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내가 다 설명할게.”“H선생님.”이서의 목소리가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 있던 지환을 끌어올렸다. 그가 이서를 바라보았다. “왜?”“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 손님들을 좀 보시라고요, 간간이 우리를 쳐다보면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어요. 제가 그때마다 달려가서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사이코패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고요.”“말은 하지 않지만, 저 손님들의 눈빛에서 다 느낄 수 있단 말이에요.”“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너만 잘 지내면 되는 거야.” 입술을 오므린 이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H선생님은요? H선생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지환은 멍해지는 듯했다. “너... 너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과 많이 닮았어.” 지환의 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이서의 두 번째 말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그의 귓전을 스쳤다. “그래서 저를 그 여자의 대역으로 삼은 거예요?” 사실, 요 며칠 동안 이서는 생각을 거듭했다.‘H선생님은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친절을 베푸시는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딱 하나뿐이야.’‘잃어버렸다던 그 여자와 내가 아주 닮은 거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래서 모든 감정을 나한테 대입하셨던 거라고.’ 이러한 가능성을 생각하자, 이서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으며, 의심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기억까지 잃은 상황이잖아.’ ‘혹시... 내가 이 비밀을 알고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니었을까?’‘그런 게 아니라면, 이전의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유독 작년 한 해 동안의 일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영 이상하잖아.’‘그래, 내가 잃어버린 기억은 H선생님을 알게 되면서부터야.’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그마치 1년간 다른 사람의 대역으로 살았다는 게 너무 억울해.’시무룩한 이서의 얼굴을 본 지환은 어
지환의 대답은 이서의 마음을 세게 흔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선물을 든 하이먼 스웨이와 심가은은 배미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배미희는 오늘 손님을 초대하여 바비큐 파티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전화를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가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자, 거절하기 어려워 승낙한 것이었다. ‘나는 스웨이 여사가 아니라 심가은 저 여자한테만 악감정이 있는 거야.’‘그런데 오늘은 꽤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네?’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배미희의 시선을 느낀 가은이 간신히 표정 관리를 했다.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보러 간다는 것은 알았으나, 결코 동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말씀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 불과 며칠 전에 그런 일을 당했는데, 이씨 가문이 윤이서가 외출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지. 윤이서의 현재 상황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써서 윤이서를 상대할 수 있겠어?’‘게다가 윤이서는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 최근 1년간 일어난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해. 즉,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우선 윤이서한테 살갑게 다가가서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하면 윤이서를 한 방에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수많은 꿍꿍이를 숨긴 가은이 배미희와 인사를 나누자, 이서와 지환 역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순간, 가은의 시선이 가면을 쓴 지환에게 향했다. 지환은 가면 따위로 감출 수 없는 귀티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내뿜고 있었다.가은이 질투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윤이서는 참 운도 좋지. 지엽 씨와 하은철로도 모자라 지금은 또 가면을 쓴 남자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이씨 가문에 초대받을 정도면... 신분이 꽤 높은 남자인 것 같은데...’ ‘윤이서는 결혼도 했는데, 여전히 많은 남자가 쫓아다니잖아? 정말 복도 많아.’“이서야, 나야, 하이먼 스웨이.”이서를 바라보는 하이먼 스웨이의
“기억을 잃은 이서한테 이전의 일을 말해서는 안 돼.”하이먼 스웨이가 말했다.“어떤 일이 이서를 자극할지 모르거든.”심가은은 이를 듣자마자 눈을 돌렸다.“그렇군요, 죄송해요, 기억을 잃은 사람을 만난 건 저도 처음이라...” 배미희가 가은을 힐끗 보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은근슬쩍 이서의 앞에 서서 그녀를 보호했다.바로 이때, 그들에게 다가온 상언이 말했다.“이야기는 좀 나누셨어요?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상황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이서를 끌며 말했다.“이서야, 우리 바비큐나 먹으러 가자.”“네.”이서가 배미희를 따라 중간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하이먼 스웨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 하이먼 스웨이 역시 이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배미희와 모녀처럼 지내는 이서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찡한 듯했다. ‘왠지 내 딸을 빼앗긴 것만 같아.’‘하지만 내 딸은 지금 내 곁에 있는데...’ “우리도 가자.”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을 불렀으나, 뒤에 있는 지환에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저렇게 차려입은 걸 보면, 알아봐 주길 원치 않는 것 같아.’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서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배미희 여사님, 혹시 저 예쁜 아가씨가 이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인 거 아니에요?” 이서가 예쁘다는 말을 들은 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니에요, 제가 그런 복이 어디 있겠어요.”배미희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그리고 제 못난 아들은 이서에게 어울리지도 않아요. 이서야, 내 말이 맞지?” 이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 식사 한 끼의 위력 때문인지 배미희는 그녀를 언급할 때마다 자부심이 가득한 말투를 하고 있었고, 이는 이서를 쑥스럽게 했다. “네?”사람들은 호기심이 발동한 듯했다.“이렇게 훌륭한 이 선생님이 저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는다니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설마, 공주는 아니죠?”어떤 나라는 여전히 군주제를 시행하고
심가은은 이전에 심씨 가문의 고택에 있을 때, 늘 이지숙과 함께 고스톱을 쳤기 때문에 고스톱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가은은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으나, 이따가 또 모두 이서를 칭찬할까 봐 두려웠다.그뿐만 아니라, 이서가 고스톱을 칠 줄 모르는 이상, 고스톱에서만큼은 그녀를 짓밟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 하이먼 스웨이는 매우 기뻤다.‘가은이가 점점 더 철이 드는구나.’ “그래, 우리 넷이 한 판 해보자꾸나.” 배미희 역시 동의했다.“그러시죠.” 네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 가은이 말했다.“저도 잘 치지는 못해요. 엄마, 그리고 여사님, 조금은 봐주셔야 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이길 거야.’ 첫 번째 판이 곧 시작될 것이었다. 패를 섞으려던 찰나, 지환을 본 세 사람이 그에게 이서의 뒤에 의자를 놓고 앉으라고 했다. 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패를 꼭 잡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지환의 숨결이 자신의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어서 도망갈 곳도 없어.’이서는 억지로 숨을 참아야 했다. 잠시 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가면 아래에 감춰졌던 지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H선생님.”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약간의 애원을 의미를 띠고 있었다.“조금만 뒤로 가주시겠어요?” ‘원래 고스톱은 칠 줄도 모르는 데다가, H선생님까지 보고 계신다면, 분명 빈털터리가 되고 말 거야.’속눈썹을 살짝 늘어뜨린 지환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이서의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바라보았다.‘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야.’ ‘이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거였는데...’ ‘이런 이서의 모습은 나의 모든 근심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았지.’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지환이 패가 놓인 테이블을 한 번 보았
“가은 씨, 정말 고스톱 칠 줄 모르는 거 맞아요?”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이서는 패를 만지는 것만 봐도 미숙하다는 걸 알 수 있어.’‘하지만 심가은은...’가은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패를 섞으며 말했다.“그럼요, 여사님.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배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고, 또다시 이서의 차례가 되었다.그녀는 섣불리 패를 던지지 않았으며 패를 주시했다. ‘방금 그 한 판으로 백만원을 잃었어.’ ‘게다가 그 백만원은 H선생님이 지불하실 거라고.’ ‘배미희 여사님께서 이렇게 통이 크실 줄은 몰랐어. 절대, 절대 또 지면 안 돼.’ “긴장할 필요 없어.”지환이 이서의 패를 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서가 입술을 깨물었다.“너무 많은 돈을 빚지면 갚을 수도 없단 말이에요.” “갚을 필요 없어.”지환의 목소리는 대단히 낮았다. 이서는 몇 번이나 그가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하는 줄 알았다. “H선생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이서는 지환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럼 이겨야겠네.”뒤에서부터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서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H선생님도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나?’‘고스톱을 칠 줄도 모르는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지환이 손가락으로 이서의 옷자락을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집중해, 모두 너만 보고 있잖아.”고개를 돌린 이서의 눈에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아무렇게나 패를 던지려 하자, 누군가가 등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지환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손이 홀린 듯 두 번째 패로 향했다. “아이고, 이번에는 먹을 게 없네.” 약간의 실망감에 빠진 배미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
배미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작 이런 일로 이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로 들리는데... 아직도 이서가 똑똑하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는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은이 얼른 상황을 수습하고 나섰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사모님, 계속 게임 하시죠.”‘과연 다음 판에도 운이 좋을지 한번 보자고!’ 이서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가은의 말에 동조했다. “사모님, 저는 괜찮으니까 계속 게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세 번째 판, 네 번째 판 역시 이서가 승리를 거두었다.오백만 원을 잃은 가은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지환에게 향했다. ‘한 번은 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은 말이 안 돼. 분명히 무슨 속임수를 썼을 거야.’ 가은이 잔꾀를 내었다.“저기... 혹시 물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어요?”그녀는 말을 마칠 무렵 윙크를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지환의 눈동자는 대단히 차가웠다. 가은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녀는 지환이 거절할 줄 알았으나,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다소 놀란 듯했다.‘드디어 나의 매력이 통한 건가?’가은은 은근히 기뻐했으나, 이서는 몰래 입술을 오므렸다. “이서 씨, 이제 이서 씨 차례예요.” 가은이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서를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가은을 한 번 보았는데, 가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분명 친절함이 아닌 조롱을 지닌 것이었다. 사실, 이서는 처음부터 가은이 자신을 향한 악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따님인데...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직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한테 적대적이었어.’ ‘오해가 아니었던 거라고.’고개를 숙이고 패를 보던
심가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서가 말했다.“제가 이겼네요.” 가은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서가 패를 하나하나 뒤집어 가은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를 확인한 가은이 숨을 내쉬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요! 고스톱은 칠 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방금 배운 거예요.” “그럼 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서 씨를 가르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서 배웠다는 거냐고요!”“왜 배워야지만 고스톱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관찰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서가 우습다는 듯 가은을 바라보았다.“오늘만 해도 벌써 여러 판을 쳤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요령 정도는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H선생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H선생님은 첫 번째 판이 끝나자마자 모든 규칙을 파악하셨을 테니까.’ “이번 판은 무효예요, 다시 해야 한다고요!” 가은은 여전히 이서가 운이 좋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녀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은아...”하지만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재촉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요, 계속!”상황을 지켜보고 싶던 배미희가 가은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이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하이먼 스웨이는 계속해서 고스톱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판 역시 이서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녀의 뒤에는 지환이 없었다. 가은은 더 이상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이서야, 너 정말 똑똑하구나.”배미희가 칭찬했다.“겨우 몇 판 만에 모든 규칙을 알아차리다니!”다른 테이블의 사람들 역시 이서의 총명함에 매료된 듯했다. 이서가 연거푸 승리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분분히 이서를 칭찬했다. “이렇게 금방 고스톱을 배우다니, 윤이서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정말
이서가 자리를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졌다. 배미희 역시 더 이상 고스톱을 치고 싶지 않았기에, 하이먼 스웨이를 끌고 문밖의 넓은 잔디밭에 가서 햇볕을 쬐었다. “태양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이맘때의 태양은 더 따스하죠.” 배미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이먼 스웨이가 묵묵히 배미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배미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이서는 말이에요, 줄곧 나에게 따뜻한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어요. 그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따스함을 건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죠.”“맞아요.”하이먼 스웨이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나는 한동안 이서가 제 딸이었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아쉽게도 우리의 인연은 깊어질 수 없었지만요.”배미희가 벤치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좌우를 살핀 그녀가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스웨이 여사, 우리 두 사람, 친구 맞죠?” 배미희의 눈빛에 비친 진지함을 알아차린 하이먼 스웨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요.”‘내가 배 여사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하 서방 덕분이야.’ 애초에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와 함께 책의 판권에 서명했으며, 영화 발표회 때도 그녀의 홍보를 도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 M국에 온 하이먼 스웨이가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지환이 특별히 그녀에게 배미희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하이먼 스웨이와 배미희는 친구가 되었다. “그래요, 스웨이 여사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배미희는 우정을 걸고 말을 이어 나갔다.“스웨이 여사도 오늘 봤겠지만, 가은 씨가 이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가은 씨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