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 씨, 정말 고스톱 칠 줄 모르는 거 맞아요?”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이서는 패를 만지는 것만 봐도 미숙하다는 걸 알 수 있어.’‘하지만 심가은은...’가은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패를 섞으며 말했다.“그럼요, 여사님.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배미희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고, 또다시 이서의 차례가 되었다.그녀는 섣불리 패를 던지지 않았으며 패를 주시했다. ‘방금 그 한 판으로 백만원을 잃었어.’ ‘게다가 그 백만원은 H선생님이 지불하실 거라고.’ ‘배미희 여사님께서 이렇게 통이 크실 줄은 몰랐어. 절대, 절대 또 지면 안 돼.’ “긴장할 필요 없어.”지환이 이서의 패를 보며 말했다.“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서가 입술을 깨물었다.“너무 많은 돈을 빚지면 갚을 수도 없단 말이에요.” “갚을 필요 없어.”지환의 목소리는 대단히 낮았다. 이서는 몇 번이나 그가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하는 줄 알았다. “H선생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이서는 지환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럼 이겨야겠네.”뒤에서부터 지환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서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H선생님도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나?’‘고스톱을 칠 줄도 모르는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지환이 손가락으로 이서의 옷자락을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집중해, 모두 너만 보고 있잖아.”고개를 돌린 이서의 눈에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아무렇게나 패를 던지려 하자, 누군가가 등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지환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손이 홀린 듯 두 번째 패로 향했다. “아이고, 이번에는 먹을 게 없네.” 약간의 실망감에 빠진 배미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
배미희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작 이런 일로 이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로 들리는데... 아직도 이서가 똑똑하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는 거예요?”하이먼 스웨이 역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은이 얼른 상황을 수습하고 나섰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사모님, 계속 게임 하시죠.”‘과연 다음 판에도 운이 좋을지 한번 보자고!’ 이서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가은의 말에 동조했다. “사모님, 저는 괜찮으니까 계속 게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세 번째 판, 네 번째 판 역시 이서가 승리를 거두었다.오백만 원을 잃은 가은은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지환에게 향했다. ‘한 번은 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은 말이 안 돼. 분명히 무슨 속임수를 썼을 거야.’ 가은이 잔꾀를 내었다.“저기... 혹시 물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어요?”그녀는 말을 마칠 무렵 윙크를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지환의 눈동자는 대단히 차가웠다. 가은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녀는 지환이 거절할 줄 알았으나,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는 다소 놀란 듯했다.‘드디어 나의 매력이 통한 건가?’가은은 은근히 기뻐했으나, 이서는 몰래 입술을 오므렸다. “이서 씨, 이제 이서 씨 차례예요.” 가은이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서를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가은을 한 번 보았는데, 가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분명 친절함이 아닌 조롱을 지닌 것이었다. 사실, 이서는 처음부터 가은이 자신을 향한 악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의 따님인데...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한 건 아닐까?’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직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한테 적대적이었어.’ ‘오해가 아니었던 거라고.’고개를 숙이고 패를 보던
심가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서가 말했다.“제가 이겼네요.” 가은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서가 패를 하나하나 뒤집어 가은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패를 확인한 가은이 숨을 내쉬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요! 고스톱은 칠 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네, 방금 배운 거예요.” “그럼 더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서 씨를 가르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서 배웠다는 거냐고요!”“왜 배워야지만 고스톱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관찰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서가 우습다는 듯 가은을 바라보았다.“오늘만 해도 벌써 여러 판을 쳤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요령 정도는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H선생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H선생님은 첫 번째 판이 끝나자마자 모든 규칙을 파악하셨을 테니까.’ “이번 판은 무효예요, 다시 해야 한다고요!” 가은은 여전히 이서가 운이 좋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녀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은아...”하지만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재촉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요, 계속!”상황을 지켜보고 싶던 배미희가 가은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이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하이먼 스웨이는 계속해서 고스톱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판 역시 이서가 승리를 거두었고, 그녀의 뒤에는 지환이 없었다. 가은은 더 이상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이서야, 너 정말 똑똑하구나.”배미희가 칭찬했다.“겨우 몇 판 만에 모든 규칙을 알아차리다니!”다른 테이블의 사람들 역시 이서의 총명함에 매료된 듯했다. 이서가 연거푸 승리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분분히 이서를 칭찬했다. “이렇게 금방 고스톱을 배우다니, 윤이서 씨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정말
이서가 자리를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졌다. 배미희 역시 더 이상 고스톱을 치고 싶지 않았기에, 하이먼 스웨이를 끌고 문밖의 넓은 잔디밭에 가서 햇볕을 쬐었다. “태양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아요. 특히 이맘때의 태양은 더 따스하죠.” 배미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태양을 올려다보았다.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하이먼 스웨이가 묵묵히 배미희를 바라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배미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이서는 말이에요, 줄곧 나에게 따뜻한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어요. 그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따스함을 건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죠.”“맞아요.”하이먼 스웨이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나는 한동안 이서가 제 딸이었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아쉽게도 우리의 인연은 깊어질 수 없었지만요.”배미희가 벤치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좌우를 살핀 그녀가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스웨이 여사, 우리 두 사람, 친구 맞죠?” 배미희의 눈빛에 비친 진지함을 알아차린 하이먼 스웨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요.”‘내가 배 여사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하 서방 덕분이야.’ 애초에 지환은 하이먼 스웨이와 함께 책의 판권에 서명했으며, 영화 발표회 때도 그녀의 홍보를 도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 M국에 온 하이먼 스웨이가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지환이 특별히 그녀에게 배미희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하이먼 스웨이와 배미희는 친구가 되었다. “그래요, 스웨이 여사가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배미희는 우정을 걸고 말을 이어 나갔다.“스웨이 여사도 오늘 봤겠지만, 가은 씨가 이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가은 씨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이서
“계속 이러다가는 큰일이 나고 말 거예요. 스웨이 여사는 현명한 사람이니까 올바른 조처를 해줄 거라고 믿어요.”이 말을 마친 배미희가 하이먼 스웨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얕은 한숨을 쉬고 자리를 떠났다. 배미희가 방에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는 상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정말이지 깜짝 놀랐구나.”“하이먼 스웨이 작가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상언이 턱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글쎄다, 알아듣게 설명했으니 좀 기다려 보자꾸나.”하이먼 스웨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배미희는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던 사람이 고작 딸 때문에 저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어. 엄마는 여전히 스웨이 여사가 딸아이를 되찾은 게 잘된 일인지 잘 모르겠구나.” 상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이서와 지환이 2층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이서를 본 상언이 친절하게 물었다. 이서가 입을 떼려던 찰나, 지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서는 그와 맞닿은 피부에 전기가 흐르기라도 하는 듯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지환은 그녀를 잡은 손을 더욱 거세게 쥘 뿐이었다. “공항에 가야 하는데...”지환의 시선이 상언에게 향했다.“상언아, 너도 같이 갈래?”상언은 가고 싶지 않았다.‘나는 두 사람의 들러리가 되고 싶지 않아.’“두 사람이 공항에 가는데 왜 나를 끌어들이려는 거야?”지환이 상언의 팔을 잡아당겼다.“싫어도 어쩔 수 없어.”결국, 상언은 두 사람에게 이끌려 고택의 입구에 다다랐다. 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지환이 조수석에 상언을 밀어 넣고서야 차 문을 열고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의 손목에는 아직 지환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H선생님의 눈빛을 보니까 아까의 온기가 더욱 생생해지는 것 같아.’“어서 타.”지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의 목
공항에 도착한 상언은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파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임하나를 보고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하나 씨!”‘말도 안 돼,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상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서야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 씨가 정말 내가 나고 자란 M국에 오다니!’ 하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이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를 안아줄 줄이야.’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 하나가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그녀가 상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이 선생님, 우선 저 좀 놓아주세요... 보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한참이 지나서야 하나를 놓아준 상언이 흥분감과 기대감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떻게 된 거예요?”“업무차 출장 온 거예요. 겸사겸사 이서도 볼 수 있으니까요.”상언이 서운해하는 모습을 본 하나가 말했다. “물론... 이 선생님도 볼 수 있고요, 어차피 다 같이 있으니까요.”상언이 하나의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진심이에요?”“오, 이서야.”하나가 이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동안 어떻게 지냈어?”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내 이서의 곁에 선 키가 큰 남성에게 향했다.“저기... 낯이 좀 익은데...”지환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나는 금방 그를 알아본 듯했다.하나가 막 입을 떼려던 찰나, 상언이 그녀의 입을 가리고 차로 데려가며 말했다.“우선 차로 가요, 허허...”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서는 마음이 놓였다. ‘이전에는 이 선생님께 하나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렸는데, 지금 보니까 잘한 일인 것 같아.”‘이 선생님께서 하나를 정말 잘 챙겨주시는 것 같아.’‘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도 이 선생님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고 있잖아.’“왜 웃어?”이서의 입가에 맺힌 옅은 웃음을 본 지환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흥분한 배미희는 핏줄이 솟구치는 듯했다. “엄마, 제 친구인 임하나 씨예요.”상언이 하나를 소개했다. 그가 곧바로 하나에게 말했다.“제 어머니세요.”“안녕하세요, 사모님.”하나를 자세히 살핀 배미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상언이의 친구라고 하니까 더 마음에 드네.’“하나 씨라고 했나요?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하나가 배미희에게 이끌려 고택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상언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웃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이만 가볼게. 오늘은 친구랑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해.”지환이 이서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서가 스킨십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환은 때때로 이서에게 스킨십을 했다. ‘이서가 무의식중에 서서히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이를 알아차린 지환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서는 지환을 배웅하고 나서야 상언을 따라 고택의 거실로 들어섰는데, 거실에서는 배미희가 하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하나 씨, 남자 친구는 있어요?” 배미희의 열정을 당해낼 힘이 없었던 하나가 도움을 원하는 눈길로 이서와 상언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상언이 앞으로 나아가서 배미희에게 말했다.“엄마, 사실 하나 씨는 이서 씨의 친구예요. 단지 이서 씨를 보러 왔을 뿐이니까, 인제 그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 좀 비켜주세요.”“아, 이서의 친구예요? 아이고, 그러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으면 바로 자리를 비켜줬을 텐데요.” 배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언을 한 번 보았다. “상언아, 너는 위층에서 엄마랑 이야기 좀 하자.””...”‘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재에 들어선 배미희가 지체하지 않고 물었다.“맞지? 그렇지?” 상언이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뭐가요?” “역시, 하나 씨를 좋아하는 거 맞구나?” 상언이 배미희의 기세등등한 눈빛을
‘이게 무슨 소리야?’배미희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상언이가 가끔은 상투적인 표현조차 할 줄 모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분명 괜찮은 아이인데...’‘게다가 상언이는 의학계의 최고 권위자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재력, 외모, 학식,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아이인데, 대체 왜...’‘우리 가문과 연을 맺으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그런 상언이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엄마, 이제 그만 물어보세요.”배미희의 질문을 예상한 상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배미희는 이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정말 네가 해결할 수 있는 거야?”“여자의 마음 하나 다잡지 못해서 결혼을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대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어요.”배미희가 기뻐하며 상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남자라면 패기가 있어야지, 역시 내 아들이야. 혹시라도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렴.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마.” “네, 알겠어요. 엄마, 이제 그만 나가보세요.”상언이 서재 밖으로 배미희를 밀어냈다. 배미희가 서재를 나서자, 상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사실, 그동안 계속 하나 씨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었어.’ ‘끝내 좋은 방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야.’...같은 시각, 아래층.이서의 손을 잡은 하나가 외국 생활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서는 찬찬히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모든 대답을 들은 하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서야, 며칠 전에 사고가 났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멍해진 이서가 물었다.“어떻게 알았어?” ‘아, 이 선생님께서 알려주셨구나.’하나는 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정말이냐니까?”“응.”하나가 긴장하기 시작했다.“그... 그 사람은 잡힌 거야?”“응, 잡혔어.”“하지만, 사건은 H선생님께서 처리하고 있어서, 나도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겠어.”“잡혔다니 다행이다.”하나는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