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겠지.” 허태준도 돌아보고 나서는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이랑 삼촌들도 모시고 살려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는데 할머니와 살던 집을 떠나지 못하시겠대.”물론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할아버지가 대표하는 것은 YT그룹에서의 최고 권력자다. 어느 아들 집에 가서 살든지 타인의 의심과 불만을 사는 것은 뻔한 일이다.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집안 파벌 싸움은 심유진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심유진은 감탄했다. “이 세상에 아직도 할아버지 같은 순정남이 있다니!”허태준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도 있는데”라는 말을 뱃속으로 삼켰다.“남으려면 남든지.” 그는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심유진은 다급히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됐어요. 할아버지도 휴식하고 계실 텐데. 나중에 또 오면 때는 묵도록 할게요.”허태준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허태준은 심유진과 얘기를 나눴다. “우리 할아버지가 좋아?”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허태준의 마음속에 있었다.“좋지요.” 심유진은 전혀 감추려는 마음이 없었다. “솔직히 처음 뵜을 때는 어려운 분인 줄 알았어요!”“사실 상대하기 어려운 분이야.”허태준은 할아버지 뒷담화를 하였다. “성격도 괴팍하고 꼭 내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화를 내셨어. 나도 어릴 때부터 맞으면서 자랐는데. 지팡이를 몇 개 날려 먹었는지 몰라.”“네?”심유진은 허태준이 묘사한 인물과 허 할아버지를 연계시키기 어려웠다.“진짜로요? 거짓말이 아니고요?”“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허태준은 웃었다. “네 앞이라 많이 약해지셨어. 아마도 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나 봐.”심유진은 얼굴이 빨개졌다. “허태준 씨를 예뻐하시니 저도 예뻐하는 거겠죠.”이러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지만 허태준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손주며느리”가 아닌 심유진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사촌 형제들도 다들 장가가고 애들을 낳았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의 와이프한테는 심유진한테 대하는 것마냥
스위트룸은 너무 커서 청소부 두 분이서 청소를 해야 했다.허태준은 심유진과 각각 한 사람씩 감독하기로 했다. 그들의 모든 행위가 규범에 맞는지를 보장하기 위해서다.폭로의 영향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스위트룸이라 차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분의 청결 작업 과정에는 일전의 폭로된 영상 속 실수들은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심유진은 그들이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알아챘다—원래는 이런 프로세스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다.중도에 허태준의 조수가 캐리어를 들고 왔다. 안에는 두 주일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들과 새 침구류 세트였다.심유진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필경 경주시 로열에서 위생적인 이슈가 터졌고 그의 결벽증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와 진짜 부부가 아닌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때문에 힘들어 머리카락까지 빠질 것 같았다. **객실부 경영진은 전부 이직을 하였다. 하지만 새 직원들도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심유진은 아침 일찍 나머지 인원들과 미팅을 하여 당사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한 청소부들한테 초보적인 교육을 시켜주었다.그녀는 대구에서의 스킬을 그대로 발휘하여 직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였다.아마도 예전 업무 방식이 손에 익었던 탓인지 대다수의 직원들은 그녀의 “새로운 정책”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불만이 있었다. 다들 듣는 둥 마는 둥하여 심유진이 질문할 때마다 그들은 대답을 못했다.심유진은 나름 성격이 온화한 사람이었으나 이 사람들의 태도근만에 완전히 뿔이 났다.그녀는 그들한테 한바탕 화를 내고 말했다.“일하기 싫다면 지금 나가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청소부만 하더라도 로열에서 주는 월급은 다른 호텔의 두 배를 넘어섰다.“다들 나가지는 않겠다고 하니 무조건 제 요구대로 하셔야 합니다!”심유진은 말했다.그녀가 순찰을 돌 때 공
“저랑 심 매니저는 다릅니다. 저는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규정을 지키지 않는 일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당신들을 제 발로 나가게 하든지 아니면 제가 내쫓을 겁니다. ” 심유진은 자신을 냉혈한 “악인”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관리에 복종하지 않는 저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려고 했다.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고 존중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일을 똑바로 해줬으면 했다.할 말을 끝마친 뒤 심유진은 떠나려 했다.그녀가 돌아서자마자 맞은 켠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잠옷 차림을 한 젊은 남성이 비스듬히 문턱에 기대어 웃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사람은 잘생겼다. 이목구비는 허태준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아우라가 음유적이었다. 그리고 허태준한테서 느껴지는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분위기도 없었다.심유진은 방금 목소리가 너무 커 그 사람을 방해한 줄 알고 연거푸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쉬시는 것을 방해했나요?”남자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그는 장난기가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호텔에 새로 온 객실부 매니저신가요?”심유진은 이분이 일반 고객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아마도 큰 확률로 이 호텔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저는 단지 며칠만 대신할 뿐입니다. 곧 있으면 새 객실부 매니저가 올 것입니다.”그녀는 설명했다.“그런가요.”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가워요.”그는 활짝 웃으면서 덧니를 보였다.“일을 마저 하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그는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심유진은 굳게 닫힌 방문을 몇 초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리고 의문을 품은 채 떠났다.방안에서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했다.“응. 아까 허태준과 같이 있던 여자를 만났어. 로열호텔 객실부 매니저인것 같던데.”“사람은…괜찮게 생겼어. 정소월이랑 닮았어. 아마도 허태준이 좋아하는 것이 이런 스타일일 거야.”“나?내가 가라고? 형, 이런 일 한 번이면 됐어. 또 하라니…허태준이 진짜
허태준의 말대로 객실부 신입사원들은 이튿날에 전부 도착하였다.동시에 새로운 총지배인이 온다는 소식도 같이 전해 들렸다.심유진은 의자에 앉아있기도 바쁘게 대회의실에서 열릴 미팅에 참석해야 한다는 메일을 받았다.이번 회의는 전부 호텔 측 경영진이 참석하는 회의다. 당연히 새 상사와 인사하고 회사의 전망과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인 듯했다.심유진은 경주로열의 직원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 낯설었다. 또한 어제 허태준의 귀띔도 명기하여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노트북을 들고 구석에 앉았다.주변에서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곧 여기에 나타날 새로운 상사에 관한 얘기였다.그들은 상사의 성별, 나이, 생김새, 성격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하였다. 동시에 아름다운 염원을 갖고 있었다. “총지배인이 친절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회의실대문은 메일에서 공지한 아홉 시에 제때 열렸다. 한 사람이 문을 열자 연이어 세 사람이 걸어들어왔다.제일 처음에 들어온 사람은 어제 심유진이 공구실 밖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그는 회의실을 가로질러 총지배인의 자리에 앉았다. 그사람과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분산되어 그의 양쪽에 앉았다.남자는 마이크를 집은 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기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로열 호텔에 새로 온 총지배인 허택양이라고 합니다.”누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삽시간에 회의실에 “허지배인님” 소리가 가득 찼다.심유진은 놀라움 속에서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다.그러니 허태준과 닮았지. 혈연관계가 있는 사촌 형제였구나!허택양의 시선은 회의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심유진의 얼굴에 떨어졌다.심유진은 똑똑히 보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웃는 모습을.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회의 내용은 상상했던 것만큼이나 무료했다. 다들 겉치레식으로 얘기했다.심유진은 필기하는 척하고 허택양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한테 이름이 불렸다.“객실부 심 매니저님—”허택양이 발언하자 회의실의 모든 눈빛은 심유진에게로 집중되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이미 오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고 심유진만 사무실에 남아 심청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자 심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허택양이 미소를 지은 채 입구에 서있었다. “바빠요?” 심유진이 벌떡 일어섰다. “총 지배인님.” “아이고,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나이도 비슷하니까 그냥 택양 씨라고 불러요.” 심유진은 허택양의 살가운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허태준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직장 상사신데 그렇게 부를 순 없죠. 허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비록 이 호칭은 그를 허태준과 헷갈리게 했지만 심유진은 어떻게든 허택양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허택양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편하실 대로.” 허택양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이 심유진을 불편하게 했다. 심유진은 딱딱한 어투로 말을 돌렸다. “근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허택양의 시선은 심유진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구체적인 개선 방안이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호텔 위생에 관한 일로 인터넷이 뜨겁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고 우리 호텔도 투숙객이 점점 줄어들어요. 심유진 씨가 회사 경영부문이랑 얘기해서 저희가 얼마나 열심히 개선하고 있는지 대외적으로 기사를 하나 냈으면 좋겠어요.” 심유진은 회사 일에는 항상 진심이었다. “네, 오후에 그쪽 책임자랑 얘기해 볼게요.” “전 오후에 바로 기사를 냈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해 보죠.” 허택양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심유진은 그걸 거절할 자격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허택양은 구내식당이 아니라 호텔의 식당에 있는 룸을 잡았다. 경영부문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심유진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침에 허택양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온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심유진은 그들이 허택양의 비서들인 줄
침착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말은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허택양은 이런 구설수에 휘말리는 걸 개의치 않아 했다. 오후에도 허택양은 두 번 더 심유진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일 때문에 온 것이긴 했으나 심유진은 밖에 여러 직원들이 이쪽을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허택양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둘은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허택양은 심유진이 호텔에서 지낸다는 걸 알았기에 저녁식사도 함께 하자고 얘기했다. 심유진은 다이어트 때문에 저녁을 안 먹는다고 핑계를 대며 그 초대를 거절했다. 허택양은 그 변명을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척 섭섭해했다.심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허태준이 보였다. 소파에 기대앉은 채 투명한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와인 한 방울이 흰 셔츠에 튀었지만 허태준은 그걸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65인치짜리 초대형 TV에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홈쇼핑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허태준은 TV를 응시하고 있기는 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허태준의 그윽한 눈에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했다.“무슨 일 있어요?”심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에 했던 얘기는 다 까먹었어?”심유진이 잠깐 멈칫했다가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됐다. 아마도 허택양과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그런 게 아니라 저랑 허 대표님, 아니 태준 씨 사촌동생분이랑은 그냥 일적으로 얘기만 나누는 사이에요.”“일 얘기를 하는데 둘이 같이 밥을 먹고 온 오후 사무실에 같이 있어?”허태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목소리도 서리가 낀 듯 차가웠다. 누가 봐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 심유진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맥이 빠지기도 했다.“그냥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세요.”심유진은 방으로 걸어 들어
허택양과 더는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며칠 동안 계속 객실 쪽에서 서성대다가 누군가 방으로 청소하러 들어갈 때가 되면 “기습”해 들어갔다. 습관을 기르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비록 직원들 모두 청소에 더욱 주의를 돌리고 있긴 했지만 잔 실수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심유진은 살짝 귀띔만 해주고 넘어갔지만 상황이 심각하다 싶으면 기록을 하고 일정한 벌금도 내렸다. 그 규정을 따르지 않거나 처벌에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유진은 가차 없이 해고했다.단 일주일 만에 심유진은 “마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심유진은 이 별명에 딱히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이 무서워서라도 일을 자각적으로 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일하게 부담스러운 점은 한주에 한 번씩 진행되는 회의에서 허택양이 자신을 콕 짚어서 칭찬해 줬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마녀”라는 별명을 비웃기도 했다.아마 원래의 의도는 다른 사람들도 심유진을 따라 배워서 직원들을 엄격히 교육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유진은 그 말에 담긴 비웃음을 느꼈다.회의가 끝나고 심유진은 주방 쪽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 두 명이 험담을 하는 걸 듣기도 했다.“마녀라고 불리는 게 뭐가 자랑스럽다는 거지? 그냥 사람들한테 미운털 박혔다는 소리 아냐?”“그냥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여서 칭찬해 주고 싶으신 거겠지!”“맞네... 지난번에 허 대표님이랑 단둘이 식사도 했다잖아. 내가 둘이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도 봤다니까.”심유진은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다 붙잡고 해명할 수도 없고 연예인들처럼 해명 기사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일주일만 있으면 이곳을 떠나게 될 테니 그때 가서 사람들이 뭐라 하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심유진이 예상 못 한 부분이 있었다. 허택양이 본사에 심유진을 대구에서 이쪽으로 이직시켜 달라고 신청을 했다는 것이었다. 허택양은 이 일에 관해서 한 번도 심유진의
심유진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허택양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신청하면 무조건 통과되지 않을 거예요.” 허택양은 심유진과 협상을 하려고 했다. “아니면 이렇게 하죠. 일단 이쪽에서 일을 하다가 객실 쪽의 일이 다 순조로워질 때쯤에 한 번 더 신청할게요. 솔직히 대구보다 이쪽이 유진 씨를 더 필요로 해요. 부문을 개선한다는 게 두 주일 만에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제가 유진 씨를 여기에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허택양의 태도가 매우 진지해 보였다. 만약 허태준의 경고와 경주에 대한 나쁜 감정들이 없었다면 심유진은 이미 허택양에게 설득당했을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전 싫어요. 만약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시다면 제가 직접 본사에 연락할게요.” 허택양이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에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상사를 찾아가 본사에 상황 설명을 부탁드리고 자신도 메일을 보내서 이 사실을 몰랐다는 점과 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실 등을 설명했다. 하지만 본사는 이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사발령 자료들도 이미 보내놓은 상태였다. 더 이상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걸 인식하자 심유진은 어쩔 수 없이 허태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번에 조금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고 나서 허태준은 평소보다 더 일찍 나가서는 더 늦게 집에 들어왔다. 심유진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나간 상태였고 심유진이 잠들고 나서 돌아온 탓에 일주일 동안 같은 방에 자면서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심유진은 거실에서 11시 반까지 안 자고 버텼고, 그제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태준은 심유진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는지 잠시 멈칫하더니 먼저 말을 걸었다. “아직 안 잤어?” 목이 잠긴 탓에 말을 마치고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허태준이었다. 심유진은 하려던 말을 잠깐 미뤄둔 채 다급히 물었다. “감기 걸렸어요?” “심각해요? 약은 먹었어요? 지금이라도 감기약 사 올까요?” 몰아치는 질문에 담겨있는 그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