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네가 걱정하는 건 뭐야?” 할머니는 이렇게 묻고 나서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은서야, 너와 승재의 이혼 문제 말이야... 넌 아직 마음을 바꾸지 않았구나?” 고은서는 대답 대신 사과했다.“할머니, 지난번에 제 외삼촌과 이모가 할머니를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많이 신경 쓰이셨죠?” 할머니는 듣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것보다 나는 네가 그들이 말한 대로 승재와 이혼하지 않으면 좋겠어.” 고은서는 말이 없었다. 오직 이 부탁만큼은 그녀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연히 알고 있었다. “은서야, 네가 이 기간에 이혼 얘기를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는데도 이혼 서류를 받았다는 건, 승재가 또 너를 슬프게 했다는 거지?”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할머니는 네가 먼저 찾아와 얘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할머니에게 전화 한 통 없었잖아.” 예전 같았으면, 고은서는 확실히 할머니에게 자주 전화해 불만을 털어놓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걱정을 끼쳤는지 모른다. 고은서는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할머니, 이 일은 승재 씨와는 관계가 없어요. 제가 억지로 그에게 서명을 받은 거예요. 들으니 그를 꾸짖으셨다고 하던데, 사실 책임져야 하는 건 저예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봐봐, 아직도 승재 편을 들고 있잖아.”“솔직히 말해봐, 지난번 술자리 때 백유미가 방해한 것 때문에 승재에게 미리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게 한 거지?” 할머니는 인터넷을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본 그날 밤의 일을 할머니에게 전해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은서가 말하려고 하자 할머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예전에 곽씨 가문에 자주 있었고 승재와 아는 사이일 뿐이야. 그 둘 사이에는 절대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없어.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면 할머니가 걔를 회사에서 쫓아내줘?”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고은서가 재빨리 막았다.“그때 술자
결정을 내린 할머니는 말했다.“은서야, 네 말이 맞아. 할머니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게.”“오랜만에 네가 만든 단팥빵을 먹고 싶구나. 조금 만들어 줄 수 있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가져올게.”고은서는 이전에 주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숙녀였지만, 남자들은 밥 잘하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말에 영향을 받아 요리 수업을 듣고 본격적으로 요리와 디저트를 배우게 되었다.그녀는 매일 따뜻한 밥과 반찬을 준비해 놓고 곽승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음식이 식을 때까지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그가 설령 집에 돌아오더라도 그녀가 만든 음식을 몇 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니 이로써 그의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더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다행히 배웠던 요리 기술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가끔 간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 완전히 무용한 건 아니었다. 노인들은 너무 달거나 기름진 음식을 드실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레시피를 직접 조절하여 그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재생 이후로 요리하지 않았던 고은서는 할머니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물론이죠.”“그리고, 이 기간에 승재와 잘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더 이상 할머니에게 거짓말해선 안 돼, 알겠어?”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한 고은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네.”할머니의 전화 때문에 원래 외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려던 고은서는 차를 타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집 문에 들어선 후 아줌마에게 빵을 만들 재료들을 준비해 달라고 하려던 참에, 그녀는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아마도 오후의 일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듯,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할머니와 함께 저녁 먹으러 가지 않았어?”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 혼자 본가로 돌아갔는데 할머니는 네가 안 보이니까 내가 너를 괴롭혔다고 하시면서 나를 쫓아내셨어.”곽승재는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고은서, 이 일에
그날 밤, 고은서는 밀가루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발효시켜 다음 날 아침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직접 개량한 저당 팥앙금을 만들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샤워하고 피부 관리를 마친 후 침대에 눕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중, 서재에서 바쁘게 일하던 곽승재가 갑자기 들어왔다.고은서는 그와 대화하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물기와 샴푸 향기를 남기며 침대에 누웠다. 고은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존재감을 줄이려 애썼다.그러나 다음 순간, 고은서의 이불이 당겨졌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곽승재는 그녀의 몸 위에 바로 덮쳐들었다.“너 뭐 하는 짓이야!”고은서가 눈을 뜨고 화를 내며 물었다.곽승재는 팔을 그녀의 몸 양옆에 지탱하며 깊은 눈으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너의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만이었지? 지금 그 역할을 해줄게.”“야, 너 제정신이야?”고은서는 그를 밀어봤지만 그의 큰 몸집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곽승재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강제로 밀어붙이려는 모습에 고은서는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리를 높이 들어 그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강하게 찔렀다.“으악!”곽승재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 통증을 호소하며 몸을 움츠렸다.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곽승재를 다시 한번 밀었고 이번에는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곽승재의 잔뜩 찡그린 이마와 창백한 얼굴, 그리고 손으로 가리는 부분을 보며 자신의 행동에 매우 뿌듯했던 고은서는 조금 난처했다.그녀는 뭔가 안 될 곳을 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린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괜찮아?”고은서가 진심으로 물었다.곽승재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너 이러고도 정말 여자 맞아? 좀 살살하지 그래?”‘진짜로 할 생각도 아니었고 고은서가 좀 낮추는 태도만 보이면
이 익숙한 호칭과 등록되지 않은 번호를 보고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은서야, 나 지금 TIME에 있어. 네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마시니까 우리 함께 술 마시던 시절이 정말 그립더라.”역시나 성아연이었다. 지난 술자리 이후로 고은서는 성아연이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스스로 연락을 해왔다.만약 성아연이 이 우정을 잃기 싫어서 연락한 거라면 고은서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TIME은 이 도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바 중 하나로, 성아연은 자주 그곳에서 친구들을 불러내어 부잣집 딸처럼 대접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 그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고은서였다.혹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호구였던 자신을 떠올렸던 걸까?“넌 나한테 절대 화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설령 절교하더라도 나에게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했잖아.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성아연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왔다.이 말들은 고은서가 실제로 한 말이었다.그때는 성아연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했고 그녀와의 우정이 변질되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그런데 그녀가 백유미와 결탁한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실 성아연의 말은 그리 설복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은서 스스로 곽승재의 사랑을 너무 간절히 원했고 또 성아연과의 우정을 너무 믿었기에 매번 그녀의 조언을 따라 백유미와 맞섰다.“은서야,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내 잘못이었어. 너에게 사죄하기 위해 아빠에게 부탁해서 향료 대리점을 하는 친구를 소개받았어. 그 친구가 MQ에서 대량의 향료를 주문할 수 있대.”고은서는 번호를 차단하고 자려고 했지만 성아연이 다시 문자를 보내자 그녀의 차단하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지난 생에서도 성씨 일가는 고씨 가문에 사업을 소개해 주었고 납기 시점에 문제 발생으로 상대방이 수취를 거부했다. 그 후 MQ는 벌금까지 지불하고 그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었다. 이로 인해 MQ의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아저씨께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줘. MQ는 현재 주문이 꽤 많아. 승재 씨도 최근에 우리 삼촌을 도와 빅딜을 성사했어.”말을 들은 성아연은 난감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이 일을 계속해서 고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오히려 고은서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구하며 앞으로는 모든 발언과 행동에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다.고은서는 그녀와 더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충 몇 가지 핑계를 대어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외할아버지에게 문자를 남겨 당분간 삼촌에게 더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이 일들을 마친 후 고은서는 피곤해져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새로 교체한 침대 시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고은서는 금방 잠이 들었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고은서는 허리 위에 어떤 것이 눌린 것을 느꼈고, 몇 번 몸을 움직여 봤지만 그 무게를 떨칠 수 없어 결국 눈을 떴다.그러자 고은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팔을 자신의 허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녀는 온몸을 그를 향해 자고 있었고 머리는 그의 어깨 옆에 기대어 있었으며, 눈을 뜨자마자 곽승재의 날렵한 턱선을 볼 수 있었다.비록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이렇게 친밀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져 고은서는 급히 곽승재의 팔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곽승재는 잠결에 그녀를 흘끗 보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눈을 감고 다시 자려고 했다. 고은서는 자신의 잠꼬대가 이렇게 심한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침대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자고 나니 이미 곽승재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평소 자율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곽승재도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미 잠을 다 깬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외투를 걸치고 주방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드릴 단팥빵을 만들기로 했다.냉장고의 반죽은 이미 발효가 완료되었다. 고은서는 그 반죽을 꺼내 길게 밀어서 납작한 형태
겉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는 일인데 그가 너무 센 힘으로 반죽을 눌렀더니 반죽 모양이 한 번에 망가져 버렸다.“이러다가 도마까지 부서지겠네.”고은서가 불평하며 말했다.“그만하고, 내가 평평하게 만든 반죽에 속을 넣어서 모양을 잡아줘.”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쳐다본 후 말없이 지시대로 속을 쌌다.하지만 동작은 여전히 서툴렀고 앙금 속이 전혀 균일하지 않았다. 반죽 모양을 잡을 때는 더구나 엉망이었고 하마터면 앙금 속이 터져 나올 뻔했다.“어휴, 그만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무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너 그냥 나가 있어. 오히려 방해야. 할머니께서 점심 때까지 기다리셔도 못 드실까 봐 걱정이야.”“고은서, 방금 내가 한심하다고 했어?”곽승재는 그녀의 불평에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그러자 고은서가 말했다.“이렇게 쉬운 일도 못 하잖아. 너도 자신이 한심하지 않아?”예전에 곽승재를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이렇게 서투르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아마 그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홧김에 밀대를 빼앗아 그녀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너는 그냥 옆에 있어. 내가 할게!”‘그 한마디에 멘탈 나갔나 보네.’“좋아! 기대할게.”고은서는 여유롭게 말하며 동시에 앞치마를 벗고 그에게 물 었다.“매 줄까?”곽승재는 냉담한 시선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고은서도 그를 강요하지 않았고 아줌마가 집에 없으니 옷이 더러워지면 스스로 세탁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곽승재의 솜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되도록 고은서에게 깔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해보니 훨씬 더 어려웠다. 겨우 반죽을 밀어 평평하게 만들었지만 두께가 불균일하고 어떤 곳은 아예 구멍이 나버렸다.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반죽을 들어 자기 얼굴 앞에 가리면서 그 구멍을 통해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한번 비교해 봐. 내 눈과 이 구
“읍!”곽승재의 점점 더 선을 넘는 행동을 느끼며 고은서는 화가 나고 초조해져 몸을 비틀며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곽승재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지금 이 자세로 그녀는 어떤 방어 기술도 쓸 수 없었다.이 상태에서 더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니 고은서는 결국 불편함을 참으며 곽승재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의 음란한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그녀의 순응을 느낀 곽승재는 격렬했던 키스를 조금 늦추었고 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쓰읍...”곽승재는 아픔에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가 화를 내며 그녀를 밀어낼 줄 알았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듯하였고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혀를 빨기 시작했다.‘미친 XX...’고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혀끝을 물어버렸다.그러자 곽승재는 드디어 좀 아팠는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너 자꾸 이럴래?”고은서는 산소 부족으로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헐떡이며 말했다.“이 나쁜 XX...”‘아무렇지 않게 반죽 만들다가 왜 갑자기 욕구불만인 거야?’고은서의 붉어진 얼굴과 키스 때문에 촉촉해진 입술을 보며 곽승재 마음속의 이상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하지만 고은서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조금만 더 건드리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맞장 뜰 기세로 서 있었다.곽승재는 참느라 상당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강박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성인이 된 이후로 그에게 관심 갖고 다가오려는 여성은 많았지만 그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예전의 고은서가 매일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감정적인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항상 자제력이 강했다.‘하지만 왜 요즘 고은서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 그녀를 괴롭히고 싶고, 울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드는 걸까? 혹시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가 욕망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절대 다음은 없어. 다시는 곽승재랑 함께 주방에 있지 않을 거야.’“허허, 괜찮아, 그냥 어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거야. 의사 선생님이 간식을 적게 먹으라던 걸 깜빡했어. 따로 다시 만들 필요는 없어.”할머니가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은서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기분이 더 좋아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화를 끊고 지저분한 주방을 보며 고은서는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가사도우미가 일을 시작하는 동안 고은서는 그 남자의 냄새가 묻은 몸을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여자는 스스로 모든 집안일을 떠안고 있으면 끝이 없을 만큼 일이 쌓이기만 하지. 난 그딴 착한 아내의 명성을 원하지 않아. 그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게 훨씬 나아.’서재에서, 곽승재는 할머니의 영상 통화를 받았다. “승재야, 입술에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는 피를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부딪힌 것뿐이에요.”할머니는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시며 말했다.“너 또 은서를 괴롭혔지? 걔한테 물린 거지?”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곽승재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고은서는 그의 입술뿐만 아니라 혀도 물어버렸다. 방금 확인해 보았는데 혀에서는 피까지 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걸 보니 고은서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함부로 행동한 걸 후회하고 있니? 여자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대로 해줘야 행복해하는 거야.”할머니는 꾸짖으며 말했다.“항상 은서에게 잘 대해주라고 했는데 넌 들은 척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거 아냐.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셈이니?”곽승재의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걔가 정말로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저에 대한 공략 전술을 바꿔서 더 교묘해진 것뿐이에요.”“아이고, 이 답답아! 너를 어쩌면 좋니!”할머니는 실망한 목소리로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
고은서는 아무리 두 사람이 남매라고 해도 상대방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다치는 게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송민아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그냥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뭘?”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 났다.“오빠가 하도 경각심이 높은 사람이라 폰이랑 컴퓨터에 다 비밀번호가 걸려있거든. 그리고 평소엔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그런데 내가 전에 몰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걸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까진 모를걸. 그래서 혹시 사무실 컴퓨터도 같은 비밀번호인지 확인해 보려고.”‘이건 또 뭔 호기심이래?’“민아야, 그냥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개인 프라이버시와 연관된 일이잖아.”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그러나 송민아는 그녀의 말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괜찮아. 내가 기밀문서를 찾아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비밀번호만 확인해 보는 거잖아. 우리 둘 다 비밀로 하면 오빠도 영원히 모를 거야.”“...”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송민아는 이내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열렸어!”송민아는 흥분해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이러고 보면 내 시력하고 기억력이 다 어마어마하네.”“네네네. 세상 제일로 가는 시력과 기억력을 가지셨어요.”고은서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오빠가 조금 이따 곧 올 건데 얼른 다시 잠가. 발각되어서 욕먹지 말고.”“알겠어.”송민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마우스로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그러나 마우스가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실수로 동영상 파일 하나를 클릭하게 되었다.갑작스레 재생된 동영상에 깜짝 놀란 송민아는 인츰 꺼버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동영상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내 황급히 고은서를 불렀다.“고은서, 얼른 와서 봐봐. 이거 우리가 갔던 농장 아니야?”‘송민준의 컴퓨터에 농장 동영상이 저장되어 있다고?’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의를 따지던 고은서는 모든 걸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고은서가 담담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송민아는 WOR에서 나오자마자 여시은에 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입으로만 계속 아버지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좋은 아버지를 뒀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사람이 누군데. 우리가 WOR을 투자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 찾아오는 이유가 뻔하잖아.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네 말처럼 능력 있는 아버지를 배후에 두고 있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게다가 그냥 알아보러 온 거라고 말한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잖아.”고은서가 웃으면서 그녀를 달랬다.“다 우리 아빠 탓이야. 여시은한테 지다니 너무 분해.”송민아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우리가 굳이 아버지한테 의지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자아 발전에 중심을 두면 되지. 게다가 넌 훌륭한 오빠를 뒀잖아. 북성에서 ST그룹 송민준이라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송민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내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하긴. 오빠가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 그보다 고은서, 우리 오빠 찾으러 가자. 오빠가 전에 꽤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해서 내가 며칠 동안 떼쓰며 빌었는데 어제 겨우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거든. 오빠가 마음 바꾸기 전에 얼른 가자.”“이미 약속한 일인데 괜찮지 않을까?“그럴 리가. 오빠가 이런 면에서는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거든. 높은 이익만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인한다니까. 나중에 핑계 대며 모른다고 하면 나만 손해잖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얼른 가자. 지금쯤 사무실에 있을 거야.”송민아는 재촉하면서 고은서를 끌고 차에 탔다. 그리고 이내 기사한테 ST그룹 해성 지사로 가달라고 부탁했다.“미리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물었다.“아니. 그냥 쳐들어갈 거야. 그리고 가는 김에 밥도 한 끼 얻어먹어야지.”“...”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날 백유미가 송민준을 의심하고 있다고 했는데 곽승재도 확실한 증거
고은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어제 금방 곽승재한테서 여시은도 게임 회사에 관심 있어 한다고 주의하라는 소릴 들었는데 오늘 바로 찾아온다고?’“여긴 무슨 일로 온 거래?”고은서의 물음에 송민아는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 비서랑 같이 온 것 같던데 보자마자 너한테 전하러 달려왔어.”“한번 나가 보자.”고은서는 송민아랑 책임자와 함께 여시은을 만나러 갔다.WOR 게임 회사 직원은 이미 그녀를 또 다른 접대실로 데려갔다.고은서가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과 비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의 귀여운 옷차림 대신 여시은은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원래도 귀엽게 생긴 데다가 항상 천진하고 무구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해서인지 정장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어머, 은서 씨 아니에요. 여기에서 은서 씨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여시은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여시은 씨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오신 거죠?”고은서가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요즘 WOR 게임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게임에 흥취가 생겨서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찾아왔어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고 싶어서요.”여시은은 숨김없이 그대로 말했다.“WOR이 우리 유일에서 투자한 프로젝트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옆에 있던 송민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알고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유일과도 합작하면 되죠.”여시은이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송민아는 화가 나긴 했지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드러내고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죄송하지만 우린 WOR 프로젝트에 관해서 아직 다른 회사와 합작할 생각이 없습니다.”고은서가 담담하게 말했다.WOR 책임자도 유일 투자 은행과 단독 계약을 체결한 터라 다른 회사와 합작할 의향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그러나 예상 밖으로 여시은은 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아니.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곽승재가 고개를 저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고은서는 도리어 자기 아이디어가 인정받았다는 거에 내심 기뻐했다.곽승재는 GS그룹을 물려받을 때부터 엘리트라고 불리면서 많은 기사에 떴었는데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은서는 이어 곽승재와 여시은에 관해 더 자세히 토론한 후 시간이 늦어지자 먼저 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먼저 갈게. 나중에라도 일이 있으면 다시 연락해.”“은서야.”그러나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왜?”고은서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곽승재는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배는 괜찮아?”“다 나았어. 전에 나한테 문자로 물어봤었잖아.”곽승재는 그녀가 조금 더 머물 수 있게끔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잘 자.”“응.”‘이상하게 왜 저러는 거야?’고은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더 머무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고은서는 먼저 회사에서 긴급한 서류들을 처리한 후 송민아와 함께 WOR 게임 회사로 갔다.게임 회사는 전보다 더 밝고 넓은 곳으로 이사하였고 규모도 훨씬 더 커졌다.그러나 분위기만은 변함없이 활력이 넘쳤다.아무래도 젊은이끼리 자체로 팀을 묶어 제작한 게임이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자기 친자식과 다름없었는 존재였다.책임자는 고은서와 송민아를 보자마자 아주 열정적으로 맞이해 주면서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곧 테스팅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테스팅이 순리롭게 진행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출시도 가능했다.듣기만 해도 격동되는 순간이었다.책임자는 두 사람한테 얘기하면서 매우 흥분해 했다.송민아는 여러 가지 절차를 확인하러 가고 고은서는 책임자와 함께 접대실에 앉아 어제저녁 곽승재가 말했던 일에 관해 의논했다.“정말 이런 밑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