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같이 들어가 보겠니?” 가은은 당연히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그럼요.”“그래... 그럼 들어가 보자꾸나.” 가은은 대답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는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다. ‘가은이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두 사람이 심리 진료실에 들어서자, 검사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미희가 그녀들을 마중했다.“마침 오셨네요. 조금만 늦었으면 이서를 보지 못했을 거예요.” 이 말은 들은 가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이먼 스웨이를 재촉했다. “엄마, 어서 들어가 봐요.” 두 사람이 즉시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실로 들어간 가은은 침대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물을 마시고 있는 이서를 보았고, 순식간에 안색이 굳어졌다. ‘낯빛이 왜 저렇게 좋아? 도대체 어딜 봐서 욕을 당한 사람이냐고!’ “도대체 어떻게...”격동된 채 이서를 향해 나아가던 가은이 누군가의 살벌한 시선을 느끼고 바삐 말을 돌렸다. “괜찮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지만 화가 잔뜩 난 가은은 이서의 숨통을 조여 버리고만 싶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많은 여자를 농락했던 그 변태남이 윤이서는 풀어줬다는 거야?’ 이서를 바라보던 가은이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하이먼 스웨이가 따스하게 이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서야, 괜찮은 거야?”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앞의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지환을 바라보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이셔.”지환이 말했다. 하이먼 스웨이가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이서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상황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스웨이 여사님, 별일 아니에요. 이서의 얼굴은 봤으니까 저랑 잠시 나가서 이야기 좀 해요.” 하이먼 스웨이가 배미희의 손에 이끌려 검사실 밖으로 나갔다. 지환이 여전히 그
같은 시각, 이서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이먼 스웨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하염없이 중얼거리던 하이먼 스웨이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배미희가 그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어쩌려는 거예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가쁜 호흡을 내쉬는 하이먼 스웨이는 분명 화가 난 듯했다.“하 서방한테 가서 좀 따져야겠어요, 도대체 그동안 이서를 어떻게 돌본 건지!” 배미희가 얼른 하이먼 스웨이의 입을 막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배 여사, 진정하세요.” 배미희가 의아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와 하이먼 스웨이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기에, 그녀는 하이먼 스웨이가 어떤 성격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스웨이 여사가 이렇게 추태를 부린 적이 있었던가?’ “우선 좀 진정해야 할 것 같아요.”배미희가 말을 덧붙였다.“스웨이 여사까지 나서면 지환이는 더욱 고통스러워질 거예요.”하이먼 스웨이는 고통스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몇 번이나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에야 비로소 냉정함을 되찾았다.“정말이지 이서의 운명은 너무 기구한 것 같아요. 도대체 언제쯤이면 하늘이 이서의 편을 들어줄까요?” “이서는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배미희가 하이먼 스웨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제가 보기에 이서는 운을 타고난 아이예요.”“이서는 반드시...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하이먼 스웨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 중심가, 높고 큰 건물 안.책상에 다리를 얹은 하지호가 박장대소하며 화가 치밀어 오른 박예솔을 바라보았다. “봐, 내가 분명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나저나, 지환이가 제수씨를 위해서 어둠의 세력에게까지 손을 뻗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내가 뒤에서 칼을 휘두를까 봐 두렵지는 않았던 걸까?” “감히 겁도 없이!”얼굴이 몹시 일그러진 예솔이 짙은 경고의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빠, 경고하지 않은 나를 탓하지는
그리고 M국에서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인재였다. ‘반드시 마땅한 방법을 찾아 윤이서를 없애버릴 거야.’...이씨 가문의 고택에 돌아온 배미희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언아, 이서랑 지환이한테 무슨 일 있니?”그녀가 마당에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서가 지환이한테 달라붙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상언이 우스꽝스럽다는 듯 말했다.“지환이가 이서 씨한테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나 봐요.”“그래? 하지만 지환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서잖니?”“네, 하지만 지환이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잖아요.” “왜?”배미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엄마, 벌써 잊으신 거예요?” 상언이 이서와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감개무량해 했다.“이서 씨한테 지환이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하 어르신의 죽음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환이를 떠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했던 거고요.”“그래서 다른 사람 같은 경우에는 천천히 언급해서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지환이만은 그럴 수 없어요. 일단 지환이를 언급하는 거 자체가 이서 씨에게는 큰 자극이 될 테니까요.”이 말을 마친 상언이 이전에 이서가 하은철로 인한 자극을 받은 일을 떠올렸다. ‘그 자식도 분명 이서 씨한테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이서 씨를 자극하다니,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어.’ ‘그 자식은 지환이가 이서 씨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만약 그 자식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났더라면, 뼈도 추릴 수 없었을 테니까.’ ‘이제 하은철 그 자식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건 시간 문제야.’‘이서 씨는 지금 지환이랑 같은 방을 쓸 수 있고, 지환이도 조만간 가면을 벗을 수 있게 될 테니까.’상언은 이 비운의 두 남녀가 빨리 화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런 상언의 마음이 이서에게 닿았던 것일까.
임하나 역시 이서가 괴한에게 습격당한 일을 알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상언이 아닌 임현태였다. 현태는 진실한 사람이었기에, 소희의 몇 마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소희는 즉시 하나에게도 알려주었다. 곧 이 소식은 단톡방에 보내졌으며,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은 즉각 이서를 보러 가려 했으나, 하나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안 돼, 절대 안 돼, 소희야, 너는 이서를 대신해서 회사를 잘 관리해야 하잖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돼.][그리고 나나야, 아무리 기억을 잃기 전의 이서가 너를 국제적인 유명한 스타로 만들려고 했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 계획이 보류된 상황이잖아. 너도 네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아. 마침 우리 회사에 올해 M국에 갈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내가 회사에 잘 말해볼게.]소희와 나나는 마침내 이성을 되찾을 듯했다.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하나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하나의 마음은 확실히 허전한 듯했다. 상언이 떠난 이후로, 그녀는 그와 연락한 적이 없었다. ‘설마... 이 선생님이 벌써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하나는 회사에 M국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는데, 그 프로젝트는 대단한 주목을 받는 것이었기에, 회사는 적극적인 하나의 태도에 기쁨을 표하며 즉시 허가를 내려주었다.하나는 곧바로 이 소식을 이서에게 알렸다. 물론, 그녀는 이서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출장을 오는 것이었지만, 이서는 그녀가 온다는 것 자체에 큰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요 며칠...’‘옆에 앉은 H선생님께 답답함을 느끼던 참이었어.’‘내 곁을 맴돌지 말라는 분명한 의견을 밝혔는데도 전혀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신다고.’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지환과 대화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오늘은 배미희가 주최한 바비큐
“이봐, 내가 다 설명할게.”“H선생님.”이서의 목소리가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 있던 지환을 끌어올렸다. 그가 이서를 바라보았다. “왜?”“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 손님들을 좀 보시라고요, 간간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어요. 제가 그때마다 달려가서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사이코패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요.”“말은 하지 않지만, 저 손님들의 눈빛에서 다 느낄 수 있단 말이에요.”“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너만 잘 지내면 되는 거야.” 입술을 오므린 이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H선생님은요? H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지환은 멍해지는 듯했다. “너... 너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과 많이 닮았어.” 지환의 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서의 두 번째 말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그의 귓전을 스쳤다. “그래서 저를 그 여자의 대역으로 삼은 거예요?” 사실, 요 며칠 동안 이서는 생각을 거듭했다.‘H선생님은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친절을 베푸시는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딱 하나뿐이야.’‘잃어버렸다던 그 여자와 내가 아주 닮은 거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래서 모든 감정을 나한테 대입하셨던 거라고.’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하자, 이서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으며, 의심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기억까지 잃은 상황이잖아.’ ‘혹시... 내가 이 비밀을 알고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니었을까?’‘그런 게 아니라면, 이전의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유독 작년 한 해 동안의 일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영 이상하잖아.’‘그래,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H선생님을 알게 되면서부터야.’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그마치 1년간 다른 사람의 대역으로 살았다는 게 너무 억울해.’시무룩한 이서의 얼굴을 본 지환은 어
지환의 대답은 이서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선물을 든 하이먼 스웨이와 심가은은 배미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배미희는 오늘 손님을 초대하여 바비큐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전화를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가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자, 거절하기 어려워 승낙한 것이었다. ‘나는 스웨이 여사가 아니라 심가은 저 여자한테만 악감정이 있는 거야.’‘그런데 오늘은 꽤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네?’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배미희의 시선을 느낀 가은이 간신히 표정 관리를 했다.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알았으나, 결코 동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말씀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 불과 며칠 전에 그런 일을 당했는데, 이씨 가문이 윤이서가 외출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지. 윤이서의 현재 상황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써서 윤이서를 상대할 수 있겠어?’‘게다가 윤이서는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 최근 1년간 일어난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해. 즉,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우선 윤이서한테 살갑게 다가가서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하면 윤이서를 한 방에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수많은 꿍꿍이를 숨긴 가은이 배미희와 인사를 나누자, 이서와 지환 역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순간, 가은의 시선이 가면을 쓴 지환에게 향했다. 지환은 가면 따위로 감출 수 없는 귀티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내뿜고 있었다.가은이 질투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윤이서는 참 운도 좋지. 지엽 씨와 하은철로도 모자라 지금은 또 가면을 쓴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이씨 가문에 초대받을 정도면... 신분이 꽤 높은 남자인 것 같은데...’ ‘윤이서는 결혼도 했는데, 여전히 많은 남자가 쫓아다니잖아? 정말 복도 많아.’“이서야, 나야, 하이먼 스웨이.”이서를 바라보는 하이먼 스웨이의
“기억을 잃은 이서한테 이전의 일을 말해서는 안 돼.”하이먼 스웨이가 말했다.“어떤 일이 이서를 자극할지 모르거든.”심가은은 이를 듣자마자 눈을 돌렸다.“그렇군요, 죄송해요, 기억을 잃은 사람을 만난 건 저도 처음이라...” 배미희가 가은을 힐끗 보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은근슬쩍 이서의 앞에 서서 그녀를 보호했다.바로 이때, 그들에게 다가온 상언이 말했다.“이야기는 좀 나누셨어요?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상황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이서를 끌며 말했다.“이서야, 우리 바비큐나 먹으러 가자.”“네.”이서가 배미희를 따라 중간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하이먼 스웨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 하이먼 스웨이 역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배미희와 모녀처럼 지내는 이서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찡한 듯했다. ‘왠지 내 딸을 빼앗긴 것만 같아.’‘하지만 내 딸은 지금 내 곁에 있는데...’ “우리도 가자.”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을 불렀으나, 뒤에 있는 지환에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저렇게 차려입은 걸 보면, 알아봐 주길 원치 않는 것 같아.’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서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배미희 여사님, 혹시 저 예쁜 아가씨가 이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인 거 아니에요?” 이서가 예쁘다는 말을 들은 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니에요, 제가 그런 복이 어디 있겠어요.”배미희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리고 제 못난 아들은 이서에게 어울리지도 않아요. 이서야, 내 말이 맞지?” 이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 식사 한 끼의 위력 때문인지 배미희는 그녀를 언급할 때마다 자부심이 가득한 말투를 하고 있었고, 이는 이서를 쑥스럽게 했다. “네?”사람들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했다.“이렇게 훌륭한 이 선생님이 저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는다니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설마, 공주는 아니죠?”어떤 나라는 여전히 군주제를 시행하고
심가은은 이전에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을 때, 늘 이지숙과 함께 고스톱을 쳤기 때문에 고스톱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가은은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으나, 이따가 또 모두 이서를 칭찬할까 봐 두려웠다.그뿐만 아니라, 이서가 고스톱을 칠 줄 모르는 이상, 고스톱에서만큼은 그녀를 짓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 하이먼 스웨이는 매우 기뻤다.‘가은이가 점점 더 철이 드는구나.’ “그래, 우리 넷이 한 판 해보자꾸나.” 배미희 역시 동의했다.“그러시죠.” 네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 가은이 말했다.“저도 잘 치지는 못해요. 엄마, 그리고 여사님, 조금은 봐주셔야 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이길 거야.’ 첫 번째 판이 곧 시작될 것이었다. 패를 섞으려던 찰나, 지환을 본 세 사람이 그에게 이서의 뒤에 의자를 놓고 앉으라고 했다. 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패를 꼭 잡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지환의 숨결이 자신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어서 도망갈 곳도 없어.’이서는 억지로 숨을 참아야 했다. 잠시 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가면 아래에 감춰졌던 지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H선생님.”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약간의 애원을 의미를 띠고 있었다.“조금만 뒤로 가주시겠어요?” ‘원래 고스톱은 칠 줄도 모르는 데다가, H선생님까지 보고 계신다면, 분명 빈털터리가 되고 말 거야.’속눈썹을 살짝 늘어뜨린 지환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이서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바라보았다.‘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야.’ ‘이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거였는데...’ ‘이런 이서의 모습은 나의 모든 근심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았지.’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지환이 패가 놓인 테이블을 한 번 보았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처음에 그 약속을 할 때, 왜 이런 상황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환은 그런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조용히 말했다. “술집에 가고 싶으면, 가자.” 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 보고 나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는 밤거리를 좀 걷는 게 어때요? 한밤중에 조용한 거리를 걷는 거, 진짜 재밌거든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서는 스스로 신이 나서 말했다.“아마 해본 적 없겠죠? 진짜 재밌어요. 가끔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더 재밌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누군가가 정적을 깨는 것 같다니까요?” 바로 그때, 지환이 이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같이 해줄게. 오늘 밤 집에 안 가는 것까지도.”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고말고. 뭐가 문제겠어?” 어둠 속에서 지환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이서는 괜히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집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될 상황을 떠올리니, 이서의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서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두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며 11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저히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지환과 단둘이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스스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
“왜 굳이 여기서 먹어야 하는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식당 내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테리어였다. 이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환이라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라, 훨씬 더 좋은 7성급 호텔에서 우아한 분위를 즐기며 식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호텔의 고급스러움은 이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식당, 속설이 하나 있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가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라도 있는 듯, 지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밥을 먹은 부부는, 가정법원 앞까지 가서 이혼하려고 했던 사이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이서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창밖만을 바라보았다.이서는 그런 지환을 흘겨보았지만,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이 살짝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비서님께 미리 예약하라고 하지 그랬어요.”그 정도는 지환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여기서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지.’지환에게는 매 순간이 아까운 시간일 터였다. 지환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천한테 예약하라고 시키면 정성이 부족한 거잖아. 정성이 부족하면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단 말이야.”이서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정성을 들여도 안 통하면요?” 지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안 통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우리 둘이 다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아무리 바보 같아 보여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하지환 씨...” 이서가 무언가 더 말하려던 순간, 지환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서야,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하도훈 문제가 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지환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의 귓가에 들려오자, 이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빛나는 지환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지환이었다. 지환은 이 세상에 내려온 최고의 선물과 같았는데, 한때 그를 가졌던 이서에게도 그것은 분명 큰 행운이었다.“‘그날 내가 하지환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복수 계획에 동의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서의 조용한 목소리에 지환이 잠시 이서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글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 이서는 왠지 지환의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뭔데요?” 지환은 이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사랑하게 됐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지.” 그 한마디에 이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서는 미칠 듯한 두근거림을 감추려 애써 지환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있는 거예요?” 지환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뿐이잖아. 물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이제 두 번째 장소로 가자.”“어디로 갈 건데요?” 이서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물었지만, 지환은 대답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이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고,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는 지환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가정법원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와 이혼하러 온 듯한 부부들을 보며 이서가 말했다. “덕분에 생각났네요.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지환은 안전벨트를 풀던 손을 멈추고 이서를 바라보았다.“혹시 지금 내려서 이혼하자는 건 아니지?”이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왜 이미 고이서의 정보를 손에 넣고도 나한테 바로 알리지 않은 거예요?” 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지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료를 받았을 때는 어떤 카페의 근처였어. 그런데 마침 네가 소지엽을 만나러 가는 걸 보게 된 거지.”“하지환 씨가 밖에 있었다고요?” 이서가 놀라며 되물었다. ‘그럴 수가 있다고?’그 말은 곧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대에 고이서의 자료를 입수했다는 얘기였다. ‘뭔가 이상한데...’ 이서는 지환을 보면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지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이서가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야 뭔가 눈치챈 듯 미소를 지었다.“내가 이겼다는 거야?” 이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시간을 계산해 봤는데, 하지환 씨는 구태우 씨보다 하루 늦게 고이서를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을 계산해 보면 하지환 씨가 이긴 게 확실한 셈이죠.”이서는 괜히 혼자서 이리저리 고민했던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럼...”지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네 시간은 내 거라는 거야?” 이서는 그 말이 묘하게 들렸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든 해도 돼?” 이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뭘 하려고요?” 지환은 이서를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내가 뭘 할 것 같은데?” 이서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순한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고 했다. 지환은 이서의 표정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지환은 이내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환한 웃음을 지었다.“이서야, 혹시...” “그런 거 아니에요!”이서는 빠르게 부인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수상쩍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맞춰줄 수 있어.”지환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자, 이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것은 지환이 이서에게 보낸 고이서에 관한 자료였다.‘이게 왜 열린 거지?’이서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왜 그래?]이서의 목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자, 지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서의 시선은 시종일관 고이서의 자료에 머물러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고이서의 자료를 보는 중인데, 다 보고 나서 다시 전화할게요.”이서는 전화를 끊고 자료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자료의 내용은 고이서가 제공한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이서는 5살 때 화재 사고를 겪은 후 해외로 보내졌다.하지만 지환이 보내온 자료에는 더욱 상세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겨우 5살이던 고이서는 하룻밤 사이에 해외로 보내졌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이 차례로 퇴원하게 되었다. 딸의 치료 기간 동안, 성지영과 윤재하는 각기 다른 시점에 귀국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후 처음으로 향한 목적지가 모두 보육원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매번.보육원 쪽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고이서를 대신할 아이를 구하러 간 것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이서였다. ‘그때 윤수정이 내가 윤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구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처음에 하은철이 이서와 결혼한 이유는 그녀의 신장을 위한 것이었는데, 윤재하와 성지영은 하은철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서와 하은철이 결혼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도우려 했다. ‘하긴, 나는 윤씨 가문에 있어서 시집을 통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할 도구일 뿐이었어. 누가 그런 도구한테 큰 관심을 쏟으려 했겠어?’‘윤재하가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씨 가문은 윤씨 가문에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윤씨 가문은 줄곧 재기하지 못했다.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윤씨 가문 사람들한테 배신당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