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주최 측의 관계자가 다가오자 업계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었다.송민준 역시 곽승재와 여시은을 알아본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곽 대표님까지 참석한 걸 보면 오늘 시상식 규모가 꽤 크네요.”고은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 곽승재가 여시은과 함께 다가왔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얼마 전까지는 그 인플루언서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온라인에서는 곽승재가 마재경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기사까지 돌고 있었다.‘정식적인 자리라서 파트너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은서야, 송 대표님.”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이전에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송민준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고은서는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시은 씨.”“우리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거리감 두는 거야?”여시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은서야, 혹시 내가 곽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걸 보고 오해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시... 아니, 시은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알았어. 장난이야.”여시은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사실 아빠가 시상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곽 대표님도 오늘 시상자여서 목적지도 같은 김에 같이 판주 투자은행에서 출발했어.”“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가서 민아 좀 보고 올게요.”송민준이 자리를 떠나자 여시은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서야, 송 대표님도 너 좋아하는 거지? 개업식에서 너 대신 페인트도 맞았잖아.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평소에도 너한테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 아닐까?”민시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날 좋아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많겠어. 송 대표님은 그냥 파
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어리둥절해졌다.“이상형이라면... 고은서, 너 설마 정말 우리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만약 진짜라면 완전 우리 집 경사인데. 우리 엄마 아빠가 오빠를 장가보내는 일로 얼마 골치 아파하는지 알아?”고은서는 흥분한 송민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먼저 진정해 봐. 나 네 오빠 안 좋아해.”송민아는 이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하긴. 곽승재랑 민시후 같은 남자가 널 따라다니는데 우리 오빠가 어떻게 눈에 들어오겠어.”“...”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송민아의 반응으로부터 송씨 가문에 송민준을 장가보내는 일로 하루 이틀 머리 아파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그저 한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송민아는 거침없이 모든 걸 다 알려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오빠 이상형에 관해서 묻는 거야?”송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답했다.“민시후가 전에 네 오빠가 일밖에 모른다면서 연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나 대신 페인트를 막아준 것도 있고 또 그 후로도 날 몇 번이고 도왔잖아. 그래서 민시후가 네 오빠가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적이 있거든.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까 여시은이 말하니까 나도 확실하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오빠가 설마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송민아는 장난치는 대신 아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오빠가 특별히 어느 여자한테 잘해주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집에서도 여자를 소개해주곤 했는데 정말 일밖에 모르는 기계 사람처럼 굴어서 결국엔 다 수포로 돌아갔거든. 그래서 이상형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민시후랑 관계도 꽤 좋고 해서 걔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한테 호감을 표시하진 않을 것 같은데.”고은서는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한 번 더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잘난체한다고 오해하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놓아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상을 받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던 것 같네요.”사회자도 눈치 있게 타이밍에 맞추어 곽승재한테 나이가 제일 어린 수상자인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해주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곽승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가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할 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축하합니다.”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지만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관중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여시은이 눈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앞쪽에 있는 좌석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그러나 뜻밖으로 그녀는 박수도 치지 않고 물잔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여시은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곽승재가 무대 아래로 내려간 후 고은서와 나머지 두 수상자는 각각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큰 포옹을 하면서 축하해줬다.“정말 너무 멋있어. 축하해!”“너도 충분히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고은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시상식은 열 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밖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송민아는 기사한테 연락하러 가고 고은서는 사람들과 함께 호텔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저녁 시간이어서인지 바람이 약간 쌀쌀했다.옷을 얇게 입은 고은서가 추위 때문에 팔을 비비고 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에게 옷을 걸쳐주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송민준이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면서 말했다.“민아는 아직 통화 중이에요. 기사가 곧 도착할 거라고 전해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했다.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외투를 벗어 돌려주려고 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외투는 민준 씨가 입고 있으세요.”그러나 송민준은 웃으면서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입고 있어요. 감기라도 걸리면 업무
고은서는 고민 끝에 주말에 해야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다면서 여시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시은도 강요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마침 기사가 도착하면서 고은서는 여시은과 간단히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민아는 민준 씨한테 맡길게요.”고은서는 말하면서 외투를 다시 송민준에게 돌려주었다.“외투 고마워요. 차에 앉으면 별로 춥지 않으니까 도로 가져가세요.”송민준은 그제야 외투를 받으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조심해서 들어가요.”“네.”고은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송민준은 멀어지는 차량을 보면서 외투를 자신의 팔에 걸쳤다.“친절하시네요.”곽승재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준은 그의 날이 선 말을 무시하면서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별말씀을요.”곽승재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떠났다.“힘내세요.”여시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송민준을 보면서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곽승재를 뒤따라갔다....토요일.고은서는 늦잠을 실컷 자고 고준석을 보러 본가로 가려고 했다.그러나 옷을 다 차려입고 집 문을 나서자마자 엘리베이터 쪽에서 익숙한 여자 한 명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인풀루언서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몸에 딱 붙고 짧은 옅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볼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고 가녀린 허리도 밖에 드러나 있었다.아래에는 베이지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청순하면서 섹시함을 잃지 않았다.그녀의 옆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마재경도 고은서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도 이 아파트 주민이세요?”고은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이곳 주민이냐고 물은 거지? 설마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거야? 심지어 나랑 같은 동 같은 층에 산다고?’“그럼 우리 이웃이겠네요.”마재경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인 듯했다.“며칠 동안 고민 끝에 여기가 환경도 좋고 위치도 좋아서 이곳으로 선
“안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조금 이따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육현석이 시무룩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의 말에 응대하지도 않았다.이를 본 육현석은 책상 변두리에 걸터앉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형, 내 말 들었어?”곽승재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이 시간에 지연 씨랑 같이 데이트나 하지 그래.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찾는 거야?”“형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그리고 그 인플루언서와는 대체 무슨 사이야? 스캔들이 퍼진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냐고.”곽승재는 차를 마시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형, 민시후가 이젠 위협이 되진 않지만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육현석이 일부러 고은서에 관해 말했다.“지연이한테서 들었는데 사업 파트너 중에 여러 명이 형수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대. 심지어 쉴 새 없이 형수님 회사로 선물까지 보낸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잘생긴 연예인 있잖아. 이틀 후면 해성으로 돌아온다고 형수님한테 만나자고 매일 문자가 온대.”육현석은 이어 자신의 결론을 보태었다.“쓸데없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형수님을 빼앗길 수도 있어.”“나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의 눈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불안하면... 뭐? 방금 뭐라고 했어?”육현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형, 나 지금 고은서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형이 재혼하고 싶어 미치는 그 전처 말이야. 그런데 지금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거야?”육현석은 말하면서 곽승재가 열이라도 나는지 그의 이마를 짚어보려고 했다.곽승재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후로 고은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돼. 나가. 나 바쁘니까.”“...”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은 왜 또 자존심을 세우고 난리야? 형수님이랑 재혼하기 싫은 거야?’육현석은 그 영문을 파헤치기 위해 한참 동안 떼를 썼지만
고은서를 쿠아를 여시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쿠아가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구해주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준 시은 씨겠죠.”“그런데 모든 일이 정성을 다했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잖아요. 쿠아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잘 따르는 것 같은데요.”여시은이 쿠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쿠아는 몸을 옹크리고 긴장한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그래서 부럽다는 거예요. 일도 잘하고 매력적이고 심지어 동물들도 은서 씨를 좋아하잖아요.”여시은은 전에도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고은서는 그녀가 그저 예의를 차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똑같이 칭찬을 해줬었다.“저는 시은 씨가 더 부러운데요. 집안도 좋고 자식을 무척 사랑해주는 아버지도 있잖아요. 시은 씨야말로 인생 승자죠.”여시은은 계속 쿠아를 어루만지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진짜 인생 승자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죠.”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여시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아버지도 언젠간 저를 떠나게 될 거잖아요. 게다가 저는 또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나중에 의지할 곳 하나 없을까 봐 무서워요.”고은서는 문뜩 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 방계들이 현재 가주 자리를 호시탐탐하고 있는데 여재훈이 곽승재를 사위로 들이고 싶은 이유가 아마 그의 능력 때문일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런데 나중에 여씨 가문이 어떻게 되든 여시은은 여전히 지금처럼 부유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어머. 갑자기 저도 모르게 이런 얘기가 나왔네요.”여시은이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은서 씨, 곧 밥 먹을 시간인데 우리 같이 나가 먹지 않을래요?”고은서가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사양하려고 할 때 여시은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은서 씨, 아무리 바빠도 밥은 챙겨 먹어야죠. 원래 오늘 아빠가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한테 친구랑 같이 놀라고 하던데 제가 해성에 친구가 별로 없는 걸 은서 씨도
여시은은 사과하다가 말고 깜짝 놀라했다.고은서가 다가가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룸 안에는 곽승재가 앉아 있었는데 그의 옆에는 마재경도 함께 있었다.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지 웨이터가 마침 음식을 올리고 있었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고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곽 대표님,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밥 먹으러 오신 건가요?”여시은이 의외라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재경이가 이 레스토랑의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한 번 먹어보러 온 거예요.”곽승재가 담담하게 답했다.옆에 있던 마재경이 부끄럽다는 듯 나긋하게 웃어 보였다.“고마워요, 대표님.”“미리 예약하고 오신 거예요? 우린 만석이라고 좀 기다려야 된다던데.”여시은이 부러워하며 물었다.“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실래요?”마재경이 곽승재를 힐끔 보더니 예의 바르게 물었다.여시은은 문 쪽에 서있는 고은서를 보면서 물었다.“은서 씨, 어때요?”마재경은 그제야 고은서를 발견하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그녀를 안으로 초대했다.“은서 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얼른 들어오세요.”‘밥 먹으러 왔는데 왜 하필 곽승재랑 부딪치는 거야?’고은서는 사실 별로 합석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음식 냄새를 맡은 여시은은 약간 흥분해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심지어 고은서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밥만 같이 먹는 건데 대표님도 괜찮으시죠?”“들어오세요.”곽승재가 무표정을 얼굴을 하고 답했다.이렇게 된 이상 고은서는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여시은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네모난 나무 식탁 앞에 곽승재가 센터 자리에 앉고 마재경은 그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맞은 켠 자리에 앉았다.여시은 아주 자연스럽게 곽승재의 오른쪽에 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쿠아를 잠시 웨이터에게 부탁했다.사람이 많아진 탓에 곽승재는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몇 가지 더 주문했다.“와, 다 매운 음식이네요. 은서 씨, 괜찮겠어요?”여시은이 관심하는 말투로 물었다
뚝배기 안에 있던 우유는 몹시 뜨거웠는데 여시은이 국자를 떨어뜨리면서 우유가 그녀의 손에 튕겼다.여시은은 순간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그릇을 옆으로 팽개쳤다.그러자 뜨거운 우유가 마침 고은서와 마재경의 손등에 튕겼다.두 사람은 동시에 갑자기 몰려오는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손을 움켜쥐었다.“괜찮아?”곽승재가 벌떡 일어서면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바로 이때,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마재경이 의자와 같이 뒤로 넘어졌다.뚝배기랑 더 가까이 있었던 마재경이 사실상 더 심하게 데였는데 방금 튕겨오는 우유를 피하면서 실수로 뒤로 고꾸라졌던 것이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를 관심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이미 식은 차를 빨갛게 데인 고은서의 손등에 부으면서 옆에 넋을 놓고 있는 웨이터를 향해 호통쳤다.“지금 멍해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얼른 찬물을 가져오지 않고!”“네네.”웨이터가 황급히 찬물을 가지러 가고 여시은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은서 씨, 괜찮아요?”여시은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움직이지 마.”“마재경 씨, 왜 넘어지셨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여시은이 마재경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앗, 재경 씨도 데었어요? 죄송해요.”여시은이 자책하면서 사과했다.그녀도 곽승재를 따라 식은 찻물로 임시 처치를 해주려고 했는데 쓸 수 있는 찻물은 이미 그가 다 써버린 후였다.“괜찮아요. 웨이터가 곧 올 거예요.”여시은이 마재경을 위안했다.마재경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여시은의 부축하에 힘겹게 일어섰다.웨이터는 이내 찬물을 가져왔고 이어 상황을 처리하러 온 매니저가 사과하며 나타났다.그와 동시에 다른 한 담당자가 화상 연고를 들고 룸으로 들어 왔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은서를 위해 연고를 발라주었다.행여나 그녀가 아파할까 봐 애써 힘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
곽승재는 고은서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리에 덮을만한 담요 하나를 가져오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해성이 기후가 좋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초겨울엔 날씨가 으스스했다.히터를 켜놓은 동시에 통풍을 위해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행여나 고은서가 추워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의사 선생님께서 따뜻하게 하고 다니랬잖아.”곽승재가 덤덤한 얼굴로 설명했다.‘그건 생리할 때 따뜻하게 하고 다니란 뜻이었는데.’고은서는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 겉으론 티 내지 않고 담요를 다리에 덮었다.곽승재는 이내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좀 마셔.”그러나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괜찮아.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아서. 얼른 할 얘기나 해.”“그럼 따뜻하게 손에 쥐고 있어.”곽승재는 물잔을 강제로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서야 소파에 앉았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담요를 덮고 따뜻한 물을 손에 쥔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손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 하나 있지?”고은서는 그의 물음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해졌다.“응. 왜? 문제라도 있어?“여시은이 요즘 들어 유사한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지 연관 분야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어.”고은서는 이미 여시은이 그럴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여시은이 회사를 설립한 목적 자체가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기에 유일 투자 은행과 경쟁하려 드는 게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같은 업계에 있는 한 경쟁은 피할 수 없잖아. 예상했던 바야.”그러나 곽승재가 덤덤하게 설명을 보태었다.“투자한 게임 회사가 규모도 크지 않고 팀 내에 집안 배경이 뛰어난 사람도 없다며?”고은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뜻을 깨달았다.“지금 그 사람들이 여시은한테 수매 당해 우리 회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업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너도 알고 있잖아.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어. 현재 게임 회사가 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은서야, 데려다줄게.”육현석이 차창 너머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사양했다.“고맙지만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서 사양할게요. 그리고 저도 차 가지고 왔어요.”그러자 육현석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럼 운전 조심하고 집 들어가면 지연이한테 문자해.”“알겠어요. 절대 지연이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할 테니까 시름 놓으세요.”육현석과 박지연은 고은서의 재촉 하에 더는 머무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고은서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폰을 확인해 보았는데 곽승재가 얼마 전에 자신에게 전화한 걸 발견했다.마침 박지연과 함께 폰을 사물함에 넣은 채 한창 스파를 즐기고 있을 때라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곽승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바쁜지 한참이 지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녀는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문으로 돌아갔다.마침 주차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곽승재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방금 화장실에 있어서 전화 못 받았어.”“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여시은 투자 은행에 관해 얘기해줄 게 있어서 전화했어. 라이트문에 왔는데 네가 집에 없다고 해서 전화를 했던 거야.”“알겠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고은서는 말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엘리베이터는 이내 두 사람이 사는 층에 멈춰 섰고 고은서는 곽승재의 집 문을 두드렸다.이내 일상복을 입은 곽승재가 문을 열어주었다.금방 샤워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돌아오는 길에 먼지가 좀 묻어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어.”곽승재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현재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그는 전에도 약간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원 별장에 있을 때도 몸에 먼지가 묻거나 이상한 냄새가 배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로 걸어갔다.집 구조가 그녀의 집과 조금 달랐는데 거실이 좀 더 넓어 보였다.소파에 앉은 고은서는 갑자기 집에서 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부엌에서 요리라도 했어? 뭔가 탄 것 같은데.
곽승재가 요 며칠 바쁜 건 사실이었다.여시은의 투자은행이 곧 개업할 거라 준비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었다.여재훈이 믿음직한 비서를 붙여줬지만, 사업에 생소했던 여시은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했다.곽현수는 이 틈을 타 곽승재에게 당분간 여시은의 회사에 가서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탁대로만 해주면 GS 그룹 본사 복귀도 고려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상은 협박이었다.GS그룹으로 급히 돌아갈 필요는 없었지만 고은서와 함께 C선생을 잡아내고 여시은에 관해 조사하려거든 많은 시간과 수단이 필요했기에 곽현수와 다투면서 필요 없는 손해를 보는 걸 최대한 피면 하는 게 좋았다.곽현수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게다가 여시은을 도우면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한테서 미리 소식을 접한 덕분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 모든 내막을 그대로 박지연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곽승재가 제안을 수락한 건 혹시 곽현수가 또 고씨 가문에 무슨 일을 꾸밀까 우려해서일지도 모른다고만 했다.“또라니? 고씨 가문에 해가 되는 조짐이 보였어?”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지금까지 고국성 일을 꾸민 사람이 곽현수라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앞으로 곽승재와 자주 연락할 일이 생길 테고,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엔 솔직히 털어놓았다.“곽승재의 아버지가 우리 둘이 재결합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우리 삼촌을 해친 거야.”“그럼 곽승재가 너랑 거리를 둔 것도 네 삼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겠네?”비록 박지연 말처럼 쉽게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렇게 보면 돼.”박지연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그 스캔들도 아버지의 눈을 피하려고 일부러 수습하지 않은 거야?”‘눈치 백단이네.’고은서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맞아. 모든 스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