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골이 송연한 무진의 말에 성연은 온몸이 오싹해졌다.몸을 낮춰 무진의 팔 아래로 빠져나온 성연이 뒤로 물러나 무진과 몇 걸음 거리를 둔 채 말했다.“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성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강무진과는 그저 연극에 불과한 것이다.진심을 담은 사랑은 당연히 진짜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키스는 강아지가 핥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서로 사이가 더 깊어지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무진을 대할 수 없을 것이다.요즘은 비교적 개방적이고 별로 개의치 않는 사회 분위기라지만, 성연은 그렇지 않았다.뼛속까지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성연이다.성연의 안색이 카멜레온처럼 이리저리 변하는 것을 보고 있던 무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아이의 작은 머리통을 두드려 보고 싶을 정도다.무진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내 보기에도 그리 급하진 않은 것 같은데?”무진의 표정을 본 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그제야 무진이 자신에게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억울한 마음에 성연도 무진을 놀리고 싶었다.“아저씬 급해 보이네요, 아주 많이.”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의아했다. 무진은 사적으로 만나는 여자가 없었다. 그런데WS그룹의 실질적인 대표가 무진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된 참이었다.그와 같은 신분이나 지위에 있는 사람은 보통 밖에서 만나는 여자가 최소 한 두 명은 있는 법 아닌가.재벌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다.하지만 무진은 그들과 달리 여자를 찾지 않았다.이런 생각하던 성연이 재미있다는 듯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성연이 웃는 모습을 보던 무진 또한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을 입에 문 채 물었다.“뭘 생각했길래, 그렇게 기분 좋게 웃어?” 성연이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무진에게 말했다.말을 다 끝낸 후에야 아차 싶은 마음과 함께 말 실수를 후회했다.하지만, 말을 돌리기엔 이미 늦어 버린 터.무진의 얼
강운경은 방금 전까지도 연회장에서 성연을 찾고 있었다.그러다 고용인들에게서 무진이 이미 성연을 데려갔다는 말을 들은 참이다.성연이 오늘의 주인공인데 무진이 데리고 나가 버렸으니, 연회가 계속 진행될 수 있을 리가.운경이 안금여의 귓가에 속삭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무진이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요. 이처럼 큰 연회에서 말도 안 하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예전에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제 그룹을 모두 맡았다고 더 이상 아무 눈치도 안 보는 건지, 뭔. 가고 싶다고 가고, 아예 제마음대로야. 뒤처리는 다 우리한테 떠맡기고 말이지.”운경의 말을 듣고 있던 안금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잠한 표정이었다. 속으로 운경과 다른 생각을 하며.어린 소녀였다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성연이다. 무진은 당연히 그런 약혼녀를 데리고 서로의 감정을 키우려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정말 그래서 빨리 증손자를 안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무진의 이런 행동을 막을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응원할 생각이다. 엄마 안금여가 말을 하지 않자 운경은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엄마, 성연이도 없는데 이제 어쩌죠? 파티를 계속 진행할 수 있을까요?”안금여는 딸을 흘겨보았다.“뭐가 그렇게 초조한 거야? 너도 이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구나. 케이크, 성연이가 이미 잘랐잖아? 성연이 여기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어? 시간이 되면 하객들은 알아서 돌아갈 거다. 소개할 사람도 이미 다 소개했고 말이다. 오늘 밤 주인공은 성연이 아니니? 주인공이 나가 놀고 싶으면 그만인 게지.”안금여에게 핀잔을 듣긴 했지만 운경 또한 투덜대지 않았다.‘강씨 집안 제일 어르신 엄마도 신경 안 쓰시는데, 내가 왜 걱정해?’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강일헌, 강상철, 강상규, 강진성 등이 늦게 도착했다.뒤에 블랙 슈트의 경호원 부대도 거느린 채.보아하니 축하하기 위해 온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분위기를 깨고 있는 듯.홀을 둘러보
무진과 성연을 비난하는 걸 안금여가 두고 볼 리 없다. 둘 다 자신의 가족이니.“신혼 부부인데 당연히 자기들만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생일도 이제 1시간 남짓 남았는데, 둘이서만 같이 보내고 싶지 않겠어요?”연회장에 있던 하객들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무진과 성연이 서로 사랑하고 다정하게 지내는 걸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터.또한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기실 성연의 생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으니.그들의 주목적은 강씨 집안을 통해 사람들과 두루두루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강씨 집안 회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하고 있던 차였다.그리고 모두 하나같이 사업 파트너를 찾거나 인맥을 쌓느라 어차피 바빴다. 생일 주인공이 어디에 있든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고, 신경쓸 시간도 없었다.그런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오래전부터 강씨 집안 큰집 본가와 둘째, 셋째 일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익히 소문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매체에서 서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확실한 것 같다.“아니 그러면 다른 날 잡으면 되잖습니까? 집안 어른들을 접대할 시간도 없었답니까?” 강상철이 괜한 생트집을 잡았다.더이상 꼬투리 잡을 것이 없자 어른들을 안중에도 없다며 계속 따지고 들었다.미간에 주름이 생겨난 안금여는 계속 생떼를 부리는 그들의 말을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오늘은 성연의 생일파티이니 당연히 주인공인 성연의 의견을 존중해지요. 둘째 서방님이 다 늦은 시간에 와서 무진과 성연을 못 만난 건데, 어쩌겠습니까? 설마, 늙은이인 내가 두 분 서방님을 접대하면 안 되는 거예요?”안금여 눈빛이 서릿발처럼 아주 매서웠다. 이번에는 형수 안금여가 또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했던 강상철과 강상규였다.강상철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더니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때 강진성이 입을 열었다.“큰할머님은 형수님을 많이 아끼시나 보네요. 우리 집안에 온 지 얼
안금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너, 정말 많이도 알고 있구나.”‘무진이 성연에게 별장을 선물하겠다고 말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 사실을 일헌이 벌써 알고 있다? 우리 무진일 계속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둘째, 셋째 일가는 조금도 단념할 생각이 없구나.’“아, 소문에, 형님이 큰 선물을 줬다고요. 비밀리에 선물한 게 아니라 이미 다 소문 난 걸 오다가 들은 겁니다.” 당황한 강일헌이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다.강상철이 강일헌을 노려보았다.‘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일을 망치는 데 타고 난 놈 아냐?’‘지금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떠벌리다니. 그냥 큰집에 우리 의도를 알리는 꼴 밖에 더 돼?’‘지금 강무진은 섣불리 건드려선 안된다는 걸 몰라? 무진이 놈한테 당한 게 아직 부족해서 저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지금 강상철은 손자 강일헌에게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우리 큰집의 일은 걱정하지 마, 일헌아. 네가 맡고 있는 그 계열사 실적이 올해 기준 미달로 알고 있는데, 시간 낭비 하지 말고 회사 일에나 좀 더 신경 쓰지 그러니.”운경아 사정없이 비웃었다.‘강일헌 이 자식, 바보 아니야? 우리가 정말 너네 속셈도 모르는 줄 아는 거야?’“저는…….”“됐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자.” 또 무슨 말을 하려던 강일헌의 입을 강상철이 제지했다.강상철이 음산하고 매섭게 눈을 부릅뜨자 강일헌은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순순히 강상철과 강상규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운경이 그런 저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결국엔 무진이 성연에게 선물한 별장이 화제가 되고 말았다.만약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냥 집을 선물했나 싶은 이야기였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해변가의 그 고급 별장은 돈만으로 구입하기 힘든 곳이었기에 순간 좀 놀랐다.그러나 이 말을 들은 송아연과 임수정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바다 전망의 고급 저택이라면
그날 저녁 연회가 끝나고 모든 하객들이 거의 다 떠났을 때, 임수정은 여전히 나가지 않은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큰 홀에 자기 가족만 남은 걸 본 임수정이 작심을 하고 결국 또 100억의 예물 얘기를 꺼냈다.“사돈 어르신, 처음에 저희와 약속하신 거 잊지 않으셨죠? 성연이 이 집으로 들어 오면 저희에게 사례금을 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어르신께서도 성연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성연이는 우리 송씨 집안의 딸이니,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뭔가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임수정이 말을 빙빙 돌려서 말했다.100억인데, 안 받으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분명히 이 말을 꺼내는 게 무척 부끄러웠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100억이 들어온다면 언제까지 버틸지 장담할 수 없는 자신들 SG기업이 한 숨 돌리 수 있을 터였다.그러나 강씨 집안이 질질 끌며 주지 않으니 그녀도 마냥 초조했다.100억이 물거품이 될까 봐 계속 걱정되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받아내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씨 집안 사람들을 상대로는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은가.안금여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임수정의 말을 듣던 안금여는 속으로 냉소했다.‘딸을 팔아 놓고 뭐 이리 당당하게 말해, 참내! 송씨 집안 사람들 말고 누가 또 이러겠어?’‘송종철과 임수정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둘 다 어쩜 이리 똑같이 뻔뻔스러운지!’‘이 계모는 방금 몇 만 원짜리 팔찌로 성연을 속이려던 걸 벌써 잊었나?’그러나 안금여는 별다른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사돈, 제가 사돈 댁에 말씀드렸잖아요? 예물은 제가 이미 무진이에게 주었으니 무진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임수정은 정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강무진은 주기는 커녕 얼굴도 전혀 내밀지 않으려 하지 않나 말이다.어떤 꼴을 당할까 무서워 무진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성연이 거실로 들어가니 무진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점심 때가 가까워 있었다.의아한 마음이 든 성연이 물었다.“오늘 출근 안 해요?”신문을 탁탁 펼쳐 든 무진이 대답했다.“백수가 회사엔 가서 뭐해?”성연은 어이가 없었다. ‘강무진, 당신이 회사를 손에 넣은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흥, 다들 알고 있는 일을 가지고 지금 부러 저러는 거야? 우리 아수라문의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빼앗아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척, 너무 얄미워!’‘미리 알지 못했으면 정말 속았을 거 아냐?’성연은 무진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가지고 놀았다.지금 모든 게 다 귀찮게 느껴져 무진이 계속 연기하락 내버려뒀다. 어차피 언젠가는 들통이 날 테니.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놓은 무진이 성연을 바라보았다.“뭐 먹고 싶은 거 없어?”성연이 입을 열기를 계속 기다렸다.그런데 아침도 안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거나 먹으면 돼요.”성연은 어젯밤 생일파티에서 술을 대신해 주스를 너무 많이 마셨다. 케이크도.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한 느낌이다. 당연히 입맛도 없고.게으른 고양이처럼 소파에 누워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아주 귀여워 보이는 무진이다.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성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그런데도 성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휴대폰만 계속 가지고 놀았다. 머리도 들지 않은 채.그러다 또 하품을 한다. 잠을 그렇게 많이 자고도 부족한지.성연을 한참 쳐다보던 무진이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30분 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들고 왔다.코끝에 감도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간 성연의 눈에 해산물 스프 접시를 식탁에 내려 놓는 무진이 보였다. 깨까지 뿌려진 그 고소함이 성연의 식욕을 더 돋우었다.“우와 이거 아저씨가 한 거예요?” 성연이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들며 물었다.솔직히 요리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 아닌가? 늘 휠체어에
성연은 계속 분풀이를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무진과 아침을 먹은 뒤 오후에 성연은 학교에 갔다.그런데 하필 체육 시간이었다. 땀이 나 끈적거리고 찝찝한 게 싫어 성연은 수업에 들어가기 싫었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이유도 묻지 않고 그냥 쉬라고 하신다.얼마 전에 성연의 일로 학교가 한바탕 떠들썩했던 걸 모두가 안다.비록 성연이 범인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 일로 유명해졌다.성연 뒤에 누가 있는지 선생님들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 누가 감히 미움을 살 짓을 하겠는가?어차피 체육수업은 성연과 같은 학생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터.체육 선생님도 일개 고등학교 교사일 뿐, 당연히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운동장을 나온 성연이 보건실로 들어갔다.보건실에서 마라탕을 먹고 있던 서한기가 성연을 보더니 놀라 사레가 들렸다. 보건실이 서한기의 기침 소리로 가득했다.허둥지둥 물을 마시고 나니 기침이 가라앉았다.옆에서 지켜보던 성연이 차가운 눈으로 서한기를 보았다.“왜 그렇게 놀라?”“아니 보스, 수업은 왜 안 들어가요?” 서한기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체육시간이야. 여기서 할 일이 있나 찾아 보려고.” 성연이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었다.“무슨 할 일을 찾아요?” 서한기가 의심스럽게 물었다.“우리 ‘스카이 아이시스템’을 가져간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성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듯 두 눈이 반짝거렸다.북성에 온 이후 조용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WS그룹에 교훈이라도 주려는 겁니까? 강씨 집안에서 보스를 위해 그처럼 성대한 생일파티도 열어 주었는데요?” 서한기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성연을 쳐다보았다.그의 눈에 비친 성연은 항상 사람과의 정을 중시해왔었다.또 그동안 성연에게 무척 잘해주었던 강씨 집안이었기에 ‘스카이 아이시스템’의 일은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스카이 아이시스템’하나면 그깟 생일파티 열 번도 더 할 수 있는데.
WS그룹 내부 시스템에 회사 기밀 정보들이 많이 들어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많은 인재들을 뽑았다. 당연히 보통 실력들이 아니었다.성연이 그룹 내부 시스템에 침입하는 순간, WS그룹 쪽에서도 즉시 알아차렸다.즉시 방화벽을 세우고 보안시스템을 새로 만들었다.하지만 침입자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이쪽에서는 아직 침입자의 꼬리도 못 잡았는데 저쪽은 바로 공격방식을 바꾸었다.컴퓨터 보안시스템에도 일가견이 있는 손건호가 마침 회사에 있다가 꽤 심각한 상황임을 알아챘다.손건호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무진을 찾아 ‘블루베이'로 갔다.어젯밤 엠파이어 하우스에 돌아가지 않고 성연과 함께 그곳에 잤으니, 무진이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블루베이에 도착해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역시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무진이 보였다.무진으로부터 상당한 권한을 부여 받은 손건호였기에 이 집의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웬만한 일로는 블루베이로 찾아오지 말라고 무진이 지시한 터였다.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선을 넘지 않는 손건호인 만큼 무진 또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그래서 문 소리가 나자 성연이 학교에서 돌아온 줄 알았던 무진이다.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거의 뛰다시피 들어오는 손건호가 보였다.“보스, 큰일났습니다!”일 처리가 언제나 깔끔하고 차분한 손건호다. 이렇게 허둥거리는 법이 없었다. 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회사 내부 시스템이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막고 있지만,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손건호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금세 표정이 가라앉은 무진이 서류를 덮으며 일어섰다.“회사로 가지.”고개를 끄덕인 손건호가 무진과 함께 저택을 나와 차를 몰았다.어찌나 상황이 긴급한지 엄청난 속도로 달려 30분만에 WS그룹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무진과 손건호가 임원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룹 내부 보안시스템 담당 전산 직원들이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공항 입국 게이트.암담한 눈빛의 성연은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서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이 상황을 본 예민주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인 모양이네.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어.’이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은침으로 성연의 허리에 있는 혈을 찔렀다.순간 아픈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 눈빛이 되살아난 성연이 고개를 돌려 예민주를 바라보았다.“막내 사매? 여기가 어디야?”성연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자 예민주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보아하니, 내가 연구해서 만든 독이 그래도 썩 효과가 좋은 것 같네.’사람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 뒤 인식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이 독은, 여민주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그 실험 대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F국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언니, 이제 귀국했으니까 곧 무진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진 오빠가 보고싶죠?” 예민주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약은 성연이 무진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민주의 계획은 전혀 시행할 수가 없다.‘그래, 한 걸음씩 차근차근 해야 해.’ 예민주의 인내심은 대단했다.“응, 무진 씨가 내 남편이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 무진씨가 잘해 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운성시에서 살면 돼.” “더 이상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스승님이 너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하셨어!”지금 성연은 더 이상 예전의 성연이 아니라 이미 완전히 변했다. 성연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들과 지시가 박혀 있었다.그래서 예민주에 대한 말투는 더없이 온화했다.“응, 언니가 정말 잘해 주시는 걸요! 언니가 외국에 와서 나를 찾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거기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언니가 제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예요!”예민주는 마음속으로는 그야말로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선량한 척 가장하면서 묵묵히 성연의 기억을 강화하고 있었다.예민주가 설계한 기억 속에서 성연은 어제 오후 3시에
하룻밤 사이에 연운그룹은 완전히 무너졌다. 연계진 회장은 탈세 문제로 구속되었고, 많은 부문의 책임자들도 잇달아 사직했다. 인터넷의 여론이 폭발하면서, 주가는 이튿날에도 어김없이 또 다시 20%나 폭락하며 하한가를 기록했다.회장 대행인 조수경도 이미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도저히 국면을 만회할 수가 없었다. 진교철과도 연락을 시도했지만 결국 진교철은 여전히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대리인을 시켜서 연운그룹에 한 투자마저 철회했다.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조수경도 재빨리 연운그룹과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수경은 오후에 바로 회장 대행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그룹 전체가 이미 완전히 끝장이 났다. 게다가 여러 여직원들의 고소에 직면해 있어서, 탈세 문제뿐만 아니라 성범죄 문제와도 엮여 있었다.이 보도를 접하면 당연히 즐거운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지금 무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커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그 7 명의 임원들 사건이 무진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그래함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이른 아침에 전화를 건 그래함은, 성연의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줄곧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래서 무슨 사고가 생길까 봐, 어젯밤에 성연과 짜고 거짓말을 했다고 무진에게 빨리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무진은 비로소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연의 핸드폰으로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줄곧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렸다.손건호와 서한기에게 반드시 단서를 찾으라고 지시한 뒤 지금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곧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손건호의 전화였다.얼른 전화를 받은 무진이 다급하게 물었다.“소식이 있어?”[보스, 사모님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어제 오후 3시 비행기로 F국 프로방스로 갔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추적하기 위해서 제가 이미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그래, 어서 가.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보고하고. 하지만 반드시 은밀히 해야 해. 실혼전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무진은 당황
완전히 놀란성연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실혼전의 캐서린을 마주해도 지금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너 정말 예중천 스승님의 딸이 맞아? 왜, 왜 이렇게 하려는 거야?”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예민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수잔이 주는 커피를 받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선배,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언니에게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어요. 언니도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언니가 강무진 씨를 양보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게 되겠지요!”“웃기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돼!”이를 악문 성연의 눈빛에는 살기도 확고하게 배어 있었다.“언니는 안 죽어도 돼요! 그리고 언니가 죽는다면 소용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언니가 순순히 양보하는 거예요! 나하고 강무진 씨가 행복해야 지내는 모습을 봐야지요.” “그리고 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언니가 키우게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갑자기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내게 줘도 돼요.”예민주의 말투는 마치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연은 예민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놀라서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수잔은 마치 로봇처럼 성연에게 홍차를 가져다주었다.“송성연 씨, 차 드세요!”“예민주, 네가 말한 계획들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그 7명의 임원들이 없어도 내 남편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어.” “그리고 강씨 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겠다는 그런 말을 하니 더 터무니가 없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넌 스승님의 딸도 아니면서 왜 딸이라고 사칭한 거야?”성연의 거듭되는 질문에 갑자기 화가 난 예민주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나를 화나게 해서 더 많은 사실을 드러내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좋아요, 그럼 내가 아예 말해 줄게요.” “예전에 강무진 씨 부모님 죽음은 우리 예씨 가문과 관계가 있어요. 강씨 가문이 우리 예씨 가문에게 빚진 거지요! 알겠어요?”“내가 강씨 가문의 모든
“도대체 날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거야? 조건이 있으면 그냥 말해.” 두려움을 떨치고 정신을 차린 성연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다.분노한 성연이 소리치자 예민주가 냉소를 터뜨렸다.“마주 보고 있어야 얘기하기도 편해요. 앉아요!”예민주는 여전히 얼버무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모든 건 자신의 수중에 있다는 듯이.성연은 거실로 돌아와서 예민주의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잔이 성연에게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송성연 씨, 홍차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커피를 원하십니까?”성연은 정말 깜짝 놀랐다. 겉으로는 전혀 무해해 보이는 이 여자가, 불과 몇 초 전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기에!‘어떻게 감정을 이렇게 신기하게 바꿀 수 있지?’‘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아.’예민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성연 씨에게는 홍차를 한 잔 주세요. 임산부라서 커피를 마시는 건 적합하지 않아요!”‘헐!’성연은 정말 멍해졌다.“날 조사한 거야?”“언니가 내 선배인데 당연히 언니의 일에 더 신경을 써야지요.” 예민주의 눈빛은 정말 사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내가 임신한 사실은 지금까지 무진 씨하고 서한기만 알고 있어. 할머니와 고모에게도 아직까지 알리지 않았는데, 아득히 멀리 있는 예민주가 알고 있다니!’자신의 비밀을 예민주가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자, 성연은 완전히 충격에 휩싸였다.“됐어요! 언니 표정이 이렇게 다채로운 걸 보니 내 목적도 달성한 모양이군요. 이제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어요!”갑자기 미소를 거둔 예민주의 단호한 눈빛에는 냉혹함까지 엿보였다.“그래! 나도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불원천리 날 찾아왔는데, 나나 무진 씨를 내버려둘 리는 없겠지?”원래 막내 사매라는 호칭에 성연은 어느 정도 친근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을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또는 적으로 생각해야 했다.“그 7 명의 임원을 무사
성연은 문득 예민주의 나이에 의문이 들었다.‘외모는 확실히 나보다 두세 살 어리게 보여. 갓 대학교에 입학한 청순한 아가씨처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모습이야.’그러나 겨우 10여 분 동안 접촉하면서 성연은 이따금씩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막내 사매는 앳된 외모 속에 무서운 영혼을 감추고 있어.’다시 자리에 앉아서 예민주를 쳐다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WS그룹의 미래 업무를 담당해야 할 7명의 고위 임원들이 예민주의 부하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것 만이 7명의 임원들이 예민주의 지시에 따라서 잇달아 여기 프로방스로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언니가 세상 일을 전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먼저 아침부터 먹어요! 그리고 나서 언니한테 어떻게 해야 WS그룹을 구하고 남편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 줄게요!”수잔이 아침 식사를 하나씩 내왔다. 빵과 우유, 그리고 약간의 치즈로 아주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나 지금 성연은 전혀 입맛도 없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요구를 빨리 말하는 것이 좋겠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그 7명의 임원들을 WS그룹으로 돌려보낼 거야?”예민주는 들은 체 만 체하며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이 X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거야?’성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이제 7 명의 임원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어. 그 사람들이 정말 예민주의 부하라면, 그럼 더 이상 WS그룹으로 돌아가게 할 필요도 없어.’‘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야.’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성연은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은침을 날려서 예민주를 제압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그러나 예민주가 나를 그렇게 쉽사리 풀어줄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숨겨진 위험이 있을 거야.’잠시 생각하면서 성연은 사방을 쓸어보았다.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하인들과 수잔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경호원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계산하기 어렵겠죠. 어떻게 똑똑히 계산할 수 있겠어요.”예민주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닫았지만 성연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내친 김에 아예 예민주에게 반문했다.“그럼 사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세어 보기라도 했어?”예민주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했다.“세어 봤지요.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동안 제가 배운 게 변변치 않아서 사실 환자를 도와준 적이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말을 마친 예민주의 얼굴에는 잠시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성연은 멍해진 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예민주가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떨어진다 해도 의술을 배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조금 전 손가락 사이에 은침을 끼우는 수법만 해도 정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거야.’‘그래서 예민주의 말 뜻은 도대체 뭐야?’갑자기 성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자기도 모르게 방금 전에 수잔이 벌벌 떨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뼛속에서 발산되는 공포에 떨던 모습은 예민주가 수잔을 어느 정도로 참혹하게 다뤘는지 말해 주기에 충분했다.‘게다가 수잔은 예민주를 주인이라고 불렀어. 애완동물한테나 주인이 있는 거지.’‘그럼 예민주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건, 줄곧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데 의술을 사용했기 때문인 거야?’‘심지어, 사람들을 해치거나?’성연은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예민주를 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언니가 이제야 눈치채신 모양이네요? 호호,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배운 건 원래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의술이 아니었어요.” 예민주는 성연의 추측을 시원스럽게 확인해 주었다.게다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히 평범한 표정이었다.그 말을 들은 성연은 경악하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스승님은 국내외에서 최고의 신의로 여겨지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어.’‘스승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예민주가 차에서 내리자 성연은 바로 멍해졌다.예민주는 세련되고 예쁜 퍼프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오똑 솟은 코, 역동적인 두 눈은 서양 인형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선명한 붉은 입술에 일부러 양갈래로 땋아서 예쁜 느낌을 주는 머리카락.‘이런 모습은 흡사 동화 속의 공주와도 같은 모습이야.’‘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지만 앳된 느낌은 없어. 옅은 파란색 눈동자는 오히려 차분한 느낌이 가득해.’성연은 깜짝 놀랐다. 여러 면에서 예민주가 스승의 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스승님과 닮은 부분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그 푸른 눈동자에 성연은 좀 놀랐다.‘예민주가 뜻밖에 혼혈이야?’“언니, 드디어 언니를 만났네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예민주는 곧장 성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미소를 지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는 스승님과 정말 닮았어.’“이제 당신이 내 사매라는 걸 인정할 수 있겠네요. 사매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스승님의 딸이잖아요. 예민주 씨!”성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그리고 위아래로 예민주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러자 마음속에 갑자기 뭔지 모를 느낌이 더 생겼다.이 막내 사매는 겉으로는 귀엽고 단순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연은 왠지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다.마치 더없이 존귀한 존재인 예민주가 구름 위에 서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래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결국 제게도 의술을 좀 물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언니의 막내 사매라고 할 수 있어요. 저도 이 호칭을 좋아하니까, 더 이상 저한테 말을 높이지 마시고 그냥 사매라고 저를 부르세요!”웃으면서 손을 뻗은 예민주가 성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그러나 순간 바로 뒤로 물러난 성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예민주를 주시하며 냉담하게 말했다.“뭘 하려는 거야?”“역시 선배답네요. 제 은침은 손가락 사이에 숨겨져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어요. 그래도 언니는
그날 이후 예중천은 정식으로 성연을 제자로 받았다.정식으로 스승님을 모시는 예를 갖춰서 스승님에게 차를 대접하고 절을 했다. 예중천도 마찬가지로 성연에게 봉투를 하나 줬다.봉투 안에는 80만 원이나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성연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추가로 구입했고 자신의 옷과 신발도 샀다. 그리고 예중천에게 자주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예중천은 성연의 집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연은 방에서 지내고 예중천은 물건이 쌓인 창고에서 아무렇게나 지냈다.수많은 시간 동안 성연은 모든 약초의 이름과 조제 배합 방법을 외우고, 약을 달이고 침을 놓는 방법을 끊임없이 학습했다.그 시간은 아주 단순한 즐거움이었다. 성연은 이런 걸 배워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몰랐지만, 스승은 줄곧 성연에게 이 기술들이 실전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일단 대수롭지 않은 병이 생기면 점점 성연에게 진료를 의뢰하기 시작했다. 계속 연습하면서 성연의 의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심지어 지방의 언론 매체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그때는 이른바 소녀 신의를 방문해서 취재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성연은 매일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결국 이장을 찾아간 성연은 앞으로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게 한다면, 마을 사람들의 병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마을 사람들도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이런 공짜 의사가 정말로 가 버리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그날이 될 때까지.스승님은 성연에게 이미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스승님 자신은 평생 절대 놓칠 수 없는 원수와 줄곧 맞서야 한다고!그때 성연은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다만 스승님이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 목이 쉬도록 울었다.사부님은 마지막으로 의학 서적들을 모두 성연에게 건네주면서 당부했다.“잘 배워두도록 해라. 이 책들은 네가 보관하거라. 앞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내게
밤새 성연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어릴 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예전에 성연이 스승을 만났던 그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처럼 퍼부어서 마을 사람들은 외출도 하지 못했다. 빗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가 없었더라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어린 성연은 모습을 보고 나쁜 사람이 온 줄 알고는 깜짝 놀랐다.그러나 그 사람이 마침내 진창길에 쓰러지자, 용기를 낸 성연은 우비를 입고 뛰어갔다.처음에는 정말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스승님의 얼굴 반쪽에는 이미 진흙이 가득 묻은 채 진창 속에 잠겨 있었다. 얼굴은 온통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남루한 옷차림이어서 거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몇 번이나 소리쳐 깨우면서 설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자 두려워진 성연은 재빨리 마을 이장님 댁으로 달려갔다.비록 아직 세상 물정은 몰랐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장님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성연은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결국 이장님을 불러낼 수 있었다.‘이장님은 아마도 스승의 생김새가 희고 멀끔해 보이자, 시골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있는 도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보수를 좀 챙기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장님이 자기 친척을 불러서 결국 스승님을 구할 수 있었지.’‘뜨거운 죽 한 그릇과 작은 장작불이 결국 스승님을 다시 살려낸 거야.’얼굴의 진흙도 떼지 못한 스승은 성연과 눈빛이 부딪치자 미소를 지었다.“네가 날 구했지, 그렇지?” 예중천이 물었다.어색해진 성연은 이장만 보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장이 바로 사실을 얘기했다.“이 아이가 당신을 발견한 뒤에 나를 불렀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당신은 도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이런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겁니까?”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중천은 손을 뻗어 너덜너덜한 옷 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 낡아서 헤진 지폐 몇 장을 꺼냈다.만 원짜리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