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안에 있던 우유는 몹시 뜨거웠는데 여시은이 국자를 떨어뜨리면서 우유가 그녀의 손에 튕겼다.여시은은 순간 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그릇을 옆으로 팽개쳤다.그러자 뜨거운 우유가 마침 고은서와 마재경의 손등에 튕겼다.두 사람은 동시에 갑자기 몰려오는 고통에 신음소리를 내면서 손을 움켜쥐었다.“괜찮아?”곽승재가 벌떡 일어서면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바로 이때,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마재경이 의자와 같이 뒤로 넘어졌다.뚝배기랑 더 가까이 있었던 마재경이 사실상 더 심하게 데였는데 방금 튕겨오는 우유를 피하면서 실수로 뒤로 고꾸라졌던 것이다.그러나 곽승재는 그녀를 관심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이미 식은 차를 빨갛게 데인 고은서의 손등에 부으면서 옆에 넋을 놓고 있는 웨이터를 향해 호통쳤다.“지금 멍해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얼른 찬물을 가져오지 않고!”“네네.”웨이터가 황급히 찬물을 가지러 가고 여시은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했다.“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은서 씨, 괜찮아요?”여시은이 긴장해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제지했다.“움직이지 마.”“마재경 씨, 왜 넘어지셨어요. 얼른 일어나세요.”여시은이 마재경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앗, 재경 씨도 데었어요? 죄송해요.”여시은이 자책하면서 사과했다.그녀도 곽승재를 따라 식은 찻물로 임시 처치를 해주려고 했는데 쓸 수 있는 찻물은 이미 그가 다 써버린 후였다.“괜찮아요. 웨이터가 곧 올 거예요.”여시은이 마재경을 위안했다.마재경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여시은의 부축하에 힘겹게 일어섰다.웨이터는 이내 찬물을 가져왔고 이어 상황을 처리하러 온 매니저가 사과하며 나타났다.그와 동시에 다른 한 담당자가 화상 연고를 들고 룸으로 들어 왔다.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은서를 위해 연고를 발라주었다.행여나 그녀가 아파할까 봐 애써 힘
고은서는 곽승재의 숨결이 가빠진 걸 느낄 수 있었다.잠시 후, 곽승재는 콧방귀를 뀌면서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마재경을 바라보았다.“가자. 병원으로.”그제야 관심을 받은 마재경은 가엽게 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괜찮아요. 별로 안 아파요.”“그래도 안심하게 검사받아.”곽승재는 말하면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마재경은 머뭇거리면서 고은서를 힐끔 보더니 이내 곽승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며 그의 팔짱을 꼈다.키큰 곽승재 옆에 서있는 마재경의 뒷모습이 유독 더 작아보였다.고은서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은서 씨도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아보는게 어때요?”여시은이 관심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고은서는 이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여시은 씨, 곽승재랑 마재경 씨가 이 레스토랑에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곳에 오자고 한 거죠?”전에 노숙자 일과 마찬가지로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수상했다.‘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여시은이 그 현장에 있는다는 게 말이 돼? 한두 번도 아니고. 우연이라고 해도 이런 우연이 어디 있어?’여시은은 멈칫하더니 이내 울먹이면서 물었다.“은서 씨,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 여기 음식이 맛있다고 들어서 먹어보러 온 것뿐이에요. 저도 이곳에서 곽 대표님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여시은은 마치 정말 상처라도 입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다치게 한 건 정말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합석하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레스토랑으로 가든 얌전히 자리가 나길 기다리면 될 것을.”고은서는 상심해 하는 여시은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우연이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런 거지?’“여시은 씨, 곽승재 비서를 하러 판주에 들어간 것도 곽승재한테 호감이 있어서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문을 내뱉었다.여시은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확실히 능력이 뛰어나고 우리 아빠도 마음에 들어 하면서 우리
“지연아, 차라리 연예 기자를 하는 건 어때? 간호사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박지연은 자신을 향해 장난치는 고은서를 보며 전혀 화내지 않았다.“안 될 일은 없지. 그럼 우선 날 위해 엔터테인먼트 하나를 매수해주지 않을래? 그리고 저기요, 왜 제 물음을 피하시는 거죠?”박지연은 끝까지 캐물을 생각인 것 같았다.“아무렇지도 않거든. 됐지?”고은서가 그녀를 째려보며 답했다.“그만하고 나 손 아파.”그녀는 화제를 돌리면서 박지연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박지연은 눈이 휘둥그레서 황급히 어떻게 다친 거냐고 물었다.고은서는 그제야 밥 먹을 때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그러니까 그 인플루언서가 병원을 간 게 화상을 입어서란 말이지? 그래서 아까 놀라지도 않았던 거고.”그러나 박지연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그 여시은이라는 사람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그럴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어.”박지연은 이내 이미숙한테 연고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녀의 말에 답했다.“그게 왜 이해가 안 돼. 곽승재가 그 인플루언서랑 가까이 지내는 걸 알고 일부러 너를 이용해서 두 사람을 데어놓으려는 거겠지. 상대방한테 곽승재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라고 주제를 알라고 경고하는 거잖아. 그럼 그 인플루언서도 자연스럽게 널 질투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여시은이 어부지리로 모든 이득을 갖게 되는 거고.”박지연의 설명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음식을 주문할 때랑 밥을 먹으면서까지 여시은이 은근슬쩍 곽승재가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확실히 느껴졌어. 특히 그 우유가 튕길 때 곽승재의 반응이 그 모든 게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셈이 되었지. 만약 여시은이 일부러 마재경의 질투심을 일으키려 한 거라면 목적을 이루게 된 거네.’“그런데 여시은이 마음에 다른 여자를 둔 남자는 싫다고 했는데.”고은서는 아직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 거라면 왜 자꾸 그를 시험하려 하는
“괜찮아. 급한 일도 없고 한데 그냥 쉴 겸 기다린 거야.”주인혁은 말하면서 아주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 하나를 꺼내 고은서에게 건네주었다.“누나, 이거 내가 주는 선물이야. 개업한 거도 축하하고 해성 10대 청년상을 받은 것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 비록 조금 늦었지만 양해 부탁해.”고은서는 선물을 받아 열어보았다.그 안에는 옥으로 된 평안 목걸이가 들어 있었는데 빨간 줄로 장식되어 있었고 불빛 아래에서 아주 영롱한 빛을 선보이고 있었다.축하 선물이라기엔 너무 귀중해 보였다.“촬영장 근처에 아주 영험한 절이 하나 있는데 누나를 위해 내가 가서 직접 받아온 거야.”주인혁이 약간 쑥스러워하며 말했다.“누나가 계속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전에 매번 그와 연락할 때마다 고은서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아마 그 이유 때문에 나한테 이걸 주는 거겠지.’고은서는 그의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고맙게 받을게. 너무 마음에 들어. 가자. 누나가 밥 사줄게.”그러나 주인혁은 갑자기 그녀의 손등에 있는 상처를 보고 다급해 하며 물었다.“누나, 손등은 왜 이래? 다쳤어?”어제 데인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다 나을 리가 없었다.물집은 또 어느새 터졌는지 주변이 새하얗게 되면서 물집 아래의 빨간 살이 드러났다.확실히 보는 사람이 놀랄만한 비주얼이었다.“괜찮아. 약을 바르면 돼.”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그럼 안 되지. 의사한테 가서 보여야지. 누나, 나랑 같이 병원 가자.”주인혁이 병원을 가자고 고집부렸다.고은서는 이까짓 상처로 병원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느꼈지만 태도가 결연한 주인혁을 보면서 밥 먹으러 가는 도중에 의원에 들러보려고 했다.주인혁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행여나 기자들한테 찍힐까 봐 고은서는 기사한테 주차장에서 대기하라 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그러나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송민준을 만났다.그는 캐쥬얼한 옷차림을 한 채 손에 간식거리를 들고 있었는데 송민아를 찾으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고은서는 희망으로 가득한 주인혁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그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속마음을 토로할 것만 같았다.주인혁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명확히 말한 적이 없었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은서는 항상 주인혁을 진취심이 있는 남동생으로 여기면서 그와 친구 사이로 지내는 반감하지 않았고 그가 큰 성과를 이룩하길 바랐다.그러나 그뿐이었다.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이내 그의 뜻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연기했다.“서로 잘 맞는 여자친구를 찾아서 함께 노력해 나가면 좋지 않아?”주인혁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주차장에 도착했다.대화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차에 오른 후 고은서는 기사에게 근처에 있는 진료소로 가달라고 했다.당직을 서는 의사는 한 중년여성이었는데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의사는 그녀의 손등을 보자마자 자신의 몸을 아낄 줄 모른다고 피부가 이렇게 될 때까지 왜 처치하지 않았냐면서 고은서를 꾸짖었다.그리고 걱정하는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고 있는 주인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청년, 여자친구를 어떻게 보살핀 거야?”“제 남동생이에요.”고은서가 다급하게 부인했다.“얘 탓이 아니에요. 아침저녁으로 연고도 바르고 해서 괜찮을 줄 알고 의사를 보러 가지 않았거든요.”“화상을 그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 처치 안 했다가 나중에 상처가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의사는 고은서의 상처를 처치해주고 주인혁에게 당부했다.“돌아가서 누나를 잘 챙겨. 그래야 미래의 여자친구도 행복할 거 아니야.”주인혁은 얼굴이 새빨개서 고개를 끄덕였다.의사는 고은서를 위해 약을 발라주고 또 몇 가지 소염제와 바르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약사들이 밥 먹으러 간 탓에
그는 창가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뭘 도와드릴까요?”여자 간호사가 얼굴이 새빨개서 입을 열었다.“필요 없어요.”곽승재가 담담하게 거절했다.여자 간호사가 떠난 후 고은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인혁이 잡고 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대표님, 여기 계셨어요? 계속 주차장에서 기다렸잖아요.”바로 이때 마스크를 낀 마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그녀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무언갈 떠올린 듯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듯이 곽승재의 팔짱 꼈다.“은서 씨, 저는 기자들한테 사진이 찍히면서 혹시라도 이상한 기사가 날까 봐 이 진료소로 온 건데 은서 씨는 왜 이곳에 있는 거죠?”마재경이 고은서를 노려보며 말했다.‘왜 하필 이곳에서까지 만나게 되는 거지?’고은서는 마재경의 말을 무시한 채 주인혁을 향해 말했다.“이만 가자.”주인혁도 눈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오른 후, 고은서는 완곡하게 주인혁의 고백을 거절했다.“미안. 난 그저 널 남동생과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어. 네 고백은 못 받아줄 것 같아.”주인혁은 실망하긴 했지만 이미 그가 예상했던 결과였다.그는 사실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 없었다.원래 같으면 미래에 더 강해져서 그녀 곁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때 고백할 예정이었다.그러나 복도에 홀로 앉아 자신의 상처를 호 하고 부는 그녀의 뒷모습이 하도 가녀려 보여서 저도 모르게 고백을 하게 된 것이었다.“미안해, 누나. 내가 너무 급했네.”주인혁이 후회하며 사과했다.“그렇다고 날 멀리 밀어내진 말아줘. 나, 나...”그는 장난친 것뿐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전에도 말했지만 넌 그저 내가 널 도와준 일로 나에게 환상이 생겨서 날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야.”고은서가 난감해하는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나도 이해해. 예전에 내가 그렇게 곽승재를 사랑하게 되었거든. 그런데 이혼하고 나니까 곽승재도 내가 생
여시은은 곽승재의 말을 듣자마자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곽 대표님, 어제 은서 씨랑 마재경 씨를 데게 한 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진짜 그냥 실수로 그런 거예요. 대체 무슨 설명을 원하시는 거죠?”곽승재의 표정이 삽시에 어두워졌다.“여시은 씨, 총명하신 분이어서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어떤 일은 해도 괜찮고 어떤 일은 하면 안 되는지 이후부터 잘 구분해 가며 하시길 바랄게요.”“지금 제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단정 짓는 건가요?”여시은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반박하기 시작했다.“그럼 신고해서 경찰더러 저를 잡아가라고 하세요. 고의상해죄로 저를 고소하면 되겠네요.”여시은이 이렇게 강인하게 나올 줄은 생각 못 했던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바로 이때 문 쪽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곽 회장님과 여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사무실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아버지, 여 대표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죠?”곽승재가 일어서서 두 사람을 마중했다.“금방 귀국하고 시은이 보러 들렀는데 마침 아래서 곽 회장님을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여재훈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여시은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더 빨개지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억울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듯 울락 말락 했다.“시은아, 왜 그러니? 승재가 널 괴롭혔어?”곽현수는 눈을 부릅뜨고 곽승재를 노려보면서 그를 비난했다.“시은이가 뭘 잘못했다고 애를 울리는 거야?”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재훈은 여시은에게 다가가 물었다.“시은아, 무슨 일 있었어?”여시은은 눈물을 닦으면서 울분을 토했다.“방금 분쟁이 생겼는데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곽 대표님한테 화냈어요.”여재훈은 여시은의 이마를 콕 찍으면서 말했다.“겸손하게 성질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걸 배우겠다고 아빠랑 약속했잖아.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잊은 거야?”그러자 여시은이 콧방귀
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다 아버지를 닮아서죠. 아버지가 좋은 모범이 되어서 아들도 이렇게 배우고 자란 거죠.”“곽승재!”곽현수는 버럭 호통쳤다.“정말 내 아들만 아니었으면 이미 집에서 쫓겨난 줄 알아. 그때 되면 나한테 빌 기회조차 없을 거야.”곽승재는 더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대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곽현수가 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더는 비난하지 않고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요즘 들어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스캔들이 동네방네 소문난 걸 알고나 있어? 여 대표가 딸바보인 걸 몰라서 그러는 거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는 피식거리며 비아냥거렸다.“다 아버지 덕분이잖아요. 제가 고은서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끔 아버지가 꾸미신 일이잖아요. 이 기회에 일거양득으로 저를 GS그룹에서 밀어내고 얼마나 좋아요.”곽현수는 부인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곽승재가 언젠간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알면 똑바로 행동해. 얼른 시은이랑 약혼하고 쓸데없는 여자랑은 연 끊어.”“고은서랑 짜고 그 여자를 내 방에 보낼 땐 쓸모있는 여자고 지금은 쓸모없는 여자란 말씀이세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곽현수는 순간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네가 고은서랑 진작에 연을 끊었으면 내가 이러지 않아도 됐잖아. 대체 시은이가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결혼을 거부하는 거야?”곽승재는 더는 아버지랑 다투고 싶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재경이가 꽤 마음에 드는데 계속 옆에 두고 지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너, 이 불효자 같은 놈!”곽현수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반면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욕 다 하셨으면 이만 가보세요.”“판주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 GS그룹으로 돌아가고 싶거든 얼른 시은이랑 약혼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곽현수는 씩씩거리며 할 말을 다 하고는 문을 박차고
룸에서 유혜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주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더 소란 피워 봐요. 좋기든 온 해성 사람들이 다 알게끔 일을 크게 만드세요. 저야 아이를 없애고 이혼하면 그만이에요.”조수연은 이내 흠 잡힌 사람처럼 조용해졌다.“아무튼 당신 아들도 전처만 좋아하잖아요. 출국한 지 이렇게 오래되도록 나한텐 전화 한 통도 없잖아요!”조수연은 기세만 수그러들었을 뿐 입으로는 전혀 지려고 하지 않았다.“지연이를 더 좋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 효녀인 데다가 말도 곧잘 들어. 너와 달리 승준이도 잘 보살펴줬거든. 넌 집안일도 하지 않고 사람을 돌볼 줄도 모르잖아. 심지어 나와서...”유혜린이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조수연은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바로 이때, 레스토랑 웨이터가 경찰을 데리고 룸 앞으로 다가왔다.고은서와 박지연도 더는 머물지 않고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이곳에서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다니. 한때 유혜린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당하고 나니 또 네가 좋아 보이나 봐.”조수연이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고은서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반면 박지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는데, 그 정도 소리도 못 들으면 허무하지.”“정말 이혼하고 나와서 다행이야. 계속 참다가 활발하던 애가 우울증을 앓겠어.”고은서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그런데 유혜린도 정말 만만하지 않던데. 똑같이 되갚는 거 봤어?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인데 서슴없이 내려치던데?”전에 주차장에서 만났을 땐 그저 기사에게 차로 데려가라고 했을 뿐이지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다.유혜린은 조수연의 체면을 단 한 번도 고려해 준 적이 없었고 또한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니까. 전생에 지연이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다 조수연 업보지.”박지연이 차를 따르면서 말했다.“자기 아들이 뭐 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아무 여자나 마음대로 고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욕설을 퍼붓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고은서와 박지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마주 보았다.“구경하러 가고 싶은데.”고은서가 흥미진진해 하며 답했다.“나도.”두 사람은 이내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이미 구경꾼들이 적지 않게 몰려들어 있었는데 복도가 북적북적했다.유혜린의 룸에서는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내부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던 터라 고은서와 박지연은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두 사람은 구경꾼들 사이에 서서 몰래 룸 안을 들여다보았다.조수연은 룸 안에 서서 유혜린을 손가락질하면서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험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유혜린은 뺨을 맞았는지 손으로 얼굴 한쪽을 가린 채 남자 앞에 서 있었다.“유혜린, 의사라는 사람이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임신했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감히 나와서 몰래 바람을 피워?”조수연이 호통쳤다.“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친구랑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바람이라뇨?”유혜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친구는 무슨. 개 같은 자식들이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미 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바람을 피웠잖아.”조수연이 화내며 소리쳤다.“아까 들어왔을 때 저 남자가 다정하게 네 어깨에 손까지 올려놓고 있었는데 내가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여기서 더 한 짓이라도... 아악!”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얼굴이 일그러진 유혜린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그녀는 가녀린 몸과 다르게 힘은 무척 셌다.조수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뒷걸음을 쳤다.도중에 상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한 번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던 조수연은 한참 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달려가 유혜린의 머리채를 잡았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시어머니한테 손을 대? 오늘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조수연은 소리를 지르면서 유
이미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더 긴장해 했다.“은서 씨, 더는 이렇게 무리하게 일하면 안 돼요. 건강도 챙겨야죠. 그러다 몸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고은서에게 있어서 이미숙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그녀의 관심에 고은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로 고은서는 이틀 동안 이미숙의 요구대로 집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화장실을 가고 밥 먹는 것 외에는 거의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다.사실 이미숙은 밥까지 침대로 가져다줄 생각이었는데 고은서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재택근무라도 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곧 폐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아줌마, 저 진짜 괜찮아요. 그냥 조금 불편한 것 빼곤 아무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틀 동안 누워 있어서 이젠 다 나았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세요. 그리고 저녁엔 지연이랑 밥약이 있어서 제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고은서가 이미숙을 달랬다.정식으로 병원에서 나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지라 박지연은 이틀 동안 계속 병원 업무에 시달려 있었다.따라서 고은서 또한 그녀에게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오늘 마침 두 사람 다 시간이 있어서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미리 약속을 잡아두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끝없는 당부를 들으면서 준비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의사가 음식을 가려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하는 홍콩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웨이터는 고은서를 이 층으로 안내했다.마침 다른 웨이터가 옆 룸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는데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안을 들여보았다.그런데 룸 안에서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온승준의 현 와이프 유혜린이었다.남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간단히 위로 묶어 올린 유혜린은 성숙미가 넘쳐흘렀다.유혜린 옆에는 사십 대 좌우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는데 꽤 괜찮게 생긴 듯했다.남
의아해하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아주 덤덤해 보였다.“지금 중요한 건 배후에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과 네 안전을 보장하는 거잖아. GS그룹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한테 해가 될 일은 없어. 그전보다 한가한 시간도 더 많아지고 해서 차라리 더 좋아.”고은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이 전에 그녀한테 곽승재가 GS그룹에 있은 지도 꽤 오래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있는 데 왜 이리 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곽승재와 아무런 다툼도 없는 잔잔한 대화를 이토록 오래 이어간 게 얼마 만이지?’전에는 남은 생에 더는 곽승재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고씨 가문이 전생의 비극적인 결말을 또다시 맞이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그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곽승재 또한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은서와 재결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두 사람은 해결 대책에 관해 간단히 토론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체력이 고갈되었다.배가 아픈 데다가 낮에 회의하고 병 보이러 가고 또 정신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두통까지 생겼다.그녀가 피곤해한다는 걸 발견한 곽승재는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 먼저 돌아가서 쉬어. 나머지는 나중에 만나서 다시 얘기해.”고은서는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는 차창을 내리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경호원을 향해 와서 운전하라고 손짓했다.도중에 곽승재가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날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여성 파트너로만 생각해 줘. 선 넘는 일은 삼가해주고.”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거절을 마다하지 않고 고은서의 배를 어루만져주기
“그때 그 목소리 엄청 익숙했는데 혹시 백유미 목소리였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도 이내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육현석이 종래로 중요한 일로 연락이 온 적이 없었던데다가 당시 마침 백유미를 심문하고 있었던지라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고 박지연의 전화는 행여나 고은서한테 문제라도 생겼을까 봐 잊지 않고 받은 것이었다.이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곽승재한테 직접 들으니 마음이 자꾸 저도 모르게 흔들렸다.곽승재는 과거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전에는 고은서를 자신을 성가시게 만드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그녀를 관심해 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고마워.”그러나 곽승재는 그녀의 감사 인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가까운 사이라면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곽승재는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 하면서 그와 함께 C선생에 관해 의논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했다.반면 고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백유미한테 약을 먹인 사람에 관해서 계속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나랑 고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혐의 대상이 한 명이 있긴 해.”“여시은을 말하는 거야?”곽승재가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 보기에는 순진해 보이지만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나한테 접근한 거고.”“전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 나더러 여시은과 정략결혼까지 하라고 했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전에는 당신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은서와 쟁론하고 싶지 않았다.“아버지는 정략결혼을 통해 우리 회사를 더 강하게 만들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런데 난 단 한 번
고은서가 이런 상태로 곽승재와 대화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아무런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고 일부러 냉담한 척하지도 않았으며 더는 정신을 곤두세우고 그를 경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곽승재는 약간 씁쓸하긴 했지만 전에 비해 두 사람의 사이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고은서는 그의 품에서 나오면서 말했다.“알겠어. 그럼 C선생을 찾아내고 나랑 고씨 가문이 더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무례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당신을 사랑하는 것 빼곤 다 해줄 수 있으니까.”그녀의 혼자 힘으론 도무지 C선생을 상대할 수가 없었으므로 유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송민준은 처음부터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주인혁은 연예인으로서 자칫하면 앞날을 망칠 수 있었고 유성준은 MQ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상태였다.지금으로써는 곽승재가 조력자로서 제일 알맞는 인물이었다.게다가 곽승재가 요즘 들어 계속 몰래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른 시일 내로 손을 잡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었다.“당신이 모자란 게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볼게.”고은서가 설명을 보태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약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은서야, 자꾸 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난 단 한 번도 너한테서 뭘 바란 적이 없어. 일부러 네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돕는 것도 아니야.”고은서는 자기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히 도움을 받는 입장이면서도 불구하고 거만한 태도를 선보이는 게 확실히 마땅치 않았다.그녀는 이내 그에게 사과했다.“그럼 우린 이젠 한배를 탄 거네. 백유미한테서 더 들은 거 없어? 백승엽 일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였어?”고은서는 이어 백유미에 관한 얘기를 이어갔다.곽승재는 백유미가 백승엽의 일에 관해 많은 의심을 품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줬다.백승엽이 백
“그런데 아무런 의심스러운 곳도 찾지 못했다는 건 송민준이 C선생이 아니란 뜻이잖아.”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딱 두 가지 가능성이야. 하나는 송민준이 확실히 무고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한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고은서는 송민준이 무고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나랑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하는 거지? 애초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집안이잖아.’“백유미는 그 뺑소니 범인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대?”곽승재 또한 전에 백유미한테 물어봤었는데 고은서와 고준석이 해찬시에 갔을 때 두 사람을 처리할 만한 절호의 기회라고만 소식을 전했을 뿐 모든 건 C선생 혼자 계획한 일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그 말인즉슨 백유미는 두 사람이 사고가 날 거라는 걸 알고만 있었을 뿐 자세한 계획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었단 뜻이다.‘곽승재가 두 범인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아무런 당황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았던 게 다 이유가 있었네. 난 그저 곽승재가 백유미의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고은서는 문뜩 무언가가 떠올랐다.‘전생에 백유미가 만났던 절도 방화범도 그 두 남자였는데 그러니까 전생의 배후도 C선생이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다친 것도 우리 집이 망한 것도, 또 내가 정신병원에서 겪은 모든 일이 다 그 C선생이 꾸민 짓인 거야.’고은서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곽승재는 몸을 떨고 있는 고은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은서야, 괜찮아? 병원 갈까?”고은서는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한기에 휩싸인 듯 마치 당장이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고은서는 이번 생에 곽승재와 이혼만 하고 백유미를 망가뜨리기만 하면 나머지 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현실은 매우 잔인했다.백유미는 그
“은서야, 왜 그래? 어디 문제라도 있어?”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리고 사색에 잠긴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전에 받았던 전화에 관해 얘기했다.그러자 곽승재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내 추측이 맞았어. 아마 백유미가 일을 망친 데다가 혹시나 무언갈 폭로하기라도 할까 봐 희생양으로 삼고 모든 죄명을 덮어씌운 걸 거야.”녹음된 증거도 있고 해서 고은서는 이미 그 일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그런데 백유미 배후에 있는 사람이 제보자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백유미는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에 관해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의 물음에 곽승재는 눈살을 또다시 찌푸렸다.“백유미도 배후가 대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 전에 암암리에 조사해 보았다고는 했는데 딱히 쓸만한 걸 찾아내지는 못했대. 그런데 의심되는 상대가 한 명 있다고 했어.”“누구?”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익숙한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송민준.”고은서는 약간 의외이긴 했지만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섰다.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했었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 건 송민준 자체가 원래부터 꽤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송민준은 왜 백유미 더러 고씨 가문을 해치라고 한 거지?’“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당시 고은서가 사고로 유산하게 된 일을 꺼냈다.송민아의 도우미가 백유미 어머니랑 아는 사이인 건 맞았다. 심지어 진숙희가 먼저 그녀 어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연락한 것이었다.진숙희 신분을 알게 된 백유미 또한 그 절호의 기회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또 마침 고은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진숙희에게 그 아이가 민시후의 아이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소식을 송민아한테 전하라고 시켰던 것이다.송민아가 고은서를 찾아가 아이를 없애라고 했던 것도 다 백유미가 계획한 것이었다.“진숙희가 은혜를 갚기 위해 백유미를 도운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그런데 백유미 또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곽승재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은서는 백유미가 그동안 자신을 상대로 저질렀던 만행들이 모두 누군가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백유미가 고은서는 이미 누군가의 표적이 됐다고 그토록 확신에 차서 말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백유미는 겉으로는 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사실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어. 너와 너희 가문을 상대하라고 말이야.”곽승재가 말을 덧붙였다.고은서는 계속해서 곽승재에게 물었다.“이 모든 것도 다 백유미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 그래서 내가 진짜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보내서 날 지켜보게 한 거고?”“말하자면 그렇지.”곽승재의 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는 죄책감마저 엿보였다.“원래는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내서 네가 더는 위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철저하게 숨은 탓에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 대한 유리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고은서는 언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냐고 곽승재에게 물었다.곽승재는 백유미가 L국에서 납치를 계획할 때부터 백유미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말했다.이후에 백유미는 C선생이라는 사람이 계속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시해왔다고 순순히 인정했다.C선생이라는 말에 고은서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고은서는 한참을 생각해낸 끝에 그때 백유미가 원지훈 무리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백유미에게 전화가 온 사람이 C선생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때 전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C선생이라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도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설마 그때 전화가 온 것도 백유미한테 일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물어보려고 그런 건가? 근데 백유미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서 백유미를 버리려고 한 거고?”고은서는 이 일을 곽승재에게 말해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C선생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