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지?”“죽은 건가...?”잔뜩 뒤엉킨 공간 안에서 임유환의 작은 목소리만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그의 몸은 풍선처럼 아무 무게 없이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눈을 떠보려고 애썼지만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약간의 틈조차 만들 수 없었다.그렇게, 의식만 점차 뚜렷해질 뿐이었다.갑자기 어느 순간.눈앞의 공간이 물결처럼 여울이 일더니 그의 몸을 감쌌다.어두컴컴하던 세상이 확 밝아지면서 한 빌딩의 옥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24층이나 되는 고층빌딩이었다.여긴 바람이 아주 셌다.그리고, 어쩐지 익숙한 곳이라는 것도 알아챘다.바로 그의 어머니가 뛰어내렸던 곳이었다!왜... 여기 있는 거지?임유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던 차에, 기억 속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엄마!”임유환이 불렀다.하지만 그 뒷모습은 그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그녀는 임유환을 등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옥상의 끝으로 걸어갔다.임유환은 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동공이 확 커졌다.15년 전의 그날이 떠올랐다.어머니는 자기 옥팔찌를 건네주고는 잘 살라며 이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렸었다.지금, 그날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엄마!”임유환은 엄마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크게 소리쳤다.하지만 헛수고였다.그녀는 한 발 한 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유환아, 엄마 먼저 가. 넌 꼭 무사해야 해.”그리고 뛰어내리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엄마, 가지 마!”임유환이 처절하게 소리쳤다.15년 전의 비극이 한꺼번에 몰려와 죽을 힘을 다해서 막으려고 했다.하지만 어떻게 용을 써봐도 끝까지 제자리걸음이었다.순간.광풍이 일면서 온 하늘이 깜깜해졌다.미모의 여성은 임유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훌쩍 뛰어내렸다.“엄마!”또 다시 이 사고를 목격한 임유환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엄마!”그 시각.S시 제일병원, 302호 중환
“아가씨는 괜찮아요. 본인 몸이나 신경 써요. 이렇게 심하게 다쳤으면서.”조명주는 걱정스러운 임유환을 보면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임유환이 이마를 찌푸렸다. “혹시 저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그냥 솔직히 말해주세요.”조명주가 뭔가를 감추려는 게 느껴졌다.“사실대로 말해줘요?”조명주가 눈썹을 움직였다.임유환이 사건의 전말을 알면 충격을 받아 몸이 더 악화될까봐 걱정이었다.“네.”임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너무 상처받지 마요.”조명주가 미리 언질을 주고 사실을 말했다. “서인아 씨는 아주 멀쩡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당신이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만 보고 돌아갔습니다.”“갔다고요?”임유환이 멈칫 했다.뒤늦게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자신이 목숨을 바쳐 지킨 여인이 정작 자신을 보러도 오지 않았다니.하지만 스스로가 기꺼이 구한 것이니 서인아를 탓하지는 않았다.또 반복된다 해도 여전히 망설임 없이 구할 것이다.근데... 그 여자가 이렇게나 매정했던가?폐허에 갇혔을 때 보여준 걱정과 관심이 다 가짜였다고?“그러니까요, 알려주기 싫었는데.”실망한 임유환을 본 조명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임유환의 편을 들었다. “서인아 씨도 참, 자기 때문에 이렇게 다쳤는데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하긴, 서인아 씨 같은 여자 주위에 목숨 바칠 남자가 한 둘이겠어요? 당신 하나쯤이야 신경도 안 쓸 테지.”“허”임유환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니 뭔 위로를 이딴 식으로 한대?“제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죠? 제가 소식 듣고 곧바로 현장에 간 게 아니었으면 지금쯤 산채로 매장당했을 걸요.”조명주는 팔짱을 꼈다. “절 만난 걸 행운으로 아세요.”“당신이 절 살렸다고요?”임유환은 마음이 동했다.“그럼요.”조명주는 턱 끝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근데 무슨 몸이 이렇게 튼튼해요?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금방 일어났네요?”“저 얼마나 누워있었어요?”“열여덟시간이요.”
“서우야, 어쩐 일이야?”조명주는 눈앞의 여자에게 이상한 듯 물었다.‘곧 수술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누가 내 뒷담을 까는 것 같길래, 바로 달려왔지.”최서우는 살포시 웃으며 얘기했다. “농담이고, 환자 살피러 왔지.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데.”“이봐요, 잘생기신 분? 이불 좀 치워봐요, 상처 보게.”그녀는 말하면서 임유환에게 다가갔다.“허...”임유환의 얼굴이 굳었다.조명주가 얘기한 친구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160에서 170 정도 되는 키에 예쁘장한 눈썹 아래 무쌍인 눈 위로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흰 가운을 걸친 그녀는 아주 섹시한 이미지였다.몸매도 얼마나 좋은지 대충 봐도 C컵일 것 같은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최서우를 살펴보는 동시에 최서우도 눈앞의 연구 대상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예쁜 입꼬리가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며 최서우가 배시시 웃었다. “잘생긴 얼굴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부끄러운데.”“아...”임유환이 멈칫 했다.분명히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섭지.“서우야, 너 이미지 관리 좀 해! 너 이제 교수님에다 부과장이라고!”조명주는 이마를 치면서 말했다.왠지 자기 친구가 임유환을 만나면 이럴 것 같았다.“이미지? 잘생긴 사람 앞에서 무슨 이미지 타령이야, 안 그래요?”최서우는 임유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저녁에 같이 연구실 갈까요? 진지한 얘기 좀 하게?”“하하, 됐습니다.”임유환이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여자가 날 어떻게 구워삶을 줄 알고.“긴장하지 말고. 당신이 여자 구해준 거 온 병원에 소문이 자자해요. 내가 매력이 없나? 아유, 속상해라.”최서우는 슬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저... 고소해도 됩니까?”임유환이 손을 들었다.“당연히 안 되죠.”최서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손으로 임유환의 손을 눌렀다.서로의 피부가 닿은 그 순간에 임유환이 여자의 매끈한 피부를 느끼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어머, 부끄러워
“저 놀리지 마세요, 선생님.”자신에게 걸어오는 최서우를 보면서 임유환은 씁쓸하게 웃었다.“놀리긴요, 저 진지하거든요.”최서우는 희롱하듯 웃었다. “얼른 옷 올려봐요. 상처가 얼마나 회복됐는지 볼게요.”“아... 괜찮습니다.”임유환이 머쓱한 듯 대답했다.이성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놀리는 건 처음인지라 굉장히 민망했다.미모의 여성이 흰 가운까지 입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뱉으니 마음이 간질간질한 것만은 사실이었다.하지만 최서우의 시커먼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오늘 저녁에 진짜 연구실에 갔다가는 또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무사히 내려올 수 있을지는 더더욱 장담 못 하고...“혹시 부끄러우면 제가 해드릴까요?”최서우가 막 손을 들이밀었다.“이건 아니죠, 선생님!”임유환은 깜짝 놀라서 이불을 여몄다.“깔깔.”최서우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막으며 청아하게 웃었다.이렇게까지 쑥스러워할 줄이야.다른 남자들은 벗으려고 안달이던데.그녀는 임유환이 더욱 궁금해졌다.“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요. 진짜 검사하려는 거예요. 그래도 제 환잔데, 얼마나 회복됐는지는 알아야죠.“최서우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임유환이 의심을 채 거두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진짜죠?”“진짜로요.”최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임유환은 그제야 이불을 치우고 환자복을 올렸다.붕대에 칭칭 감긴 몸이 드러났다.최서우는 허리를 숙여 검사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손가락으로 왼쪽 복부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 “여기 아파요?”“조금요.”임유환이 대답했다.“그럼 여긴요?”최서우는 가슴 쪽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안 아파요.”임유환이 머리를 저었다.그는 자기 몸 상태를 아주 알고 있었다.그때 비수에 가슴이 찔리긴 했지만 일반 자상은 스물네시간 안에 완벽히 회복되며 기껏해야 흉터만 좀 남을 뿐이다. 몸이 튼튼할 뿐만 아니라 체내에 진기가 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부가 철근에 뚫려 시간도 길고 상처도 깊게 났기에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
“최 선생님, 그건 좀...”입꼬리를 올린 최서우의 모습을 보며 임유환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뭐지... 내가 살아있는 표본이 된 느낌이야...“멋진 환자분, 부끄러워하지 마요. 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검사할 때 잘 맞춰주면 누나가...”여기까지 말한 최서우가 갑자기 멈추었다.그리고 임유환의 귀에 섹시한 붉은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특별 서비스를 줄게요.”꿀꺽.귓가에 다가오는 뜨거운 입김과 이 애매한 말에 임유환이 참지 못하고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지금 이 순간 아무리 참을성이 강한 그라고 해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 여자, 진짜 대단하네!그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손에 넘어가기만 하면 뼈도 남기지 않고 먹힐 것 같았다.“잘생긴 환자분, 어때요?”최서우는 계속 물었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임유환은 최서우의 매혹적인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역시 됐습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음은 흔들렸다.“임유환 씨,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이 누나 한 번만 믿어봐요. 응? 그냥 보기만 할 뿐 아무 짓도 안 할 거라고 약속해 줄게요.”최서우는 임유환을 꼬시지 못하겠으니, 이번엔 작은 입을 삐죽 내밀며 불쌍한 척했다.“아 진짜... 졌다, 졌어. 최 선생님 말 대로 하죠.”연약하고 가련한 최서우의 모습을 본 임유환이 두 손 두 발을 들었다.이 여자가 오늘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저항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자고, 그는 생각했다.“호호, 잘 생각했어요.”붉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며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최서우.임유환은 어이가 없었다.이봐, 당신 아까 이러지 않았잖아! 얼굴이 뭐 여덟 개야? 바꾼다면 막 바꿔!“유환 씨가 직접 풀래요, 아니면 누나가 도와줄까요?”최서우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최 선생님께서 대신 해주세요.”임유환은 이렇게 말한 후, 침대에 기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토끼 같달까.“어머, 유환 씨 제법 재밌는 사
“어머, 유환 씨. 몸매가 꽤 좋으시네요? 이 튼튼한 근육 좀 봐.”임유환의 튼튼한 가슴 근육을 보자 최서우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어... 뭐 칭찬 고마워요.”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여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볼 때마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유환 씨 회복력은 정말 놀라워요.”최서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임유환을 흥미롭게 보았다.“아하하, 제 몸은 확실히 정상인과는 조금 다릅니다.”그는 열두 살 때 스승님에게 입양되어 그분과 함께 수련했었다.스승님은 그가 몸을 튼튼히 할 수 있게끔 매주 7,749종의 독극물로 만든 약물을 사용하게 했고, 고된 수련까지 제정해 주셨다.매번 수련이 끝나기만 하면 그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목숨이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그래서 임유환은 보다 빠른 시일 내에 쇠보다 더 단단한 몸을 만들 수 있었다.일반적인 총상은 보통 몇 시간이면 회복된다.“그 말을 들으니 유환 씨한테 점점 더 관심이 생기는데요?”최서우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매혹적인 눈빛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유환 씨, 아까 이 누나가 한 조언을 다시 생각해 보고 오늘 밤 나랑 단둘이 실험실에 다녀오는 건 어때요? 특별한 보상이 기다릴 거랍니다~”“됐습니다. 최 선생님, 저는 몇 년 더 살고 싶습니다.”임유환은 입꼬리가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앞의 이 여자는 그를 조각내서 연구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어, 설마 내 매력이 부족해서 그런가요?”임유환에게 거절당했지만, 최서우는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랑한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는데 자세가 꽤 유혹적이었다.이런 의학적인 기적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꿀꺽.아무리 참을성이 강한 임유환이라고 해도 여자의 유혹적인 자세에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피가 빠르게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어쨌든 그는 혈기 왕성한 성인 남자였으니까.아무 반응도 없다면 거짓말이었다.“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임유환이 약간 동요하는 것을 본 최서우가 즉시 자신의
“임유환 씨, 아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조명주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상처는 왜 갑자기 터졌단 말인가?“그쪽 친구분한테 물어보시죠.”임유환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그 여자가 자신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상처가 터질 일은 없을 거다.어휴, 이젠 병원도 안전하지 않네...“서우가 뭘 했는데요?”조명주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녀는 친구가 꽤 대담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방금 전의 자세도 조금 대담했겠지.“됐어요. 친구분께 직접 물어보세요.”임유환은 마지못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중령님, 친구분께서 조금... 그렇지 않아요?”“조금 뭐요?”조명주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조금 경박한 것 같아요.”임유환은 잠시 멈칫한 후 말을 이었다.“허, 당신이 더 경박하거든? 우리 서우가 얼마나 고고한데.”조명주는 코웃음을 치며 사납게 임유환을 노려보았다.“경고하는데 우리 서우 넘볼 생각 꿈에도 하지 마요. 그랬다간 내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중령님, 걱정 마세요. 전 최서우 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중령님 친구분께서 절 거의 삶아 먹을 뻔한 거 안 보이세요?”임유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나저나 병실을 옮길 수 있을까요?”“그쪽이 병실을 옮겨도 서우가 찾아 올 테니 헛수고하지 마요.”임유환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조명주는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찬물을 끼얹었다.“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임유환은 지금 정말 속수무책이었다.하지만 다음번에는 절대 최서우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임유환 씨, 그나저나 상처는 괜찮아요?”조명주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이번에는 확실히 친구가 좀 지나친 것 같았다.“괜찮아요, 작은 상처예요.”임유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오신 다음 다시 처리하면 돼요.”임유환을 보는 조명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끔 꽤 상남자라니까.“아참.”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조명주가 재
같은 시각.S 호텔 로얄 스위트룸.서인아는 창가에 서서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서리가 잔뜩 끼어 있었다.수미는 서인아의 뒤에 서서 엄숙한 표정으로 보고했다.“아가씨, 집사님께선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임... 임유환 씨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깨어났다고?”임유환이 깨어났다는 말을 듣자, 서인아의 차가운 눈동자에 갑자기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네. 아가씨, 보러 가시겠습니까?”수미가 물었습니다.“됐어.”서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 밑엔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보러 가지 않으면 그분께서 아가씨를 오해할 것 같은데요.”수미는 잠시 생각해 본 후, 결국 이 말을 꺼냈다.예전에 그녀도 임유환을 싫어했다.하지만 몇 번의 일을 통해 임유환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특히 그가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던 점에 가장 감동 받았다.그 인간이 말은 괘씸하게 해도 중요한 시각엔 매번 용감하게 나섰다.수미는 아가씨와 임유환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냥 오해하라고 해.”서인아는 가볍게 말했다.평온해 보이는 말투 속에 깊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음이 보였다.폐허 아래 그녀를 위해 임유환이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준 그 공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구조대가 현장에서 그녀와 임유환을 구출했을 때, 그는 이미 심한 혼수상태에 빠졌음에도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당시 의료진 6명이 와서 그를 겨우 구급차에 실어 올렸다.그 순간 그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 때문에 임유환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까.그녀를 지키겠다던 임유환의 결심을 과소평가한 자신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만약 가능하다면, 그녀는 쇠가 몸을 찌르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신이길 바랐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도 자신이길 바랐다.그녀는 더 이상 임유환에게 그 어떤 폐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