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은 창문에 기댄 채 뒤를 확인했다.사영은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도로 의자에 기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여긴 웬일이에요?”그녀는 그제야 이 문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렸어.”허태준의 표정은 덤덤했다.심유진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날 기다렸잖아요.”그녀는 서술형 말투로 대답했다.“왜요?”그녀가 더욱 궁금했던 건 이점이었다.“제가 뒷문으로 나올 거란 건 어떻게 안 거예요?”허태준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다가 들린 거야.”심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구멍이라도 뚫을 듯 따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허태준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차는 리친시아에 들어섰다.심유진은 또다시 창문 유리에 기댔다.아파트단지는 여느 때처럼 인적이 드물었다.자동차 바퀴가 낙엽을 밟으며 지나갈 때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이 사는 아파트 앞에는 웬 낯선 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큰길과 등진 탓에 차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허태준은 그 차 옆에 차를 주차했다.그는 키까지 뽑았지만 심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워 옆 차 움직임을 살폈다.허태준은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새로 산 차인데 마음에 들어?”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심유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재빨리 고개를 돌려 물었다.“지금... 지금 이 차가 당신 것이라고요?”허태준은 보관함에서 보조키 하나를 꺼내 꾹 눌렀다--옆에 있던 차가 갑자기 확 밝아지더니 띡 소리를 냈다.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빼앗긴 듯 심유진은 힘없이 주저앉았다.그녀는 의자에 기댄 채 손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괜히 놀란 것이었다.다행히도 괜히 놀란 것이었다.“난 또...”그녀는 자신의 리액션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차 예쁘네요
그는 당황한 눈빛을 지은 채 손으로 힘껏 오픈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죽고 싶어?”그는 낮은 목소리로 따끔하게 혼냈다.“손으로 엘리베이터 문 막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몰라?”이런 상식쯤은 심유진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를 알고 있어도 다급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소리 없이 손을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허태준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그녀의 손바닥과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부어오른 얼굴처럼 보기 흉했다.허태준의 눈빛이 확 싸늘해졌다. 심유진은 이를 눈치채고 재빨리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더욱 꽉 잡히고 말았다.“움직이지 마.”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말투는 유달리 무거웠다.심유진은 곧바로 그의 말에 따랐다.하지만 이윽고 또다시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그녀가 잘못했다고 해도 결국 다친 건 그녀 자신이었다.그녀는 자신이 그를 마주할 때 왜 이토록 작아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허태준은 20층 버튼을 눌렀다.심유진은 버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손도 잡혀있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18층 눌러주세요, 고마워요.”허태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18층?”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여형민한테 볼 일 있어?”아니다.그녀는 단지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없을 뿐이었다.허태준은 그녀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아직 안 왔어, 먼저 내 집으로 가.”이는 상의가 아니라 명령이었다.“...네.”심유진도 거절할 마음이 없었다.**리친시아로 이사 온 지는 몇 달이 되어가지만 이는 심유진이 처음으로 허태준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같은 평층이지만 천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층과 아래층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허태준이 모든 칸막이를 없앤 탓에 입구에서도 집 안 구조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 안이 유달리 넓어 보였다.시야가 닿는 곳에 검은색, 흰색, 회색 외에 다른 색은 없었다.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모던한 스타일이었다.정작 허태준 본인은
커플템이라는 세 글자가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심유진은 재빨리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그는 그저 귀찮은 마음에 대충 구매한 게 틀림없었다.그의 신발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슬리퍼 여분은 하나도 없었다.예상 밖의 결과에 심유진은 순간 보송보송한 슬리퍼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허태준은 두 사람의 신발을 신발장에 넣은 뒤 몸을 돌려 심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신발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왜 그래?”그가 물었다.심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되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허태준은 의혹을 도로 되삼켰다.“들어와.”그는 겉옷을 벗어 소파에 대충 걸쳐두었다.“앉아.”심유진은 두 다리를 가둔 채 조신하게 소파 한끝에 앉았다.허태준은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그의 집 주방은 오픈식이라 심유진은 그가 냉장고 문을 열어 재료를 꺼내는 모습을 훤히 바라볼 수 있었다.그는 얼음주머니를 들고 그녀에게 걸어왔다.“찜질하고 있어.”그는 얼음주머니를 심유진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갑작스레 전해져온 차가움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목을 뒤로 움츠렸다.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얼음주머니를 건네받고 얼굴에 가져다 댔다.허태준은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의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그는 분명 이유를 알면서도 되물었다.심유진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했다.“상대하기 어려운 고객님을 만났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 말대로 며칠 더 쉬다가 출근할 걸 그랬어요.”허태준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서글퍼진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도와줄까?”차가운 말투와 달리 부드러운 관심이 드러났다.“괜찮아요.”심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녀는 오른쪽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은 김에 아예 얼음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그나저나”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위아래로
**아파트단지 입구 옆에 마트가 하나 있었다.리친시아 주민들은 대부분 도우미 아줌마를 고용했기에 직접 요리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도우미 아줌마들은 아침 일찍 재료를 구매하기에 심유진과 허태준이 갔을 때 마트에는 카운터 직원과 몇몇 손님들만 있었고 대부분 재료들은 소진된 채 채소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시간 절약을 위해 허태준은 신선한 게맛살과 스테이크 및 조미료 몇 가지만 구매했다.두 사람이 계산하려는데 한 사람이 마트 안으로 들어오더니 허태준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허태준 씨? 여긴 웬일이에요?”심유진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소박한 옷차림의 중년여성이었다. 사오십대로 되어 보였는데 어깨에 큰 주머니를 메고 있었다.아무래도 어느 주민 집 도우미 아주머니인 것 같았다.“장 보러 왔어요.”허태준은 카운터 직원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뒤 물건들을 쇼핑백에 담았다.중년여성은 그와 심유진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그럼 오늘 밥 좀 많이 할까요?”허태준이 말했다.“제 밥도 준비해 줄 필요 없어요.”중년여성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그녀는 대답하는 동시에 심유진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마트에서 나온 뒤에야 허태준이 심유진에게 알려주었다.“여형민이 찾아준 도우미 아줌마셔.”심유진은 이미 속으로 짐작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여 변호사님 곧 오지 않아요? 그냥 여 변호사님까지 불러서 함께 저녁 식사할까요?”그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은 말이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얼음처럼 차가워졌다.“아니.”허태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신경 쓰지 마.”**허태준은 게맛살을 간단히 손질한 뒤 썰어놓은 생강과 함께 볶았다.이윽고 그는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스테이크를 구우려고 했다.심유진은 사실 그의 요리 솜씨가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았다.그는 종일 비즈니스로 바쁜 몸이었기에 직접 요리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가 힘들게 생강을 써는 모습만으로도 그의 진짜 요리 실력을 대충 짐작할 수
그는 여자친구 네 글자를 끝 음 처리까지 하며 강조했다.그의 놀림에 심유진은 곧바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왕 아주머니께서 오해하신 거예요.”그녀가 말했다.“오해는 아니죠? 허 대표 여자친구 맞잖아요?”여형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심유진이 반박하려고 할 때 그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두 사람 계약 그냥 체결한 거 아니잖아요.”...아.심유진은 얌전하게 입을 닫았다.여형민은 테이블을 툭툭 쳤다. 그가 들어온 뒤로 허태준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스테이크 곧 탈 것 같은데?”허태준은 경고 어린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네 몫은 없어.”“마침 나도 스테이크 별로 안 좋아하거든.”여형민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대답하고는 시선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로 돌렸다.“랍스타랑 게만 있으면 돼.”심유진이 보는 앞에서 허태준은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화를 죽인 뒤 버터를 냄비에 발랐다.“에잇!”여형민은 여전히 진정하지 못했다.“화장실 가야되니까 슬리퍼 좀 빌려줘.”허태준은 단번에 칼같이 거절했다.“싫어.”“왜 이렇게 속 좁게 구는 거야?”여형민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우리가 친구로 지낸 지 몇 년인데 이사해도 슬리퍼 하나 준비해 주지 않았잖아. 두 사람만 슬리퍼 신고 있고 나는 맨발 바람이야, 그러고도 네가 친구야?”허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심유진은 마음이 복잡했다.“여 변호사님, 제 슬리퍼 신으세요!”“안돼!”“아니에요!”허태준과 여형민은 동시에 소리치더니 일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불꽃 튕기는 신경전 끝에 여형민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신이 너무 작아요. 게다가 핑크색이라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아요.”여형민이 심유진에게 말했다.“화장실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심유진은 이미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말했다.“화장실 바닥에 물기가 있어서 양말이 젖으면 안 되잖아요.”그녀의 진지한 말투에 여형민은 민망함이 앞섰다.“장난이에요. 신발장 안에 일회용 슬리퍼가 있는데
그들 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닥거리는 것뿐이었지만 심유진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여형민도 다른 손님들처럼 일회용을 사용하는데 그녀가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스테이크를 썰다가 예리한 칼날이 접시와 부딪히면서 귀청을 찢는듯한 소리를 내게 되었다.허태준과 여형민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심유진은 순간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혹시 허 대표가 구운 스테이크 맛이 별로예요?”여형민이 잔뜩 신난 말투로 물었다.“아니에요!”그녀는 허태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스테이크 맛있어요.”허태준의 요리 솜씨는 예상 밖으로 훌륭했다. 스테이크가 익은 정도는 아주 적당했다. 사용한 것도 직접 제작한 후추소스였지만 맛이 딱 좋았고 레스토랑 스테이크 못지않았다.허태준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슬리퍼는 지나가다가 예뻐 보여서 그냥 산 거야. 내 집에 들어오는 여자가 없으니까 그냥 너한테 신으라고 준 거야. 일회용품 사용하고 싶으면 사용해도 돼. 스테이크 썰기 어려울까 봐 실버로 준 거야.”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심유진, 설마 내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속마음이 들킨 바람에 심유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그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에 심유진은 더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진짜 좋아하게 될 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허태준이 계속 박차를 가했다.“너도 그러지 않길 바래.”심유진은 손에 든 포크와 나이프를 확 움켜잡더니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의 대답에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심유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스테이크를 먹는 데만 집중했다.그녀는 빨리 식사를 마치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어색한 분위기에 여형민은 게 다리를 뜯는 속도를 늦추었다.“크큼.”그는 목을 풀며 강제적으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오늘 북성구 파출소에 한 번 들렸어.”심유진은 힘겹게 고기를 삼킨 뒤 물었다.“가서 뭐 했는데요?”“또 다른
문이 닫히는 순간 허태준은 손에 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너...”안 먹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여형민은 그가 접시에 남은 스테이크와 깔끔하게 손질한 랍스타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지켜보았다.“아--”여형민이 막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안 먹을 거면 나한테 주면 되잖아!”그는 가슴 아픈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허태준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싸늘한 표정으로 식기들을 거둬 싱크대에 넣었다.그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에 묻은 찌꺼기들을 씻어냈다.“이거”그는 손으로 싱크대에 쌓인 식기들을 가리키며 여형민에게 말했다.“네가 씻어.”**허태준이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에도 여형민은 아직 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고 싱크대는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허태준은 머리를 닦은 수건을 목에 걸치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직도 안 돌아가고 뭐해?”여형민은 진지한 자세로 고쳐 앉더니 말했다.“수업 해줄게.”“무슨 수업?”“여자 꼬시는 법.”“필요 없어.”허태준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여형민은 재빨리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설마 평생 솔로로 살 생각이야?”허태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한텐 네가 있잖아?”허태준이 애정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여형민은 단번에 손을 놓고 두 손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채 방어 태세를 보였다.“꿈 깨! 난 여자랑 결혼할 몸이야!”그는 곧바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풉.”허태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재촉했다.“그럼 결혼이나 하고 말해. 여자를 어떻게 꼬시는지.”여형민은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가 곧바로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포인트를 찾았다.“나도 비록 연애 경험은 없지만 너보단 나아. 적어도 난 너처럼 자존심 세워가며 좋아하는 마음도 드러내지 못하진 않거든. 넌 절대 여자를 꼬실 수 없어!”허태준은 걸음을 멈추더니 한껏 싸늘해진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내가 티 낸 적
그녀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에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문 앞으로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굳어버려 다 지나간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전만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이미 평소 퇴근할 때처럼 피곤하기 그지없었다.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심유진은 절반 완성한 파일을 저장한 뒤 전원을 끄고 식당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무실 밖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게다가 이번에는 지나가지 않고 그녀의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심유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그녀가 자세히 들어보니 심장 소리 외에 다른 소리도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똑똑똑.누군가 문을 세 번 두드렸다.심유진은 침을 꿀꺽 삼킨 뒤 힘들게 말을 꺼냈다.“누구세요?”“저예요.”젊은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심유진이 열심히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정재하입니다.”정재하?“혼자 오셨어요?”그녀가 경계 어린 말투로 되물었다.그녀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정재하는 당황스러웠다.“당연히 저 혼자죠. 제가 누구랑 오길 바라는 거예요?”심유진은 그제야 의심을 내려놓고 다급히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녀가 물었다.정재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비즈니스 때문에 찾아왔어요.”“무슨 비즈니스요?”심유진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인상 속 정재하는 늘 노느라 바쁜 재벌 집 도련님이었다.두 사람은 몇 번이나 만남을 가졌지만 심유진은 단 한 번도 그가 비즈니스를 언급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정재하는 다짜고짜 의자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더니 두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비즈니스 자세를 취했다.심유진은 재빨리 일회용 컵에 따뜻한 물을 떠서 그에게 넘겼다.“물밖에 없으니까 일단 마셔요.”“괜찮아요.”정재하는 잔을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사실은 곧 여자친구 생일이거든요. 로열 호텔에서 생일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