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고민 끝에 주말에 해야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다면서 여시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시은도 강요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마침 기사가 도착하면서 고은서는 여시은과 간단히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민아는 민준 씨한테 맡길게요.”고은서는 말하면서 외투를 다시 송민준에게 돌려주었다.“외투 고마워요. 차에 앉으면 별로 춥지 않으니까 도로 가져가세요.”송민준은 그제야 외투를 받으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조심해서 들어가요.”“네.”고은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송민준은 멀어지는 차량을 보면서 외투를 자신의 팔에 걸쳤다.“친절하시네요.”곽승재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준은 그의 날이 선 말을 무시하면서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별말씀을요.”곽승재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떠났다.“힘내세요.”여시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송민준을 보면서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곽승재를 뒤따라갔다....토요일.고은서는 늦잠을 실컷 자고 고준석을 보러 본가로 가려고 했다.그러나 옷을 다 차려입고 집 문을 나서자마자 엘리베이터 쪽에서 익숙한 여자 한 명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인풀루언서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몸에 딱 붙고 짧은 옅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볼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고 가녀린 허리도 밖에 드러나 있었다.아래에는 베이지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청순하면서 섹시함을 잃지 않았다.그녀의 옆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마재경도 고은서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도 이 아파트 주민이세요?”고은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이곳 주민이냐고 물은 거지? 설마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거야? 심지어 나랑 같은 동 같은 층에 산다고?’“그럼 우리 이웃이겠네요.”마재경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인 듯했다.“며칠 동안 고민 끝에 여기가 환경도 좋고 위치도 좋아서 이곳으로 선
“안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조금 이따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육현석이 시무룩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의 말에 응대하지도 않았다.이를 본 육현석은 책상 변두리에 걸터앉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형, 내 말 들었어?”곽승재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이 시간에 지연 씨랑 같이 데이트나 하지 그래.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찾는 거야?”“형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그리고 그 인플루언서와는 대체 무슨 사이야? 스캔들이 퍼진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냐고.”곽승재는 차를 마시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형, 민시후가 이젠 위협이 되진 않지만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육현석이 일부러 고은서에 관해 말했다.“지연이한테서 들었는데 사업 파트너 중에 여러 명이 형수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대. 심지어 쉴 새 없이 형수님 회사로 선물까지 보낸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잘생긴 연예인 있잖아. 이틀 후면 해성으로 돌아온다고 형수님한테 만나자고 매일 문자가 온대.”육현석은 이어 자신의 결론을 보태었다.“쓸데없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형수님을 빼앗길 수도 있어.”“나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의 눈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불안하면... 뭐? 방금 뭐라고 했어?”육현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형, 나 지금 고은서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형이 재혼하고 싶어 미치는 그 전처 말이야. 그런데 지금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거야?”육현석은 말하면서 곽승재가 열이라도 나는지 그의 이마를 짚어보려고 했다.곽승재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후로 고은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돼. 나가. 나 바쁘니까.”“...”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은 왜 또 자존심을 세우고 난리야? 형수님이랑 재혼하기 싫은 거야?’육현석은 그 영문을 파헤치기 위해 한참 동안 떼를 썼지만
“죽고 싶으면 곱게 죽지, 투신자살은 왜 한대?”혐오감이 잔뜩 담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난들 곱게 죽고 싶지 않...”고은서는 문득 곽승재의 말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그녀가 대체 언제 투신자살했단 말이지?“사모님, 드디어 깼군요.”이때, 도우미 이미숙이 물과 약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머리가 아프시죠? 의사 선생님께서 가벼운 뇌진탕 증상이 있다고 해서 약 처방해주셨는데 지금 드실래요?”고은서는 널찍한 침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까먹었다.실내 인테리어를 봐서는 예전의 곽씨 일가 별장 같았다.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2년이 넘도록 발길이 끓긴 곳이지 않은가?설마 곽승재가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단 말인가?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칼로 심장을 찌른 이상 설령 살아있더라도 수술실에 실려 갔을 테니까.고은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가슴을 확인해봤는데 멀쩡하기만 했다.그리고 머리와 손목에는 의료용 거즈가 둘둘 감겨 있었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나중에 투신자살하고 싶으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고작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진 않으니까.”싸늘한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방을 나섰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기 몸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2년 넘게 정신병원에 갇혀 있으면서 안색은 이미 초췌하다 못해 창백했고, 살이 쏙 빠져 장작처럼 삐쩍 말랐지만 지금은 피부가 뽀얗고 매끈하니 탄력까지 넘쳤다.몸과 팔뚝에도 간병인과 환자들 때문에 난 상처와 멍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화가 난 나머지 말을 좀 심하게 했을 뿐이에요.”이미숙은 그녀가 상처받은 줄 알고 조심조심 위로했다.“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이따가 도련님과 잘 얘기...”“아줌마! 오늘 며칠이죠?”고은서는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이미숙의 말을 끊었다.
"고은서, 이제 그만해!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곽승재가 버럭 화를 내며 타박하자 고은서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자기 와이프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할 수 있단 말인가?“승재야, 화내지 마.”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유미가 먼저 말을 꺼내더니 설명을 보탰다.“은서 씨, 승재가 오늘 내 생일 파티에 참여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야. 사실 우리 아빠가 오랜만에 보고 싶다고 해서 가볍게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어. 게다가 은서 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걸려 서둘러 해명하러 달려왔거든. 다 내 탓이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과하는 백유미의 모습은 진정성이 가득했다.고은서는 3년 전에도 백유미가 집까지 찾아와서 똑같은 변명을 했던 거로 기억했다.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침실이었다.당시 백유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란히 서 있는 선남선녀를 보자 열이 확 올랐다.이내 악을 쓰며 백유미에게 꺼지라고 했고, 탁자에 놓인 꽃병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꽃병에 머리를 부딪힌 백유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곽승재는 노발대발하면서 곧바로 백유미를 안고 병원으로 데려가 몇 날 며칠이나 돌봐주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를 돋우는 말이었지만, 이제 고은서의 마음에 아무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심지어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짓는 여유까지 되찾았다.“유미 씨, 멀리서 해명하러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애썼네. 나 화 안 났어. 아버님께서 승재를 식사에 초대하셨다며? 얼른 가 봐. 연장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백유미는 고은서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살짝 당황했다.곽승재도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상황이란 말이지?자신에게 혼났는데 울고불고 떠들기는커녕 백유미와 밥 먹으러 가라고 흔쾌히 보내주기까지 하다니?분명 2시간 전만
그녀를 가장 아끼는 분이지만, 전생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이번 생에는 반드시 곁에서 효도하여 외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은서는 몸이 만신창이라 당분간 외할아버지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결국 설렘과 간절함을 애써 억누르고 며칠 후에 찾아뵙기로 약속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고은서는 테라스에 앉아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18살이 되던 해, 사랑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사랑에 빠진 소녀는 체면 불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남자에게 대시했지만, 끝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대학 졸업할 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곽승재의 할머니 전미자가 둘이 혼인신고 하도록 적극 추진한 덕분에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비록 곽승재는 대놓고 그녀를 싫어했지만, 언젠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는 이름다운 환상을 줄곧 품고 있었다.결혼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나자 백유미가 귀국해서 곽승재의 회사에 입사했다.두 사람 사이의 남다른 인연은 그녀에게 어쩌면 곽승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결국 점점 초조해지면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확인받고 싶었다.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투신자살로 협박하는 바람에 곽승재과 백유미의 사이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곽승재가 집에 돌아오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절망에 빠진 그녀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미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곽승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갖도록 출국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하지만 출국 전날, 뜻하지 않게 집에 강도가 들어 불까지 지핀 탓에 백유미는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심지어 범인을 붙잡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시켰다고 딱 잡아뗐다.이 사건은 곽승재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입이 아프게 변명해봤자 그녀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대쪽 같이 밀어붙였다.결국 외할아버지의 설득과 전미자의 도움을 받아 옥살이는 면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어렵게 받아냈다.그
고은서가 몸을 홱 돌렸다.“누가 버리라고 했죠? 당장 주워요.”프런트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어차피 대표님은 볼 생각도 없을 텐데 굳이 헛수고할 필요 있어요? 그동안 챙겨온 물건도 다 버리라고 했거든요.”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일하는 게 힘들까 봐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음식이며, 옷이며,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마저 가져다주었다.게다가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처럼 속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결국은 진심이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꼴이라니.어떻게 고작 프런트 직원이 감히 그녀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냐는 말이다.고은서는 싸늘한 시선으로 프런트 직원을 노려보았다.“대표님이 보든 말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을 함부로 버리죠? 얼른 챙기지 못해요?”여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알겠어요, 다시 챙기면 되잖아요. 목을 매서 겨우 대표님을 만난 주제에 어디서 사모님 행세를 하는 건지, 참.”“무슨 일이죠?”그녀에게 사과를 요구하려던 찰나,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내 고개를 돌리자 곽승재의 비서 주민기가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주민기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은색 프리미엄 맞춤 정장 차림의 곽승재였다.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비록 안색이 싸늘하다 못해 얼음장 같았지만 비주얼 자체가 워낙 훈훈한지라 오히려 남성미를 한층 더 부각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그를 만날 때마다 고은서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이름을 불렀을 테지만, 지금은 입도 벙긋하기 싫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주민기가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득의양양한 얼굴로 잽싸게 대답하는 예전과 달리 고은서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곽승재가 인정한 아내가 아니었다.남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처세술에 불과했으니까.“무슨 일이지?”고은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곽승재는 프런트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그녀는
“펜 이리 줘요.”“대표님, 거래처 분들이 계약 체결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주민기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는 GS 그룹에서 오랫동안 논의해온 중요한 협력 건이었는데, 자칫 고은서 때문에 망칠 뻔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무시하고 주민기와 함께 급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곽승재!”고은서가 뒤쫓아갔다.“저 여자 끌어내.”곽승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고은서를 에워쌌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워커홀릭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바빠지기 시작하면 오늘은 이혼하기 글렀기에 일방적으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내일 오전 9시, 구청에서 봐!”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쌩하니 떠났다.대체 간다는 건가? 만다는 건가?하루빨리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곽승재라면 무조건 올 텐데...이런 생각에 고은서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곧이어 별장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메일에 접속했다.메일함에는 여러 투자은행에서 보낸 채용 제의가 들어 있었는데, 예전처럼 바로 메일을 삭제하는 대신 하나씩 클릭해 봤다.그러나 전부 기한이 지난 메일로 심지어 난다긴다하는 금융권 엘리트들이 앞다투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유명한 투자은행도 있었다.정작 그녀는 쓰레기 같은 곽승재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제 발로 뻥 걷어차지 않았는가?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땅을 치고 후회할 지경이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계획을 잘 세워서 절대로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삶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다짐했다.몇 군데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서 내일이면 곽승재와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이내 PC 전원을 끄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그리고 이혼 절차를 밟으면 곧바로 떠날 작정이다.한창 열심히 짐을 싸고 있을 때 이미숙이 걸어 들어왔다.“사모님, 짐을 왜 싸는 거죠? 여행 가시게요?”이미숙은 곽승재가 임시 고용한 도우미로 혹시라도 두 사람의 상황을 전미자에게 보고하는
“우리 집이 널 빈털터리로 내쫓을 만큼 못 살진 않아.”어리둥절한 고은서를 가뿐히 무시하고 곽승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두둑하게 챙겨줄 테니까 민기한테 협의서를 다시 쓰라고 할게.”“괜찮아.”고은서가 거절했다.“어차피 돈 때문에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사실 그녀는 꽤 유복한 편이다.외할아버지가 남겨준 주식은 둘째치고 충분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유능했다.곽승재와 기어코 결혼한 이유는 단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을 뿐이었다.“그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곽승재는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냈다.“다만 서로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내 말대로 협의서를 다시 써.”고은서는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럼 알아서 해. 내일 구청에서 봐.”말을 마친 고은서는 뒤로 물러나 방문을 닫고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문밖에 덩그러니 남은 곽승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정말 이혼 얘기만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일을 보고 나니 미련 없이 방문을 닫아? 심지어 그와 단 한 마디도 더 섞지 않는다니?그가 집에 돌아오면 고은서는 항상 참새처럼 따라다니며 재잘거리기 바빴다.같이 산책해달라는 둥, 꽃 보러 가자는 둥 요구가 끝도 없었다.게다가 일하고 있을 때마저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앞에서 알짱거렸다.만약 지금처럼 얌전하고 신경이 덜 쓰이게 한다면 집에 돌아가는 걸 꺼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비록 고은서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지만, 내일 정말 이혼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는 셈이다....“오빠, 나 외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어. 딱 하루면 되니까 오빠와 백유미 결혼식에 절대로 훼방 놓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증명해줄게.”“고은서, 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절대로 유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야.”푹!곽승재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뜨거운 피가 몸속에서 철철 흘러내렸고, 체온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안 모인지도 꽤 된 것 같은데 조금 이따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육현석이 시무룩해 하며 물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의 말에 응대하지도 않았다.이를 본 육현석은 책상 변두리에 걸터앉으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손으로 가렸다.“형, 내 말 들었어?”곽승재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이 시간에 지연 씨랑 같이 데이트나 하지 그래. 왜 나한테 와서 존재감을 찾는 거야?”“형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그리고 그 인플루언서와는 대체 무슨 사이야? 스캔들이 퍼진지 며칠째인데 아직도 그대로냐고.”곽승재는 차를 마시면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형, 민시후가 이젠 위협이 되진 않지만 형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육현석이 일부러 고은서에 관해 말했다.“지연이한테서 들었는데 사업 파트너 중에 여러 명이 형수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대. 심지어 쉴 새 없이 형수님 회사로 선물까지 보낸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잘생긴 연예인 있잖아. 이틀 후면 해성으로 돌아온다고 형수님한테 만나자고 매일 문자가 온대.”육현석은 이어 자신의 결론을 보태었다.“쓸데없는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진짜 형수님을 빼앗길 수도 있어.”“나랑 무슨 상관인데?”곽승재의 눈빛이 삽시에 어두워졌다.“불안하면... 뭐? 방금 뭐라고 했어?”육현석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형, 나 지금 고은서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형이 재혼하고 싶어 미치는 그 전처 말이야. 그런데 지금 형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 거야?”육현석은 말하면서 곽승재가 열이라도 나는지 그의 이마를 짚어보려고 했다.곽승재는 성가시다는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이후로 고은서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돼. 나가. 나 바쁘니까.”“...”육현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은 왜 또 자존심을 세우고 난리야? 형수님이랑 재혼하기 싫은 거야?’육현석은 그 영문을 파헤치기 위해 한참 동안 떼를 썼지만
고은서는 고민 끝에 주말에 해야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다면서 여시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시은도 강요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마침 기사가 도착하면서 고은서는 여시은과 간단히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민아는 민준 씨한테 맡길게요.”고은서는 말하면서 외투를 다시 송민준에게 돌려주었다.“외투 고마워요. 차에 앉으면 별로 춥지 않으니까 도로 가져가세요.”송민준은 그제야 외투를 받으면서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조심해서 들어가요.”“네.”고은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송민준은 멀어지는 차량을 보면서 외투를 자신의 팔에 걸쳤다.“친절하시네요.”곽승재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준은 그의 날이 선 말을 무시하면서 단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별말씀을요.”곽승재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떠났다.“힘내세요.”여시은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송민준을 보면서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곽승재를 뒤따라갔다....토요일.고은서는 늦잠을 실컷 자고 고준석을 보러 본가로 가려고 했다.그러나 옷을 다 차려입고 집 문을 나서자마자 엘리베이터 쪽에서 익숙한 여자 한 명이 걸어오는 걸 보았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랑 스캔들이 난 인풀루언서 마재경이었다.그녀는 몸에 딱 붙고 짧은 옅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 볼륨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고 가녀린 허리도 밖에 드러나 있었다.아래에는 베이지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청순하면서 섹시함을 잃지 않았다.그녀의 옆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서 있었다.마재경도 고은서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도 이 아파트 주민이세요?”고은서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나도 이곳 주민이냐고 물은 거지? 설마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거야? 심지어 나랑 같은 동 같은 층에 산다고?’“그럼 우리 이웃이겠네요.”마재경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상태인 듯했다.“며칠 동안 고민 끝에 여기가 환경도 좋고 위치도 좋아서 이곳으로 선
고은서는 곽승재를 놓아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상을 받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던 것 같네요.”사회자도 눈치 있게 타이밍에 맞추어 곽승재한테 나이가 제일 어린 수상자인 고은서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해주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곽승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녀가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할 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축하합니다.”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지만 관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관중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여시은이 눈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앞쪽에 있는 좌석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그러나 뜻밖으로 그녀는 박수도 치지 않고 물잔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고은서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여시은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곽승재가 무대 아래로 내려간 후 고은서와 나머지 두 수상자는 각각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송민아는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큰 포옹을 하면서 축하해줬다.“정말 너무 멋있어. 축하해!”“너도 충분히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고은서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시상식은 열 시가 되어서야 끝났고 밖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송민아는 기사한테 연락하러 가고 고은서는 사람들과 함께 호텔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저녁 시간이어서인지 바람이 약간 쌀쌀했다.옷을 얇게 입은 고은서가 추위 때문에 팔을 비비고 있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에게 옷을 걸쳐주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송민준이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면서 말했다.“민아는 아직 통화 중이에요. 기사가 곧 도착할 거라고 전해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했다.그러나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외투를 벗어 돌려주려고 했다.“저는 괜찮으니까 외투는 민준 씨가 입고 있으세요.”그러나 송민준은 웃으면서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입고 있어요. 감기라도 걸리면 업무
그 말을 들은 송민아는 더 어리둥절해졌다.“이상형이라면... 고은서, 너 설마 정말 우리 오빠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만약 진짜라면 완전 우리 집 경사인데. 우리 엄마 아빠가 오빠를 장가보내는 일로 얼마 골치 아파하는지 알아?”고은서는 흥분한 송민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먼저 진정해 봐. 나 네 오빠 안 좋아해.”송민아는 이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하긴. 곽승재랑 민시후 같은 남자가 널 따라다니는데 우리 오빠가 어떻게 눈에 들어오겠어.”“...”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송민아의 반응으로부터 송씨 가문에 송민준을 장가보내는 일로 하루 이틀 머리 아파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그저 한 마디만 내뱉었을 뿐인데 송민아는 거침없이 모든 걸 다 알려주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 오빠 이상형에 관해서 묻는 거야?”송민아는 흥분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답했다.“민시후가 전에 네 오빠가 일밖에 모른다면서 연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나 대신 페인트를 막아준 것도 있고 또 그 후로도 날 몇 번이고 도왔잖아. 그래서 민시후가 네 오빠가 뭔가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던 적이 있거든.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까 여시은이 말하니까 나도 확실하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오빠가 설마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송민아는 장난치는 대신 아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오빠가 특별히 어느 여자한테 잘해주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집에서도 여자를 소개해주곤 했는데 정말 일밖에 모르는 기계 사람처럼 굴어서 결국엔 다 수포로 돌아갔거든. 그래서 이상형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어. 그런데 민시후랑 관계도 꽤 좋고 해서 걔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한테 호감을 표시하진 않을 것 같은데.”고은서는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한 번 더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잘난체한다고 오해하지
행사 주최 측의 관계자가 다가오자 업계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었다.송민준 역시 곽승재와 여시은을 알아본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곽 대표님까지 참석한 걸 보면 오늘 시상식 규모가 꽤 크네요.”고은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 곽승재가 여시은과 함께 다가왔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얼마 전까지는 그 인플루언서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온라인에서는 곽승재가 마재경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기사까지 돌고 있었다.‘정식적인 자리라서 파트너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은서야, 송 대표님.”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이전에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송민준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고은서는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시은 씨.”“우리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거리감 두는 거야?”여시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은서야, 혹시 내가 곽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걸 보고 오해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시... 아니, 시은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알았어. 장난이야.”여시은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사실 아빠가 시상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곽 대표님도 오늘 시상자여서 목적지도 같은 김에 같이 판주 투자은행에서 출발했어.”“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가서 민아 좀 보고 올게요.”송민준이 자리를 떠나자 여시은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서야, 송 대표님도 너 좋아하는 거지? 개업식에서 너 대신 페인트도 맞았잖아.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평소에도 너한테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 아닐까?”민시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날 좋아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많겠어. 송 대표님은 그냥 파
송민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고은서는 송민준을 발견했다.금테 안경을 쓴 그는 연회색 정장에 같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늘씬한 체형에 절제된 기품이 감돌았다.그는 마치 귀족 신사처럼 성숙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도 이 시상식에 초대받은 거야?”송민아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송민준의 주변에는 이미 몇몇 업계 인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송민아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고은서를 발견한 송민준은 곧 송민아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 씨, 해성에서 선정한 젊은 리더상 후보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합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감사합니다.”“오빠, 지난번에 게임 어플 업체 몇 군데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오늘 현장에 와 있어?”송민아는 못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게임사는 보편적으로 핵심 개발진 몇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이었기에 자체적으로 테스트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일부 플랫폼에서 사전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프로젝트의 테스트 업무를 맡고 있는 송민아로서는 출시 전부터 충분한 마케팅과 시장 반응을 끌어내 좋은 시작을 열고 싶었다.송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오늘따라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구나?”“도와줄 거야, 말 거야?”송민아는 살짝 투덜거렸다.“동생이 부탁하는 데 당연히 도와야지.”송민준은 자연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은서 씨도 같이 가실래요?”시상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던 터라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업체 관계자들은 송민준의 체면을 봐서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혔고 송민아는 그들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테스트 관련 사항을 논의했다.고은서와 송민준은 옆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민준 씨,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지난번 저희 삼촌 일도요.”“문제는 해
“육현석 부모님은 언제 만나볼 생각이야?”고은서는 박지연이 이 문제를 너무 오래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예전에 어머님은 한 번 뵌 적 있잖아. 꽤 온화하고 좋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맞아. 부드럽고 친절하셨어.”박지연은 소파에 기대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하지만 그때는 여자 친구 신분으로 간 게 아니었잖아. 어머님 입장에서 나는 그냥 낯선 사람이었다 보니 예의상 친절하셨을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여자 친구로서 찾아가면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지?”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은서야, 사실 나 좀 무서워. 현실에서 부모님들이 아들의 연인이 이혼녀라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육현석처럼 집안 조건이 좋은 경우라면 더하겠지. 더 좋은 선택지도 많은데 겉으로는 허락한다고 해도 정말 진심일까 싶어.”박지연의 걱정도 완전히 기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동료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그 동료의 시어머니는 밖에서 교양 있고 온화한 분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고부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혼하고 보니 실제로는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겉으로는 며느리를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괴롭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시어머니 편만 들었고 결국 동료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만약 육현석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이라면 박지연은 앞으로 다시는 연애나 결혼은 거들떠보지 않을지도 몰랐다.“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고은서는 여전히 육현석 부모님이 그런 분들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육현석만 봐도 알잖아. 아들도 바르게 잘 키우셨으니 믿을 만한 분들이실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자기 눈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기다려볼래.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녀의 고민을 이해하며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지연아, 혹시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박지연은 그녀의 손을 치
곽승재는 여시은을 흘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말 그대로예요.”여시은은 대화가 재밌는 듯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설마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거예요? 곽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생겼다던데요?”곽승재는 얼마 전 여시은과 한 번 만나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직접 물었었다.여시은은 담담하게 인정하며 예전에 Y국에서 열린 연회에서 여재훈이 일부러 자신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원래는 여재훈이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여시은이 실수로 곽승재에게 술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이후 서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아직도 부모님들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몰랐다.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십을 캐묻는 여시은을 보며 곽승재는 더 이상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도착했네요. 회의실로 가죠.”여시은은 보통 부잣집 아가씨들처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상황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 곽승재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채자 곧바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알겠습니다. 대표님.”...고은서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박지연은 이미 집에 와 있었다.그녀를 본 박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나보다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곽승재를 데려다준 일을 이야기했다.“도대체 왜 그래? 곽승재랑 거리 두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굳이 먼저 나서서 데려다줬어?”박지연은 말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고은서, 설마 곽승재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 질투라도 한 거야? 아직도 곽승재를 못 잊은 거 아니야?”고은서는 바로 박지연에게 눈을 흘겼다.“제발 상상은 멈춰줘.”“그럼 왜 그랬는데?”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고은서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곽승재가 곽현수랑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결국 우리 삼촌 때문이잖아
“뻔뻔한 건 너지.”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용서한다고 해?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잖아. 그냥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사랑에 빠진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잖아. 네가 그렇게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했겠어!”“너...”“곽 대표님, 은서야.”곽승재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때 갑자기 밖에서 여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품에 안은 여시은이 차 밖에 서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복장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고은서가 바라보자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빠가 나를 판주 투자은행 쪽에 보내서 곽 대표님 비서를 하게 됐어. 보고 배우라고 보내신 거지. 오늘도 회의가 있어서 내려와서 일정 조율하려고 곽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면 먼저 올라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게.”여시은은 배려 깊은 척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일이 우선이죠. 좌천된 몸인데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온 건가?’판주 투자은행은 GS 그룹에서 인수한 투자은행에 불과했다.그룹 대표였던 그가 여기로 왔다는 건 단순한 강등이 아니라 사실상 유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방금까지 곽승재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가라앉고 죄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GS 그룹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런데 이제 본사에 남을 수도 없게 됐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차에서 내려 로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여시은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고은서를 향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은서야, 우리도 오래 못 봤네.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