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놓아줘."임유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교실 문 앞에서 울려 퍼졌다. "여자를 놓아달라고?” 이 말을 들은 남자의 입가에는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그는 문 앞에 나타난 임유환을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알다시피, 나는 단지 당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 위해 이 여자의 목숨을 남겨뒀던 거야.”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고?” 임유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그의 기억에 눈앞의 남자는 전혀 있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내 동생 제프는 만난 적이 있을 테지?” 남자는 살기가 가득 찬 가늘어진 눈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 "제프?"임유환의 표정이 바뀌었다. "당신이 그 사람의 형인가?” "그래, 맞아.” 제이크는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내 유일한 동생, 내 유일한 가족을 죽였어!” "그 사람은 죽일 만했어.” 임유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실인에는 살해가 뒤따른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는 제프를 죽이지 않았고, 흑제를 시켜 그를 가두게 한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제이크의 눈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죽이지 말아야 했어!” 제이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최고의 용병이 되어 최고의 용병 조직을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이 절반만 실현되고 네가 산산조각 내버렸어!”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용병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통제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날마다, 해마다, 매일 함께 지독한 훈련을 했다.사막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하이킹을 하며, 열대우림에서 맹수와 독사에게 시달리고, 임무를 수행할 때는 총알 세례에 직면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짊어졌고 결국 최고의 용병이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고, 그 후 그들은 꿈의 두 번째 단계를 위해 용병 조직을 창설했다.
서인아는 천천히 눈을 떴고, 날카로운 단검이 자신의 목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방금 주차장에서 일어난 일을 회상했고, 지금 그녀는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호흡은 여전히 느리고 얼굴은 차가웠다.하지만 8년 전과 비교했을 때,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일어났나?” 제이크는 잠에서 깨어난 서인아를 바라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마침 잘 깨어났네. 이 남자가 두 사람 중에서 누구의 목숨을 선택할지 지켜볼 수 있겠어.”서인아의 마음이 움직였고, 그녀가 교실 입구를 바라보자 과연 그곳에는 임유환이 서 있었다.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놓여 있었다.“유환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냥 이 사람 죽여.” 서인아는 매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네가 죽어도 이 사람은 날 놓아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넌 반드시 죽게 되겠지.” 제이크는 흉악한 웃음을 지었고, 다시 임유환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선택을 하도록 해. 네 발아래 있는 단검으로 네 가슴을 찌르든지, 아니면 내 손에 있는 단검으로 이 여자의 목을 베던지 둘 중 하나야.”"당신도 들었다시피, 저 여자가 나더러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임유환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제이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게다가 방금 말했듯이 저 여자의 생사는 나와 무관해.”말을 마치자, 그는 제이크를 향해 걸어갔다. "그래?” 제이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입가에 웃음이 번졌고, 단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날카로운 칼날이 서인아의 연약한 피부에 핏자국을 남겼다. 서인아는 천천히 눈을 감고 죽을 준비를 했다."당장 그 손 멈추지 못해!” 그 순간, 임유환은 걸음을 멈춘 뒤 크게 소리쳤다. 서인아는 다시 눈을 뜨고 떨리는 눈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 "유환아, 내가 말했잖아. 설령 네가 이 사람이 말한 대로 해도 이 사람은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입 다물어!"임유환은 이를 악물고 제이크를 바라보았다."내가 말한
푹.비수를 꽂았다.칼날이 가슴을 뚫고 뼈에 긁히는 소리가 소름이 끼치게 싫었다.임유환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안돼!”서인아의 눈시울이 빨개졌다.임유환이 자신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수를 가슴에 꽂을 줄 몰랐다.자신을 싫어한다면서!“왜! 왜 그랬어!”서인아는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눈물이 차올라 앞이 보이질 않았다.칼에 찔려본 적 없는 그녀는 아픔의 크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그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머릿속으로 짐작할 뿐이었다.“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이제 이 여자는 풀어주지?”임유환은 서인아를 보지 않았다. 두 눈을 제이크한테 고정한 채로 낮게 읊조릴 뿐이었다.“풀어? 웃기고 앉아있네.”제이크에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그는 임유환이 이제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다.“풀어줘. 안 그럼 후회할 거야.”임유환이 또박또박 내뱉었다.비수는 여전히 그의 가슴팍에 꽂혀있었다.피가 끊임없이 흘러 가슴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었다.하지만 제이크를 쳐다보는 눈빛은 차분하고 또 날카로웠다.전과 다름없었다.제이크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자신의 몸속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이 소름이 돋았다.그는 이런 기분이 너무 싫었다.제이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그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바로 임유환에게 겨누면서 경고했다. “꼼짝 마,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서인아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제이크가 총을 머리에 대고 있었지만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임유환에게 소리칠 뿐이었다. “임유환, 난 됐으니까 빨리 가!”하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빨리 가라고! 내가 언제 살려달랬어! 빨리 꺼져!”서인아는 반쯤 미쳐있었다. 눈물이 후둑둑 떨어졌다.제이크는 광기에 차 더 웃어댔다.그는 임유환에게로 총구를 향하고 곧 방아쇠를 당겼다.탕.공기 속에서 불꽃을 튀기며 발사된 총알이 임유환의 왼쪽 무릎을 명중했다.
서인아는 더 견딜 수 없었다.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렸다.임유환이 목숨까지 걸며 자신을 구하길 원치 않았다.“이 바보야, 왜 자꾸 울어. 너답지 않게.”임유환은 눈물을 떨구는 서인아를 보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서인아의 심장이 세차게 떨렸다.그녀는 임유환에게 소리쳤다. “내가 언제 살려달랬어? 내 일에 신경 꺼. 네가 여기서 죽으면 난 너 평생 미워할 거야!”“허, 내가 너 구하려고 이러는 것 같아? 그냥 궁금한 게 있을 뿐이야. 네가 죽으면 대답은 누가 해줘?”임유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서인아는 온몸이 굳어 임유환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7년 전과 다름없이 고집스러웠다.“이 바보야......”서인아는 목놓아 울었다.“아이고, 눈물겨워서 볼 수가 없네!”제이크는 박수까지 치면서 폭소했다.하지만 곧 얼굴을 구겼다. “따뜻한 척하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다들 억울한 척, 죄 없는 척. 불쌍한 내 동생......”“너야! 네년이 내 동생을 죽였어!”제이크는 서인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아!”서인아는 끌려가면서 아파 비명을 질렀다. “그거 놔!”임유환은 낮게 으르렁거렸다.“이 여자가 아파하니까 또 가슴은 아픈가 보지?”제이크는 임유환의 벌게진 눈시울을 보면서 비열하게 웃었다. “근데 이미 이 지경이 됐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니?”“오늘 말이야, 네놈이 죽기 전에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게 더럽혀지는지 똑똑히 두고 봐!”그러고는 서인아의 셔츠를 찢으려 손을 뻗었다.그가 보기에 임유환은 이미 병신이 된 몸이었다.해서 경계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쿵!서인아의 몸에 제이크의 손이 닿으려 할 때 굵은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임유환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뭐?!”제이크의 동공이 잔뜩 수축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간신히 움직이는 것도 기적인 저 몸이 어떻게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거지?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임유환을 향해 총을 들어 올렸다.슉!제이크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임유환이 번개같
한방에 제이크를 쓰러뜨린 임유환도 조금 힘에 겨워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아까 순간 폭발시킨 진기 때문에 피가 더 많이 흘렀다. 이제 시야가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그는 얼른 서인아를 풀어주었다.“유환아!”서인아는 벌떡 일어나 임유환에게 안겼다.“스읍!”상처를 건드리자 임유환은 너무 아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서인아는 그제야 임유환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얼른 거리를 두었다. “미안해......”죄책감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이 바보야.”임유환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내 제이크에게로 날카롭게 시선을 돌렸다.“일단 옆으로 가 있어. 저 자식 아직 안 죽었어.”서인아는 심장이 두근댔다.임유환이 익숙한 듯 바보라고 부르자 마치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혹시... 뭘 알고 있는 건가?그녀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는데 임유환이 이미 절뚝거리며 제이크에게로 다가갔다.제이크는 동공이 풀리기 시작했다.숨이 거의 끊어지고 있었다.하지만 무언가를 쥐고 있는듯 왼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임유환이 인상을 찌푸렸다.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은침으로 제이크의 왼손을 명중했다.신경에 손상을 입자 꽉 쥐었던 주먹이 확 풀어졌다.손안에 쥐고 있던 건 아주 작은 빨간색 버튼이었다.빨간색 불빛이 계속 깜박거리고 있었다.“안돼!”임유환의 눈이 커다래졌다.그는 이것이 폭탄 장치임을 한눈에 눈치챘다.이 자식이 벌써 장치를 가동시켰다!이 건물에 진작부터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임유환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추측이었다.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마지막 남은 기운을 끌어내 서인아의 앞으로 확 달려갔다.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서인아를 품에 안아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쾅!이때, 임유환보다 한발 먼저 아래로부터 굉음이 울려퍼졌다.건물 전체가 눈 깜짝할 새에 무너졌다.임유환도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만약 지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면 이런 폭발쯤이야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하지만
“너... 피 났어?”심장이 쿵 내려앉은 서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살짝 까진 거야, 별거 아냐.”임유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유환아, 거짓말하지 마...”서인아는 심장이 아려왔다.아까 몸에 총을 두 번이나 맞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안고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별 일 아닐 리가 없었다.“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임유환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 챙겼다고. 그렇게 도도했던 아가씨는 어디 갔대?”“지금 장난칠 때 아니잖아...”서인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찼다.“장난 아니고, 난 그냥, 콜록...”말이 끝나기 전에 임유환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했다.땅을 짚고 있던 팔도 힘이 풀려 하마터면 등 위의 바위에 깔릴 뻔했다.“임유환!”서인아는 겁에 질렸다.피가 느껴졌다.임유환이 피를 토했다!“괜찮다고 했지......”임유환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들어 올려 몸 아래 있는 서인아에게 공간을 내주었다.서인아는 이 모든 걸 느꼈다.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칠흑 같은 어둠 속, 임유환의 얼굴도, 주위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임유환이 자신을 위해 모든 걸 짊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임유환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진작에 깔려 죽었을 것이다.“왜... 왜 날 구했어? 내가 그럴 가치가 있었어?”서인아는 감정이 격해졌다.눈물이 차올랐다.“너 지금 되게 시끄러워... 이따 사람들 오기전까지 쓸데없이 힘 빼지 마.”임유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의식이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서인아, 잘 들어. 혹시나 내가 힘들어서 잠들기라도 하면 시끄럽게 땍땍대지 말고 나중에 구조대원 오면...”“아니야! 우리 둘 다 구조될 거야!”서인아는 임유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겁에 질렸다.하지만 임유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임유환, 내 말 들려?”서인아는 당황스러웠다.“괜찮아?”“대답해! 정신 차려!”“임유환!”서인아는 다급하게
“서인아, 솔직하게 말해봐. 7년 전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야?”임유환은 힘들게 입술을 달싹였다.목소리는 갈라지다 못해 바람이 불면 사라질 것 같았다.“7년 전에?”서인아는 멍해졌다.곧 임유환이 뭘 얘기하는지 깨달았다.그녀의 코끝이 찡해졌다.지금까지 그때의 일을 궁금해하다니.내가 임유환한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이 멍청이... 7년 전에 전부 다 얘기했잖아!”서인아는 진실을 묻어두기로 했다.“하하, 그래? 다 내 착각이었나 보네.”임유환이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역시, 숨겨진 사정 따위 없었네.“이 바보야, 이런 걸 왜 물어보는데! 내가 널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데, 왜 나 살려주는데!”서인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말과 달리 눈꼬리에서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하지만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임유환은 서인아의 말투에 담긴 진심을 전혀 알아챌 수가 없었다.“하하, 그냥 멍청이 할래.”“한 번 더 속는 셈 치지 뭐. 이번이... 아마 마지막일거야...”임유환의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어느샌가 눈을 꽉 감고 있었다.진짜 너무 피곤해서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아니야! 마지막 같은 소리 하지마!”“임유환, 정신 차려! 앞으로 계속, 계속 멍청이 해!”“죽지 말라고, 내 말 들려? 임유환!”서인아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절대 임유환이 자도록 해서는 안 된다.만약 잠에 든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여전히 제멋대로야, 서인아.”임유환이 쓸쓸히 웃었다.목소리는 가늘어지다 못해 끊어질 것 같았다.“넌 정말 첫 만남 때부터 귀찮았었지...”“그래도,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어...”“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목소리가 멈췄다.서인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임유환, 임유환!” 그녀는 크게 불렀다.“응...”임유환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다잡고 말을 이어갔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난 너한테 아무 관심 없었다? 얼마나 차가운
“여긴... 어디지?”“죽은 건가...?”잔뜩 뒤엉킨 공간 안에서 임유환의 작은 목소리만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그의 몸은 풍선처럼 아무 무게 없이 허공에 떠다니고 있었다.눈을 떠보려고 애썼지만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약간의 틈조차 만들 수 없었다.그렇게, 의식만 점차 뚜렷해질 뿐이었다.갑자기 어느 순간.눈앞의 공간이 물결처럼 여울이 일더니 그의 몸을 감쌌다.어두컴컴하던 세상이 확 밝아지면서 한 빌딩의 옥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24층이나 되는 고층빌딩이었다.여긴 바람이 아주 셌다.그리고, 어쩐지 익숙한 곳이라는 것도 알아챘다.바로 그의 어머니가 뛰어내렸던 곳이었다!왜... 여기 있는 거지?임유환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던 차에, 기억 속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엄마!”임유환이 불렀다.하지만 그 뒷모습은 그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그녀는 임유환을 등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옥상의 끝으로 걸어갔다.임유환은 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에 동공이 확 커졌다.15년 전의 그날이 떠올랐다.어머니는 자기 옥팔찌를 건네주고는 잘 살라며 이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렸었다.지금, 그날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엄마!”임유환은 엄마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크게 소리쳤다.하지만 헛수고였다.그녀는 한 발 한 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유환아, 엄마 먼저 가. 넌 꼭 무사해야 해.”그리고 뛰어내리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엄마, 가지 마!”임유환이 처절하게 소리쳤다.15년 전의 비극이 한꺼번에 몰려와 죽을 힘을 다해서 막으려고 했다.하지만 어떻게 용을 써봐도 끝까지 제자리걸음이었다.순간.광풍이 일면서 온 하늘이 깜깜해졌다.미모의 여성은 임유환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훌쩍 뛰어내렸다.“엄마!”또 다시 이 사고를 목격한 임유환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엄마!”그 시각.S시 제일병원, 302호 중환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