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비가 생각해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중신궁에 도착한 희씨 어멈은 원경능의 남주를 황후께 드리며 말했다.“초왕비가 말하기를 황후마마께서 한번도 류큐의 공물인 남주를 하사 받으신 적이 없으니, 며느리로서 둘 다 혼자 가질 수 없어 황후마마께 한 꿰미 드린다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너무 기가 막혀 차갑게 말했다.“본궁은 감히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갖고 가게.” 희씨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마마, 어찌 왕비의 효심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어찌됐든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인데 왕비께서 거절하시면 귀비마마나 현비마마께 갈수 있습니다. 이 남주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만약 왕비께서 갖고 계시지 않는데 귀비마마나 현비마마께서 갖고 계신다면 체면이 깎이지 않겠습니까? 먼저 받으시고,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는 왕비께서 알아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신궁의 총관 시녀(掌事姑姑)도 거들었다.“희씨 어멈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마마, 일단 받으시고 폐하께 가져다 드리는 겁니다. 초왕비가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든 아부한다고 생각하든 그건 다 폐하께 달렸다고 봅니다.”요컨대 어느 쪽이든 황제는 똑같이 화를 낼 것이다.황후는 화가 나서 미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총관 시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냉담하게 말했다.“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일단 받고 나중에 폐하께 드리면 되겠어. 태후도 갖지 못한 것을 본궁이 받을 수 없어서 도로 갖고 왔다고.” 그녀는 황제가 남주를 아직 태후께 드리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는 꽤 합리적인 구실이었다.희씨 어멈이 웃으며 말했다.“소인은 이만 건곤전으로 돌아가 태상황의 시중을 들어야겠습니다.” “희씨 어멈을 바래다 주거라.”총관 시녀가 말했다. 희씨 어멈은 천천히 중신궁을 걸어 나왔다. 궁에서 나온 그녀의 걸음은 왠지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당신에게 진 빚은 다 갚았으니 이번 생
목여공공이 안으로 들어가자 원경능도 따라 들어갔다.우문호는 몸을 약간 일으키며 물었다. “공공, 부황께서 왜 남주를 거둬드리라 하시는가?”우문호가 전혀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목여공공도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왕야께서 하문하셨으니 소인도 몇 마디 하겠습니다. 부디 무례하다고 소인을 꾸짖지 마시길 바랍니다. 왕야께서 황후마마에게 효도할 기회는 많고 많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왕비가 남주를 하사 받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후한테 보내시다니요?”우문호의 눈빛은 예리한 칼이 되어 원경능의 얼굴을 찢어 놓을 것만 같았다. 원경능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도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우문호는 서서히 목여공공의 얼굴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먼저 돌아가 주게. 본왕이 왕비와 조용히 할말이 있네.” “왕비, 남은 남주 한 꿰미와 차용증을 먼저 돌려주시지요. 폐하께선 지금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목여공공이 말했다.원경능이 말했다. “공공, 남주 한 꿰미를 잃어버렸으니 내가 직접 폐하께 가서 죄를 청할 것이네. 먼저 돌아가시게.” 목여공공은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왕비께서는 더 이상 그리 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수록 폐하께선 더 진노하실 겁니다.”우문호도 원경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공공께 내어드려.” 원경능은 그의 어둡고 노기 서린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잃어버린 겁니다. 제가 직접 가서 죄를 청할 겁니다.”목여공공이 싸늘하게 말했다. “왕비, 왕비께서 기어이 잃어버렸다고 하시니 저도 더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비가 잃어버렸던 그 남주 한 꿰미는 중신궁의 총관 시녀 옥보가 폐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왕비가 실제로 잃어버렸다면 그건 중신궁을 바로 겨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험성을 왕비께서 재삼 고려해 보시기를 바랍니다.”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우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 소인
하지만 몹시 화가 난 명원제는 목여공공더러 원경경능을 불러들이게 하였다.손왕은 측은한 눈길로 원경능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미안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원경능이 부황의 노기를 직면해야 하다니. 듣자 하니 다섯째가 궁에서 상처를 치료받고 있다 하던데 가서 다섯째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에게 방법을 생각해 초왕비를 벗어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원경능이 궁 안에 들어서자 명원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꿇어라!”원경능은 황제의 지시대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부황을 뵙습니다!” 궁전 안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목여공공이 땅바닥에 떨어진 벼루(砚台)며 상주문(奏章)들을 주었다. 보아하니 분노한 황제가 손왕을 향해 이 물건들을 던진 것 같았다.땅에는 남주도 조용히 놓여 있었다. 바로 원경능이 무릎 꿇고 앉은 곳에서 다섯 자 떨어진 곳에.명원제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좀 전에 목여공공이 말하기를 네가 짐이 하사한 남주 한 꿰미를 잃어버렸다 하던데 어디서 잃어버렸느냐?”“부황께 아룁니다. 건곤전에서 잃어버렸습니다.”원경능이 대답했다.“그럼 네가 보기엔 그 바닥에 있는 남주가 네가 건곤전에서 잃어버린 남주가 맞는 것 같으냐?”명원 제는 다시 물었다.원경능은 한번 힐끗 보고는 말했다.“네, 그렇습니다.” “이 한 꿰미의 남주는 황후의 사람이 짐한테 갖고 온 것이다. 네가 말해 보거라. 황후의 사람이 네 남주를 훔친 것이냐?”명원제의 목소리에는 이미 조금 노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원경능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누가 가져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뭐라?”명원제는 비웃으며 말했다.“누가 훔쳐갔는지 네가 알고 있다는 말이냐?”“알고 있습니다. 저는 누가 가져갔는지 보았습니다.”그녀는 계속 ‘가져갔다’는 단어를 고집했다. “누구더냐?”명원제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원경능은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희씨 어멈입니다.
황후는 놀란 눈으로 총관 시녀를 보았다. “뭘 잘못 들었다는 것이냐? 본궁이 너더러 남주를 돌려주라 했을 때 대체 뭐라 아뢴 것이냐?”“마마…”총관 시녀는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소인 스스로 총명하다 자만했습니다. 초왕비가 남주를 보내온 것이 초왕을 위한 거라 생각하여 한마디 더 보탰습니다. 초왕비가 마마께 폐하 앞에서 초왕을 위해 덕담 좀 해달라 부탁했다고 아뢰었습니다.”황후는 분노했다.“네가 감히 제멋대로 추측했단 말이더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저 황후는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옥보는 그녀의 시중을 든 지 몇 년이 되었다. 성격이 워낙 차분하여 황제 앞에서 절대로 자신의 추측을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그녀는 대뜸 저명취를 떠올렸다.전에 명취가 현비를 찾아가겠다고 했었지만, 지금은 현비와 정면으로 대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비는 태후의 조카였다. 현비의 미움을 산다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명원제는 졸지에 안색이 아주 흉해졌다. 옥보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황후의 분부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싸늘한 눈길로 황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황후는 나서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총관 시녀의 뺨을 후려치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무엄하다. 어찌 자신의 허튼 생각을 감히 폐하께 아뢸 수 있단 말이냐? 목숨이 여러 개라도 달린 것이냐?”총관 시녀는 땅에 꿇어 앉아 감히 얼굴도 감싸지 못한 채 그저 끊임없이 빌기만 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명원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명했다. “여봐라. 옥보를 끌어내 곤장 서른 대를 호되게 쳐라.”저 황후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녀를 감싸주지 못하고 그저 화를 내며 한마디 했다. “이걸로 끝내는걸 다행으로 알거라.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지 않고 뭐하느냐?”총관 시녀는 이미 힘이 풀려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말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그녀는 끌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퍽
희씨 어멈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 했습니다. 지난해 소인이 큰 병에 걸렸을 때 제왕비가 좋은 약을 지어 줘서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이번에 그녀를 한번 도왔으니 그 은혜를 갚은 셈입니다. 소인은 초왕비가 벌을 받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태상황은 아직도 초왕비가 필요하니, 몇 마디 꾸지람만 하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소인 누구도 해 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오랫동안 머리를 조아린 채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평온한 얼굴이었다.“소인 이젠 더 할말이 없습니다. 독주를 하사하여 주십시오, 폐하!” 이 생에 진 빚을 그녀는 이젠 다 갚았다. 곧 걸을 황천길에서도 더 이상 그에게 미안한 것이 없었다 명원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배후의 인물을 말한다면 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겠다.”희씨 어멈은 침묵을 지켰다. 얼굴에는 생사를 도외시하는 결연함이 묻어 있었다. 명원제는 죽도록 미우면서도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당연히 희씨 어멈을 죽이지 못한다. 심지어 이 일을 태상황께 알리지도 못한다. 태상황은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데, 어찌 수십 년 동안 당신 곁에서 보필하던 사람이 당신을 독해하려 했단 충격을 견딜 수 있겠는가?오랜 침묵 끝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태상황을 해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니, 짐도 자네를 믿겠다. 책임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멈도 이젠 연세가 있으니 태상황 곁에서 시중들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어멈이 초왕비와도 인연이 있으니 짐이 초왕비를 위해 태상황께 청을 드리겠다. 어멈은 초왕비를 따라 왕부로 가서 초왕비의 시중을 들도록 하라.” 명원제는 끝내 자신의 손으로 희씨 어멈을 처리하지 않았다. 희씨 어멈이 원경능을 해하려 했으니, 원경능에게 보내 그녀더러 처리하게 내버려 둘 셈이었다.원경능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희씨 어멈은 이만 물러가거라.”명원제가 노기를 거두고 담담하게 명령했다.희씨 어멈은 복잡한 눈길로 원경능을
건곤전에 도착하니 태황상은 반쯤 일어나 앉은 채로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다.건곤전 안에는 상공공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온몸에 검은 옷을 두르고 검을 차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것으로 보아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그는 원경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천둥번개가 치듯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태상황이 해바라기씨를 까면서 그에게 명령했다.“이만 물러가거라.”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손을 모아 인사하고 물러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서 걸음을 옮길 때 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잠깐 사이에 건곤전 밖으로 종적을 감췄다.“뭘 그리 쳐다보는 게야? 저 자는 암위(暗卫)이니라. 일은 잘 해결됐느냐?”그녀를 흘겨본 태상황이 한가로이 물어왔다. 그는 꽤 기운이 있어 보였다. 문득 원경능은 이 영감이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희씨 어멈을 사주한 사람까지도.영감은 그녀를 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원경능은 머리털이 쭈뼛하고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이 영감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상공공, 내 태상황께 따로 할말이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게.”원경능은 혼자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제대로 알아내야 했다. 상공공은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태상황은 여전히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얄밉기까지 했다.“물어볼 거라도 있느냐? 과인이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다만.”“누가 약을 바꿨습니까?”원경능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알고 계시지요?”“알지!”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소나자.”“어디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십니까?”“방자하도다!”태상황이 화내며 소리쳤다.“지금 어느 안전에 말하는 것이냐?”원경능은 눈을 내리 깔고 가슴에 가득 맺힌 억울함을 참으며 말했다.“송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태상황은 ‘흥’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해서 해바라기 껍질을 깠다. 그러다가 사실대로
손왕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난 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큰형님도 하고 싶으시겠지, 그러나 난 큰형님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를 천거할 일은 없지 않겠느냐.”탕양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손왕 전하, 전하의 이번 천거는 초왕 전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손왕은 깜짝 놀랐다.“어찌 해를 끼친단 말이냐? 본왕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정식으로 천거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부황도 내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탕양 자네는 너무 조심성이 많아. 자네와 같이 처신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탕양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손왕은 본인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본인의 말을 듣지 않을 걸 아는데 왜 굳이 수고스럽게 말씀 드린단 말인가? 손왕 전하는 참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손왕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을 수도 있음을 깨닫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쳤다.“어리석은 주둥이 같으니라고. 또 내가 실언한 게지?”“괜찮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저었다.“실언하신 게 아닙니다. 둘째 형님께서 저를 알아봐 주셨으니, 천거하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그의 시선은 계속 밖을 향해 있었다. 원경능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황은 지금 진노하고 계시고. 부황은 과연 그녀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가?손왕은 과자를 다 먹고는 떠났다. 가기 전에 분노를 가득 담아 우문호를 대신해 범인을 몇 마디 저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로써 형제간의 우애를 다 보여준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금단도 꺼내 탕양에게 건넸다.우문호가 거절하자 그는 아예 우문호에게 던져버렸다.“이 맛도 없는 걸 내가 갖고 있어서 뭐하느냐? 게다가 본왕은 태자 자리에 뜻이 없으니 본왕을 상대하려는 자도 없을 것이다.”그는 던지고는 곧 도망치듯 나왔다. 탕양이 보물을 얻은 듯 얼른 주워 들며 말했다.“손왕 전하께서는 그래도 왕야를 신경 써 주시는군요.”우문호가 덤덤히 대답했다.“본왕도 알고 있다.”둘째 형님은
저녁 식사는 기씨 어멈이 준비했다. 원경능은 입맛이 없어 국물을 한 모금만 삼키고는 상을 치우게 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챈 기씨 어멈은 다른 일은 묻지 않은 채 녹아를 불러 함께 음식을 정리했다. 기씨 어멈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때 원경능이 물어왔다.“어멈, 화가는 괜찮은 것이냐?”그녀가 입을 열자 기씨 어멈이 급히 돌아서며 말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 그 아이는 이젠 괜찮습니다.”“내일 그를 보러 가마.”원경능이 말했다.“네, 감사합니다!”기씨 어멈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할 때에도 화가 걱정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원경능은 책을 조금 읽다가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부디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때 희씨 어멈이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면서 문까지 닫았다.원경능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무슨 일인가?”희씨 어멈이 양 손을 공손히 드리우며 담담히 말했다.“왕비, 차라리 직접 말씀해주십시오. 소인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시렵니까?”원경능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그 어떤 처분도 내리지 않을 것이네.”그러자 기씨 어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인 잘 알아들었습니다. 왕비께선 소인 스스로 자결하라는 말씀이시겠지요. 아마 이건 폐하의 뜻이기도 할 테지요.”원경능이 담담하게 말했다.“폐하의 뜻은 나도 모르네. 성심을 어찌 함부로 짐작하겠는가? 허나 태상황께서 내게 말씀하셨네. 나더러 자네를 잘 대하라고.”희씨 어멈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곧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태상황께서 진정으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내가 자네에게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목숨을 끊어 은혜와 원한을 없애든, 잘 살아서 태상황의 은혜에 보답하든 자네 스스로 고민해보게. 내가 자네를 대신해 결정해주진 못하니 말이야. 이만 돌아가게, 쉬어야 하겠네.”원경능은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희씨 어멈은 무거운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갔는데도 원경능은 멀리서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