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가져와 봐.”민예지는 직원들에게 지시했다.하지만 직원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어르신을 쳐다보았다.“가져와, 나도 이서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싶어.”직원들은 그제서야 가지러 갔고, 곧 두루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펼쳐보니 조지겸의 서예작품이 였다.이 사람은 업계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다. 민예지가 홧김에 조지겸의 작품을 사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람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이것을 본 민예지는 순간 비꼬는 듯 입꼬리를 굽혔다.“윤이서, 이것이 바로 네가 준비한 선물이야? 이런 서예가 할아버지의 신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동안 할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이뻐해 줬는데.”다른 사람들도 소곤대기 시작했다.“할아버지가 괜히 예뻐해줬네, 유명하지고 않는 작품을 선물해주다니.”“그러니 도련님이 널 안좋아하지, 말만 잘해서 뭐해, 일을 이 따위로 하는데.”“…….”평소라면 하은철은 분명 기뻐하겠지만 오늘은 왠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그는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예 앞으로 다가왔다.“몇 억짜리 선물은 분명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전재산이에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웅장한 글씨체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도서관에 가서 모든 서예가의 작품을 찾아보니 조지겸이 가장 어울렸습니다.”“조지겸은 비록 유명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글씨체이기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민예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하려는 순간 어르신이 떨며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조지겸, 정말 그의 작품이란 말인가!”세월에 날이 간 거친 손은 서예 위로 향했다가 멈췄다. 어르신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이 모습에 다들 놀라 있었다. 필경 어르신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 였기때문이다.하도훈은 얼른 앞으로 나아가 어르신을 부축였다:“아버지, 괜찮으세요?”어르신은 눈을 감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입을 열었다.“50여년전,
집사는 소리없이 윤이서에게 다가가더니 어르신에게 물었다.“어르신, 이런 귀중한 관요는 바로 댁으로 운송하시죠?”어르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지시했다. “그래, 지금 당장 사람을 불러 이것을 집으로 가져가게.”어른신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 그제야 한숨을 돌리게 된 윤이서는 감격스럽게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연회장을 나갔다.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잔을 들고 어르신에게 축하하러 왔다.“어르신,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을 축하합니다. 정말 기쁘고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이서 씨는 정말 효심이 크네요.”“그래그래,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르신한테 이처럼 지극정성이니, 어르신은 정말 복이 많으십니다.”“…….”여러 사람들의 칭찬에 어르신은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민예지는 이미 술을 권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다. 사람들이 윤이서 곁에 모여 그녀를 칭찬하는 모습을 보고 민예지는 화가 치밀었가.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외모와 자질이 그녀보다 못라다 해도 돈에서 밀리는 것은 너무 화가 났다.민예지는 조심스럽게 이송되는 관요를 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더욱 음험해졌다.‘아니야! 윤이서가 무슨 수로 이렇게 귀한 관요를 살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문데가 있을 것이다.’……술을 권하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자 윤이서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다들 주의하지 않은 틈을 타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마침 홀 밖에 대기중인 집사를 만났다.“주 집사님.”집사의 성은 주 씨이고 할아버지 옆에서 일한 지가 거의 50여년이 더 되었다.“네, 아가씨.”“그 송대 관요 말인데요…….”주집사는 윤이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웃으며 대답한다.“어르신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둘째 삼촌이요?”윤이서의 심금은 가볍게 울리기 시작했다.“네.”“지금 어디에 있어요?”“지금 휴게실에 있습니다. 만나시겠습니까?”“저를 도와주셨는데, 직접 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
그녀는 긴장해서 하지환의 옷깃을 붙잡고 두 눈에는 안개가 자욱했다.하지환의 동작은 잠시 멈췄고 마음속의 불쾌함을 억누르며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하은철과 30분 정도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윤이서는 이것이 하지환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도망갈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얼른 옷을 챙겨입고 몰래 문을 열었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재빨리 화장실로 걸어갔다.칸막이에 들어간 윤이서는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 거울 속의 여인은 두 눈이 흐릿하고 볼이 붉게 물들어 봄빛에 젖은 장미처럼 요염하게 피어난 것 같았다.그녀의 볼은 약간 뜨거워졌고 귓가에는 아직도 하지환의 숨결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일어나서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려던 참에 문밖에서 갑자기 성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정아, 이 일은 다 너의 덕분이야. 너의 언니가 은철이 하고 결혼한다면 난 너를 푸대접하지 않을 거야.”“숙모, 감사합니다.”윤수정의 달콤한 목소리는 마치 쇠바늘처럼 윤이서의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그녀는 한사코 팔뚝의 살을 꼬집고 나서야 소리를 내지 않았다.밖에서 성지영의 말소리는 계속되었다.“내가 너의 언니한테 무대에 올라 결혼 발표하라고 재촉할 테니 얼른 화장을 고치고 와.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네, 알겠습니다.”화장실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그리고 휠체어가 미끄러져 가는 소리가 들렸다.윤이서는 팔을 꽉 부여잡았고 손등에는 핏줄이 솟았다.순간, 윤이서는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쾅-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한창 화장을 고치고 있던 윤수정은 고래를 돌리자 걸어 나오는 윤이서를 보고 감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언니…….”윤이서는 재빨리 윤수정 앞으로 다가가 뺨을 때렸다.탁-그 소리는 쟁쟁하고 우렁찼다. 윤수정의 얼굴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그녀는 미친 듯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윤이서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윤수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윤수정을 생으로 삼킬 것만 같았다. 윤수정은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처음으로 대갓집 규수의 몸에서 무서운 살기를 느꼈다.“윤이서, 너 뭐 하는 짓이야?”윤이서는 차갑게 웃으며 잡고 있던 윤수정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풀었다.“좋아, 너는 내가 하은철과 결혼하기를 그렇게 바라는 거지? 그럼 오늘 내가 바로 발표해 줄게. 나는 네가 내 들러리가 되어서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를 고르는 것부터 결혼까지, 하 씨 가문의 작은 부인만이 이룰 수 있는 행복이 어떤 건 지 보여 줄 거야. 그리고 이러한 행복은 네가 평생 바래도 얻을 수 없는 것이야.”“너는 이미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맹세했으니 만약 네가 감히 하은철과 결혼한다면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승낙하지 않으실 것이야.”윤수정의 하얗게 질린 얼굴빛이 설상가상으로 더욱 하얗게 변했고 손가락은 매끄러운 바닥을 힘없이 긁으며 윤이서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윤이서, 너 이 독한 년!”윤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났다.화장실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외진 곳에 서 있자 팽팽한 두 어깨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두 손은 허약하게 금빛 유리 거울을 누르고,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들고 거울 속의 눈동자가 붉고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을 쳐다보았다.눈을 깜빡이자 눈앞의 거울은 안개가 낀 듯 흐미해져 왔다.거울에 반사된 불빛은 검은 먹구름이 되어 그녀를 향해 무겁게 내려왔다.윤이서의 세계는 여태껏 암담했다.부모님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단지 하 씨 가문의 부인으로 되기를 발했다.하은철은 그녀를 혐오했다.윤수정은 그녀가 죽기를 원했다.그녀는…….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백열등의 눈 부신 빛이 문틈으로 쏟아져 나왔다. 강한 빛에 윤이서는 고개를 들자 한 쌍의 간절한 눈동자와 부딪혔다.하지환도 윤이서를 알아보았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심장이 멈추어 설 것만 같았다.“또
윤이서는 하지환의 이런 행동에 감염되어 천천히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붉은색 집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첫 페이지의 집주인 란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녀는 지체 없이 아래로 계속 읽었다.구계18도 B좌 103.구계18도는 바로 윤이서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별장 구역이고 B동 103은 바로 그날 함께 보러 간 별장이었다.“당신 미쳤어요!”윤이서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당신 정말 샀어요? 얼마 주고 샀어요? 당신 어디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어요?”하지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이서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당신 마음에 들어 했잖아요?”그의 당당함에 윤이서는 숨이 가슴속에 틀어박혔고 말투도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졌다.“아무리 마음에 든다 해도 함부로 돈을 쓰면 안 돼요. 나중에 결혼해서 생활하려면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요!”하지환은 웃기만 했다.“저랑 같이 살 거예요?”이 몇글자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날 윤이서가 한 ‘계약 결혼’만큼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윤이서의 귀밑은 순간 빨개졌고 횡설수설했다.“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에이, 아무튼 당신 함부로 돈을 써서는 안 돼요.”하지환은 윤이서의 손을 잡고 있었고 손끝엔 은근 힘을 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기뻐했지만 말투는 오히려 담담했다.“얼마되지 않아요.”윤이서는 하지환이 없으면서 자기한테 잘 보이려고 어렵게 산 거라 생각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엄청 감동을 받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하지환 씨, 당신이 사 준 별장 정말 고마워요. 집 계약서에 제 이름까지 적어준 것도 그렇고요. 하지만 전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하지환의 얼굴색은 약간 변했고 말투도 딱딱해졌다.“왜요?”“왜냐면 이것은 당신이 힘들게 번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이에요. 비록 당신이 어떻게 계약금을 모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집 한 채 때문에 평생 은행을 위해 아득바득 일해야 하잖아요. 저는 당신이 집 한 채를 위해 남은 인생을 망치
안돼!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곧 하은철과 결혼 발표를 하게 될 것이니 이같이 귀중한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하지만…….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하지환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들어 하지환의 깊숙한 이목구비를 보고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눈동자에는 또 물안개가 끼기 시작했다.“왜 또 그래요?”하지환은 윤이서의 턱을 고이 받쳐 들고 애정이 어린 말투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력함이 묻힌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왜 이렇게 잘 울어요. 정말 울보예요.”말을 마치자 하지환의 입술은 나비처럼 가볍게 윤이서의 눈꼬리에 내려앉았다. 소중히 여겨진 그 느낌은 마음 끝에 시든 작은 꽃이 새 가지를 내리게 한 것만 같았다.“그런 거 아니에요…….”윤이서는 하지환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려 그에게 홀리지 않으려고 했다.“저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찾으실 거예요.”하지환은 그녀의 다급한 걸음걸이와 버려진 집 계약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서는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며 총총히 그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이 급해서 하마터면 마주 오는 하은철과 부딪칠 뻔했다.하은철은 몸을 피하며 비웃으며 말했다“왜 또 한 번 내 품에 안겨 보려고? 너의 작은 수작 누가 모를까 봐?”윤이서는 기분이 극도로 나빠졌다. 더 이상 하은철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은철의 옆을 돌아서 갔다.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하은철에게 끌려갔다.“윤이서, 이제 그만 감정 갖고 장난쳐!”윤이서는 독사라도 만난 듯 하은철을 재빨리 따돌렸다. 윤이서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 너의 그 잘난 척하는 얼굴 좀 걷어치워. 옛날 너를 좋아했던 거는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건 내 상상 속의 너였어. 세가자제, 학문도 있고 재능도 있고 상업 천재인 너 말이야.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너는 내 남편 손끝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말이야
하은철의 몸은 매섭게 흔들렸다. 그는 윤이서의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과 땅의 거리와 같았다.그는 괜히 마음이 당황해 왔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아갔다. “은철 오빠…….”구석진 곳에 숨어 이 모든 것을 훔쳐보고 있던 윤수정은 급히 휠체어를 밀며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하은철은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눈에 윤수정의 부어오른 왼쪽 얼굴을 보고 그제야 윤이서와 결판을 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생각이 났다.“미안해…… 나…….”윤수정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 같이 하은철의 말을 자르며 급히 말했다.“은철 오빠,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하은철은 윤이서를 찾아 혼내 주겠다는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린 죄책감에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인데. 말해봐.”“언니가 생일파티에서 할아버지께 깜짝 선물로 오빠와의 결혼 발표를 낸다고 했어요.” 하은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왜?”윤수정은 머리를 저으며 눈가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은 누가 알겠어요. 아마도 내가 불쌍하다고 느꼈나 봐요.”조금 전 윤이서의 그 말을 생각하며 하은철은 윤수정의 말에 찬성을 표하지 않았다.하은철의 이런 모습에 윤수정은 분노로 손톱은 이미 살 속으로 파고들었고 눈물은 더욱 세차게 흘러내렸다.“그래서 저는 은철이 오빠와 언니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미 맹세했어요. 오빠랑 결혼 안한다고. 지금 몸 상태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죽기 전에 오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그만해, 난 윤이서와는 결혼하지 않을거야!”예전과 똑같이 하은철의 눈에는 윤이서에 대한 혐오감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윤수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오빠는 반드시 언니와 결혼해야 해요. 오직 오빠가 언니랑 결혼해야만 제가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어요.”“나는 너를
윤이서는 일부러 살짝 뜸을 들이며, 술잔을 들곤 가볍게 몇 번 톡톡 두드렸다.연회장은 일순 조용해졌다.모두의 이목이 이서에게 집중되었다.이서는 삐끗한 한쪽 발목으로 절룩거리며, 단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섰다.“여러분, 오늘 할아버지의 생신날을 빌어 여러분께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할까 합니다.”말하면서 하은철을 힐끗 보았다.가벼운 동작이라고 해도 단상 아래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이심전심,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이서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특히 백스테이지에서 모니터링 중인 하지환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정색했다.통제 불능의 느낌이 갈수록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입니다.”이서는 추억에 빠진 듯 부드럽게 웃으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모든 소녀들이 그렇듯이 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먼저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합니다…….”그녀는 또 한 번 눈을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이 장면을 본 하지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그분은 제게…… 삭막한 요즘 세상에, 따뜻한 온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모든 호의가 꼭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분은 등대처럼 어둡고, 갈길 잃은 제 인생을 밝게 비춰주었습니다…….”이서의 진솔한 얘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하은철의 심장도 여러 번 움찔했다.예의상 하는 멘트인지 알면서도…….그러나 다음 순간, 하은철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어두운 얼굴로 무대 옆에 서 있는 하지환을 봤기 때문이다.마치 어둠 속에 빠진 악마의 화신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두 눈으로 하은철을 쏘아보고 있었다.하은철은 돌연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하지환이 위치한 곳이 비교적 은폐된 데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이서에게 쏠려 있어 아무도 그의 존재를 유의하지 않았다.그는 불빛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