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곽승재의 점점 더 선을 넘는 행동을 느끼며 고은서는 화가 나고 초조해져 몸을 비틀며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곽승재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 지금 이 자세로 그녀는 어떤 방어 기술도 쓸 수 없었다.이 상태에서 더 저항하는 건 불가능하니 고은서는 결국 불편함을 참으며 곽승재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의 음란한 손길을 피할 수 있었다.그녀의 순응을 느낀 곽승재는 격렬했던 키스를 조금 늦추었고 고은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쓰읍...”곽승재는 아픔에 낮은 신음을 내었다.그가 화를 내며 그녀를 밀어낼 줄 알았지만 곽승재는 오히려 더 자극을 받은 듯하였고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혀를 빨기 시작했다.‘미친 XX...’고은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혀끝을 물어버렸다.그러자 곽승재는 드디어 좀 아팠는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너 자꾸 이럴래?”고은서는 산소 부족으로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헐떡이며 말했다.“이 나쁜 XX...”‘아무렇지 않게 반죽 만들다가 왜 갑자기 욕구불만인 거야?’고은서의 붉어진 얼굴과 키스 때문에 촉촉해진 입술을 보며 곽승재 마음속의 이상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하지만 고은서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조금만 더 건드리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맞장 뜰 기세로 서 있었다.곽승재는 참느라 상당히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강박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성인이 된 이후로 그에게 관심 갖고 다가오려는 여성은 많았지만 그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예전의 고은서가 매일 그에게 달라붙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감정적인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항상 자제력이 강했다.‘하지만 왜 요즘 고은서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 그녀를 괴롭히고 싶고, 울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드는 걸까? 혹시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가 욕망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절대 다음은 없어. 다시는 곽승재랑 함께 주방에 있지 않을 거야.’“허허, 괜찮아, 그냥 어제 갑자기 먹고 싶었던 거야. 의사 선생님이 간식을 적게 먹으라던 걸 깜빡했어. 따로 다시 만들 필요는 없어.”할머니가 웃으면서 위로해 주었다.고은서는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기분이 더 좋아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화를 끊고 지저분한 주방을 보며 고은서는 바로 가사도우미를 불렀다.가사도우미가 일을 시작하는 동안 고은서는 그 남자의 냄새가 묻은 몸을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여자는 스스로 모든 집안일을 떠안고 있으면 끝이 없을 만큼 일이 쌓이기만 하지. 난 그딴 착한 아내의 명성을 원하지 않아. 그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게 훨씬 나아.’서재에서, 곽승재는 할머니의 영상 통화를 받았다. “승재야, 입술에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할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곽승재는 피를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괜찮아요, 실수로 부딪힌 것뿐이에요.”할머니는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시며 말했다.“너 또 은서를 괴롭혔지? 걔한테 물린 거지?”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곽승재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고은서는 그의 입술뿐만 아니라 혀도 물어버렸다. 방금 확인해 보았는데 혀에서는 피까지 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걸 보니 고은서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함부로 행동한 걸 후회하고 있니? 여자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대로 해줘야 행복해하는 거야.”할머니는 꾸짖으며 말했다.“항상 은서에게 잘 대해주라고 했는데 넌 들은 척만 했지? 그러니까 이제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거 아냐.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은서를 화나게 할 셈이니?”곽승재의 기분은 여전히 복잡했다.“걔가 정말로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저에 대한 공략 전술을 바꿔서 더 교묘해진 것뿐이에요.”“아이고, 이 답답아! 너를 어쩌면 좋니!”할머니는 실망한 목소리로
고은서는 놀라며 물었다.“벌써 자료를 다 보셨어요?”“굳이 볼 필요도 없죠.” 민시후는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역시 곽 씨 사모님, 참 대단하시네요.”고은서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그냥 대충 쓴 자료인데 그렇게 완벽하나요?”“아직도 모르는 척하네요?”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제가 볼 때 승재 씨는 당신에게 꽤 잘해주는 것 같아요. 전혀 버리려는 듯한 태도가 아니던데요.”“민 도련님, 좀 더 명확히 말해 주실래요?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요.”민시후는 다리를 꼬고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허 교수 쪽에서 당신이 그들의 약품 홍보를 담당하게 됐다고 결정했어요.”고은서는 충격을 받았다.“뭐라고요? 잘못된 소식 아닐까요?”그녀는 어제 허 교수와 만났고 그의 마음이 GS그룹에 있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또 백유미와 연락까지 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자신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시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내 소식은 절대 틀리지 않아요. 그래서 승재 씨가 그쪽에게 꽤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추측한 거죠. 아니면 뭐, 이별 전 마지막 선물인가요?”고은서는 민시후의 개인적인 추측을 무시하고 물었다.“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나요?”만약 방금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 일도 빨리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민시후는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 마요. 상대방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들게 확실히 처리해 줄게요.”“... 고마워요.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다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났고 곽승재가 이번에도 받지 않으려나 하는 순간, 그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그쪽은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말투는 간결하고 짧았다. 마치 처리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고은서는 조용히 물었다.“지금 회의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까?”“할 말 해.”“알겠어.”고은서는 바로 물었다.“허 교수님 쪽의 대리권을 나한테 맡
곽승재는 백유미의 말을 듣더니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평소에는 항상 온화하고 침착하던 백유미가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격해진 모습을 보이니 그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내가 알아야 해?”곽승재가 되물었다.그의 무심한 표정과 입술의 상처를 보며 백유미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속상한 척 눈물을 흘렸다.“승재야, 예전에 우리 엄마가 심하게 아프셨을 때 난 정말 괴로웠어. 약이 하루빨리 연구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런 날 위로해 준 사람이 너야, 기억 안 나? 그때 넌 그런 약이 생기면 꼭 사주겠다고 했었잖아.”백유미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허 교수님이 개발한 이 약은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시장에 내보내고 싶어. 내 마음속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었어.”그는 백유미의 집착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백유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엄청 힘들어했다는 것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승재야, 은서 씨도 이 프로젝트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다른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서 은서 씨에게 맡겨도 되잖아. 부탁이야, 이 약품 대리는 나에게 계속 맡길 수 없겠어?”백유미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부탁했다.이것은 백유미가 처음으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었기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고은서 쪽은 이미 소식이 전해진 상태였고, 프로젝트가 백유미에게 넘어갔다고 알게 되면 분명 화를 낼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고은서는 드디어 좀 조용해졌고 백유미와 다툼이 없었던 만큼, 곽승재는 그녀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유미야, 약품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누가 책임을 지든 중요하지 않아.”곽승재가 말했다.“여전히 힘들다면 최근에 너의 팀원들과 약품 관련 프로젝트를 더 많이 가져보는 것도 좋아.”백유미는 드디어 마음을 접었다. 그는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자신에게 맡길 생각이 없는
“누나,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허 교수의 손녀가 하교하는 순간 바로 작전 개시할 거고 허 교수는 반드시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예요.” 백유미는 차갑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상황이 바뀌었어.” “네? 갑자기 무슨...”원지훈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게 손녀라면서요, 조금만 위협을 가하면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고 GS그룹과의 투자 계획도 해제할 거라고 했잖아요?” 백유미는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어쩔 수 없어. 지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의 의심만 사. 어서 다른 목표 프로젝트를 찾아야 해.” “그럼 얼른 찾아봐요! 나는 최대한 빨리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은혜 씨는 나를 다시는 쳐다도 안 볼 걸요!” 원지훈의 재촉에 백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전에 어떤 여자도 네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큰소리쳤잖아. 그런데 며칠째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그러고 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거야? 내가 쉽게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해?” “어떻게 감히 누나를 속여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누나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거죠. 요즘 여자들은 엄청 똑똑해요.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실제 성과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원지훈은 도리를 따지며 말했다.“그리고 단순히 그녀만 꼬시면 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과 친척들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요. 확실한 성과가 없으면 아무도 속일 수 없어요.” 백유미는 물론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원지훈에게 개인 회사를 차려 주려는 계획은 이미 세워 놓았지만 최근 너무 바빠서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었다. 원지훈이 직접 언급할 정도라면 확실히 급한 상황이었다. “나머진 내가 준비할게, 넌 서둘러서 어떻게든 꼬셔봐!” “알겠어요, 누나. 못 도망가요.” ... 고은서는 정말로 허 교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허 교수는 전화에서 투자와 운영 문제는 그녀에게 맡기겠지
“은서 씨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서 마음먹고 포기한 거 아니에요?”민시후는 무자비하게 말했다.“뭐, 다른 사람은 멋진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가 은서 씨를 찬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이 인간과는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저녁이 되자 항상 바쁘기만 하던 박지연이 드디어 시간을 냈다. “은서야, 새로 열린 라이브바가 정말 좋대. 거기서 한잔하고, 나를 위한 셈 치고 드럼 한 번만 연주해 줘!” 고은서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박지연은 재빠르게 덧붙였다.“너가 약속한 거야, 취소하지 마!” “알겠어, 드럼이 뭐, 문제없어.”고은서가 약속했다.두 사람은 라이브바에서 만났다. 1층은 홀, 2층은 비교적 조용한 좌석 구역이었다. 앞에는 대형 무대가 있었고 누군가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어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박지연과 고은서는 1층의 한쪽 구석 좌석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박지연은 고은서 목 뒤쪽에 있는 빨간 점을 발견했다.“키스 마크? 누가 한 거야?”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목을 만졌다. 오늘 아침 곽승재가 목 주변을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키스 마크가 아니라 벌레에게 물린 거야.” “내가 바보인 줄 아니?”박지연은 툴툴거리며 말했다.“이거 분명히 키스 마크야.” 고은서는 작은 거울을 꺼내서 그 점을 확인해 보았다. 어제 아침에 본 것과 같았다. “네 눈에 혹시 스캔 기능이라도 있니? 내가 본 다른 키스 마크들은 이보다 훨씬 크고 진했어.” 박지연은 고은서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상식이잖아. 키스 마크가 항상 크고 선명하지는 않아. 살짝 빨면 이렇게 작은 자국만 남게 돼.” 이 말을 듣고 고은서는 반쯤 잠든 상태에서 느꼈던 목의 촉촉한 감각이 떠올랐다. ‘정말 곽승재가 한 거라고?!’ “최근에 승재 씨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다며, 그가 몰래 키스한 거 아니야?”박지연은 호기심에 물었다.“그 외에 더 나아간 행동은 없었
훤칠하게 생긴 두 젊은 남자가 밀차를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밀차 안에는 로맨틱한 빨간 장미꽃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다양한 기본 와인과 블렌딩 도구가 있었다.눈앞에 다가와서 두 남자는 각자 꽃다발을 하나씩 꺼내 들고 무릎을 반쯤 꿇고서 고은서와 박지연에게 바쳤다.“공주님들, 오늘 이곳에서 좋은 밤을 보내시길 바랍니다.”촌스러운 건지 새로운 유행어인지 알 수 없는 멘트에 고은서는 웃음이 나고 흥이 올랐다.“고마워요.”고은서는 꽃을 받았다.박지연도 꽃을 받고 나서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했다.“이분들은 대회에 참가했던 전문 바턴데들이야. 지금 바로 우리를 위해 칵테일을 만들어 줄 거야!”“바텐더였구나. 난 또 네가 날 위해 젊고 잘생긴 술친구를 불러준 줄 알았어.”고은서는 박지연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젊은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의 기혼 신분에 먹칠할까 봐 걱정되어서 안 불렀지!”박지연은 낮은 목소리로 건의를 제기했다.“아님, 지금이라도 젊은 술친구를 불러줘?”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됐어. 나중에 내가 이혼하고 나면 그때 다시 한 테이블 찾아줘.”“한 테이블이면 되겠어? 두 테이블 찾는 게 어때?”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는 사이, 한 바텐더가 말했다.“두 분 모두 미인이시니 저희가 ‘미인 감취’를 두 잔 타드리죠. 무조건 예쁘고 맛있는 칵테일일 겁니다!”칵테일을 만들기 전에, 두 바텐더는 먼저 화려한 쇼를 시작했다.술병과 술잔이 그들 손에서 놀아나며 술잔에서는 연한 파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두 바텐더는 검은색 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늘고 길쭉한 다리에, 웃옷 단추를 두 개 풀어 가슴근육을 살짝 드러냈으며 게다가 현란한 솜씨가 더해져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어 보였다.주변에서도 두 바텐더에게 눈길이 이끌려 그들의 쇼를 감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어쩐지 지연이가 이것이 이 클럽의 스페셜 퍼포먼스라고 하더라니, 확실히 독특하고 눈요기를 부리긴 하네.’분홍색의 ‘미인 감취
“왜 이렇게 화를 내?”육현석은 느긋하게 말했다.“형, 우리 지금 클럽에서 놀고 있어. 형도 쉴 겸 와서 술이나 한잔해.”“싫어. 시간 없어.”곽승재가 거절할 거라는 것을 예상한 육현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신비한 말투로 말했다.“형, 진짜 안 올 거야? 형이 관심 있는 서프라이즈가 있는걸.”“웬 농간질이야.”말을 마치고 곽승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육현석은 조금도 성급하지 않고 조금 전에 찍은 고은서의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전화가 바로 울렸다.발신자가 곽승재인 걸 보고, 육현석은 무음 버튼을 눌렀다.‘흥. 맘대로 내 전화를 끊을 땐 언제고! 형도 조금만 애간장을 타봐!’육현석은 의기양양하게 카시트로 돌아가 난간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그는 아래층에 앉아 있는 고은서가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친구와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는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육현석의 인상에 고은서는 라이브바 같은 데를 절대 다니지 않고, 늘 자신을 세련되게 꾸미고 언행도 깔끔했다.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영혼이 살아나고 사람이 생기발랄해진 것 같았다.예쁜 여자가 한 명 있어도 쉽게 눈길을 끌 수 있는데, 두 미인이 함께 앉아 있으니, 곧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육현석은 더욱 신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찍었다.“도련님, 왜 이리 주춤거리고 있어요? 두 명 중 누가 마음에 드는데요? 제가 내려가서 사람을 모셔올게요!”육현석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바보처럼 웃고 또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자진해서 말했다.“술이나 마셔.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육현석은 사람을 쫓아버리고 부재중 전화를 보았는데 뜻밖에도 한 통밖에 없었다.그는 또 남자가 고은서에게 말 거는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침착한 척 더 할 수 있나 보자.’사진을 보낸 지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