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놀라며 물었다.“벌써 자료를 다 보셨어요?”“굳이 볼 필요도 없죠.” 민시후는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역시 곽 씨 사모님, 참 대단하시네요.”고은서는 어리둥절해서 대답했다.“그냥 대충 쓴 자료인데 그렇게 완벽하나요?”“아직도 모르는 척하네요?”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제가 볼 때 승재 씨는 당신에게 꽤 잘해주는 것 같아요. 전혀 버리려는 듯한 태도가 아니던데요.”“민 도련님, 좀 더 명확히 말해 주실래요?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요.”민시후는 다리를 꼬고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허 교수 쪽에서 당신이 그들의 약품 홍보를 담당하게 됐다고 결정했어요.”고은서는 충격을 받았다.“뭐라고요? 잘못된 소식 아닐까요?”그녀는 어제 허 교수와 만났고 그의 마음이 GS그룹에 있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또 백유미와 연락까지 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자신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민시후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내 소식은 절대 틀리지 않아요. 그래서 승재 씨가 그쪽에게 꽤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추측한 거죠. 아니면 뭐, 이별 전 마지막 선물인가요?”고은서는 민시후의 개인적인 추측을 무시하고 물었다.“제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나요?”만약 방금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 일도 빨리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민시후는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 마요. 상대방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들게 확실히 처리해 줄게요.”“... 고마워요.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다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났고 곽승재가 이번에도 받지 않으려나 하는 순간, 그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야?”그쪽은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말투는 간결하고 짧았다. 마치 처리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고은서는 조용히 물었다.“지금 회의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까?”“할 말 해.”“알겠어.”고은서는 바로 물었다.“허 교수님 쪽의 대리권을 나한테 맡
곽승재는 백유미의 말을 듣더니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평소에는 항상 온화하고 침착하던 백유미가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격해진 모습을 보이니 그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내가 알아야 해?”곽승재가 되물었다.그의 무심한 표정과 입술의 상처를 보며 백유미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속상한 척 눈물을 흘렸다.“승재야, 예전에 우리 엄마가 심하게 아프셨을 때 난 정말 괴로웠어. 약이 하루빨리 연구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런 날 위로해 준 사람이 너야, 기억 안 나? 그때 넌 그런 약이 생기면 꼭 사주겠다고 했었잖아.”백유미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허 교수님이 개발한 이 약은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시장에 내보내고 싶어. 내 마음속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었어.”그는 백유미의 집착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릴 적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백유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가 엄청 힘들어했다는 것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승재야, 은서 씨도 이 프로젝트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다른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찾아서 은서 씨에게 맡겨도 되잖아. 부탁이야, 이 약품 대리는 나에게 계속 맡길 수 없겠어?”백유미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부탁했다.이것은 백유미가 처음으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었기에 곽승재는 잠시 망설였다.고은서 쪽은 이미 소식이 전해진 상태였고, 프로젝트가 백유미에게 넘어갔다고 알게 되면 분명 화를 낼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최근 고은서는 드디어 좀 조용해졌고 백유미와 다툼이 없었던 만큼, 곽승재는 그녀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유미야, 약품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누가 책임을 지든 중요하지 않아.”곽승재가 말했다.“여전히 힘들다면 최근에 너의 팀원들과 약품 관련 프로젝트를 더 많이 가져보는 것도 좋아.”백유미는 드디어 마음을 접었다. 그는 정말로 이 프로젝트를 자신에게 맡길 생각이 없는
“누나,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허 교수의 손녀가 하교하는 순간 바로 작전 개시할 거고 허 교수는 반드시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예요.” 백유미는 차갑게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상황이 바뀌었어.” “네? 갑자기 무슨...”원지훈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게 손녀라면서요, 조금만 위협을 가하면 순순히 대리권을 넘길 거고 GS그룹과의 투자 계획도 해제할 거라고 했잖아요?” 백유미는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이 일은 이미 확정된 거라 어쩔 수 없어. 지금 움직이면 다른 사람의 의심만 사. 어서 다른 목표 프로젝트를 찾아야 해.” “그럼 얼른 찾아봐요! 나는 최대한 빨리 성공적인 사업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은혜 씨는 나를 다시는 쳐다도 안 볼 걸요!” 원지훈의 재촉에 백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전에 어떤 여자도 네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큰소리쳤잖아. 그런데 며칠째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그러고 지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거야? 내가 쉽게 속아 넘어갈 거로 생각해?” “어떻게 감히 누나를 속여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누나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거죠. 요즘 여자들은 엄청 똑똑해요.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실제 성과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원지훈은 도리를 따지며 말했다.“그리고 단순히 그녀만 꼬시면 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과 친척들도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요. 확실한 성과가 없으면 아무도 속일 수 없어요.” 백유미는 물론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원지훈에게 개인 회사를 차려 주려는 계획은 이미 세워 놓았지만 최근 너무 바빠서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었다. 원지훈이 직접 언급할 정도라면 확실히 급한 상황이었다. “나머진 내가 준비할게, 넌 서둘러서 어떻게든 꼬셔봐!” “알겠어요, 누나. 못 도망가요.” ... 고은서는 정말로 허 교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허 교수는 전화에서 투자와 운영 문제는 그녀에게 맡기겠지
“은서 씨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서 마음먹고 포기한 거 아니에요?”민시후는 무자비하게 말했다.“뭐, 다른 사람은 멋진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가 은서 씨를 찬 것과 별 차이가 없어요.”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 이 인간과는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저녁이 되자 항상 바쁘기만 하던 박지연이 드디어 시간을 냈다. “은서야, 새로 열린 라이브바가 정말 좋대. 거기서 한잔하고, 나를 위한 셈 치고 드럼 한 번만 연주해 줘!” 고은서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박지연은 재빠르게 덧붙였다.“너가 약속한 거야, 취소하지 마!” “알겠어, 드럼이 뭐, 문제없어.”고은서가 약속했다.두 사람은 라이브바에서 만났다. 1층은 홀, 2층은 비교적 조용한 좌석 구역이었다. 앞에는 대형 무대가 있었고 누군가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어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박지연과 고은서는 1층의 한쪽 구석 좌석에 앉았다.자리에 앉자 박지연은 고은서 목 뒤쪽에 있는 빨간 점을 발견했다.“키스 마크? 누가 한 거야?”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목을 만졌다. 오늘 아침 곽승재가 목 주변을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키스 마크가 아니라 벌레에게 물린 거야.” “내가 바보인 줄 아니?”박지연은 툴툴거리며 말했다.“이거 분명히 키스 마크야.” 고은서는 작은 거울을 꺼내서 그 점을 확인해 보았다. 어제 아침에 본 것과 같았다. “네 눈에 혹시 스캔 기능이라도 있니? 내가 본 다른 키스 마크들은 이보다 훨씬 크고 진했어.” 박지연은 고은서를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상식이잖아. 키스 마크가 항상 크고 선명하지는 않아. 살짝 빨면 이렇게 작은 자국만 남게 돼.” 이 말을 듣고 고은서는 반쯤 잠든 상태에서 느꼈던 목의 촉촉한 감각이 떠올랐다. ‘정말 곽승재가 한 거라고?!’ “최근에 승재 씨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다며, 그가 몰래 키스한 거 아니야?”박지연은 호기심에 물었다.“그 외에 더 나아간 행동은 없었
훤칠하게 생긴 두 젊은 남자가 밀차를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밀차 안에는 로맨틱한 빨간 장미꽃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다양한 기본 와인과 블렌딩 도구가 있었다.눈앞에 다가와서 두 남자는 각자 꽃다발을 하나씩 꺼내 들고 무릎을 반쯤 꿇고서 고은서와 박지연에게 바쳤다.“공주님들, 오늘 이곳에서 좋은 밤을 보내시길 바랍니다.”촌스러운 건지 새로운 유행어인지 알 수 없는 멘트에 고은서는 웃음이 나고 흥이 올랐다.“고마워요.”고은서는 꽃을 받았다.박지연도 꽃을 받고 나서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말했다.“이분들은 대회에 참가했던 전문 바턴데들이야. 지금 바로 우리를 위해 칵테일을 만들어 줄 거야!”“바텐더였구나. 난 또 네가 날 위해 젊고 잘생긴 술친구를 불러준 줄 알았어.”고은서는 박지연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젊은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의 기혼 신분에 먹칠할까 봐 걱정되어서 안 불렀지!”박지연은 낮은 목소리로 건의를 제기했다.“아님, 지금이라도 젊은 술친구를 불러줘?”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됐어. 나중에 내가 이혼하고 나면 그때 다시 한 테이블 찾아줘.”“한 테이블이면 되겠어? 두 테이블 찾는 게 어때?”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는 사이, 한 바텐더가 말했다.“두 분 모두 미인이시니 저희가 ‘미인 감취’를 두 잔 타드리죠. 무조건 예쁘고 맛있는 칵테일일 겁니다!”칵테일을 만들기 전에, 두 바텐더는 먼저 화려한 쇼를 시작했다.술병과 술잔이 그들 손에서 놀아나며 술잔에서는 연한 파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두 바텐더는 검은색 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늘고 길쭉한 다리에, 웃옷 단추를 두 개 풀어 가슴근육을 살짝 드러냈으며 게다가 현란한 솜씨가 더해져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어 보였다.주변에서도 두 바텐더에게 눈길이 이끌려 그들의 쇼를 감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어쩐지 지연이가 이것이 이 클럽의 스페셜 퍼포먼스라고 하더라니, 확실히 독특하고 눈요기를 부리긴 하네.’분홍색의 ‘미인 감취
“왜 이렇게 화를 내?”육현석은 느긋하게 말했다.“형, 우리 지금 클럽에서 놀고 있어. 형도 쉴 겸 와서 술이나 한잔해.”“싫어. 시간 없어.”곽승재가 거절할 거라는 것을 예상한 육현석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신비한 말투로 말했다.“형, 진짜 안 올 거야? 형이 관심 있는 서프라이즈가 있는걸.”“웬 농간질이야.”말을 마치고 곽승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육현석은 조금도 성급하지 않고 조금 전에 찍은 고은서의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전화가 바로 울렸다.발신자가 곽승재인 걸 보고, 육현석은 무음 버튼을 눌렀다.‘흥. 맘대로 내 전화를 끊을 땐 언제고! 형도 조금만 애간장을 타봐!’육현석은 의기양양하게 카시트로 돌아가 난간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그는 아래층에 앉아 있는 고은서가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친구와 술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는 배를 끌어안고 웃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육현석의 인상에 고은서는 라이브바 같은 데를 절대 다니지 않고, 늘 자신을 세련되게 꾸미고 언행도 깔끔했다.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니 오히려 영혼이 살아나고 사람이 생기발랄해진 것 같았다.예쁜 여자가 한 명 있어도 쉽게 눈길을 끌 수 있는데, 두 미인이 함께 앉아 있으니, 곧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육현석은 더욱 신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이 장면을 찍었다.“도련님, 왜 이리 주춤거리고 있어요? 두 명 중 누가 마음에 드는데요? 제가 내려가서 사람을 모셔올게요!”육현석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바보처럼 웃고 또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한 친구가 자진해서 말했다.“술이나 마셔.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육현석은 사람을 쫓아버리고 부재중 전화를 보았는데 뜻밖에도 한 통밖에 없었다.그는 또 남자가 고은서에게 말 거는 사진을 곽승재에게 보냈다.‘침착한 척 더 할 수 있나 보자.’사진을 보낸 지
“입 다물어.”육현석이 훈계했다.“저분은 우리 승재 형의 아내, 내 형수님이거든!”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육현석이 말하는 승재 형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었기에 다시 무대 위의 고은서를 바라볼 때 눈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GS 그룹의 사모님이 이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다니.고은서는 공연을 마치고 대범하게 관객과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박지연은 감격에 겨워 얼굴이 빨개졌다.“은서야, 넌 내 우상이야. 너무 멋있었어! 자, 칵테일 한 잔 더 마시자!”술김이 올라와서인지 고은서도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은서야, 아무리 그래도 원샷은 무리야. 이 칵테일이 마시기는 좋지만, 도수가 꽤 높아.”고은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괜찮아. 취하면 취하는 거지.”고은서는 이제 누구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고, 곽승재가 자신이 단정하지 못하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술에 취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그리고 너 평소에 술 마시러 나올 시간도 없는데 오늘은 너랑 실컷 마실 거야!”박지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요 며칠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너무 힘들었어. 진작에 이렇게 나와서 바람도 쐬고 기분도 풀고 싶었어.”“다연아, 온 닥터와 그 여동창은 어떻게 됐어? 온 닥터의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어?”고은서는 이 일에 계속 신경을 써서 물었더니 박지연이 말했다.“아마 옮기지 않았을 거야. 나 이틀 전에 남편에게 한마디 물었는데 여동창과 연락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했어.”고은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생의 타임 라인으로 계산하면, 그 여동창은 지금 이미 귀국해서 병원에 갔었다.‘설마, 이번 생에 지연이가 남편 따라 외국에 가서 그 여동창에게 틈을 주지 않았던 걸까?’“요즘 우리 시어머니께서 자꾸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해서 머리가 아파.”박지연은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내가 이 타이밍에 임신하면 수간호사 자리를 완전히 놓치게 될 거야. 그리고 시어머니의 성격상 나더러 아예 직장
드르륵!술배 남이 손을 쓰기도 전에 그의 몸은 앞으로 홱 기울어 그대로 탁자에 부딪혀 탁자 위의 술병과 술잔을 쓸어내렸다.큰 소란은 일부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육현석도 밑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카시트에 앉아 있는 남녀를 향해 한마디 소리쳤다.“얼른 내려가서 도와!”말하고 나서 육현석은 앞장서서 아래층으로 달려갔다.술배 남은 바닥에 쓰러져서 아프다고 연신 호소하였고, 그의 몇몇 동료는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이 사람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며 옷을 잘 입고 온몸에 소름 끼치는 냉기와 위엄이 배어있었다.“웬 오지랖이야!”두 번이나 손해를 본 술배 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기 이미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다들 덤벼! 이 여자를 묶어놓고 남자를 죽도록 패!”이 말을 듣자 술배 남의 동료는 즉시 반응하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아!우!삽시에 비명이 겹쳤다.어질어질한 고은서는 눈앞의 손놀림이 매서운 곽승재를 보고,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곽승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그의 매서운 주먹 날림과 깔끔한 발차기 솜씨를 보아하니 싸움을 잘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곽승재는 고귀한 GS 그룹의 대표인 거 아니었어? 돈 벌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 왜 싸움도 이렇게 잘해?네다섯 명의 남자는 곽승재에게 맞아 뒷걸음질 치면서 조금도 이득을 보지 못했고, 육현석을 비롯한 몇몇 남녀들도 이쪽으로 몰려왔다.왜 다 함께 있는지 몰랐지만, 곽승재가 손해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감히 우리 형수님을 희롱해? 넌 죽도록 맞아야 해!”육현석은 화가 잔뜩 나서 발을 뻗어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술배 남을 걷어차려고 했다.하지만 옆에 있던 술배 남의 동료에게 밀린 육현석은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 탁자의 상다리에 이마를 부딪쳤다.“피!”육현석은 손을 뻗어 만지더니 피를 보는 순간 바로 기절했다.박지연은 어쨌든, 간호사였기
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하지만 아주머니가 상황을 아시고 나서 성씨 일가에 찾아가 크게 소란을 피웠어. 성씨 일가 사람들도 화가 나서 경찰을 부를 뻔했어.”유성준이 말하자 고은서가 웃었다.단은숙의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녀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친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고국성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조금 나아졌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면은 변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이제 성아연에게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어쩌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이 상황에 어울릴지도 몰랐다.세무 문제로 속이 답답했지만 단은숙이 성아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회사에서 모든 세무 자료를 자진 제출했으니 며칠 후 구체적인 결론이 나올 거야. 우리는 결과가 나온 후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설명하며 영향을 최소화할 생각이야.”유성준이 말했다.“고마워요, 오빠.”고은서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은서의 미소를 보며 유성준도 미소를 지었다.“MQ에 들어왔으니 나도 MQ 일원이야. 이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그래도 고생 많으셨잖아요. 오빠, 주스로 건배해요.”고은서가 유리잔을 들었다.유성준도 잔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고은서는 음료를 마실 때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고개를 돌려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MQ의 현재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성준 오빠, 지난 번에 MQ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해결 방안 있을까요?”유성준이 논리정연하게 답했다.“MQ는 향수를 주력으로 하는 만큼 이 방향을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향수를 개발해야 시장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좋은 조향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품질 요구가 높아졌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다.“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조제한 향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정원의 따뜻한 조명 아래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분했으며 마치 겨울밤의 바다처럼 차갑고 알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한 번 들여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식당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정말 우연이네요. 저도 대표님이랑 함께 식하라러 온 건데 여기서 다 뵙네요.”주민기는 바로 곽승재를 따라 들어가는 대신 고은서에게 말을 건넸다.고은서는 주민기가 그녀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여전히 나한테 예의 갖추는 건 아마 체면 때문이겠지.’“그러게요. 우연이네요. 다만 앞으로는 주 비서님께서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고은서가 말했다.주민기는 시선을 내리며 대화를 잇지 않았다.“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주민기가 자리를 뜨자 유성준은 고은서를 배려하며 물었다.“장소를 바꿀까?”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저 사람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먹으면 되죠. 곽승재가 있는 자리를 매번 피할 수는 없잖아요.”유성준은 고은서의 결정을 존중했다.“그럼 연못가의 자리에서 먹자. 풍경 보며 먹으면 좋잖아. 곽승재 씨 일행은 비즈니스 이야기를 룸에서 할 테니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좋아요.”연못가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연못에 다양한 색상의 연꽃과 수련이 자라며 조명 아래 그림처럼 드리웠다.유성준은 고은서의 의견을 묻지 않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주문했고 신선한 과일 주스도 함께 주문했다.“오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잘 아세요?”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유성준이 웃으며 답했다.“네 인스타에서 봤어.”고은서는 가끔 인스타에 일상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유성준이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놀라웠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민시후가 오이 만찬으로 곽승재를 골탕 먹인 사건이 생각났다.그녀와 곽승재가 룸으로 향하는 중, 곽승재는 그녀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었었다.선물하기 전 먼저 취향 조사를
다정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등에서 땀이 났다.“나가서 밥 먹어.”“좋네. 같이 가자. 배고파 죽겠어.”민시후가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고은서가 살짝 피하며 말했다.“미안, 약속 있어.”민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누구랑? 하루 종일 못 봤는데 같이 있어 주면 안 돼?”민시후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가끔은 민시후가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옆에 있던 송민아의 쓸쓸한 모습을 힐끔 본 고은서는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졌다.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민아 씨는 시간 있대. 민아 씨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민시후가 발끈했다.“고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내가 송민아와 파혼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지금 투정 부리는 거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나 진짜 약속 있어. 먼저 갈게.”고은서가 자리를 뜨려 하자 민시후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세웠다.“아직 집 보러 안 갔지? 내일 같이 가서 보자.”송민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자 고은서는 미안하면서도 난감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잠시 후, 고은서는 유성준과 약속한 식당에 도착했다.식당이라기보단 관광지 같았다.넓은 식당 정원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못 옆에는 작은 다리와 정자들이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가득했다.얼마 가지 않아 고은서는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성준을 발견했다.유성준은 캐주얼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모습은 시크함과 더불어 온화함도 느껴졌다.“성준 오빠, 오래 기다렸죠?”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유성준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회사에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하더라고.”“괜찮아요. 운전하면 금방이던데요.”“이거 받아.”유성준은 마술처럼 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한 판다 인형을 내밀었다.고은서는 귀여운 인형을 건네받으면서도 정신이 멍해졌다.유성준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어릴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