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돈을 줍고 바이올린을 든 채 발걸음을 옮겨 문 앞으로 갔다.배현수는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샴페인을 들이마시며 조유진에게 냉랭하게 당부했다.“그리고 조유진 목에 있는 목걸이의 그 은반지가 너무 신경 쓰이네.”조유진은 문 앞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배현수를 등지고 서 있다.그녀는 손을 올려 목에 건 목걸이에 있는 은반지를 만졌다. 그것은 6년 전에 배현수가 사줬던 커플 반지였다. 싸구려 은으로 만든 것이지만 조유진은 보물처럼 여겼다.“습관이 돼서요. 이 반지를 6년 전에 저에게 선물하셨으니 제 거죠. 제 물건인데 어떻게 할지는 제 선택이죠. 배 대표님과는 상관이 없잖아요.”게다가 그것은 6년 전의 배현수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다. 조유진을 아끼고 사랑하던 배현수가 준 것이다.조유진은 이기적이게도 아름다웠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비록 그 추억이 그녀의 가슴을 칼로 베는 듯 아프게 하지만 말이다.그런데 조유진은 뭔가에 홀린 듯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그녀의 고집이 배현수의 화를 돋운 듯했다.“꺼져.”조유진은 떠났다.배현수의 손에 들어 있던 술잔이 순식간에 쨍그랑하고 깨졌다!진한 냄새의 알코올과 손바닥의 붉은 피가 섞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육지율과 강이찬은 깜짝 놀랐다. 조유진의 등장이 배현수를 이 정도로 자극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현수야,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생각이 짧았어!”어두운 불빛 아래, 배현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았고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차갑게 한마디 했다.“이게 네가 준비했다던 서프라이즈야? 재미없어.”“미안해.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강이찬은 배현수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배현수는 그의 상사이기도 하다. 이 몇 년간에 배현수는 점점 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알 수 없게 변했다. 가끔은 강이찬도 함부로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앞으로 함부로 나서지 마. 특히 조유진에 관한 일은.”배현수가 하는 말에 강이찬은 따를 수밖
강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하지.”가장 심각했을 때는 배현수가 교도소에서 칼에 맞았는데 하마터면 심장이 찔려 죽을 뻔했었다....조유진은 술에 취해 어질어질해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도 모른다.집에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토해서 겨우 속이 조금 편해졌다.약국을 지날 때 조유진은 들어가서 숙취해소제와 알레르기 약을 샀다.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몸에 난 두드러기는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몸에서 나는 술 냄새는 너무 세서 막을 수 없었다.집 안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조유진은 가방을 내려놓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조선유는 평소처럼 달려와 그녀에게 안기지 않았다.“선유야?”대답이 없었다. 잠든 것일까?조유진은 침실로 들어가자 조선유가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입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조유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큰 걸음으로 다가갔다.“선유야, 왜 그래?’“엄마... 나 아파... 가슴이 아파...”아이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엄마가 당장 병원 데려가 줄게! 선유야, 조금만 참아!”조유진은 곧바로 구급차를 부르고 조선유를 업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밖에 날씨가 변했다. 어두운 밤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구급차는 아직 안 왔지만 조유진은 기다릴 새 없어 조선유를 업고 길가로 달려가 오는 차를 막았다!등에 업혀 있는 아이는 아파서 중얼거렸다.“엄마,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너무 아파...”조유진은 불안해서 눈물을 흘렸다.“아니야! 선유야, 조금만 더 참아! 엄마가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줄게! 자지 말고 참아! 선유야...”아이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조유진은 한 손으로 아이 엉덩이를 바치고 다른 한 손으로 차를 잡았다.“멈춰요! 멈춰! 아이가 쓰러졌어요! 당장 병원에 가야 해요!”“차를 세워요! 제발 병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제 딸을 살려주세요...”하지만 비가 너무 크게 쏟아져 지나가는 차들은 이 광경을 보고도 감히 차
늦은 밤, 응급실에서.조선유는 응급실로 들어갔고, 온몸이 젖은 조유진은 간호사에게 막혀 문밖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보호자분, 여기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조유진은 응급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너무 무력했다. 두 손을 떨며 간호사의 손을 잡고 쉰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했다.“제 딸을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흐느끼는 목소리였다.간호사가 조유진을 위로하며 말했다.“저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진정하세요.”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으로 오는 내내 정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마침내 병원에 도착하자 온몸에 힘이 빠진 조유진은 벽에 기대어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조선유가 등에 업혀서 쓰러졌을 때 당장이라도 딸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조유진은 몸을 덜덜 떨었다.6년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 바로 배현수가 교도소에서 그녀와 완전히 헤어지자고 말했던 순간이었다.숨 쉬는 것조차 아팠다.한 사람이 극도로 슬플 때는 온몸이 저리다. 조유진은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는 갯벌에 빠진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때 누군가 큰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조심해요.”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빨개진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봤다.“신 선생님?”그 사람은 제일 병원 호흡기과 주치의 신준우였다. 3년 전 선유가 고열로 인해 병원에 왔을 때 치료해 준 사람이 바로 신준우였다.신준우는 조유진이 홀로 딸을 힘겹게 키우는 것을 알고 이 모녀를 많이 신경 쓰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아까 선유가 응급실에 실려 가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선유의 얼굴이 창백하고 숨을 잘 못 쉬더라고요. 저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선유가 너무 아프대요...”“걱정하지 마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병이 발작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제가 전에 선유를 데리고 와서 동맥 도관술을
조선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매쉬드 포테이토도 먹고 싶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매쉬드 포테이토 왔어!”신준우는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영양죽 좀 사 왔어요. 매쉬드 포테이토도 있고요. 선유랑 같이 먹어요.”“준우 아저씨.”신준우는 조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선유 말 잘 듣고 치료받아야 해. 엄마 걱정시키지 말고.”“네!”“선유 말 잘 듣네.”조유진은 숟가락으로 으깬 감자를 퍼서 선유에게 먹였다.신준우는 그녀의 손등에 난 두드러기를 보고 물었다.“알레르기죠? 아까 약국에 가서 알레르기약 사왔어요. 조금 있다가 꼭 발라요.”조유진은 잠시 멈칫했다.“고마워요. 병원에 올 때마다 신세를 지네요.”“신세는 뭘요. 혼자서 선유 보느라 쉽지 않을텐데, 저도 그냥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는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유진 씨,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꼭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요.”조유진은 신준우가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신준우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도 신준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의 도움에 보답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어떤 일은 신준우가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그녀는 이미 진흙탕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신준우도 그녀와 함께 발버둥 치게 끌어들일 수 없었다.신준우가 떠나자 침대에 기대어 있던 선유는 갑자기 놀라운 말을 꺼냈다.“엄마, 준우 아저씨가 엄마를 좋아해.”조유진은 입꼬리만 올린 채 아무런 감정변화 없이 말했다.“애가 뭘 안다고.”“원래 그런 거지! 엄마, 엄마도 혹시 나처럼 아빠 생각하고 있어?”숟가락으로 감자를 뜨던 조유진의 손이 멈췄다.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조유진의 눈 밑에 그림자가 한 층 드리워져 외로워 보였다.“아니야, 엄마는 지금 선유를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은 하나도 생각 안 해.”선유는 고민에 빠졌다.“엄마, 아빠가 떠난 지 이제 몇 년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유진의 절친 남초윤은 선유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남초윤은 두 손 가득 간식과 장난감을 사 왔다.“아이고, 우리 선유, 왜 이렇게 살 빠졌어!”“이모!”선유가 태어난 후부터 남초윤은 선유의 수양어미가 되기로 마음먹었다.“얼른 와, 이모가 안아보자! 아이고 내 새끼, 링거 맞느라 손이 다 부었네!”남초윤이 조선유의 얼굴을 마구 어루만지자 선유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모! 너무 열정적이야! 나 얼굴 아파!”“쏘리 쏘리! 이리 와, 이모가 너 주려고 맛있는 음식과 장난감을 사 왔어. 마음에 들어?”조유진이 말했다.“너무 많이 사 왔어. 무슨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러다 애 나쁜 습관 들어.”남초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어린애잖아. 많이 사랑해 줘야지. 맞지, 선유야?”조선유는 너무 기뻐서 눈이 반달 모양으로 되었고 남초윤에게 윙크를 날렸다.“이모, 사랑해, 음뫄!”“사랑해, 사랑해!”남초윤은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발사했다.조선유는 한 켠에서 바비 인형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었고 남초윤은 조유진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 이야기를 나눴다.“너 어젯밤에 술집에서 배현수를 만났어?”조유진은 흠칫했다.“너 어떻게 알았어?”“강이찬이 말했어. 네가 배현수 때문에 술을 들이켜 알레르기 났을 거라고 나보고 시간 있으면 보러 가라고 하더라고. 배현수 이 자식 너무 한 거 아니야?! 네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난 괜찮아. 약 먹었어. 그래도 그 술 덕분에 칠백만 원이나 벌었어. 나 손해 본 거 아니야.”남초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봤다.“너 무슨 소리야! 너 운이 나쁘면 알코올 알레르기로 죽을 수 있어! 바보야!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너에게 이런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거야. 너 술집에서 알바하지 않았으면 그 자식이랑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조유진은 한숨을 쉬었다.“좋은 거든 나쁜 거든 피할 수 없어. 이번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언
배현수가 말했다.“유진아, 다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널 만지게 하지 마. 난 견딜 수 없어.”그는 그렇게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사랑도 원망도.“초윤아, 난 그 사람이 나한테서 선유를 뺏어갈까 봐 겁이 나. 선유를 뻇어서 나한테 복수할까 봐.”남초윤은 깜짝 놀랐다.“배현수가 충분히 변태라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어!”그때 남초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신문사에서 결려온 전화였다.“네, 편집장님?”“너 어디 갔어! 배현수의 스캔들 기사가 인기 검색어 1위까지 올라갔어! 우리 신문사의 단독 기사가 또 상대한테 빼앗겼다고!”배현수에 관한 단독 기사?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은 얼른 트위터를 확인했다.트위터 실검 1위: “배현수와 송인아 약혼!”이 검색어는 클릭 수가 폭발적으로 많았다.“미친! 무슨 일이야!”남초윤은 너무 놀라 욕이 튀어나왔다.조유진은 그녀의 신문사에 일이 생긴 줄 알았다.“무슨 일이야?”남초윤은 휴대폰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배현수에 관한 기사야, 봐봐!”송인아, 조유진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하지만...“약혼했네, 잘 됐어. 축하해.”남초윤은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조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유진의 표정에서 속상한 감정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조유진의 표정은 지나치게 평온했고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왜 그렇게 쳐다봐?”“너... 이거 정상 반응이 아닌데? 너 예전에 배현수랑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잖아. 그 사람 때문에 아버지에게 반항까지 했으면서, 지금은...”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어떤 반응을 보여야 정상인데? 내가 울어도 배현수는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이 약혼했다는 것은 과거를 잊겠다는 뜻이고,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야. 아마 그 사람이 지금의 약혼녀랑 잘 지내면 나에게 복수하는 것도 잊을 거야.”남초윤의 입꼬리를 떨렸다.“그래. 그 생각 괜찮네.”남초윤은 편집장의 재촉에 불안해하며 황급히 신문사로 돌아갔다.조유진은
“최대한 빨리 실력 좋은 심장외과 전문의를 찾아서 우리 아버지 혈관우회로술을 시켜드려야겠어. 응, 그래.”배현수는 창문 앞에 서서 비서장과 통화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꼬마 한 명이 그의 옆으로 달려와서 입을 앙다물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곧 뒤에서 경호원이 나타나 그 낯선 꼬마 아이를 끌고 가려고 했다.아이는 배현수의 수트 바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아저씨,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저 사람에게 저를 잡지 말라고 해 주세요!”배현수는 그 말에 놀랐다. 상대는 어린 꼬마이기도 하고 악의가 없어 경호원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무슨 일 있니?”선유는 작고 흰 얼굴을 들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아저씨, 정말 잘생기셨어요! 아저씨랑 이야기해도 돼요?”아이는 핵인싸 같았다.배현수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어도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배현수는 어린아이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넌 내가 무섭지 않니?”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아저씨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왜 무서워해요?”“내가 나쁜 사람일까 봐 겁나지 않니?”“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선유는 단호하게 말했다.배현수는 순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꼬마들은 외모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나?두 사람은 병원 안에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선유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배현수에게 물었다.“아저씨는 왜 병원에 왔어요? 어디 아파요?”“난 아프지 않아. 우리 아버지가 편찮으셔.”배현수의 양아버지 배희봉은 관상 동맥 질환으로 인해 병원으로 실려 왔다. 배현수는 배희봉을 보러 병원에 온 것이다.배현수는 자신이 왜 꼬마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다.평소 같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꼬마는 이상하게 볼 때부터 호감과 익숙함이 느껴졌다.아마도 똑똑하고 귀엽게 생겨서 다른 아이들처럼 싫지 않은가 보다.꼬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하고 소리 냈다. 그리고는 또 혼잣말하듯이
배현수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기억력이 이렇게 좋아?”“네! 엄마가 기억력 좋은 것은 아빠를 닮아서 그렇대요! 우리 아빠 천재예요!”배현수는 흠칫했다.“네 아빠가 기억력이 엄청 좋아?”“네! 왜요, 아저씨?”배현수는 사실 별생각이 없이 물어봤을 뿐이다. 이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꼽힐 정도다.그러나 배현수는 귀신에 홀린 듯 일부러 아이를 시험하고 싶기도 해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읊었다.“기억했니?”꼬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했어요! 아저씨, 제가 미인을 소개해 드릴 테니 기다리고 있으세요!”배현수는 당연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아무 연관도 없는 꼬마와 이야기하느라 20분이나 보냈다니.배현수는 일어나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난 갈게. 너도 얼른 병실로 돌아가.”선유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아저씨, 또 봐요!”경호원은 배현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배현수는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의자에 앉아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꼬마를 쳐다보았다.갑자기 마음속 깊이 가장 부드러운 곳이 뭔가에 걸린 것 같았다.만약 그때 조유진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배현수와 조유진의 아이도 이만큼 컸겠지.당시, 배현수는 졸업하자마자 조유진과 혼인 신고하고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만약은 없다.배현수와 조유진에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을 수 없다.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배현수는 시선을 차갑게 그 아이에게서 다른 데로 옮겼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이와 동시에 조유진은 드디어 조선유를 찾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선유를 껴안았다!“선유야! 너 왜 말도 없이 나가! 엄마가 엄청 걱정했잖아!”“윽... 엄마 너무 꽉 껴안았어! 나 숨 막혀!”조유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