어져야 백룡심이 비로소 하나가 된다. 다만 문제는 그 조건이 매우 가혹하다는 것이다. 백광이 제단 전체를 밝게 비추는 가운데, 음양어 문양도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지훈은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쿵쿵쿵!” 심지어 한지훈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땅 위의 제단을 다시 한번 올려다본 한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른바 생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결코 이대로 허무하게 자결한다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땅에 그을린 몇 갈래 금은 모두 음양어로 몰리게 됐는데, 어느새 음양어의 한쪽은 이미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럼 남은 반대쪽은 빨간색으로 물들여야 한다. 그 빨간색은 바로 피였다. 이내 한지훈은 오릉군 가시를 뽑아 들어 직접 자신의 손목을 찔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지훈은 순간 멍해졌다. “땡!” 오릉군을 내려치면서 뜻밖에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이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힘껏 오릉군을 내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목에 는 흰 점 하나만 보였다. 피는커녕 피부에 닿지도 못했다. 한지훈은
그렇게 한지훈은 예충기 부부의 시체를 향해 여러 차례 무릎 꿇고 참배까지 마친 후에야, 계속하여 곤륜허의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뇌해 구역을 지나 5리도 안되어, 한지훈은 갑자기 알 수 없이 넘쳐흐르는 생기를 느꼈다. 이내 주위에 깔려있던 회백색의 모래와 자갈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전방에는 넓은 숲이 나타나더니 자연의 짐승들이 나무 사이를 누비는 걸 보게 됐다. 한지훈은 저도 모르게 공기가 탁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예충기가 말한 바와 같이, 제준의 능묘로 들어설수록 생기가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다. 백룡심을 얻기 위해서는 생사를 건너야 한다더니. 방금 뇌해를 건너면서 한지훈은 이미 한 번의 죽음을 겪었기에, 지금 그의 눈앞의 펼쳐진 것은 바로 또 다른 삶이었다. 계속하여 이러한 생사의 왕복이 펼쳐질 예정이다. 동시에 한지훈은 내심 걸어온 길을 되새기며 생기와 사기를 번갈아 생각해 보았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지훈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지훈은 생사의 오의를 깨닫지는 못하여 단지 모호한 개념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상한 사실 하나는, 곤륜허에는 낮과 밤의 구분도 없는 것 같았다. 시간으로 계산하게 되면, 지금 시점은 노을이 지는 시점일 텐데 곤륜허는 여전히 대낮과도 같았다. 햇빛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주위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이런 극한의 환경은 곤륜허를 더욱 기괴하게 만들었다. 또 몇 시간 계속하여 걸으면서 산등성이를 넘은 한지훈은, 갑자기 비할 데 없이 웅장한 궁전을 마주하게 됐다. 그 궁전은 길이가 수 미터에 달하는 돌로 쌓여 있었다. 비록 세월의 풍파를 거치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대전과 벽에 보이는 금에서 당시 이 궁전이 얼마나 휘황찬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한지훈은 곧장 대전으로 걸어갔다.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없는 한기가 한지훈에게로 밀려왔다. 이는 진정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극한의 한기였다. 대
국왕의 발언에, 종묘 장로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젊어 보이지만 그 내면은 매우 단단했다. 이는 이번 기회를 빌어 아주 자연스럽게 4대 가문과 조정에 숨겨진 배후를 함께 물리칠 계획이었다. 재빨리 이 사실을 눈치챈 종묘 대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어귀에 있는 금위군을 향해 말했다. “여봐라, 당장 모두 밀어내!”“네!” 이내 한 무리의 금위군이 우르르 몰려들어 땅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 노신들을 밀어내려 하자 국왕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엄연히 다들 우리 용국의 영웅들인데, 어떻게 밀어낼 수가 있겠어?” “네?”그 말에 한 무리의 금위군들은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모두 끌어내! 3일 안에 용경을 떠나지 않는 자들은 가산까진 전부 몰수할 거야!”국왕의 노여움에 금위군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들어 멱살을 잡거나 팔을 잡아당긴 채 20여 명을 모두 용각 밖으로 끌어냈다. 그제야 조정은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신한국은 끌려가는 노신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폐하, 이러면 이젠 4대 가문과 얼굴을 붉히게 될 것입니다!”강만용 역시 근심이 가득했다. “용국이 영원히 4대 가문의 용국은 아니야. 더욱이는 어느 명문 가문의 용국도 아니야. 자고로 용국은 백성들에게 속하고 만민에게 속하는 거야!”“나라를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은 마땅히 봉상을 받아야 하고, 그 유상 역시 마땅히 조상의 영예를 받아야 돼. 이것은 절대 당연한 천리야! 이 천리를 어기려 하는 자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될 거야!”국왕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는, 그동안 4대 가문이 손을 뻗은 범위가 너무나도 넓었고 관리 범위도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왕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닌 용국 전체의 의지를 대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그 시각, 멀리 곤륜허에서는 사람 모양을 한 검은 숯덩이가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족히 10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람 모양의 검은 숯덩이는 겨우 몸을 버티고 땅에서 일어선 뒤 옆에 있는 유리석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