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집으로 돌아간 송종철이 임수정과 송아연에게 이 일을 전했다.그러자 임수정이 송종철에게 욕을 퍼부어댔다.“사과? 송성연 그 촌 것이 무슨 자격으로? 그럼 내가 뭐가 돼냐고?”“그러게 아빠, 걔한테 사과하라는 건 나더러 죽으라는 말 아냐? 정말 촌닭 송성연 같은 애한테 사과하라고 하느니 차라리 날 죽여.” 아연이 얼굴 가득 혐오감을 드러내며 거부했다.두 모녀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송성연 그 애가 자격으로 자신들의 절과 사과를 받느냐는 것만 생각했다.좀 더 이성적이라 할 수 있는 송종철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강씨 집안에서 말을 해 주지 않는 이상 북성에서 아연을 받아줄 학교는 없었다.이전엔 함께 욕하던 송종철이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질책했다.“소란 피우지 마. 이제는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야. 성연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귀염을 받고 있어. 강씨 집안 회장님이 직접 아연이 너더러 와서 사과하라고 하신 거야. 물론 나도 같이 고개 숙이고 잘못을 빌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를 외국으로 보내 공부시킬 수밖에 없다.”송종철 또한 여러 가지로 성연이 맘에 들지 않았다.괴롭기 그지없지만, 부득이 현실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학위도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야.“아빠, 전 외국에 나가지 않을 거예요. 난 계속 북성남고에 남을 거라고요.”아연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해외로 나가게 되면 강제로 떠밀려 간다는 자패감에 스스로 창피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신을 몰아낸 것이 다름아닌 송성연이라니.송성연, 그 촌닭, 촌뜨기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그런 자신에게 사과하라는 건 스스로 내 뺨을 때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성연은 틀림없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어렸을 때부터 아연은 내가 직접 데리고 키웠다구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애를 외국으로 보내서 어쩌려고? 혼자 집을 떠나보내다니, 당신 그럴 수 있어요? 당신한테 경고하는데, 아연이 정말 외국으로 보
그날 저녁.방과 후, 할머니 안금여의 병실에 들어서던 성연은 송종철, 임수정과 송아연 일가족이 모두 와 있는 걸 보았다.막 문을 들어서자 임수정이 친한 척하며 다가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성연아, 학교 갔다 왔어?”이 가족들을 본 성연은 기분이 확 나빠졌다.임수정의 손을 차갑게 밀어내며 병상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할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이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여기 왔을 리가 없다.송씨 일가족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한 자리에 모인 건 정말 드문 일이다.안금여가 침착하게 말했다.“이 분이 여동생과 함께 너에게 사과하러 왔단다. 지난 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너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나도 막지 않았다.”안금여는 임수정을 말하며 성연의 ‘새어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계모’라는 말도 가당치 않았다.기껏해야 낯선 아주머니일 뿐.그게, 내내 온갖 짓으로 성연을 괴롭힌 행태에 딱 맞는 표현일 거다.그래도 ‘이 분’이라고 존칭은 써 준 셈이다.그리고는 송종철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사과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성연이 왔으니 해 보시지요.”병실에 죽치고 있는 이 가족을 보는 것도 눈에 거슬리고 피곤했다.빨리 끝내고 나가기만 기다리는 심정이다.“회장님, 저희 아연이가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커서 낯을 많이 가립니다. 시간이 좀 필요한 모양입니다. 너그러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송종철이 얼른 대신 변명하며 아연을 다그쳤다.“언니에게 얼른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빌어. 한 가족 아니냐, 언니가 용서해 줄 거야.”송아연은 제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런 아연을 지켜보던 안금여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버릇이 잘못 들었으면 지금이라도 바로 가르치면 늦지 않겠지요. 설마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다. 하기 싫으면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마. 다들 나가세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군요.”속으로 분을 참고 있던 아연은 성연에게 사과하고
아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험지를 훔쳤다. 성연을 모함하기 위해서. 시험문제는 보지도 않았다.‘송성연, 분명히 일부러 저런 말을 한 거야.’강씨 집안을 옆에 낀 성연의 말은 힘이 있었다. 의기양양한 그 모습을 보노라니 또 화가 치민다.옆에서 지켜보던 임수정 역시 이를 갈며 성연을 향해 불만을 드러내었다.“말이 너무 지나치잖니? 아직 어린 동생이 철이 없어 그런 건데!”성연에게 사과하러 오는 것까지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계였다.지금 제 후원자를 믿고 일부러 자신들을 모욕하고 있는 거 아닌가?자기 눈앞에서 방자하게 구는 성연을 임수정이 어찌 용납할 리가.참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기어이 입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하, 저 심보가 십만 팔천 리나 뻗었지? 성연이 조소를 날리며 비아냥거렸다. “곧 성인이 되는데 아직 철이 없어? 너 지능이 없는 거니? 아니면 원래 머리가 없는 거니? …… 그리고 괜히 나를 탓하고 원망하는데, 어쩌죠? 저 그렇게 대단한 능력 없어요. 학교에 압력을 행사하다니요. 학교에서 거부하는 건 본인이 저지른 더러운 짓 때문이라는 거 모두 다 아는 일 아닌가요?”솔직히 송아연 같은 애는 성연이 손 댈 가치도 없었다.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었다.게다가, 저 멍청한 머리로 지 스스로 죽을 길을 찾는 거 아냐? 자기 꾀에 빠져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저런 쓸모없는 짓을 성연이 할 필요가 아예 없었다.아연의 얼굴이 매우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만약 그때 그 일이 성연의 짓으로 되었다면, 적어도 그녀의 명성은 여전할 것이고 체면도 살아있겠지.하지만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자 모든 학교들이 아연을 거절하는 것이다.그녀의 아름다운 성적과 피아노의 성과들 모두 한 차례 우스개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어느 사이 뭔가 획 지나가는 듯하더니 뺨이 화끈거렸다.아연이 억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본 임수정이 성연을 비난하려는데, 송종철이 손을 잡아당겼다. 그녀에게 눈빛으로 안금여 쪽을 가리켰다.그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치솟는 듯한 화는 어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송종철은 속으로 또 한 차례 경악했다.이건 또 어떻게 된 거야? 성연이 총애 받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벌을 받는거지? 이거 보아하니, 마냥 총애받는 것 같지도 않구만.성연에 대한 강씨 집안의 태도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안금여 곁에 있던 강운경도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역시 시골에서 와서 그런지 교양이 없구나. 이제 보니, 예의 선생님을 불러 계속 가르쳐야겠다. 나중에 우리 집안 어른께도 이렇게 대들면 어떡할 거야?”성연은 강운경과 안금여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무서워 벌벌 떠는 모습을 연기하며 두 사람의 연극에 동참했다.“할머니, 제가 잘못 알았어요. 제가 예의를 몰라서 그랬어요.”말하면서 있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는 척했다.“그만 해라. 옹졸한 모습은 사람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야.”안금여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임수정, 송아연 두 모녀는 안금여의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해졌다.자신들이 생각했던 전개와 달랐다.마침내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 안금여가 고개를 돌려 송종철에게 말했다.“사과도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나중에 학교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죠.”송종철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회장님, 감사합니다.”기실 그 말은 공수표나 다름없었다.안금여가 어느 학교에다 얘기해 놓든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그들은 아연이 북성남고에 계속 남아 있게 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안금여의 생각은 확연히 달랐다.그러나 어찌되었든 학위를 건사할 수 있게 됐으니 아연을 외국으로 보낼 필요가 없게 됐다.이렇게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송종철이다.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한 뒤 임수정과 아연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병실을 나오자마자 안에서 당한 억울함과 불만의 말들이 임수정과 송아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송종철, 당신 설명 좀 해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송성연 그것이 총애를 받는다는 게 이거야? 오늘 얼굴을 못 들 정도로 망신
병실 안.사람들이 다 나가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안금여는 편안한 자세로 베개에 기대었다.송종철 일가를 상대할 때에 비해서 훨씬 부드러운 음성이다.“나이도 어린 것이 머리를 꽤 많이 쓰는구나.”송아연은 자신이 꾸며내는 말과 행동을 사람들이 못 알아챌 거라고 착각했다.사업을 하는 동안 다년간 장사치들 틈에서 굴러온 안금여와 강운경이었다. 속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들의 눈에 훤히 보였다.마냥 어린 계집아이가 마음속에 몇 근 몇 냥이 들어있는지 다 읽혔다.강운경도 혐오감이 일었다. 진심이라곤 없이 이런 잔꾀 부리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다. “연기도 제대로 못하더군요.”‘송씨 저 세 가족은 하나같이 정말 진상이었다.’‘가치관이 저리도 삐뚤어지다니, 참.’‘그래도 성연이가 저들과 같이 지내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그렇지 않았으면 성연을 어떻게 가르쳐 놨을지…….’성연은 여전히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방금 전의 분위기에서 아직 못 빠져나온 듯했다.이런 성연의 모습을 본 안금여는 웃음을 참기 힘든 듯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사람들 다 갔는데 계속 연기할 테냐?”성연이 고개를 들며 일부러 불쌍한 척했다.“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셨잖아요? 설마 가짜였어요?”능청스러운 성연의 말에 기가 찬 웃던 안금여가 짐짓 나무라듯 말했다.“이런 영리한 것 같으니라고. 네가 무릎을 꿇고 싶다면 내가 그렇게 해 주마.”아이고, 요 녀석, 혹시라도 야단 맞을까 봐 이렇게 또 확인까지 하는 것 봐.일부러 그러는 거지.그러나 이제는 송성연이라는 이 아이를 보물같이 여기며 친손녀처럼 대했다.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사람은 돌아보지도 않는 안금여다.그런데 성연을 위해 대신 신경 써서 화풀이까지 해주었다.조금전의 연약한 모습은 싹 씻어 낸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윽, 무릎 꿇기 싫어요. 할머니께서 화 내시는 시늉을 하시면서 저 대신 화풀이 해주셔서 정말 감동 받았어요. 자, 이제 제가 할머니께 안마
업무를 끝낸 무진이 마침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입구에서부터 안금여의 웃음소리 사이로 대화하는 음성이 간간이 들렸다.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할머님, 뭐를 빼지 않는다고요?”“내가, 성연이 안마 솜씨가 좋아서 틈틈이 너도 해주라고 했거든. 어쩜 너한테 이런 복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안금여는 웃으며 무진을 놀렸다.다시 담담한 얼굴을 한 성연이 계속해서 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성연을 한 차례 눈으로 흘깃한 무진이 입을 열었다.“할머니, 성연이가 매일 밤 안마해 줍니다. 다리가 많이 좋아졌어요.”성연이 만져 주기는 했지만 안금여가 생각한 만큼 횟수가 많지는 않았다.그런데도 무진은 수긍하고 받아들였고 다른 불만도 없었다.언제나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던 무진이 이런 말을 하자, 이 두 어린 부부의 감정이 꽤 괜찮은 듯 보였다.안금여는 더없이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이 어린 손주 며느리를 보며 감탄하는 한편, 과연 자신이 애쓴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했다.저녁, 병원에서 저녁을 먹은 후.안금여가 입을 열었다.“성연아, 너는 무진이를 따라 집에 가거라. 병원엔 너희들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어. 어쨌든 성연이 내일 또 학교 가야 하지 않니? 이런 늙은 사람 때문에 학업을 그르치면 안되지.”매일 병실로 오는 성연이다. 이런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다소 망설이는 듯한 무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요즘 병원에서 밤에 계속 고모님이 계셨어요. 낮에는 회사 업무를 보시는데, 많이 힘드실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무진이 자신에게 적극 관심을 보이자 곁에 있던 운경의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얼굴 표정도 부드럽게 풀어졌다.“무슨 고생이랄 게 있나? 네 고모부도 병원에 있으면서 잘 챙겨주지 않니? 걱정하지 마.”“그럼 고모도 건강 잘 살피세요.” 어쩔 수 없는 듯 무진이 성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도착한 후, 책가방을 집어 던진 성연이 물과 간식을 챙겨서 컴퓨터를 켰다. 목욕을 하고 나
성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진행하던 무진의 1차 치료 과정이 아직 덜 끝난 상태인데 지금의 현 상태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적당한 운동이 필요했다.결국 일어난 성연이 무진을 뒤로 살짝 밀었다. “뒤로 좀만 가요.”방안에서, 휠체어를 타지 않는 무진이 성연의 말을 따라서 살짝 뒤로 물러섰다.자세를 취한 성연이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느린 동작으로.몇 분 후, 동작을 마친 뒤 무진을 바라보며 확인했다. “기억하셨죠?”기억하긴 했다. 모두 간단한 동작들이니까.하지만 아리송한 표정의 무진이 말을 끌었다.“근데 이거…….”무진의 뚱한 표정을 본 성연이 냉소를 지었다.“아저씨, 이 동작들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리 회복에 정말 효과가 좋아요. 다른 사람은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고요…….”겉보기에는 느릿느릿한 것이 노인들의 스트레칭 자세와 비슷했다.정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에, 무진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꼭 해야 돼?” 그래도 강씨 집안의 장손으로서 체면이 있지.“물론이죠, 제가 가르쳐 드린 것들 중에 틀린 것 있었어요? 봐 봐요, 이 동작은 하체의 근육과 뼈를 모두 스트레칭 할 수 있어요. 아저씨의 굳은 다리 근육을 풀어주는 데 이만한 운동이 없어요.”성연이 이치에 맞는 소리들만 읊었다.“다른 방법은 없어?” 여전히 체면을 내려놓지 못한 무진이 주저했다.“없어요.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내 다리도 아닌데요 뭐…….” 살짝 기분이 상한 성연이 눈을 흘기며 자리를 뜨려 했다.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환자가 바로 이런 비협조적이면서 의사를 못 믿는 이들이다.무진이 바로 성연의 손을 잡았다. “미안, 바로 할게.”성연은 한숨을 돌렸다. 이 또한 그를 위해서다.그의 이런 투정은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가던 걸음을 멈춘 성연이 고개를 돌려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처음해보는 동작
한 세트의 스트레칭 동작을 다 끝낸 무진은 다리가 천근만근 같이 느껴져 들어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다리를 살짝 움직여 보니 왠지 이전보다 훨씬 느려진 듯했다.성연이 흘깃 보더니 설명했다.“정상이에요. 굳었던 근육이 이완되어서 그런 거에요. 지금 바로 침 맞고, 다시 약욕을 하면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어요.”성연은 바로 창고에 가서 무진에게 쓸 약을 조제하기 시작했다.시간이 늦어 집사와 고용인들 모두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없었다.다른 사람을 귀찮게 할 수 없으니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약을 한쪽에 놓고 무진을 눕힌 성연이 침을 놓기 시작했다.천천히 침을 놓는 성연에게 무진이 갑자기 물었다.“피곤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했지만, 곧장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그럼 안 피곤하겠어요?”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게임 좀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었는데, 이렇게 산통을 깨다니…….마음속에서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왔다.하지만 그저 속에서 담아둘 뿐, 1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을 받고 입을 싹 닦을 수는 없을 터.100억, 물론 그녀한테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고생이네.” 무진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그의 음성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낮고 묵직하니 듣기 좋은 음성이 불쑥 귓가에 닿으니 성연의 귀가 간질거렸다.무진의 얼굴, 목소리, 몸매까지 모두 성연에겐 최고로 느껴졌다.무진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들킬 뻔했다.얼굴이 점차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성연은 일부러 앙칼진 말투로 부끄러움을 감추었다.“의사가 진찰할 때 말을 아껴야 하는 거 모르세요? 만약 침을 잘못 놓기라도 하면 어쩔거에요? 저는 책임 못 져요.”하얀 피부에 피어오른 홍조가 귓바퀴까지 번지며 아주 선명했다.성연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아차린 무진이 가볍게 웃었다.눈을 크게 뜬 성연이 무진을 노려보았다. 무진은 별일 없는 듯 침착하게 눈을 감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은침을 다리에 놓고 성연은 욕조에 약재를 넣고 물을 받기 시작했다.약효
외삼촌에게 차를 주자, 외삼촌은 드라이브를 하면서 이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겠다고 말했다.그래함이 자신을 속이는 건지 보려는 것이다.외삼촌이 차를 몰고 가자 성연과 그래함, 유채연만 남게 되었다.오늘 손님이 오기 때문에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자세히 헤아려 보니 외삼촌은 정말 디테일한 사람이야.’“채연 언니, 우리 쇼핑하러 가요.” 성연이 다가가서 유채연의 팔장을 꼈다.“그래.” 유채연은 성연이 쇼핑을 하려는 걸로 생각하고 함께 갔다.성연이 유채연을 데리고 온 곳은 모두 고급 쇼핑몰이었다.유채연도 옷을 좀 사고 싶었지만, 가격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성연은 흰색 원피스를 유채연의 몸에 대고 비교해 보았다.“채연 언니, 이 원피스가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 보세요.”“난 됐어. 네가 맘에 들면 사.” 방금 유채연은 가격표를 언뜻 봤다.‘너무 엄청난 가격이야.’‘원피스 한 벌에 어떻게 가격이 이렇게 비쌀 수 있는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어.’‘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야!’“언니, 이 치마가 정말 잘 어울려요. 한번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 성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채연을 바라보았다.눈앞의 원피스를 보고 유채연은 망설였다.“채연아, 한번 입어 봐.” 그래함도 유채연이 이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유채연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기대되면서도 머뭇거렸다.마침내 결정을 내린 뒤에 옷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확실히 잘 어울리네.’유채연은 한번 입어 본 걸로 만족했고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성연과 그래함이 번갈아 설득해서 유채연도 결국 옷을 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또 유채연에게 많은 옷을 사주었다.처음에는 유채연도 두 사람이 돈을 쓰는 걸 걱정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유채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중에는 돈을 쓰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예쁜 옷을 많이 산 뒤 그래함이 뒤에서 가방을 들어주었다.그래함의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성연은 또 유채연을 끌고
“정말 변변치 못하게!” 외삼촌은 유채연을 노려보았다.그래함은 외삼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했다.‘외삼촌은 이게 채연이가 만약에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거야.’그래서 그래함도 지나친 요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이런 것들을 채연이에게 주는 것도 당연한 거야. 여기에 그치지 않고 채연이에게 훨씬 더 잘 해 줄 거야.게다가 외삼촌과 유채연은 그래함의 지위에 대해서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이 정도의 돈은 그래함에게 있어서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유채연이 직접 음식을 준비해서, 외삼촌 가게 뒤의 정원에서 모두 함께 밥을 먹었다.외삼촌의 표정은 시종 좋지 않있다.밥을 다 먹고 유채연이 치우려고 하자 외삼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놔 둬! 나 혼자 해도 돼! 너는 그럴 시간이 있으면 가서 너 자신이나 좀 꾸며.”외삼촌은 말하면서 유채연을 물러서게 했다. 유채연이 비틀거리자 그래함이 뒤에서 유채연을 부축해 주었다.그리고 유채연을 데리고 나갔다.집 앞에 와서야 유채연은 그래함과 성연에게 미안한 듯이 웃었다.“정말 미안해. 외삼촌이 바로 저런 성격이셔. 미안해.”“언니, 외삼촌이 이런 성격인 건 우리도 이해할 수 있어요. 외삼촌이 치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우리 좀 걸어요. 이쪽의 풍경이 좋네요.” 성연은 유채연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래함과 성연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고, 유채연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그들은 주변을 한가롭게 걸었다.길가에서 자동차 판매점을 본 그래함이 걸음을 멈추었다.유채연과 성연은 고개를 돌려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연이 그래함에게 물었다.“사형, 왜 그래요?”“우리 들어가서 한번 보자.” 그래함은 판매점 안으로 들어갔다.그래함이 뭘 하려는 건지 몰랐지만, 유채연과 성연도 그래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그래함은 한참동안 살펴보았다.여기는 읍내라서 그다지 비싼 차가 없었다. 겉모습이 좋아 보이는 차는 성능이 좋지 않았고 성능이 좋은 차는 스타일이 좋지 않았다.겨
“그렇게 하겠습니다.” 외삼촌이 말한 걸 그래함은 모두 승락했다.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외삼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유채연은 외삼촌이 제시한 조건들에 대해서 아주 불만이었다.‘내가 그래함과 함께 하는 건 두 사람이 예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그러나 지금 외삼촌이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는데, 오히려 내가 그래함의 돈 때문에 그래함과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유채연이 항의했지만 외삼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함을 바라보았다.“어때? 내 이 조건들을 자네가 승낙한다면 채연이가 자네와 함께 떠나도 돼. 자네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그럼 말할 필요도 없지!”유채연이 다시 말을 하려고 했지만, 바로 뒤에 있던 성연이 유채연의 옷소매를 당기면서 권유했다.“사형에게 저런 요구를 한 건, 외삼촌이 언니에게 사고가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이 몰락하게 될까 봐 일부러 이런 요구를 한 거예요. 만약 언젠가 정말 의외의 사고가 생긴다 해도, 언니가 읍내로 돌아올 수 있게 말이죠.”옆에 있던 성연은 벌써 외삼촌의 뜻을 알아차렸다.‘외삼촌이 말한 조건은 모두 채연 언니에게 유리한 것들이야.’‘외삼촌은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돈도 채연 언니 계좌에 넣고, 집 명의도 채연 언니 앞으로 하라고 했어.’‘모두 채연 언니에게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한 거야.’성연도 그제서야 외삼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삼촌의 마음이 이렇게 세심한 줄은 몰랐어.’‘사형이 채연 언니를 아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외삼촌이 말한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야.’‘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해. 결국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유채연도 그제서야 외삼촌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외삼촌의 요구는 모두 나를 위해서였어.’유채연은 더더욱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저 그래함을 바라볼 뿐이다.“외숙부님이 말씀하신 건 다 문제없습니다. 채연이에게 사 줄 집을 한번
성연은 식당 입구의 작은 가게에서 그래함과 유채연을 기다렸다.두 사람이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성연은 두 사람이 함께 하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성연은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그래함이 유채연을 데리고 가더라도 바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유채연의 외삼촌이 별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해도.그러나 유채연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유채연을 데려간다면 그래함은 반드시 외삼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그래함은 유채연과 함께 돌아가서 외삼촌을 만났다.외삼촌이 그래함을 난처하게 만들 것을 염려해서, 유채연은 원래 그다지 외삼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외삼촌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유채연도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생각해보니 외삼촌은 아마 동의할 것 같아.’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유채연의 외삼촌은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외삼촌.” 유채연은 그래함의 뒤에 숨은 채 외삼촌을 바라보았다.‘외삼촌은 지금까지 내가 여기서 살게 해주셨어.’‘어쩌다 내게 온정을 보이기도 했지만.’유채연도 외삼촌 본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외삼촌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그래함은 유채연의 손을 토닥이면서 긴장을 풀고 모든 건 자신에게 맡기라는 눈짓을 했다.“외숙부님.” 그래함이 유채연과 함께 외삼촌 맞은편에 앉았다.외숙부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외삼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험악판 표정을 지으며 그래함을 바라보았다.“지금 뭐라고 했어? 나는 당신 같은 조카는 없어.”그래함은 오히려 외삼촌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이제 모두 한 가족이 될 테니까 제가 외숙부님이라고 해야지요.”그래함의 말에 반박하려던 외삼촌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대감에 가득 찬 유채연의 눈빛을 마주하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무슨 일이야!” 외삼촌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래함을 쳐다보았다.“저는 채연이를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여기서 나가서 더 잘 살 수 있게
이튿날 오후, 가게문을 닫은 뒤 유채연은 성연의 안내로 그래함을 만났다.이번에는 유채연의 수줍은 성격을 고려해서, 밀크티 가게가 아니라 칸막이가 있는 식당을 골랐다.엉성한 칸막이지만 그래도 모두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잘생긴 그래함을 보자, 유채연의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유채연이 그래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없었다면 그 옥노리개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채연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함이 유채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다 괜찮아.” 유채연은 그래함을 똑바로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함은 이렇게 멋스러운데, 나는 진흙밭의 진흙일 뿐이야.’요 몇 년 동안 유채연은 전혀 자신을 꾸미지도 않았다.날마다 그럭저럭 지냈을 뿐이다.지금은 그래함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래함에게 어울릴 수 있겠어?’그래함이 종업원을 불러서 가정식 요리를 몇 개 시켰다.모두 유채연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그래함이 시키는 요리 이름을 들으면서, 유채연은 놀라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그래함이 유채연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어?”“당신...”그래함이 자상하게 대할수록 유채연은 더 열등감을 느꼈다.‘나한테 무슨 덕과 능력이 있어서 이런 사람에게 어울리겠어?’“애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음식부터 먹자.” 그래함의 마음은 더 긴장하면서 안절부절 못했다.이번에 또다시 거절 대답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성연은 턱을 괸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유채연은 그다지 먹고 싶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함은 수시로 유채연에게 음식을 집어 줬지만, 식사하는 내내 유채연을 쳐다보느라 음식도 그다지 먹지 않았다.안타까움이 가득한 식사였다.가까스로 식사를 마친 뒤, 그래함은 종업원에게 앞의 음식을 치우고 주스와 과일을 내오도록 했다.그래함이 유채
“나도 모르겠어.” 유채연은 고개를 저었다.이 옥노리개를 보고 유채연은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그러나 여전히 모든 걸 맡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언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 언니가 사형을 믿지 않는다면, 먼저 사형을 좀 지켜보다가 적당할 때 다시 승낙하면 돼요.” 성연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유채연을 너무 팽팽하게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언니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할 수밖에 없어.’“하지만...”유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언니하고 사형 두 사람의 일이잖아요.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그래도 사형을 한번 만나보세요.” 성연은 입이 닳도록 말하면서 언제 유채연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느꼈다.합쳐진 옥노리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연이 마침내 용기를 냈다.“알았어. 그래함과 얘기해 볼게.”유채연도 그래함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말만 하는 거니까 별거 아니야.’마침내 이 말을 듣자 성연은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드디어 유채연을 설득한 것이다.“그래요. 언니에게 기회를 주고 그래함 사형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만 그래도 고려해 봐야겠지요.” 성연은 드디어 해냈다고 생각했다.‘오늘 헛걸음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고마워.” 유채연은 손에 든 옥노리개를 꼭 쥐었다.‘만약 성연이가 내게 그렇게 많이 권하지 않았다면.’‘아마 그래함을 만나지도 못했을 거야.’‘하지만 이렇게 비참해진 나한테 더이상 비참한 일은 없을 거야.’‘그러니 나도 한번 노력해보겠어.’“언니, 자신의 마음을 존중하고 선택하면 좋겠어요.” ‘채연 언니가 사형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 아니야.’“그럴게.” 유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채연이 성연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성연은 그래함 때문에 사양했다.유채연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온 성연이 문을 열자, 그래함이 옆방에서 걸어 나왔다.‘사형이 계속 이쪽의
성연이 보니 이제 때가 된 듯했다.그래서 유채연에게 그래함 얘기를 꺼냈다.“채연 언니, 사형이 이번에 돌아온 건 바로 언니 때문이에요. 사형은 바로 언니를 찾으려고 온 거죠. 사형이 언니한테 어떻게 너에게 대하는지 언니도 봤을 거예요. 사형은 정말 언니를 좋아해서 언니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언니도 앞으로 결혼하겠죠, 그렇죠? 그런데 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아요?”성연이 한 말도 일리가 있지만 유채연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이 소멸되다시피 했다.유채연에게는 전혀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유채연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래함에게 어울리지 않아.”말을 마친 유채연이 또 눈물을 흘렸다.그래함의 찾아와서 유채연의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그러나 유채연은 자신과 그래함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자신은 이미 감히 그래함을 원할 수 없었다.성연은 유채연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감정의 일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어.’‘좋아하는데 그냥 함께 하면 돼잖아.’‘게다가 두 사람은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어.’‘하지만 지금 채연 언니에게는 사형의 신분이 큰 문제야.’성연도 이해할 수 있었다.‘미래가 정말 너무 막막할 거야.’성연이 갑자기 반쪽짜리 옥노리개를 꺼냈다.옥노리개를 본 유채연은 깜짝 놀라면서 뭔가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이 옥노리개를 뜻밖에도 그래함이 여전히 가지고 있었어.’성연이 옆에서 말했다.“그래함 사형은 줄곧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여자친구도 없이 줄곧 언니를 기다린 거예요.”유채연이 목에 차고 있던 다른 반쪽의 옥노리개를 이어 붙이자, 완전한 옥노리개가 되었다.흥분한 유채연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나는 원래 그리움에 이 옥노리개를 남겨 두었을 뿐이야.’‘그동안 그래함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은 전혀 몰랐어.’“그동안 그래함에게 정말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 유채연
저녁 무렵에 성연이 다시 왔다.두 사람이 이번에 온 목적이 유채연을 데려가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그래함도 오고 싶었지만, 유채연의 감정이 너무 격해질까 봐 성연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메로나 두 개요.” 카운터 앞으로 바로 간 성연이 유채연을 향해 말했다.성연의 출현에 유채연의 마음도 흔들렸다.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성연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채연은 말없이 묵묵히 냉장고에서 메로나 두 개를 꺼냈다.“여기 있어. 돈은 필요 없어.”성연은 미소를 지었다. ‘채연 언니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언니 마음은 항상 착해.’성연도 계산을 하지 않고 포장을 뜯고 먹으면서 나머지 한 개는 유채연에게 주었다.“채연 언니, 여기요.”성연이 자신에게 줄 줄은 몰랐기에 유채연은 놀라서 성연을 바라보았다. 성연이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 언니도 우리에게 하드를 많이 사줬잖아요.”유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과거의 기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사람이든 일이든 다 똑같아.’유채연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성연이 주는 하드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성연이 고개를 돌려 유채연을 보면서 감탄했다.“채연 언니, 언니는 이전보다 더 예뻐졌어요.”‘채연 언니는 정말 예뻐.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여전히 부드럽고 아름다워.’‘이전과 달리 언니의 미모가 세월 속에 쌓였어.’유채연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이렇게 거친 얼굴이 어디가 예쁘겠어.”‘내가 좀 더 나은 모습이라면 그래함과 함께 할 용기가 있을 텐데.’‘그러나 세상 일은 종종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피부 관리만 잘하면 돼요. 화장만 하면 천상의 선녀보다 더 예뻐요.” 성연은 유채연의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때때로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거나 손님이 많은데 유채연이 바쁠 때면, 성연도 옆에서 도와주었
이때 산책하고 돌아오던 외삼촌이 성연을 보고는 불만을 표시했다.“걔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왜 또 강요하는 거야? 나는 성질 좋은 사람이 아니야. 채연이를 괴롭히지 마.”외삼촌의 말을 들은 성연은 유채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성연도 중재자일 뿐이기에 유채연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는 없었다.지금 유채연의 외삼촌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더 불편했기에,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성연이 나간 뒤 외삼촌을 보면서 유채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그 자리에 선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없이 가슴 아프게 했다.유채연의 이런 모습을 본 외삼촌은 크게 화를 냈다.바로 유채연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너 왜 그래? 아까 그 남자가 바로 네 사진 속에 있던 걔가 맞지? 그 사진을 몇 년이나 보고 있었는데,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그럼 나가. 이 작은 가게는 나 혼자서도 관리할 수 있어.”예쁘고 부지런한 유채연이 요 몇 년 동안 일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유채연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채연은 응하지 않았다.맞선을 볼 때마다 유채연은 자기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언젠가 문을 잠그는 걸 깜빡했을 때, 외삼촌이 무심코 유채연의 손에 든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유채연은 마치 보물을 대하듯이 사진을 보고 있었다.그때 외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그 사람이 정말 나타났는데 조건도 아주 좋아 보여.’‘채연이가 그 남자와 함께 한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야.’외삼촌의 말에 유채연은 순간 멍해졌다.유채연은 자신이 나간다고 하면 외삼촌이 제일 먼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자신이 떠나면 외삼촌을 챙겨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유채연의 눈에 외삼촌은 줄곧 나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래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삼촌이 자신을 돌보고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다.‘외삼촌이 가끔씩 말을 거칠게 해도 속마음은 부드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