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네가 걱정하는 건 뭐야?” 할머니는 이렇게 묻고 나서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은서야, 너와 승재의 이혼 문제 말이야... 넌 아직 마음을 바꾸지 않았구나?” 고은서는 대답 대신 사과했다.“할머니, 지난번에 제 외삼촌과 이모가 할머니를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많이 신경 쓰이셨죠?” 할머니는 듣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것보다 나는 네가 그들이 말한 대로 승재와 이혼하지 않으면 좋겠어.” 고은서는 말이 없었다. 오직 이 부탁만큼은 그녀도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연히 알고 있었다. “은서야, 네가 이 기간에 이혼 얘기를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는데도 이혼 서류를 받았다는 건, 승재가 또 너를 슬프게 했다는 거지?”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할머니는 네가 먼저 찾아와 얘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할머니에게 전화 한 통 없었잖아.” 예전 같았으면, 고은서는 확실히 할머니에게 자주 전화해 불만을 털어놓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걱정을 끼쳤는지 모른다. 고은서는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할머니, 이 일은 승재 씨와는 관계가 없어요. 제가 억지로 그에게 서명을 받은 거예요. 들으니 그를 꾸짖으셨다고 하던데, 사실 책임져야 하는 건 저예요.”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봐봐, 아직도 승재 편을 들고 있잖아.”“솔직히 말해봐, 지난번 술자리 때 백유미가 방해한 것 때문에 승재에게 미리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게 한 거지?” 할머니는 인터넷을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본 그날 밤의 일을 할머니에게 전해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은서가 말하려고 하자 할머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 여자는 예전에 곽씨 가문에 자주 있었고 승재와 아는 사이일 뿐이야. 그 둘 사이에는 절대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없어.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면 할머니가 걔를 회사에서 쫓아내줘?”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고은서가 재빨리 막았다.“그때 술자
결정을 내린 할머니는 말했다.“은서야, 네 말이 맞아. 할머니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게.”“오랜만에 네가 만든 단팥빵을 먹고 싶구나. 조금 만들어 줄 수 있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가져올게.”고은서는 이전에 주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숙녀였지만, 남자들은 밥 잘하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말에 영향을 받아 요리 수업을 듣고 본격적으로 요리와 디저트를 배우게 되었다.그녀는 매일 따뜻한 밥과 반찬을 준비해 놓고 곽승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음식이 식을 때까지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그가 설령 집에 돌아오더라도 그녀가 만든 음식을 몇 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니 이로써 그의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더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다행히 배웠던 요리 기술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가끔 간식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 완전히 무용한 건 아니었다. 노인들은 너무 달거나 기름진 음식을 드실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레시피를 직접 조절하여 그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재생 이후로 요리하지 않았던 고은서는 할머니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물론이죠.”“그리고, 이 기간에 승재와 잘 지내기로 약속했으니 더 이상 할머니에게 거짓말해선 안 돼, 알겠어?”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한 고은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대충 대답했다.“네.”할머니의 전화 때문에 원래 외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려던 고은서는 차를 타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왔다.집 문에 들어선 후 아줌마에게 빵을 만들 재료들을 준비해 달라고 하려던 참에, 그녀는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아마도 오후의 일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듯,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본 순간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할머니와 함께 저녁 먹으러 가지 않았어?”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나 혼자 본가로 돌아갔는데 할머니는 네가 안 보이니까 내가 너를 괴롭혔다고 하시면서 나를 쫓아내셨어.”곽승재는 기분이 매우 나빠 보였다.“고은서, 이 일에
그날 밤, 고은서는 밀가루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발효시켜 다음 날 아침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직접 개량한 저당 팥앙금을 만들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샤워하고 피부 관리를 마친 후 침대에 눕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중, 서재에서 바쁘게 일하던 곽승재가 갑자기 들어왔다.고은서는 그와 대화하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물기와 샴푸 향기를 남기며 침대에 누웠다. 고은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존재감을 줄이려 애썼다.그러나 다음 순간, 고은서의 이불이 당겨졌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곽승재는 그녀의 몸 위에 바로 덮쳐들었다.“너 뭐 하는 짓이야!”고은서가 눈을 뜨고 화를 내며 물었다.곽승재는 팔을 그녀의 몸 양옆에 지탱하며 깊은 눈으로 말했다.“고은서, 내가 너의 남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만이었지? 지금 그 역할을 해줄게.”“야, 너 제정신이야?”고은서는 그를 밀어봤지만 그의 큰 몸집은 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곽승재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강제로 밀어붙이려는 모습에 고은서는 주인혁이 가르쳐준 호신술을 떠올렸다. 그녀는 다리를 높이 들어 그의 허벅지 안쪽을 향해 강하게 찔렀다.“으악!”곽승재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 통증을 호소하며 몸을 움츠렸다.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곽승재를 다시 한번 밀었고 이번에는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곽승재의 잔뜩 찡그린 이마와 창백한 얼굴, 그리고 손으로 가리는 부분을 보며 자신의 행동에 매우 뿌듯했던 고은서는 조금 난처했다.그녀는 뭔가 안 될 곳을 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린 것뿐인데 이렇게 될 줄은...“괜찮아?”고은서가 진심으로 물었다.곽승재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너 이러고도 정말 여자 맞아? 좀 살살하지 그래?”‘진짜로 할 생각도 아니었고 고은서가 좀 낮추는 태도만 보이면
이 익숙한 호칭과 등록되지 않은 번호를 보고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은서야, 나 지금 TIME에 있어. 네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마시니까 우리 함께 술 마시던 시절이 정말 그립더라.”역시나 성아연이었다. 지난 술자리 이후로 고은서는 성아연이 다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스스로 연락을 해왔다.만약 성아연이 이 우정을 잃기 싫어서 연락한 거라면 고은서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TIME은 이 도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바 중 하나로, 성아연은 자주 그곳에서 친구들을 불러내어 부잣집 딸처럼 대접을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 그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고은서였다.혹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호구였던 자신을 떠올렸던 걸까?“넌 나한테 절대 화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설령 절교하더라도 나에게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했잖아.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성아연이 계속해서 문자를 보내왔다.이 말들은 고은서가 실제로 한 말이었다.그때는 성아연을 진심으로 친구로 생각했고 그녀와의 우정이 변질되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그런데 그녀가 백유미와 결탁한 줄은 상상도 못 했다.사실 성아연의 말은 그리 설복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은서 스스로 곽승재의 사랑을 너무 간절히 원했고 또 성아연과의 우정을 너무 믿었기에 매번 그녀의 조언을 따라 백유미와 맞섰다.“은서야, 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내 잘못이었어. 너에게 사죄하기 위해 아빠에게 부탁해서 향료 대리점을 하는 친구를 소개받았어. 그 친구가 MQ에서 대량의 향료를 주문할 수 있대.”고은서는 번호를 차단하고 자려고 했지만 성아연이 다시 문자를 보내자 그녀의 차단하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지난 생에서도 성씨 일가는 고씨 가문에 사업을 소개해 주었고 납기 시점에 문제 발생으로 상대방이 수취를 거부했다. 그 후 MQ는 벌금까지 지불하고 그 물건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못하고 창고에 쌓여 있었다. 이로 인해 MQ의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아저씨께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줘. MQ는 현재 주문이 꽤 많아. 승재 씨도 최근에 우리 삼촌을 도와 빅딜을 성사했어.”말을 들은 성아연은 난감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이 일을 계속해서 고집하려는 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오히려 고은서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구하며 앞으로는 모든 발언과 행동에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했다.고은서는 그녀와 더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었기에 대충 몇 가지 핑계를 대어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외할아버지에게 문자를 남겨 당분간 삼촌에게 더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다.이 일들을 마친 후 고은서는 피곤해져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새로 교체한 침대 시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고은서는 금방 잠이 들었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고은서는 허리 위에 어떤 것이 눌린 것을 느꼈고, 몇 번 몸을 움직여 봤지만 그 무게를 떨칠 수 없어 결국 눈을 떴다.그러자 고은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방으로 들어와 팔을 자신의 허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녀는 온몸을 그를 향해 자고 있었고 머리는 그의 어깨 옆에 기대어 있었으며, 눈을 뜨자마자 곽승재의 날렵한 턱선을 볼 수 있었다.비록 혼자서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이렇게 친밀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져 고은서는 급히 곽승재의 팔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곽승재는 잠결에 그녀를 흘끗 보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눈을 감고 다시 자려고 했다. 고은서는 자신의 잠꼬대가 이렇게 심한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침대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자고 나니 이미 곽승재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지금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평소 자율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곽승재도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이미 잠을 다 깬 상태였기 때문에 차라리 외투를 걸치고 주방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드릴 단팥빵을 만들기로 했다.냉장고의 반죽은 이미 발효가 완료되었다. 고은서는 그 반죽을 꺼내 길게 밀어서 납작한 형태
겉보기에는 매우 간단해 보이는 일인데 그가 너무 센 힘으로 반죽을 눌렀더니 반죽 모양이 한 번에 망가져 버렸다.“이러다가 도마까지 부서지겠네.”고은서가 불평하며 말했다.“그만하고, 내가 평평하게 만든 반죽에 속을 넣어서 모양을 잡아줘.”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쳐다본 후 말없이 지시대로 속을 쌌다.하지만 동작은 여전히 서툴렀고 앙금 속이 전혀 균일하지 않았다. 반죽 모양을 잡을 때는 더구나 엉망이었고 하마터면 앙금 속이 터져 나올 뻔했다.“어휴, 그만해!”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무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너 그냥 나가 있어. 오히려 방해야. 할머니께서 점심 때까지 기다리셔도 못 드실까 봐 걱정이야.”“고은서, 방금 내가 한심하다고 했어?”곽승재는 그녀의 불평에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그러자 고은서가 말했다.“이렇게 쉬운 일도 못 하잖아. 너도 자신이 한심하지 않아?”예전에 곽승재를 너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이렇게 서투르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아마 그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홧김에 밀대를 빼앗아 그녀에게 명령하듯이 말했다.“너는 그냥 옆에 있어. 내가 할게!”‘그 한마디에 멘탈 나갔나 보네.’“좋아! 기대할게.”고은서는 여유롭게 말하며 동시에 앞치마를 벗고 그에게 물 었다.“매 줄까?”곽승재는 냉담한 시선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고은서도 그를 강요하지 않았고 아줌마가 집에 없으니 옷이 더러워지면 스스로 세탁하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곽승재의 솜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되도록 고은서에게 깔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해보니 훨씬 더 어려웠다. 겨우 반죽을 밀어 평평하게 만들었지만 두께가 불균일하고 어떤 곳은 아예 구멍이 나버렸다.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반죽을 들어 자기 얼굴 앞에 가리면서 그 구멍을 통해 곽승재를 바라보며 물었다.“한번 비교해 봐. 내 눈과 이 구
“읍!”곽승재의 점점 더 선을 넘는 행동을 느끼며 고은서는 화가 나고 초조해져 몸을 비틀며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곽승재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지금 이 자세로 그녀는 어떤 방어 기술도 쓸 수 없었다.이 상태에서 더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니 고은서는 결국 불편함을 참으며 곽승재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의 음란한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그녀의 순응을 느낀 곽승재는 격렬했던 키스를 조금 늦추었고 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쓰읍...”곽승재는 아픔에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가 화를 내며 그녀를 밀어낼 줄 알았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듯하였고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혀를 빨기 시작했다.‘미친 XX...’고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혀끝을 물어버렸다.그러자 곽승재는 드디어 좀 아팠는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너 자꾸 이럴래?”고은서는 산소 부족으로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헐떡이며 말했다.“이 나쁜 XX...”‘아무렇지 않게 반죽 만들다가 왜 갑자기 욕구불만인 거야?’고은서의 붉어진 얼굴과 키스 때문에 촉촉해진 입술을 보며 곽승재 마음속의 이상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하지만 고은서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조금만 더 건드리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맞장 뜰 기세로 서 있었다.곽승재는 참느라 상당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강박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성인이 된 이후로 그에게 관심 갖고 다가오려는 여성은 많았지만 그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예전의 고은서가 매일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감정적인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항상 자제력이 강했다.‘하지만 왜 요즘 고은서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 그녀를 괴롭히고 싶고, 울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드는 걸까? 혹시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가 욕망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절대 다음은 없어. 다시는 곽승재랑 함께 주방에 있지 않을 거야.’“허허, 괜찮아, 그냥 어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거야. 의사 선생님이 간식을 적게 먹으라던 걸 깜빡했어. 따로 다시 만들 필요는 없어.”할머니가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은서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기분이 더 좋아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화를 끊고 지저분한 주방을 보며 고은서는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가사도우미가 일을 시작하는 동안 고은서는 그 남자의 냄새가 묻은 몸을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여자는 스스로 모든 집안일을 떠안고 있으면 끝이 없을 만큼 일이 쌓이기만 하지. 난 그딴 착한 아내의 명성을 원하지 않아. 그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게 훨씬 나아.’서재에서, 곽승재는 할머니의 영상 통화를 받았다. “승재야, 입술에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는 피를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부딪힌 것뿐이에요.”할머니는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시며 말했다.“너 또 은서를 괴롭혔지? 걔한테 물린 거지?”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곽승재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고은서는 그의 입술뿐만 아니라 혀도 물어버렸다. 방금 확인해 보았는데 혀에서는 피까지 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걸 보니 고은서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함부로 행동한 걸 후회하고 있니? 여자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대로 해줘야 행복해하는 거야.”할머니는 꾸짖으며 말했다.“항상 은서에게 잘 대해주라고 했는데 넌 들은 척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거 아냐.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셈이니?”곽승재의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걔가 정말로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저에 대한 공략 전술을 바꿔서 더 교묘해진 것뿐이에요.”“아이고, 이 답답아! 너를 어쩌면 좋니!”할머니는 실망한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