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곤전에 도착하니 태황상은 반쯤 일어나 앉은 채로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다.건곤전 안에는 상공공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온몸에 검은 옷을 두르고 검을 차고 있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것으로 보아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그는 원경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천둥번개가 치듯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태상황이 해바라기씨를 까면서 그에게 명령했다.“이만 물러가거라.”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손을 모아 인사하고 물러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서 걸음을 옮길 때 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잠깐 사이에 건곤전 밖으로 종적을 감췄다.“뭘 그리 쳐다보는 게야? 저 자는 암위(暗卫)이니라. 일은 잘 해결됐느냐?”그녀를 흘겨본 태상황이 한가로이 물어왔다. 그는 꽤 기운이 있어 보였다. 문득 원경능은 이 영감이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희씨 어멈을 사주한 사람까지도.영감은 그녀를 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원경능은 머리털이 쭈뼛하고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이 영감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상공공, 내 태상황께 따로 할말이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게.”원경능은 혼자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제대로 알아내야 했다. 상공공은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나갔다.태상황은 여전히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얄밉기까지 했다.“물어볼 거라도 있느냐? 과인이 대답해 줄지는 모르겠다만.”“누가 약을 바꿨습니까?”원경능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알고 계시지요?”“알지!”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소나자.”“어디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십니까?”“방자하도다!”태상황이 화내며 소리쳤다.“지금 어느 안전에 말하는 것이냐?”원경능은 눈을 내리 깔고 가슴에 가득 맺힌 억울함을 참으며 말했다.“송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태상황은 ‘흥’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계속해서 해바라기 껍질을 깠다. 그러다가 사실대로
손왕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난 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큰형님도 하고 싶으시겠지, 그러나 난 큰형님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를 천거할 일은 없지 않겠느냐.”탕양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손왕 전하, 전하의 이번 천거는 초왕 전하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손왕은 깜짝 놀랐다.“어찌 해를 끼친단 말이냐? 본왕은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정식으로 천거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부황도 내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탕양 자네는 너무 조심성이 많아. 자네와 같이 처신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탕양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손왕은 본인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본인의 말을 듣지 않을 걸 아는데 왜 굳이 수고스럽게 말씀 드린단 말인가? 손왕 전하는 참 단순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그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손왕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을 수도 있음을 깨닫았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쳤다.“어리석은 주둥이 같으니라고. 또 내가 실언한 게지?”“괜찮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저었다.“실언하신 게 아닙니다. 둘째 형님께서 저를 알아봐 주셨으니, 천거하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그의 시선은 계속 밖을 향해 있었다. 원경능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황은 지금 진노하고 계시고. 부황은 과연 그녀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 것인가?손왕은 과자를 다 먹고는 떠났다. 가기 전에 분노를 가득 담아 우문호를 대신해 범인을 몇 마디 저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로써 형제간의 우애를 다 보여준 셈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금단도 꺼내 탕양에게 건넸다.우문호가 거절하자 그는 아예 우문호에게 던져버렸다.“이 맛도 없는 걸 내가 갖고 있어서 뭐하느냐? 게다가 본왕은 태자 자리에 뜻이 없으니 본왕을 상대하려는 자도 없을 것이다.”그는 던지고는 곧 도망치듯 나왔다. 탕양이 보물을 얻은 듯 얼른 주워 들며 말했다.“손왕 전하께서는 그래도 왕야를 신경 써 주시는군요.”우문호가 덤덤히 대답했다.“본왕도 알고 있다.”둘째 형님은
저녁 식사는 기씨 어멈이 준비했다. 원경능은 입맛이 없어 국물을 한 모금만 삼키고는 상을 치우게 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챈 기씨 어멈은 다른 일은 묻지 않은 채 녹아를 불러 함께 음식을 정리했다. 기씨 어멈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때 원경능이 물어왔다.“어멈, 화가는 괜찮은 것이냐?”그녀가 입을 열자 기씨 어멈이 급히 돌아서며 말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 그 아이는 이젠 괜찮습니다.”“내일 그를 보러 가마.”원경능이 말했다.“네, 감사합니다!”기씨 어멈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할 때에도 화가 걱정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의 가슴이 뭉클해졌다.원경능은 책을 조금 읽다가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부디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때 희씨 어멈이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면서 문까지 닫았다.원경능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무슨 일인가?”희씨 어멈이 양 손을 공손히 드리우며 담담히 말했다.“왕비, 차라리 직접 말씀해주십시오. 소인에게 어떤 처분을 내리시렵니까?”원경능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그 어떤 처분도 내리지 않을 것이네.”그러자 기씨 어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인 잘 알아들었습니다. 왕비께선 소인 스스로 자결하라는 말씀이시겠지요. 아마 이건 폐하의 뜻이기도 할 테지요.”원경능이 담담하게 말했다.“폐하의 뜻은 나도 모르네. 성심을 어찌 함부로 짐작하겠는가? 허나 태상황께서 내게 말씀하셨네. 나더러 자네를 잘 대하라고.”희씨 어멈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곧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태상황께서 진정으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내가 자네에게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목숨을 끊어 은혜와 원한을 없애든, 잘 살아서 태상황의 은혜에 보답하든 자네 스스로 고민해보게. 내가 자네를 대신해 결정해주진 못하니 말이야. 이만 돌아가게, 쉬어야 하겠네.”원경능은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희씨 어멈은 무거운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갔는데도 원경능은 멀리서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
현비는 여전히 걱정이 태산 같았다.“대체 누구의 미움을 샀길래 이렇게 독한 짓을 벌인다는 말이냐?”“누구의 미움도 산 적 없습니다.”우문호가 그녀를 위로했다.“됐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범인은 이미 죽여 없앴으니 전 이제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어미가 바보도 아니고….”그녀는 고개를 들고 원경능을 쳐다보았다. 볼수록 화가 났다. “왜 거기서 멍청히 서있는 게냐? 아랫것들에게 분부해 왕야께 국물이라도 올릴 생각은 못하는 것이냐? 너처럼 시중드는 사람은 처음 보는구나.”원경능이 우문호를 보며 물었다.“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나요, 왕야?”현비가 화를 냈다.“만들라 명하면 되지 않느냐? 뭔들 나쁠까? 부상당했는데 뭘 먹어야 하는 지도 물어봐야 하다니, 넌 이렇게 작은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왕부의 일도 감당하지 못하지. 차라리 너를 대신해 일을 할 사람을 찾는 편이 좋겠구나.”원경능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측비를 맞이하는 일 때문에 걸음 한 듯싶었다. 자신이 난동을 부릴까 걱정되었던 것일까? 현비는 원경능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녀는 난동을 부릴 수 없는 처지였다.현비가 천천히 몸을 꼿꼿하게 일으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미가 걸음한 것은 네 상처를 살피러 온 것 외에도 너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란다.”우문호는 그녀가 뭘 말할 지 알고 있었다.“나중에요, 소자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말하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꼭 말해야 한다.”현비가 강경하게 말했다.“어미는 이 일에 대해 네 부황께 이미 말씀드렸다. 네 부황께선 반대하지 않으셨어. 그저 저씨 집안의 의향을 물어보라고만 명하셨을 뿐이다. 만약 저씨 집안에서 동의한다면 이 혼사는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네 부황께서 너 대신 부탁하는 일인데, 저씨 집안에서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마음 편히 상처 회복에만 힘쓰거라. 부상이 다 나으면 곧 혼인할 수 있을 것이다.”“됐습니다. 그만하세요.”우문호는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기씨 어멈은 자신이 고생해서 만든 것들이 땅에 떨어져 먼지가 묻은 것을 보며 놀라고 두렵기까지 했다. 이때 서일이 나오며 말했다.“어멈, 일어나시게. 현비마마는 어멈에게 화난 게 아니야. 그 분은 왕야께 화가 난 것이네.”기씨 어멈은 더는 묻지 못하고 바닥의 간식들을 줍고 물러났다.궁으로 돌아가던 현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녀는 자신의 심복을 불렀다.“아버님께 말을 전하거라. 측비를 들이는 일에 지장이 생겼으니, 경후와 몇 마디 말씀을 나누고 오시라고.”“네!”그녀의 심복이 명령을 수행하러 떠났다.***경후는 최근 정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제왕비는 사람을 보내 제왕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동안 계속 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왕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현재 자신은 참으로 형편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전처럼 왕부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반 시진 넘게 기다려서야 제왕비의 가마가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는 분을 삭이고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했다.“제왕비를 뵙습니다!”저명취는 발을 젖히며 차갑게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후야(侯爷)시군요.”“네! 네!”경후는 그녀의 말투가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보고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저명취가 담담하게 말했다.“돌아가세요, 경후. 제왕부의 문벌이 낮아 경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혹여 초왕비의 심기를 건드려 황제 폐하 앞에서 제 잘못을 날조하게 하면 안되니까요. 돌아가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발을 내렸다. 가마는 경후를 그 곳에 홀로 세워 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경후는 어찌 되었든 후작 관저(侯爵府邸)의 사람이었다. 연속해서 삼일 동안이나 계속 찾아왔는데 이렇게 문전박대 당하다니, 실로 크나큰 치욕이었다. 그의 얼굴이 단번에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물러나기도, 그렇다고 들어가기도 애매했다.그는 제왕부 문지기(门房)의 비웃는 눈빛과 마주하고 나서, 씩씩거리며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경후!”뒤에서 그를 부르
탕양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러면 황제와 태상황께서 모두 진노하실 것이다.그러나 진노는 잠시일 뿐, 왕비와 이혼한다면 왕부는 그때부터 태평할 것이다. 경후 또한 성가시게 굴지도 않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로운 점이 더 많았다.“허면 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와 혼인하는 일에 대한 왕야의 생각은 어떻습니까?”우문호는 이 화제에 싫증이 났지만 부황과 어머니께서 계속 이야기를 꺼내셨으니 무조건 이 문제와 당면해야 했다. 그는 다시 탕양에게 반문했다.“넌 어떻게 보느냐?”탕양이 분석하기 시작했다.“국면으로 볼 때, 확실히 왕야께 유리합니다. 저씨 집안에서는 비록 큰 아가씨를 제왕에게 시집보냈지만, 저수부(褚首辅)는 제왕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태후 때문에 저수부는 줄곧 주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게다가 태상황도 왕야를 높이 평가하고 계시니 저씨 집안이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날의 국면입니다. 그러나 왕야께서 저씨 둘째 아가씨와 혼인하신다면, 저씨 집안은 어느 정도 왕야께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만약 제왕이 쓸모 없다고 느낀다면 저수부는 왕야께 모든 힘을 쏟을 것입니다.”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자네도 어머니의 말씀에 공감하는 모양이군.”탕양이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국면을 놓고 분석할 때는 이렇습니다만, 소인은 왕야께선 도모하실 마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왕야께서 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를 측비로 맞이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만약 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가 측비가 되길 원하신다면 말입니다.”“자네 이 말은 왜 앞뒤가 맞지 않느냐?”“모순되지 않습니다. 현비마마께서 왕야더러 저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와 혼인하라 하심은 순전히 자리를 쟁취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소인은 왕야께서 저씨 집안의 비호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우문호가 냉랭하게 말했다.“본왕이 저씨 가문의 비호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왕야, 어떤 일들은 왕야께서는 하실
그러나 원경능은 좁쌀죽만 먹었을 뿐 계화떡은 먹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에 단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은 계화떡은 그렇게 쓸쓸히 올려져 있기만 했다. 원경능은 좁쌀죽을 다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둘째 노부인, 먼저 실례하겠습니다.”둘째 노부인은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 가보거라, 너희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단다.”원경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걸어 나갔다.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자 마자 난씨의 신랄하고 매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저리도 위세를 부린답니까? 저 애가 왕부에서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경후부의 도움이 없다면 좁쌀죽도 얻어먹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제가 다 들었습니다, 왕야가 저 애를 때리고 욕한다고요. 다들 저 애의 이마는 보셨어요? 글쎄 상처가 나있지 뭡니까. 초왕야가 때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시집간지 1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합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웃음거리가 되는 게 두렵지도 않나 봅니다.”원륜문의 부인 최씨가 말을 거들었다.“합방은 했다고 들었으나, 태후의 압력에 못 이겨 초왕이 약을 먹고 합방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초왕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입니다.”“되었다. 그만하거라. 외부인들이 말하는 건 그렇다 쳐도 우리까지 함께 떠들어 댈 필요가 있겠느냐? 다들 이만 흩어지자꾸나.”둘째 부인이 정의로운 척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통쾌한 기색이 언뜻 비쳤다. 약까지 먹고 합방했다니, 초왕이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더 웃긴 건, 합방하기만 하면 초왕이 그녀를 달리 볼 것이라 착각하여 경후부로 돌아와서 왕비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실로 천박하고 무지하며, 우둔하고 속된 사람이었다.원경병은 막 성인이 되었는데 규방의 일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장 원경능을 쫓아갔다.그녀는 원경능을 막아서며 거칠게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요? 왕비가 되어서 왕야의 총애도 못 받
노부인은 조용한 것을 좋아했기에 방안에는 손씨 어멈(孙妈妈)만이 그녀를 모시고 있었다. 원경능이 방문한 것을 본 손씨 어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왕비께서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원경능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새삼 경후부에서 이런 진심 어린 미소를 보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들어가면서 손씨 어멈에게 물어보았다.“조모의 건강은 어떠한가?”손씨 어멈이 그녀를 한 손으로 막아서며 어색하게 웃었다.“괜찮으세요. 오늘은 죽을 절반도 넘게 드셨답니다. 예전엔 하루 종일 그 만큼밖에 드시지 않았는데 말이지요.”원경능은 그녀가 내민 손을 쳐다보았다. 이건 자신을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인가?“손씨 어멈, 난 안으로 들어가서 조모를 뵙고 싶네.”원경능이 말했다.손씨 어멈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노부인께서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으셨습니다. 며칠 전 소인이 왕비 얘기를 꺼냈더니, 즉시 굳은 표정으로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원경능은 곧 노부인이 그녀가 계략을 꾸며 왕부에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시집가기 전 아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호통치기도 했다. 그녀더러 어리석고 허영심이 넘친다고, 주제도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며 혼냈다. 이 몸의 주인이 친정으로 돌아와 조모를 뵈려고 했을 때도 문을 닫고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조모는 그녀에게 아주 크게 실망했었다.경후부에 이렇게 사리에 밝은 분이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원래 몸 주인의 행동은 확실히 어리석고 멍청한 것이 맞았다.그녀가 작게 속삭였다.“손씨 어멈, 내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네. 어제 막 궁에서 나왔는데 꼭 조모께 여쭤볼 일이 있네.”손씨 어멈은 그녀가 어제 궁에서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말했다.“허면 한번 시도해 보세요. 만약 노부인께서 계속 화내시면 더는 말씀하시지 말고요. 부인께서 지금 몸 상태로 화를 내는 건 좋지 않습니다.”“알겠네!”원경능이 응하며 안으로 들어갔다.방안엔 빛이
이 문제에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왜냐하면 자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원씨가 임신한 뒤로부터 그의 눈과 마음에는 다른 것들을 담지 못했었다.현재 제왕이 물으니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어디 그렇게 많은 왜가 있어, 놓으면 놓는 거지.'"다섯째 형님."제왕은 우문호가 머뭇거리자 조금 몸을 일으키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혹 아직도 명취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우문호는 그를 흘겨보았다."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네 다섯째 형수는 속이 매우 좁아.""형님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겁니까?"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좋아하지 않아.""어떻게 했습니까? 이렇게 빨리 명취를 잊다니."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한참 뒤에 우문호가 고개를 들었는데 빛이 반짝였다."너의 다섯째 형수가 있었기 때문이지.""그 말인즉, 다른 사람이 생기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건 아마 대체하는 방법인 듯 하군요. 다른 여인을 찾아야 되지요, 맞나요?"제왕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연구해본 적도 없는 걸.'허나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으로 말했다."맞아, 넌 동그란 얼굴의 계집애와 자주 있도록 시도해봐. 아마 곧 잊을 수 있을 거야."원영의를 말하니 제왕이 탄식하며 말했다."이번에 영의가 조태의를 데리고 돌아왔기 다행이지 아니면 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네 다섯째 형수가 보낸 거다."우문호는 원경능을 위해 공을 쟁취했다. 일곱째는 늘 원씨에게 편견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우문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을 쟁취하여야만 했다.그러나 제왕은 그 말을 흘려 보내고 홀로 중얼거렸다."사실, 동그란 얼굴도 괜찮아요. 자상하게 왕비를 소개해줄 것이라 했거든요."우문호가 불현듯 물었다."참, 오늘밤 돌아갈 거야?"제왕은 생각에 잠겼다."돌아갈 거예요. 동그란 얼굴이 있으니 절 괴롭히
우문호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부황...."부황께서 합의 이혼을 동의하시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그 말투에 불쾌한 느낌이 상당했다."그대로 하면 되느니라."명원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저명취가 시집온 뒤로부터 사단이 끊인 적이 없었다. 작은 일은 저수부의 체면을 보아 눈 감아줄 수 있었다. 이렇게 방임했더니 결국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실의 체면을 깎는 건 괜찮으나 사적으로 친황들의 사이를 이간질 하니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다.애당초 그녀의 명성은 그렇지 않았다. 밖에서는 다들 그녀가 현명하고 정숙하며 대가의 풍격이 있다고 했다.그러나 오늘 저씨 노태부인의 그 말을 해 이미 화가 치밀었었다. 저씨 가문의 체면이 참으로 대단했다."부황."우문호가 정색하더니 재빨리 물었다."부황의 뜻은 일곱째의 요구를 동의한다는 겁니까?""동의하지 않을 수 있느냐? 무기를 휘두르기까지 하는데."명원제가 아비로써의 인내를 보여주었다."합의 이혼한 뒤 각자 재혼한다면 두 가문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우문호는 매우 우러러보았다. 부황의 이 말은 참으로 가식적이었다. 너무 가식적이어서 전혀 가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각별히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이 일을 일주일 내에 해결하거라. 해결하지 못하면 곤장을 맞으러 와야 한다. 꺼지거라."명원제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문호는 명을 받고 제왕을 찾으러 들어갔다. 두 형제는 서로를 부축하면서 출궁했다.그러나 명원제는 계속 상소문을 읽어야 했다. 군주로써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의자가 있는 이외에 뭐가 나은 것이 있던가?황제란 수명이 짧은 직업이었다.옆에서 묵을 갈던 목여공공이 기쁘게 말했다."제왕과 초왕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음을 보셨으니 폐하께서도 시름을 놓으실 수 있습니다."명원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는 떳떳하고 일곱째는 단순하다. 그렇기에 다행인 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일찍부터 크게 다투었을 것이다. 다투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암투를 벌일 것이지.
우문호가 위로했다."그만 소리 질러, 부황 앞에서도 네가 계속 신음소리를 낸다면 네가 겁쟁이라고 꾸짖으실 거야."제왕은 아픔에 말도 하지 못했다. 끙끙 신음소리와 함께 발을 질질 끌며 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실로 참을 수 없어 말했다."형님, 절 업어줘요.""상처가 앞에 있는데 내가 널 없으면 더 아프지 않을까?"우문호는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근심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아픔을 참지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 원씨는 온몸에 부상을 입고 입궁하여서도 억지로 버텼었는데, 일곱째는 여인보다 못하는군.""다쳐서 아픈 것이 낫지 이렇게 상처가 찢기는 고통은 원하지 않습니다." 제왕은 걸음을 멈추고 무기력하게 손을 저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입술에도 혈색이 보이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를 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업고 나니 제왕이 또 "아아아"하고 소리를 질렀다.우문호가 물었다."되겠어?"제왕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목여공공을 바라 보더니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나를 들고 가게."목여공공은 이미 성지를 전하러 출궁한 궁인에게 물어보았었다. 부상 정도가 그렇게 엄중하지 않다고 조태의가 말했다고 전했다. 가슴팍의 상처는 괜찮고 복부의 상처가 조금 깊다고 했다.그리하여 제왕의 이러한 모습을 본 목여공공은 근심을 금할 수 없어 물었다."태의가 확실하게 진찰한 게 맞습니까? 내장이 상한 건 아닙니까?"제왕은 숨을 들이쉬었다."내장이 상한 건 아니네."목여공공은 제왕의 이런 모습으로 실로 궁전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말했다."좋습니다. 그렇다면 들고 갑시다."어깨 가마와 들것이 없으니 한 사람은 어깨를, 한 사람은 두 다리를 들고 갔다. 제왕의 머리는 떨어져 있었는데 입에 초롱 손잡이를 물로 있었다. 허나 자신이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제왕은 칠흙같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등불의 빛은 궁중의 밤을 밝히기엔 부족했다. 그는 그저 딴 세상에 온 듯 하였다.왜 살아가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
황후는 완전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곱째가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 죄명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죄명이 실증되고 정말 백관 앞에서 죄를 심의 받는다면 절로 미래를 망친 것이었다.그리하여 이 일의 진위를 막론하고 재빨리 답했다."합방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이야 말로 전해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태노부인도 바보가 아니었다. 저명취의 낯빛을 보고 태후가 말한 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다만 바보가 아닌 태노부인은 멍해졌다. '측비 때문이 아니라면 제왕은 왜 합의 이혼하려고 하려는 걸까? 설마, 그 원측비의 말이 진실이란 말인가? 명취와 초왕 사이가 애매하단 말인가?'태노부인의 얼굴은 당장에 어두워졌다. 다만 태후가 자리에 있는지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 일단 이 화를 가라앉혔다.그러나 태후는 태노부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노부인, 한마디 묻겠네. 한 여인이 처로써 작은 일로 자결하고 또 낭군을 중상한 뒤 회개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군다면, 노부인의 부중에서는 어떻게 처단하는가?"태노부인은 실로 체면이 깎였으나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제왕부부는 예전에 화목했었고 측비가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합방도 하지 않았으니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태노부인은 그저 기가 죽어 말했다."태후마마, 제가 아둔했습니다. 명확하게 묻지 않고 입궁하여 태후마마와 황후를 귀찮게 했습니다. 다만 젊은 부부가 다투는 건 자주 있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쉽게 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합의 이혼이네."태후가 차가운 낯빛으로 곧 시정했다."황실의 체면이 중요하나 황실의 혈육도 잃을 수 없네. 제왕은 황제의 적자네. 부부가 작은 일로 모순이 생겨 무기를 휘두른다면 철로 만든 몸이라 하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태후는 고개를 돌려 황후를 바라 보았다."너의 며느리고 또 너의 조카니 네가 알아서 이 일을 해결하
황후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절부절하여 명원제를 흘깃 보았는데 명원제의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에 황후는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말 몇 마디 하라고 태노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나 태노부인이 싸늘하고도 딱딱하게 말했다."폐하, 황후마마, 제왕은 황실자손으로써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렸습니다. 비록 명취가 충동한 것은 잘못이나 모든 잘못이 명취에게 있는 건 아닙니다. 현재 제왕이 측비로 인해 합의 이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소문이 퍼진다면 실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에 황실과 저씨 가문의 체면이 깎일 겁니다.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제왕의 상처가 호전되면 백관들 앞에서 죄를 심의 받고 합의 이혼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태노부인의 이 말은 절대 사정의 의미가 아니라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심지어 태노부인이 황실의 체면과 저씨 가문의 체면을 함께 논할 때 황후의 낯빛이 돌연 변했다. 크게 경악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명원제를 바라 보았다.아까만 해도 낯빛이 어둡던 명원제는 태노부인의 이 말을 듣고 도리어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했다."노부인, 조급해하지 말게. 이 일은 짐이 자세하게 물어볼 것이네. 노부인의 신체가 편찮다고 수부에게 들었으니 돌아가 푹 쉬게. 자손들은 자연히 자손들만의 복이 있을 것이니 노부인이 염려해서 되는 것이 아니네."말을 마친 명원제는 몸을 일으켜 떠났다. 나가기 전에 담담하게 저명취를 흘깃 보았다.태노부인은 기가 차 멍해졌다. 명원제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이 이렇게 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자신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명원제는 나간 뒤 목여공공에게 분부했다."초왕과 제왕을 부르거라."목여공공은 잠시 머뭇거렸다."폐하, 제왕은 아직 부상 당한 몸입니다.""죽지 않을 거다."명원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일 중상이라면 일찍이 부중에서 보고를 했을 것이었다."그리고 이 일을 태후께 아뢰거라. 태후께 한 번 들리라고 전하고."목여공공은 명을 받
다만 저명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고 울고 있었는데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제왕은 조태의와 원영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 원영의는 매우 눈치가 빨랐다. 조태의를 이끌고 나가려는데 조태의가 약가루를 내려놓으며 시녀에게 분부했다."이건 지혈약이다. 상처부분에 뿌리고 살짝 동여맨다면 이틀 뒤 바로 괜찮아질 거다."시녀는 이미 놀라 손발이 나른해진 상태였다. 약가루를 건네 받고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제왕은 모든 사람들을 물리고 저명취의 곁에 앉아 물었다."왜 그러는데?"저명취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왕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늘 흐리멍덩했던 머리가 이번에는 도리어 맑아졌다. 사실 원영의의 말들이 그를 정신차리게 했던 것이다.만일 명취가 정말 자신을 생각했다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은 째지게 가난한 사람도 아니었고 당당한 친왕이었다. 다른 것을 쟁취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평생의 부귀영화를 줄 수 있었다.누구도 그를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한가하게 놀고 있는 왕야를 상대하지 않았다. 명취는 그렇게 총명하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저수부의 외손자였고 현재 황후의 적자였다.큰 형님이 태자로, 황제로 된다고 하여도 감히 자신에게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천하 사람들의 공론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당연히, 좀 못나게 말한다면 큰 형님은 애초에 자신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그리하니 명취는 정말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그렇다면 그가 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을까? 그리하여 제왕은 마음이 아프지만 계속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끝내. 그대가 시집온 날부터 난 그대의 마음 속에 내가 없다는 걸 알았어. 난 자연히 다섯째 형님과 비할 바가 못되지. 나도 내 자신을 알아. 그대는 시종일관 다섯째 형님을 좋아했던 거야. 다만 다섯째 형님이 그대를 저버리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시집온
탕양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아사가 들어와 앉더니 물었다."뭐가 산 것이라고요?""본왕의 아들 말이다!"우문호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아사는 머뭇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턍양을 바라 보았다. 탕양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왕야가 이미 미쳤다는 손짓을 했다.원경능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됐어요, 식사나 해요.""우리 큰 언니는요?""돌아갔어."원경능이 답했다. 아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제왕에게 정말 화가 나요. 글쎄 큰 언니와 서일이 노닥거린다면서 큰 언니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겠어요? 큰 언니가 화를 참고 때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우문호는 기분이 매우 좋은지라 이 말을 듣고 아사를 흘겨봤다."이 계집아이 좀 봐, 일곱째가 매우 연약한 것처럼 말하네. 일곱째도 무술을 연마했었어.""설마요?"아사가 경악했다."그런데 왜 그렇게 연약하게 굴어요?"우문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연약하지 않아, 최소한 손으로 계란을 한 알 깰 수 있으니.""전 돌을 깰 수 있어요."아사가 답하니 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제왕이 정말 무술을 배운 적이 있나요?""배웠지, 황자로써 누가 배우지 않아도 되겠어? 마술과 궁술, 무술 모두 익혀야 하지. 일곱째도 배웠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는 배우지 않았어. 싸우는 것도 원하지 않고 말이야."아사는 의아해졌다."왜요?""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술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어."우문호가 말했다. 아사는 믿을 수 없었다."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정말 무술을 익혔다면 왜 반격을 하지 않았겠어요?""일곱째는 여인을 때리지 않아."우문호가 답했다****여인을 때리지 않는 제왕은 제왕부로 돌아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곧장 저명취의 방으로 향했다.요 이틀간 저명취는 많이 울었는지라 눈이 계속 부어있었다. 제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도 그저 담담히 눈길을 위로 들었다."성지가 내려진 건가요
제왕은 기가 막혔다."당신의 말투가 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지? 본왕에게 정비를 소개하다니. 본왕의 혼사는 모후의 뜻을 따라야 해."원영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눈에 하얀 이, 옴폭 파인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조모께서 말씀하셨어요. 남자는 모두 애라 달래면 된다고요. 그리고 당신의 모후는...."제왕이 화를 냈다."당신의 모후이기도 하잖아!"원영의는 그제야 두 사람 사이가 생각난 듯 무미건조하게 코를 만졌다."전 정비가 아니라 모후라고 부르면 안돼요."제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당신 계속 본왕에게 합의 이혼하라고 하고 지금 또 이러한 말을 하는군. 당신 정비가 되고 싶은 거 아니야?"원영의가 물었다."정비가 되면 좋은 점이 뭔데요?""좋은 점이 많지."제왕은 잠시 생각했다."최소한 당신은 본왕과 명분이 정당한 부부로 되는 거지.""명분이 정당한 부부가 된다면 뭐가 좋아요?"원영의가 다시 물었다. 제왕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당신은 부중에서 뜻대로 할 수 있어. 하인들도 모두 당신의 명을 따를 것이고."원영의가 반문했다."제가 지금 부중에서 뜻대로 살고 있지 않나요? 지금 하인들이 제 명을 따르지 않나요?""당신 본왕과 함께 여러 장소로 출석할 수 있지."원영의가 웃었다."지금은 제가 여러 장소에 출석할 수 없나요? "제왕은 그녀에게 눈을 부릅떴다."당신 지금 고의적으로 엇나가는 거야? 당신이 정비와 측비의 다른 점을 모를 리가 없잖아. 정비는 처고 측비는 첩이야, 명분부터 다르잖아.""처도 좋고 첩도 좋아요. 그러나 제가 저인 사실은 번함이 없어요."원영의는 손을 내저었다."전 당신의 처가 되기 싫어요 .좋기는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당신이 저명취와 합의 이혼하는가를 관심하는 것은 저와 직접적인 이해득실이 있어서예요. 누가 부중에 그러한 정실이 있기를 원하겠어요? 전 그녀를 보는 것조차 싫어요."말을 마치고는 곧 일어났다. 원영의가 떠나려 하자 우문경이 손을 잡았다."가자마, 본왕과 이야기나 좀
아사는 돌아간 뒤 부두에서 만아를 본 일을 원경능에게 알렸다.원경능은 이를 듣고 조금 마음이 시큰거렸다.이러한 시대에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아는 남정네들과 함께 막노동을 하고 있으니 어디 얼굴을 드러내는 정도인가?다만 자신의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아사더러 만아에게 은 열 냥을 가져다 주라고 하였다.다음날 아침 아사가 돌아왔다. 만아가 안받으려고 하였는데 억지로 만아에게 넣어주고 달아났다고 전했다.원경능이 묵묵히 말했다."그 아이에게 주었으면 되었다.""왕비께서는 참 선량하십니다."아사가 칭찬했다. 원경능은 속으로 자신이 선량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은 열 냥은 준 것도 사실 자신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원경능은 이 은 열 냥으로 자신을 홀가분하게 만들려고 했다.엄격하게 따진다면 그녀는 만아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다만 원경능은 자신의 동정심이 점차 사라짐을 느꼈다. 원래의 원경능도 점차 모진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혹 자기 보호를 더 잘할 수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자신을 잃게 된 것이었다.우문호가 저녁에 돌아올 때 제왕을 데리고 함께 돌아왔다.그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초왕부에 도착하더니 바로 소월각으로 들어가 숨었다.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왜요? 왜 구신이라도 본 듯이 숨어요? 누가 기분을 상하게 했기에 노기등등한 얼굴이에요?"우문호는 자리에 앉아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원경능은 자신 곁으로 끌어오고는 배를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들아, 기억하거라. 네가 이후에 만일 일곱째 삼촌처럼 못난 짓을 한다면 뺨을 갈겨 죽일 것이야."원경능은 그의 손을 두드리며 웃었다."무슨 아들이에요? 딸이면 안되나요? 제왕이 왜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어요?"우문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놈이 연속 이틀 동안 관아로 와 나를 찾았어. 공무가 가득한데 저놈 때문에 한 건도 해결하지 못했잖아. 이것 봐, 오늘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