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짜 인플루언서고 짝퉁 에르메스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임유환의 말 한마디에 조하람은 발 밟힌 고양이 마냥 소리를 질러댔다.“나 한 달에만 몇천만 원 벌어요, 근데 내가 짝퉁을 왜 사요?”“당신 옷차림이나 좀 보고 말해요. 어디서 거지 같은 옷들을 입고 와서 감히 날 평가해!”“아무것도 없는 게 어디서 있는 척이야!”조하람이 발끈하자 지켜보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임유환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애초에 최서우를 싫어하기도 했고 서희동과 조하람이 돈을 잘 버니 이건 그들에게 잘 보일 기회였다. “서우야, 네 남자친구 대체 뭐 하는 사람이니? 본인은 옷을 저렇게 입고 무슨 얼굴로 하람이한테 뭐라 하는 거야? 뭘 짝퉁 에르메스야?”“네 남자친구는 에르메스 본 적은 있대? 그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아나 몰라.”“그러니까, 하람이가 한 달에만 몇천만 원을 버는데 뭐가 아쉬워서 짝퉁을 들겠어! 아까 조하람 말에 자존심 상해서 체면 살리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야?”“하람이 거 진짜 맞아. 우리 사장님도 똑같은 거 들어서 내가 매일 보는 데 저게 가짜일 리 없어!”“서우야, 얼른 남자친구한테 사과하라고 해. 쪽팔린 것도 정도껏 해야지.”여자들이 저를 지지하지 입꼬리가 올라간 조하람이 임유환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최서우가 발끈하며 말했다. “왜 유환 씨가 사과를 해? 조하람이 먼저 뭣대로 말한 건데!”“하람이는 맞는 말 했잖아.”“그러니까, 찌질이한테 찌질이라고, 가난하다고 한 게 뭐 잘못됐어?”여자들이 대신 말해주자 조하람은 제 거짓말이 들통나진 않을 것 같아 아까보다 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에르메스 가방은 다 핸드메이드라 애초에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 조하람이 들고 온건 S급이라 에르메스를 많이 사본 사람이 아니고는 정말 구분할 수가 없었다.“너희들...”친구들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 말을 잇지 못하는 최서우를 향해 임유환이 말했다.“서우 씨, 그만 해요. 저런 사람들과 똑같아지진 말아요 우리.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고 하죠 뭐
“지혜야, 이 사람 본 적 있어?”둘의 대화를 듣던 친구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디 보기만 했어, 아까 은행에서 잘난 척하더라고, 자기는 2천억을 꺼내러 왔다고!”서지혜는 팔짱을 끼며 비아냥거렸다.“2천억?”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잠시 놀라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내가 다 부끄럽네.”“그러니까,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알아?”“어떻게 됐는데?”서지혜의 조롱 섞인 웃음에 다들 호기심에 차 물었다.“다른 사람 카드 사칭한 거 걸려서 은행 전무한테 잡혔어!”제 앞에서 계급 차이를 운운하던 임유환을 제대로 망신 주려고 서지혜는 일부러 오바하며 말했다.감히 누구한테 계급이 어쩌고저쩌고야.“진짜? 아, 너무 웃겨!”“허세 대박이네.”서지혜의 말에 자리에 있던 동창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이런 방법으로 아까의 수모를 갚아주기 위해서였다.“지혜야, 너희가 늦게 와서 좋은 구경을 놓쳤어!”“뭔데?”여자들의 말에 서지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아까 저 사람이 또 헤세 부리면서 우리 하람이한테 가짜 인플루언서라고 하는 거야, 막 가방도 짝퉁 에르메스라고 하고. 그래서 우리가 뭘 보고 그렇게 말하냐고 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뭐라고 했는데?”“자기 집엔 한정판 에르메스가 너무 많아서 딱 보면 안대! 너무 웃기지 않아?”“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니까!”“너희들 말 다 했어?!”서지혜와 애들의 웃음에 최서우는 참다못해 테이블을 '탁' 치며 몸을 일으켰다.“임유환 씨는 그렇게 헛소리할 사람이 아니야. 카드도 사칭 아니거든. 은행 전무님이 직접 사과까지 하셨어!”“어이, 최 퀸카, 네가 말하면서도 웃기지 않니?”최서우의 말에도 서지혜는 삐딱한 태도를 유지한 채 말했다.“허세 떠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너처럼 허세 쩌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2천억이 뭐 2천만 원인 줄 알아? 그리고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2천만 원은 있겠어?”최서우에게 드러내던 여자들의 적의가 이젠 무시로 변해버렸다
임유환은 서희동의 그런 속내를 보아내지 못한 듯 대답했다.“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작은 사업해요.”“사업이요? 나랑 같은 일 하네.”서희동은 신이 나서 제 자랑을 떠벌리기 시작했다.“요즘 또 내 부동산 사업이 좀 잘되고 있거든요. 혹시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도 돼요. 내가 좀 도와줄게요.”서희동 눈에는 임유환이 그저 작은 장사나 하는 걸로 보였기에 저와는 비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이때다 싶어 최서우에게 저를 어필하려고 제 자랑을 조금 보탠 것이다.“마음만 받을게요 서 사장님.”“네?”그런데 임유환이 제 호의를 거절하자 서희동이 벙찐 듯 되물었다.그러다 그 이유를 알겠는지 고개를 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남자가 체면은 챙겨야겠지만 또 계속 체면만 챙기려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요? 그쪽도 서우가 힘들게 살긴 바라지 않죠?”“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임유환이 단칼에 서희동을 거절하게 서희동은 임유환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여 발끈하며 말했다. “우리 서 사장이 너무 잘해줬지?”그때 임유환을 싫어하던 여자들이 나서며 소리쳤다.“그러니까, 능력도 없으면서 허세만 가득해서는!”“서 사장이 도와주는 건 당신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걸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지 알아요? 고마운 줄도 모르고!”“그렇게 갖고 싶으면 그 기회 당신 줄게요.”“뭐라고요?!”임유환이 고개를 들며 여자를 향해 말하자 여자는 목이 메어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다른 남자들도 임유환이 너무 체면을 차린다고 고개를 저어댔다.정말 최서우가 저런 사람을 만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됐어 됐어, 다들 그만해. 다들 원하는 게 다르잖아. 그냥 혼자 작게 사업하고 싶다는 데 나도 더 안 말려.”그때 서희동이 또 착한 척을 하자 여자들은 뭣 모르고 그를 칭찬해댔다.“봐, 우리 서 사장님은 이렇게 관대하셔! 이게 사장이라는 거야!”그에 임유환이 미간을 찌푸리자 여자들은 또 소리
“저기... 음식이 잘못 올라온 것 같은데요. 저는 라페르를 시킨 적이 없어요.”“아, 그러니까... 한 병은 부족할 것 같은데...”서희동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은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동창회에 돈을 쓰긴 싫어 그냥 다 기본적인 음식들로 주문해 가격이 2백만 원을 넘지 않았다. 돈은 적게 쓰고 허세를 부리려는 심보였다.그런데 갑자기 킹크랩에 보스턴 랍스타 그리고 라페르까지, 가격이 4천만 원을 넘어가니 돈이 아까워 나서 물어본 것이다.자리에 있는 최서우가 아니었다면,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직원이 그런 서희동의 마음을 눈치챈 듯 예의 바르게 말했다.“알고 있습니다. 이건 저희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서비스라고요?”“네.”서희동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직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저한테 주는 거예요?”“그건 사장님께서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 좀 있다 직접 술을 따라드리러 오신다고 하셨어요.”직원의 말에 서희동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당연히 우리 서 사장한테 주는 거겠지. 여기 너 말고 이거 받을 사람이 누가 있어!”그때 한 친구가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다들 질세라 한마디씩 보태고 있었다.“역시 서 사장은 대단하다니까!”“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어쩜 그리 겸손해!”“하하, 그래?”친구들의 아부를 즐기던 서희동이 문득 의아해졌다.소원 레스토랑은 이곳에서 꽤 유명한 3성급 레스토랑이라 사장이 2백억 정도의 자산가일 텐데 왜 갑자기 저에게 이런 서비스를 주는지 이상했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가게에서만 적어도 몇천만 원은 쓴 것 같아 단골손님을 붙잡으려고 주는 건가 보다 하는 결론을 내렸다.직원 말로는 사장이 직접 와서 술을 올린다고 했는데 이 자리에서 저를 빼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혹시 최서우 남자친구인가라는 생각도 했지만 저 몰골을 보니 그럴 리는 없어 보였다.“희동아, 너 대단하다.”그때
“이 사장님, 오셨어요!”이강을 본 서희동이 뛰쳐나가며 반갑게 인사하자 다들 이강이 서희동에게 술을 따라주러 온 줄 알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하하, 서 사장님!”이강도 술잔을 들며 웃고는 말했다. “서 사장님, 사업을 점점 크게 하시네요. 서 사장님 같은 분이 여기까지 와서 식사를 해주시다니 정말 제 영광입니다.”1시간 전 대하 은행 본부의 고 전무가 직접 연락해서 VIP 고객이니까 잘 모셔달라는 말에 이강도 급히 매니저에게 먼저 픽업을 부탁하고 고 전무에게 룸 번호를 보내줬었다.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급히 온 것이다.VIP라고 해서 낯선 얼굴들일 줄 알았는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서희동에 이강은 서희동이 부동산으로 한몫 크게 챙겨서 은행 VIP가 된 줄로만 알고 그에게 술을 권한 것이다.요즘 부동산이 잘 나가는 시기이긴 하니까.“하하, 이 사장님 왜 이러세요. 그냥 작은 사업일 뿐입니다. 어딜 감히 이 사장님과 비교하겠습니까.”제 신분이 이강보다 낮음에도 저를 이토록 추켜세워주는 이강에 서희동은 몸 둘 바를 모르며 굽신거렸다.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창들은 이런 게 바로 성공한 사람들끼리 서로 추켜세워주는 건가 하며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그리고 동창회를 하는 줄 알고 서희동의 체면을 세워주러 들어온 이강이 참 장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서 사장님이야말로 왜 이러세요. 고 전무님이 직접 저한테 언질 주셨는데요. 요즘 부동산 사업 너무 잘 되시죠?”고 전무라는 처음 듣는 이름에 서희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하, 서 사장님 너무 겸손하시네!”이강은 서희동이 겸손한 척하는 줄 알고 일부러 그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그리고 이강의 모습이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니고 아부를 떨러 온 것에 가까워지는 걸 본 동창들은 서희동이 이 정도로 성공했냐며 혀를 내둘렀다.“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그냥 부동산 잘 될 때 재미 좀 본 것뿐입니다!”서희동은 아마 같이 일을 했던 부동산 사장이 저를 언급했나 보다 하며
깜짝 놀란 이강이 고강준을 한쪽에 끌고 가서는 낮게 물었다.“고 전무님,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지금, 서희동 씨한테 술 따라드리라면서요?”이 자리에 서희동 말고 또 누가 제 술을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내가 언제 그랬어!”고 전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이강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나는 서희동이 누군지도 몰라! 얼른 임 선생님께나 술 따라드려!”“네? 임 선생님이라뇨? 누구예요 그게?”이를 악물고 말하는 고 전무에도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한 이강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여기서 임씨 성이 저분 말고 또 누가 있어!”고 전무가 임유환을 보며 말하자 그 시선을 느낀 임유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임유환을 본 고강준은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뭐라고요? 저 사람이 임 선생님이라고요?”고 전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이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이 사장, 아까 혹시 임 선생님한테 실수하지는 않았지?”“그... 그게...”“빨리 말해!”이미 일이 틀어진 것 같긴 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는데 말을 더듬는 이강에 고강준이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제가 아까 임 선생님인 줄 모르고 가르치려고...”“뭐라고?!”고 전무는 이강에게 욕을 하며 노려봤다. 그 순간만큼은 이강을 죽여버리고 싶었다.어쩐지 저를 보는 임유환의 눈빛이 차갑더라니.“뭐라고 했어?”“그게...”고 전무의 다급한 질문에 이강이 창백해진 얼굴로 아까의 일들을 전했다.“이런 멍청한 놈!”저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이강 더러 임유환을 잘 모시라고 했건만 사람을 잘못 본 것도 모자라 임유환을 가르치려고 까지 들었으니 이건 아주 안하니만 못한 짓이었다.“너 임 선생님이 누군지는 알아? 어떤 분이신지 아냐고! 네가 지금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알아?!”잔뜩 화가 난 고 전무가 이를 악물며 제 앞에 서 있는 바보 멍청이를 다그쳤다.“누... 누군데요?”“블랙 골드카드 주인이야.”“뭐... 뭐라고요?”등에 식은땀이
룸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수많은 시선들이 임유환에게로 향했다.다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임유환이 설마 진짜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지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임 선생님, 정...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이 풀리지 않으셨다면 더 마실 수도 있습니다!”고량주 한잔이 그대로 뱃속에 들어가 위가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임유환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정말 더 마실 수 있었다.지금은 술을 마시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됐어요. 아까 일은 이미 잊었어요.”이강이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아낸 임유환은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손을 흔들며 말렸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이강이 감사 인사를 전하며 몸을 떨어댔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이 감사 인사는 정말 임유환의 넓은 아량에 감탄하여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감사였다.그제야 고 전무가 아부를 떨며 임유환에게 다가가 와인잔을 들고 임유환에게 따라주었다.“임 선생님, 아까 일은 제대로 전달을 못 한 제 탓입니다.”“저는 이 사장이 임 선생님을 잘 모셨으면 해서 한 일인데, 이렇게 오해를 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제가 모두를 대신해서 이렇게 사죄드리겠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말을 마친 고 전무도 고량주 한잔을 삼켰다.그리고 고 전무의 말을 듣고서야 친구들도 이 자리에 올라온 킹크랩, 보스턴 랍스타 그리고 라페르는 모두 임유환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음을 알아차렸다.진짜 VIP는 바로 임유환이었다.“고마워요. 제가 한 잔 따라드리죠. 고 전무님 그리고 이 사장님 사업 모두 번창하길 기원할게요.”웃으며 술잔을 들려 한 임유환이 제 술잔을 비어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하자 눈이 빠른 이강이 서둘러 서희동 손에서 라페르를 뺏어오며 임유환에게 따라주고는 서희동을 노려보았다.“이건 당신을 주려고 준비한 게 아니야!”“하하...”그에 서희동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떨며 웃었다.애초에 이것들이 저를 위
사실을 알게 된 여자들은 서지혜와 서윤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헛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임유환을 그렇게까지 몰아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대단한 인맥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임유환은 한 번에 2천억을 인출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임유환과 비하면 서희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리고 친구들의 원망 어린 눈길을 느낀 이 사건의 원흉인 조하람, 서지혜, 서윤후는 하나같이 그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특히 조하람의 얼굴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워 났다.제가 몇 년 동안 애써서 만들어놓은 인플루언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자 정말 동창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 얘들아, 나 일이 있던 걸 깜빡해서 먼저 일어나볼게!”그래서 조하람은 아무 핑계나 대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하하, 윤후도 일이 있다네. 우리도 먼저 가볼게.”서지혜와 서윤후도 그 뒤를 따라 다급히 뛰쳐나갔다.그들 모두 이 자리에 더 있을 면목이 없었다.“하하, 그럼 우리 오늘 동창회는 이쯤 할까?”서희동은 동창들의 뜨거운 눈초리를 받진 않았지만 너무 민망했기에 서둘러 자리를 파하려고 했다.이렇게 큰 반전이 있었을 줄이야.특히 술을 따르면서 했던 말이 제일 부끄러웠다. 애초에 임유환 술이었는데 그걸 가로채놓고 본 주인에겐 따라주지도 않은 게 너무 부끄러웠다.게다가 임유환의 어마어마한 능력에 할 말을 잃기도 했다.임유환이야말로 진짜 겸손이었고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다.“후...”서희동은 긴 숨을 뱉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서둘러 룸을 나갔다.그리고 임유환이라는 다른 거물이 등장하자 다른 친구들은 서희동이 나가든 말든 잡지도 않고 모든 시선을 임유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그럼 저희도 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사죄를 마친 고 전무와 이 사장도 나가려고 하자 임유환이 웃으며 말했다.“네, 가보세요.”“임 선생님이야말로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둘은 끝까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명함을 건네주었다.“임 선생님, 이건 제 명함인데 또 은행에 오실 일이 생기면 바로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